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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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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議歸於正하니 分明是誚讓樊將軍之旨
鄭之盜 有入樊侯廟하야 러니 旣而 大風雨雹하야 近鄭之田 麥苗皆死
人咸駭曰 侯怒而爲之也라하다
余謂樊侯 本以屠狗 立軍功하고하야 至成皇帝하야 位爲列侯하고 邑食하며
舞陽 距鄭旣不遠하고 又漢楚常苦戰하니 亦侯平生提戈斬級所立功處
故廟而食之 宜矣
故後世言雄武 稱樊將軍하니 宜其聰明正直 有遺靈矣
然當盜之倳刃腹中하야 獨不能保其心腹腎腸哉
而反貽怒於無罪之民하야 以騁其恣睢 何哉
豈生能萬人敵而死不能庇一躬耶
豈其靈不神於禦盜하고 而反神於平民하야 以駭其耳目邪
風霆雨雹 天之所以震耀威罰有司者어늘 而侯又得以濫用之邪
蓋聞陰陽之氣 怒則薄而爲風霆하고 其不和之甚者 凝結而爲雹라호라
方今歲且久旱하야 伏陰不興하고 壯陽剛燥하니 疑有不和而凝結者 豈其適會民之自災也邪
不然이면 則喑嗚叱吒하야 使風馳霆擊 則侯之威靈暴矣哉인저
唐荊川曰
文不過三百字 而十餘轉摺 出(逾)[愈]奇하니 文之最妙者也


10. 번후묘樊侯廟가 재앙을 끼친 데 대한 기문記文
바른 데로 의론을 이끌었으니 분명코 번장군樊將軍힐문詰問하는 뜻이다.
정주鄭州의 도적으로 번후묘樊侯廟에 들어가 신상神像의 배를 가른 자가 있었는데, 얼마 뒤 큰 바람과 우박이 쏟아져 정주 인근의 밭에 있는 보리싹이 모두 죽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번후가 노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 번후는 본디 도살업을 하던 사람으로 군공軍功을 세웠고, 패공沛公을 도와 패공이 황제가 되게 하여 열후列侯의 지위가 되었고 무양舞陽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리고 부신符信을 쪼개어 봉작封爵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나라와 더불어 장구히 봉록을 누렸으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백성에게 공덕이 있으면 제사를 지낸다는 경우이다.
무양은 정주鄭州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고 또 나라와 나라가 항상 형양滎陽에서 치열하게 격전을 펼쳤으니, 이곳은 또한 번후가 평소 창을 잡고 적의 수급을 베어 공을 세운 곳이다.
그러므로 사당을 세워 추모하는 것이 마땅하다.
번후가 패공을 보좌하여 수레를 타고 갔을 때, 홍문鴻門에서 사세가 위급하자 눈을 부릅뜨고 한번 돌아보아 항우項羽가 기운을 잃게 만들었으니, 그 용력勇力이 족히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뛰어난 무장을 말할 때에 번장군樊將軍을 일컬으니, 그 총명함과 정직함이 영험함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도적이 칼날을 신상神像의 뱃속에 찔러 넣을 때에는 유독 그 심복心腹신장腎腸을 보존해낼 수 없었단 말인가?
그러면서 도리어 죄 없는 백성들에게 노여움을 옮겨 그 성난 기세를 내키는 대로 다 부린 것은 어째서인가?
어찌하여 살아서는 만인의 적을 대적할 수 있었으면서 죽어서는 한 몸도 지켜내지 못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도적을 막는 일에는 그 영령이 신통함을 보이지 못하고 백성들에게는 도리어 신통함을 보여 그 이목을 놀라게 한단 말인가?
바람과 천둥과 우박은 하늘이 맹렬하게 관리를 징벌하는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거늘, 번후가 또 이것을 남용할 수 있단 말인가?
대개 듣건대 음양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면 바짝 다가붙어 바람과 천둥이 되고, 조화롭지 못함이 심하게 될 경우에는 응결하여 우박이 된다고 한다.
바야흐로 올해는 또 오래 가물어 잠복한 음기陰氣가 일어나지 못하고 강성한 양기陽氣가 굳세고 건조하니, 의심컨대 음양이 조화하지 못하고 응결된 것은 아마도 마침 백성들이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때를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번후의 영령이〉 크게 노하여 소리치고 꾸짖어 바람이 휘몰아치고 천둥이 치게 만든 것은 번후의 위령威靈이 난폭한 것이리라.
형천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300자에 불과하지만 10여 차례 문장을 꺾고 변화를 주어 갈수록 기이하니, 문장 중에 가장 묘한 것이다.”


역주
역주1 : 樊侯는 바로 漢 高祖 劉邦을 도와 한나라 창업에 기여한 장수인 樊噲(?~B.C. 189)를 가리킨다. 樊侯廟는 지금의 河南省 許昌市인 許州에 있었다. 구양수는 天聖 9년(1031)에서 景祐 원년(1034)까지 西京留守로 봉직하였는데, 당시 허주는 서경유수의 관할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기문 역시 이 무렵에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으나 자세하지는 않다.
이 글에 대해 우리나라 靑泉 申維翰은 그의 《靑泉集》 續集 9권의 〈三家狐白評〉에서 “이 글의 妙는 조롱하는 듯 꾸짖는 듯하면서 곧바로 설파하지 않은 데 있으니, 그 기세가 마치 바람이 뒤집고 비가 몰아치는 것과 같다.[竗在若嘲若罵 不直道破 勢如風翻雨集]”라고 하였다.
역주2 刳神像之腹者 : 神像의 服藏品을 훔쳐갔다는 뜻이다.
역주3 沛公 : 劉邦을 가리킨다. 유방이 沛縣에서 궐기하여 沛公이라 불렸다.
역주4 舞陽 : 樊噲의 封地이다. 지금의 河南省 舞陽縣이다.
역주5 剖符傳封 與漢長久 : 剖符는 고대에 帝王이 제후 및 공신들과 함께 符信을 쪼개어 신뢰의 증표로 삼으면서 서로 반쪽씩 나누어 가진 것을 가리킨다. 漢나라 역시 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처음으로 봉해진 제후들에게 丹書로 쓴 鐵券을 하사하면서 “황하의 물이 말라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닳아 숫돌처럼 되어도 한나라의 종묘가 있는 한 그대들의 후손은 끊어짐이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역주6 禮所謂有功德於民則祀之者歟 : 《禮記》 〈祭法〉에 “무릇 聖王이 제사를 제정할 적에 공정한 법을 백성에게 실시한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힘쓴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고생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재해를 막은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환란을 막은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다.
역주7 滎陽京索 : 滎陽은 지명이며 京과 索은 형양 부근의 古城으로 모두 漢나라와 楚나라가 치열하게 다투던 격전지이다.
역주8 方侯之參乘沛公……使羽失氣 : 參乘은 수레에 陪乘하는 것으로, 고대에 수레를 탈 때 높은 사람이 좌측에 서고 말을 모는 사람이 중앙에 서며 또 한 사람이 보좌원으로 우측에 섰다. 이때 우측에 선 사람을 參乘 또는 右車라고 하였다.
鴻門에서 위급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가리킨다. 劉邦이 項羽보다 먼저 秦나라 咸陽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군대를 파견하여 函谷關을 지키게 하면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항우가 격분하여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홍문에 주둔하고서 유방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는데, 항우의 叔父인 項伯의 조정으로 서로 화해하기로 하였다.
유방이 직접 홍문으로 찾아가서 사과하니, 항우가 연회를 베풀어 유방을 접대하였는데, 이때 項莊이 항우의 謀士인 范增의 지시를 받고 칼춤을 추며 유방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자 유방의 모사인 張良이 樊噲를 들여보내 유방을 지키도록 하였고, 번쾌가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눈을 부릅뜨고서 들어가니, 항우가 그에게 압도되어 장사라고 칭찬하면서 말술과 돼지 다리 하나를 주었다. 번쾌가 이를 단숨에 받아먹자 항우가 역시 장사라고 말하면서 더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번쾌는 죽음도 피하지 않는데 잔술을 어찌 사양하겠느냐고 말하였다. 유방은 이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 뒤 그 자리를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 《史記 권7 項羽本紀》
역주9 (逾)[愈] : 저본에는 ‘逾’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愈’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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