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自岳陽至者
가 以
之書
와 洞庭之圖
로 來告曰 願有所記
라하야늘
予發書按圖
하니 自岳陽門
으로 西距
에 其外隱然隆高以長者曰偃虹隄
요 問其作而名者
하니 曰 吾滕侯之所爲也
라하고
問其所以作之利害하니 曰 洞庭은 天下之至險이요 而岳陽은 荊潭黔蜀四會之衝也라
而又常有風波之恐과 覆溺之虞러니 今舟之至者는 皆泊隄下하니 有事于州者가 近而且無患이라하고
問其大小之制와 用人之力하니 曰 長一千尺이며 高三十尺이요 厚加二尺而殺其上하야 得厚三分之二하고
曰 州以事上
하고 轉運使擇其吏之能者
하야 行視可否
를 凡三反復
하고 而又上于朝廷
하야 決之
하니
夫以百步之隄로 禦天下至險不測之虞하야 惠其民而及于荊潭黔蜀하야 凡往來湖中에 無遠邇之人이 皆蒙其利焉이라
使隄土石이 幸久不朽면 則滕侯之惠利於人物을 可以數計哉아
夫事不患於不成이요 而患於易壞니 蓋作者未始不欲其久存이나 而繼者常至於殆廢라
自古賢智之士가 爲其民하야 捍患興利하니 其遺迹이 往往而在라
使其繼者皆如始作之心이면 則民到于今히 受其賜하리니 天下豈有遺利乎아
滕侯志大材高
하야 名聞當世
라 方朝廷用兵急人之時
하야 顯用之
로되 而功未及就
하고 退守一州
에 無所用心
일새 略施其餘
하야 以利及物
이라
夫慮熟謀審하야 力不勞而功倍하고 作事可以爲後法하니 一宜書요
不苟一時之譽하야 思爲利於無窮하고 而告來者不以廢하니 二宜書요
岳之民人與湖中之往來者가 皆欲爲滕侯紀하니 三宜書라
악양岳陽에서 온 어떤 사람이 등후滕侯의 서찰과 동정호洞庭湖의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등후께서는 공께서〉 기문을 써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서찰을 뜯어보고 그림을 살펴보니, 악양문岳陽門에서부터 서쪽으로 김계석金雞石 우측까지 그 바깥에 진중하게 크고 높으면서 길게 있는 것이 언홍제偃虹隄이고, 그것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니 “우리 등후께서 지으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이해관계에 대해 물어보니 “동정호는 천하의 지극히 험고한 곳이고 악양은 형주荊州, 담주潭州, 검주黔州, 촉蜀 이 네 곳이 모이는 요충지입니다.
예전에 배로 동정호를 왕래하던 자들이 동정호에 와서 배를 댈 곳이 없었으므로 모두 남진南津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악주岳州에 볼 일이 있는 자들은 악주를 거리가 멀고 수고스러운 곳으로 여겼습니다.
또 항상 풍파風波를 만나는 두려움과 배가 뒤집혀 익사하는 근심이 있었는데, 지금 배를 타고 오는 자들은 모두 제방 아래에 정박하니, 악주에 볼 일이 있는 자들이 거리가 가깝고 근심이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제방의 크기와 제방을 만드는 데 동원된 인력이 얼마인지 물어보니 “길이가 1,000척尺, 높이가 30척이요, 바닥 두께는 30척에 2척을 더하여 위쪽으로 가면서 두께를 줄여 위쪽의 두께는 바닥 두께의 3분의 2가 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인력은 15,500명의 공인工人이 동원되어 원래 정한 공사기한을 넘기지 않고 완성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계획을 시작했을 때의 논의 과정에 대해 물어보니
“주州에서 이 일을 가지고 전운사轉運使에게 상달上達하였고, 전운사가 일을 잘하는 관리를 선발해 가서 공사의 가능 여부를 살펴보게 하기를 모두 세 번이나 반복하였으며, 또 조정에 상주上奏하여 삼사三司에서 결정하게 하였으니,
그런 뒤에 사업이 재가되었으되 모두 우리 등후의 논의를 바꾸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이것은 “군자의 일이니 기록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대개 백성들을 염려함이 깊으면 그 일을 시작할 때 계획이 정밀해진다.
그러므로 힘을 들이는 것은 적고 공이 되는 것은 많아지는 것이다.
대저 100보步의 제방으로 천하에 지극히 험고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근심을 막아, 그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고 형주荊州, 담주潭州, 검주黔州, 촉蜀의 사람들에게까지 은택을 끼쳐서 무릇 동정호를 왕래함에 있어 멀고 가까운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그 이로움을 받았다.
또 악양은 형주荊州, 담주潭州, 검주黔州, 촉蜀 이 네 곳이 만나는 요충지이니, 와서 정박하는 배가 하루에 모두 몇 척이나 되겠는가.
만일 제방의 토석土石이 다행히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는다면 등후가 사람들에게 은택과 이로움을 끼친 것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대저 일은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근심할 것이 없고 쉬이 무너지는 것을 근심해야 하니, 대개 사업을 일으키는 사람 치고 처음부터 그것이 오랫동안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그 사업을 이어받은 자가 항상 위태롭고 무너지게 만드는 데 이른다.
자고로 어질고 지혜로운 선비가 그 백성들을 위하여 근심을 막고 이로움을 일으켰으니 그 유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만일 그 뒤를 이어받은 자가 모두 사업을 처음 일으킨 사람의 마음과 같다면, 백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은택을 받을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는 등후가 염려하면서 후대에 기록을 남기고자 한 까닭이다.
등후는 뜻이 크고 재주가 높아 명성이 당세에 퍼졌으므로, 바야흐로 조정에서 군대를 쓰고 사람이 급한 시기에 일찍이 그를 중용重用하였으나, 공을 미처 이루지 못하였고 물러나 한 주州를 지키게 되어 마음을 쓸 곳이 없게 되자 대략 그 남은 재주를 펴서 이로움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였다.
대저 생각을 깊이 하고 계획을 주밀하게 짜서 힘을 수고롭게 들이지 않아도 공이 배가 되고 사업을 일으킨 것이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니, 이것이 기록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한때의 영예를 구차히 얻으려 하지 않고 무궁한 후세에까지 이익이 될 것을 생각하고서 뒷사람들에게 이 일을 폐기시키지 말고 이어가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기록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또 악주의 백성들과 동정호를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등후를 위하여 기록해주기를 바라니, 이것이 기록해야 할 세 번째 이유이다.
기록해야 할 이 세 가지 이유들로 인해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에 기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