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之盜
로 有入樊侯廟
하야 러니 旣而
요 大風雨雹
하야 近鄭之田
에 麥苗皆死
라
余謂樊侯
는 本以屠狗
로 立軍功
하고 佐
하야 至成皇帝
하야 位爲列侯
하고 邑食
하며
舞陽
은 距鄭旣不遠
하고 又漢楚常苦戰
間
하니 亦侯平生提戈斬級所立功處
라
故後世言雄武에 稱樊將軍하니 宜其聰明正直이 有遺靈矣라
豈其靈不神於禦盜하고 而反神於平民하야 以駭其耳目邪아
風霆雨雹은 天之所以震耀威罰有司者어늘 而侯又得以濫用之邪아
蓋聞陰陽之氣가 怒則薄而爲風霆하고 其不和之甚者는 凝結而爲雹라호라
方今歲且久旱하야 伏陰不興하고 壯陽剛燥하니 疑有不和而凝結者는 豈其適會民之自災也邪아
不然이면 則喑嗚叱吒하야 使風馳霆擊은 則侯之威靈暴矣哉인저
文不過三百字
나 而十餘轉摺
에 出(逾)[愈]奇
하니 文之最妙者也
라
10. 번후묘樊侯廟가 재앙을 끼친 데 대한 기문記文
바른 데로 의론을 이끌었으니 분명코 번장군樊將軍을 힐문詰問하는 뜻이다.
정주鄭州의 도적으로 번후묘樊侯廟에 들어가 신상神像의 배를 가른 자가 있었는데, 얼마 뒤 큰 바람과 우박이 쏟아져 정주 인근의 밭에 있는 보리싹이 모두 죽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번후가 노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 번후는 본디 도살업을 하던 사람으로 군공軍功을 세웠고, 패공沛公을 도와 패공이 황제가 되게 하여 열후列侯의 지위가 되었고 무양舞陽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리고 부신符信을 쪼개어 봉작封爵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한漢나라와 더불어 장구히 봉록을 누렸으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백성에게 공덕이 있으면 제사를 지낸다는 경우이다.
무양은 정주鄭州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고 또 한漢나라와 초楚나라가 항상 형양滎陽과 경京과 삭索에서 치열하게 격전을 펼쳤으니, 이곳은 또한 번후가 평소 창을 잡고 적의 수급을 베어 공을 세운 곳이다.
그러므로 사당을 세워 추모하는 것이 마땅하다.
번후가 패공을 보좌하여 수레를 타고 갔을 때, 홍문鴻門에서 사세가 위급하자 눈을 부릅뜨고 한번 돌아보아 항우項羽가 기운을 잃게 만들었으니, 그 용력勇力이 족히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뛰어난 무장을 말할 때에 번장군樊將軍을 일컬으니, 그 총명함과 정직함이 영험함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도적이 칼날을 신상神像의 뱃속에 찔러 넣을 때에는 유독 그 심복心腹과 신장腎腸을 보존해낼 수 없었단 말인가?
그러면서 도리어 죄 없는 백성들에게 노여움을 옮겨 그 성난 기세를 내키는 대로 다 부린 것은 어째서인가?
어찌하여 살아서는 만인의 적을 대적할 수 있었으면서 죽어서는 한 몸도 지켜내지 못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도적을 막는 일에는 그 영령이 신통함을 보이지 못하고 백성들에게는 도리어 신통함을 보여 그 이목을 놀라게 한단 말인가?
바람과 천둥과 우박은 하늘이 맹렬하게 관리를 징벌하는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거늘, 번후가 또 이것을 남용할 수 있단 말인가?
대개 듣건대 음양의 기운이 서로 충돌하면 바짝 다가붙어 바람과 천둥이 되고, 조화롭지 못함이 심하게 될 경우에는 응결하여 우박이 된다고 한다.
바야흐로 올해는 또 오래 가물어 잠복한 음기陰氣가 일어나지 못하고 강성한 양기陽氣가 굳세고 건조하니, 의심컨대 음양이 조화하지 못하고 응결된 것은 아마도 마침 백성들이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때를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번후의 영령이〉 크게 노하여 소리치고 꾸짖어 바람이 휘몰아치고 천둥이 치게 만든 것은 번후의 위령威靈이 난폭한 것이리라.
“이 글은 300자에 불과하지만 10여 차례 문장을 꺾고 변화를 주어 갈수록 기이하니, 문장 중에 가장 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