菱溪之石有六이러니 其四爲人取去하고 其一差小而尤奇하야 亦藏民家하고 其最大者는 偃然僵臥於谿側하니 以其難徙라 故得獨存이라
每歲寒霜落하야 水涸而石出이면 谿傍人見其可怪하야 往往祀以爲神이라
唐
中
에 刺史李濆爲荇谿記云 水出
하야 西經
下
라하되 以地求之
하면 今無所謂荇谿者
라
하니 淮人爲諱其嫌名
하야 以荇爲菱
이라하니 理或然也
라
谿傍若有遺址
하니 云故將
之宅
이니 石卽劉氏之物也
라하다
金本武夫悍卒이어늘 而乃能知愛賞奇異하야 爲兒女子之好하니 豈非遭逢亂世하야 功成志得하야 驕於富貴之佚欲而然耶아
想其陂池臺榭에 奇木異草가 與此石稱하니 亦一時之盛哉인저
予感夫人物之廢興
하고 惜其可愛而反棄也
하야 乃以三牛曳置
하고 又索其小者
하야 得於白塔民朱氏
하야 遂立于亭之南北
하니 亭負城而近
일새 以爲滁人歲時嬉遊之好
라
夫物之奇者가 棄沒於幽遠則可惜이요 置之耳目則愛者不免取之而去라
嗟夫라 劉金者는 雖不足道나 然亦可謂雄勇之士니 其生平志氣가 豈不偉哉라
及其後世하야 荒烟零落하야 至於子孫泯沒而無聞이온 況欲長有此石乎아
而好奇之士聞此石者는 可以一賞而足이니 何必取而去也哉아
行文이 委曲幽妙하야 零零碎碎作文하니 歐陽公獨長이라
일은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나 도리어 절로 초연한 풍치風致가 있다.
능계菱溪의 돌은 여섯 개가 있었는데, 그중 네 개는 사람들이 가져가버렸고, 〈남은 두 개 중〉 하나는 조금 작으면서 더욱 기이하여 또한 민가民家에 보관하고 있고, 가장 큰 것은 편안하게 능계菱溪 곁에 누워 있으니 운반하기 어렵기 때문에 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날씨가 추워져 서리가 내려 물이 말라 돌이 드러날 때마다 시냇가의 사람들이 괴이함을 보고서 왕왕 제사를 지내 신령한 것으로 삼았다.
능계菱溪는 도圖와 경經을 살펴보면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당唐 회창會昌 연간에 자사刺史 이분李濆이 〈행계기荇谿記〉를 지어 “물이 영양령永陽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황도산皇道山을 경유하여 내려온다.”라고 하였는데, 그 지역에서 찾아보면 지금 이른바 행계荇溪라는 것은 없다.
저주滁州 사람에게 물어보니 “능계菱溪가 바로 행계荇溪이다.
양행밀楊行密이 회남淮南을 점거하였는데, 회남淮南 사람들이 그의 혐오스런 이름을 피하여 ‘행荇’자를 ‘능菱’자로 바꾸었다.”라고 하니 이치가 그럴듯하였다.
시냇가에 유허遺墟가 있으니 옛 장수 유금劉金의 집인데, 돌은 바로 유씨劉氏의 물건이었다고 한다.
양행밀楊行密과 함께 합비合淝에서 거병擧兵하였으니, 36명의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 중에 유금劉金이 한 사람이다.
유금劉金은 본래 씩씩한 무부武夫이자 용맹한 병사였는데, 이에 능히 기이한 것을 애상愛賞할 줄 알아서 아녀자들이 좋아할 거리가 되었으니 아마도 난세를 만나 공을 이루고 뜻을 얻어 부귀富貴에 대한 큰 욕심 탓에 교만해져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못과 누대에 기이한 초목이 이 돌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또한 당시의 성대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지금 유씨劉氏의 후손들은 흩어져 평민이 되었지만 아직도 능계菱溪 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저 인물의 흥폐에 대해 감회가 일고, 돌이 아낄 만한데 도리어 버려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이에 세 마리의 소로 돌을 끌어다 유곡幽谷에 두고, 또 그 작은 돌을 찾아 백탑白塔에 사는 주씨朱氏에게서 얻어 마침내 정자의 남북에 세워두니, 정자는 성을 등지고 가까이 있기 때문에 저주滁州 사람들이 세시歲時로 노닐며 좋아하는 곳이 되었다.
사물 중에 기이한 것이 유원幽遠한 곳에 버려져 매몰되면 아까워할 만하고, 그것을 이목耳目에 띠는 곳에 놓아두면 좋아하는 사람이 가지고 가버림을 면치 못한다.
아, 유금劉金이란 자는 비록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또한 씩씩하고 용맹한 사내였으니 평생의 지기志氣가 어찌 크지 않았겠는가.
후세에 이르러 몰락하고 쇠락하여 자손들이 민몰泯沒되어 알려짐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물며 이 돌을 오래도록 소유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선비는 한번 완상하면 그만일 것이니 굳이 가져갈 필요 있겠는가.
“글을 짓는 것이 위곡委曲하고 유묘幽妙하여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글을 지었으니 구양수歐陽脩만의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