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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7)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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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世家
吳越世序錢王初起處 有生色이로되 及錢王略地立國處하야는 不足觀覽이니 豈吳越王無他大略耶 抑亦史官亡之耶 吳人也 錄之하야 見其創迹云이라
錢鏐 具美 杭州人也 臨安里中有大木한대 鏐幼時 與群兒戲木下할새 鏐坐大石하야 指麾群兒爲隊伍하야 號令頗有法하니 群兒皆憚之 及壯 無賴하야 不喜事生業하고 以販鹽爲盜
縣錄事鍾起有子數人하야 與鏐飮博이어늘 起嘗禁其諸子하되 諸子多竊從之遊 豫章人有善術者 望牛斗間有王氣하니 因遊錢塘하야 占之在臨安일새 乃之臨安하야 以相法隱市中하야 陰求其人이라
起與術者善이러니 術者私謂起曰 占君縣有貴人이어늘 求之市中不可得이라 視君之相하니 貴矣 然不足當之라하다 起乃爲置酒하고 悉召縣中賢豪爲會하야 陰令術者徧視之하니 皆不足當이라
術者起家할새 鏐適從外來라가 見起하고 反走어늘 術者望見之하고 大驚曰 此眞貴人也라하야늘 起笑曰 此吾旁舍錢生爾라하다
術者召鏐하야 熟視之하고 顧起曰 君之貴者 因此人也라하고 乃慰鏐曰 子骨法非常하니 願自愛라하고 因與起訣曰 吾求其人者 非有所欲也 直欲質吾術爾라하고 明日乃去하다 起始縱其子等하야 與鏐遊하고 時時貸其窮乏하다
鏐善射與槊하고 稍通圖緯諸書 唐乾符二年 浙西裨將王郢作亂한대 募鄕兵討賊하고 表鏐偏將하야 擊郢破之 是時 黃巢衆已數千이어늘 攻掠浙東하야 至臨安한대
鏐曰 今鎭兵少而賊兵多하니 難以力禦 宜出奇兵邀之라하고 乃與勁卒二十人伏山谷中한대 巢先鋒度險皆單騎일새 鏐伏弩射殺其將하니 巢兵亂이어늘 鏐引勁卒蹂之하야 斬首數百級이라
鏐曰 此可一用爾 若大衆至 何可敵邪리오하고 乃引兵趨八百里하니 八百里 地名也 告道旁媪曰 後有問者어든 告曰 臨安兵 屯八百里矣라하라하다
巢衆至하야 聞媪語하고 不知其地名하고 皆曰 嚮十餘卒 不可敵이어든 況八百里乎아하고 遂急引兵過하다
都統高駢聞巢不敢犯臨安하고 壯之하야 召董昌與鏐 俱至廣陵이러니 久之 駢無討賊意 昌等不見用하야 辭還하니 駢表昌杭州刺史하다 是時 天下已亂이라 昌乃團諸縣兵爲八都하고 以鏐爲都指揮使하고 成及爲靖江都將하다
中和二年 觀察使劉漢宏 與昌有隙이라 漢宏遣其弟漢宥都虞候辛約하야 屯兵西陵이라 鏐率八都兵渡江하야 竊敵軍號하야 斫其營한대 營中驚擾 因焚之하니 漢宥等皆走하다
漢宏復遣將黃珪何肅屯 한대 鏐皆攻破之 與漢宏遇하야 大敗之하고 殺何肅辛約이라 漢宏易服持膾刀以遁이어늘 追者及之하니 漢宏曰 我 宰夫也라하고 擧刀視之하야 乃免하다
四年 僖宗遣中使焦居璠爲杭越通和使하야 詔昌及漢宏罷兵이어늘 皆不奉詔 漢宏遣其將朱褒韓公玫施堅實等以舟兵屯
鏐出하고 成及夜率奇兵하야 破褒等於하고 進屯하니 施堅實等降이라 遂攻破越州
漢宏走한대 台州刺史執漢宏하야 送於鏐하니 斬于會稽하고 族其家하다 鏐乃奏昌代漢宏하고 而自居杭州하다
三年 拜鏐左衛大將軍杭州刺史하고 昌越州觀察使하다 是歲 畢師鐸囚高駢하니 淮南大亂이라 將徐約攻取蘇州하다
潤州劉浩逐其帥周寶어늘 寶奔常州하니度支催勘官薛朗爲帥 鏐遣都將成及杜稜等攻常州하야 取周寶以歸하니 鏐具軍禮郊迎하고 館寶于하다
稜等進攻潤州하야 逐劉浩하고 執薛朗하야 剖其心以祭寶하다 然後遣其弟銶攻徐約하니 約敗走入海어늘 追殺之하다
昭宗拜鏐杭州防禦使하다 是時 楊行密爭淮南하야 與鏐戰蘇常間이러니 久之 儒爲行密所殺이라 行密據淮南하야 取潤州하고 而鏐亦取蘇常하다
唐升越州威勝軍하야 以董昌爲節度使하야 封隴西郡王하고 杭州武威軍하야 拜鏐都團練使하고 以成及爲副使하다
字弘濟 與鏐同事攻討하야 謀多出於及이어늘 而鏐以女妻及子仁琇 鏐乃以杜稜阮結顧全武等爲將校하고 沈崧皮光業林鼎羅隱爲賓客하다
二年 拜鏐鎭海軍節度使潤州刺史하고 乾寧元年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二年 越州董昌反이라
昌素愚하야 不能決事하야 臨民訟擲之而勝者爲直이라 妖人應智王溫巫韓媪等 以妖言惑昌하야 獻鳥獸爲
牙將倪德儒謂昌曰 曩時謠言 有羅平鳥主越人禍福하야 民間多圖其形하야 禱祀之러니 視王書名與圖類라하고 因出圖以示昌하니 昌大悅하야 乃自稱皇帝하고 國號羅平하며 하고 分其兵爲兩軍하야 中軍衣黃하고 外軍衣白하야 銘其衣曰歸義
副使黃竭切昌以爲不可어늘 昌大怒하야 使人斬竭하고 持其首至하야 罵曰 此賊負我로다 好聖明時 三公不肯作하고 乃自求死耶아하고 投之하다
昌復拒命하고 遣其將陳都崔溫等屯香嚴石侯하고 乞兵於楊行密하니 行密遣安仁義救昌이라 鏐遣顧全武攻昌하야 斬崔溫이라
昌所用諸將徐珣湯臼袁邠等 皆庸人이라 不知兵하야 遇全武輒敗로되 昌兄子眞 驍勇善戰일새 全武等攻之하야 逾年不能克이라 眞與其裨將刺羽有隙일새 刺羽譖之 昌殺眞하니 兵乃敗
全武執昌歸杭州하야 行至 昌顧其左右曰 吾與錢公俱起鄕里하야 吾嘗爲大將이러니 今何面目으로 復見之乎아하니 左右相對泣下 因瞋目大呼하고 投水死하다
昭宗以宰相王溥鎭越州하니 溥請授鏐 乃改威勝軍爲鎭東軍하고 拜鏐鎭海鎭東軍節度使하고 加檢校太尉中書令하고하야 恕九死하다 鏐如越州受命하고 還治錢塘하야 號越州爲東府하다
光化元年 移鎭海軍於杭州하고 加鏐檢校太師하고 改鏐鄕里曰廣義鄕 勳貴里하고 鏐素所居營曰衣錦營하다 婺州刺史王壇 叛附于淮南이어늘 楊行密遣其將康儒應壇하야 因攻睦州 鏐遣其弟銶敗儒於軒渚하니 壇奔宣州
昭宗詔鏐圖形하고 升衣錦營爲衣錦城하고 石鑑山曰衣錦山하고 大官山曰功臣山하다 鏐遊衣錦城하야 宴故老할새 山林皆覆以錦하고 號其幼所嘗戲大木曰衣錦將軍이라하다
天復二年 封鏐越王하다 鏐巡衣錦城할새 武勇右都指揮使徐綰與左都指揮使許再思叛하야 焚掠城郭하고 攻內城한대 陳爲等 閉門拒之
鏐歸하야 至北郭門不得入한대 하야 斬首百餘級하니 綰屯龍興寺
鏐微服踰城而入하야 遣馬綽王榮杜建徽等分屯諸門하고 使顧全武備東府하니 全武曰 東府不足慮 可慮者淮南爾니이다 綰急이면 必召淮兵하리니 淮兵至 患不細矣니이다 楊公 大丈夫 今以難告 必能閔我라하니 鏐以爲然하다
全武曰 獨行이면 事必不濟리니 請擇諸公子可行者라하니 鏐曰 吾嘗欲以元璙婚楊氏라하고 乃使隨全武如廣陵하다 綰果召田頵於宣州
全武等至廣陵하니 行密以女妻元璙하고 亟召頵還한대 頵取鏐錢百萬하고 質鏐子元瓘而歸하다
天祐元年 封鏐吳王하다 鏐建功臣堂하고 立碑紀功하야 列賓佐將校名氏於碑陰者五百人하다 四年 升衣錦城爲安國衣錦軍하다
梁太祖卽位 封鏐吳越王兼淮南節度使하다 客有勸鏐拒梁命者어늘 鏐笑曰 吾豈失爲리오하고 遂受之하다
太祖嘗問吳越進奏吏曰 錢鏐平生有所好乎아하니 吏曰 好玉帶名馬라하야늘 太祖笑曰 眞英雄也라하고 乃以玉帶一匣打毬御馬十匹賜之하다
하야 信州危仔倡奔於鏐하니 鏐惡其姓하야 改曰元하다
二年 加鏐守中書令하고 改臨安縣爲安國縣하고 廣義鄕爲衣錦鄕하다
三年 加守太保 한대 鏐遣其弟鋸鏢救之 淮兵爲水栅環城하고 以銅鈴繫網하야 沈水中하야 斷潛行者
水軍卒司馬福 多智而善水行일새 乃先以巨竹觸網하니 淮人聞鈴聲하고 遂擧網한대 福乃過하야 入城中하고 其出也 亦然이라
乃取其軍號하야 內外夾攻 號令相應하니 淮人以爲神이라 遂大敗之하다 本等走어늘 擒其將閭丘直何明等하다
四年 鏐游衣錦軍하야 作還鄕歌曰 還鄕兮掛錦衣하니 父老遠來相追隨로다 無孛人無欺하니 吳越一王駟馬歸라하다
元年 加鏐守尙書令兼淮南宣潤等道四面行營都統하고於衣錦軍이라 鏐弟鏢居湖州러니 擅殺戍將潘長하고 懼罪하야 奔于淮南하다
二年 梁郢王友珪立하야 冊尊鏐尙父하다 末帝貞明三年 加鏐天下兵馬都元帥하고 하다 四年 하니 鏐始由海路하야 入貢京師하다 龍德元年 賜鏐詔書不名하다
唐莊宗入洛 鏐遣使貢獻하고이라 莊宗下其議於有司하니 群臣皆以謂非天子 不得用玉冊이라하고 旣而許之하고
乃賜鏐玉冊金印이라 鏐因以鎭海等軍節度 授其子元瓘하고 自稱吳越國王하고 更名所居曰宮殿 府曰朝하고 官屬皆稱臣하고 起玉冊金券詔書三樓於衣錦軍하고 遣使冊新羅渤海王하고 海中諸國 皆封拜其君長하다
元瓘等遣人以絹表間道自陳이러니 安重誨死 明宗乃復鏐官爵하다 三年 鏐卒하니 年八十一이라 諡曰武肅이라 子元瓘立하다
嗚呼 天人之際 爲難言也 非徒自古術者好奇而幸中이라 至於英豪草竊하야도 亦多自託於妖祥하니 豈其欺惑愚衆 有以用之歟
蓋其興也 非有功德積漸之勤이요 而黥髡盜販 倔起於王侯어늘 而人亦樂爲之傳歟 考錢氏之終始컨대 非有德澤施及一方이요 虐用其人甚矣 其動于氣象者 豈非其孽歟
是時 四海分裂하야 不勝其暴 又豈皆然歟리오 是皆無所得而推歟 術者之言 不中者多而中者少어늘 而人特喜道其中者歟인저


귀안歸安 녹문鹿門 모곤茅坤 비평批評
손남孫男 암숙闇叔 모저茅著 중정重訂
세가
전류錢鏐세가世家
오월吳越세계世系전왕錢王이 처음 일어난 부분은 생동하는 형상이 있지만 전왕錢王이 땅을 빼앗아 나라를 세운 부분에서는 족히 볼 것이 없으니 어쩌면 오월왕吳越王이 별다른 원대遠大모략謀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사관史官이 이 부분을 빠뜨려서인가? 나는 오인吳人인지라 이를 수록하여 그 처음의 자취를 드러낸다.
전류錢鏐구미具美항주杭州 임안臨安 사람이다. 임안臨安의 마을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전류가 어린 시절 아이들과 그 나무 아래에서 놀 적에 전류는 큰 바위에 앉아 있으면서 아이들이 대오隊伍를 이루도록 지휘指麾하여 호령號令이 자못 법도가 있으니 아이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장성하여 하는 일 없이 지내며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소금을 몰래 파는 일로 도적이 되었다.
임안현臨安縣녹사錄事 종기鍾起에게 아들 몇 명이 있어 전류錢鏐와 함께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는데, 종기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지하였는데도 아들들이 몰래 그를 따라 노는 일이 많았다. 예장豫章 사람으로 방술方術을 잘하는 이가 우성牛星두성斗星 사이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으니 우수牛宿두수斗宿전당錢塘분야分野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전당 지방으로 가서 점을 치자 왕기王氣임안臨安에 있기에 이에 임안으로 가서 저자에 숨어 지내면서 관상술觀相術로 몰래 그 사람을 찾았다.
전류錢鏐전류錢鏐
종기가 이 술자術者와 친하게 지냈는데 술자가 둘만 있을 때 종기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귀인貴人이 있음을 점쳐 알았는데 저자에서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대의 을 보니 귀인의 이다. 그렇지만 왕자王者에 해당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종기가 이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에 사는 현사賢士호걸豪傑을 모두 불러 모임을 갖고서 몰래 술자에게 두루 살펴보게 하였는데 모두 왕자에 해당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술자가 종기의 집을 들렀을 때 전류가 마침 밖에서 찾아왔다가 종기를 보고는 몸을 돌려 달아나자 술자가 그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참으로 귀인이다.”라고 하였는데 종기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 옆집의 전생錢生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술자가 전류를 불러 그가 오자 자세하게 살펴보고 종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가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람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고 나서 전류를 위로하기를, “너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부디 자중자애自重自愛하거라.”라고 하고 이어 종기와 작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찾은 것은 바라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나의 방술을 증명하고 싶어서였을 뿐이다.”라고 하고 이튿날 바로 떠났다. 종기가 그제야 아들들을 전류와 놀게 내버려 두고 이따금 전류가 궁핍窮乏할 때면 도와주었다.
전류錢鏐는 활과 창을 잘 다루었고 각종 도참圖讖위서緯書를 대략 통달하였다. 건부乾符 2년(875)에 절서浙西비장裨將 왕영王郢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감진石鑑鎭진장鎭將 동창董昌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을 토벌하고 표주表奏하여 전류를 편장偏將으로 삼아 왕영을 격파擊破하였다. 이때에 황소黃巢의 무리가 이미 수천 명이었는데 절동浙東공략攻掠하여 임안臨安에 이르렀다.
그러자 전류가 말하기를, “지금 진병鎭兵은 적고 적병賊兵은 많으니 힘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기병奇兵을 내어 대적해야 합니다.”라고 하고서 정예병 20명과 함께 산곡山谷에서 매복하였다. 황소의 선봉대先鋒隊가 험한 곳을 지나갈 때 길이 좁아 모두 기병 한 명씩 가기에 전류가 매복해 두었던 궁노수弓弩手들이 쇠뇌로 그 장수들을 사살射殺하니 황소의 병졸들이 혼란해지거늘 전류가 정예병을 이끌고 그들을 유린하여 수급首級 수백을 베었다.
전류가 말하기를, “이 방법은 한 번만 쓸 수 있을 뿐이니 만약 대군大軍이 이르면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군대를 이끌고 팔백리八百里로 가니 팔백리는 지명地名이었다. 길가의 노파老婆에게 말하기를, “뒤에 묻는 자가 있거든 그에게 임안의 군대가 팔백리에 진을 쳤다고 고하라.”라고 하였다.
황소의 무리가 이르러 노파의 말을 듣고 팔백리가 지명인 것은 모르고 모두 말하기를, “지난번에 10여 명 군졸도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팔백리에 진을 친 군사임에랴!”라고 하고 마침내 급히 군대를 이끌고 지나갔다.
도통都統 고변高駢이 황소가 감히 임안을 침범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장하게 여겨 동창과 전류를 불렀다. 함께 광릉廣陵에 갔는데 오래 지나도 고병이 을 토벌하려는 뜻이 없는지라 동창 등이 쓰이지 못하여 하직하고 돌아오니 고병이 표주表奏하여 동창을 항주자사杭州刺史로 삼았다. 이때에 천하天下가 이미 혼란하니 동창이 이에 각 의 병사들을 모아 팔도八都를 만들고서 전류를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고 성급成及정강도장靖江都將으로 삼았다.
중화中和 2년(882)에 월주관찰사越州觀察使 유한굉劉漢宏동창董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유한굉이 자기 아우 유한유劉漢宥, 도우후都虞候 신약辛約을 보내 서릉西陵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전류錢鏐팔도八都의 군대를 거느리고 을 건너 적병敵兵군호軍號를 훔쳐 그 군영軍營을 부수자 군영 안이 놀라고 소란해 졌는데 이 틈을 타서 군영을 불지르니 유한유 등이 모두 달아났다.
유한굉이 다시 장수 황규黃珪, 하숙何肅을 보내 제기諸曁, 소산蕭山에 주둔하자 전류가 모두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리고는 유한굉과 만나 전투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하숙과 신약을 죽였다. 유한굉이 옷을 바꿔 입고 회칼을 가지고 달아났는데 추격병이 그를 따라잡으니 유한굉이 말하기를, “저는 백정입니다.”라고 하고 회칼을 들어 보여주고서야 벗어났다.
중화中和 4년(884)에 희종僖宗중사中使 초거번焦居璠을 보내 항월통화사杭越通和使로 삼아 동창董昌유한굉劉漢宏에게 군대를 물리라고 조서詔書로 명하였는데 모두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았다. 유한굉이 자기 장수 주포朱褒, 한공매韓公玫, 시견실施堅實 등을 보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망해望海에 주둔하였다.
전류錢鏐평수平水에 출병하고 성급成及이 밤에 기병奇兵을 거느리고서 주포 등을 조아태曹娥埭에서 격파하고 진군하여 풍산豐山에 주둔하자 시견실 등이 항복하니 마침내 월주越州를 격파하였다.
유한굉이 태주台州로 달아나자 태주자사台州刺史가 유한굉을 잡아 전류에게 보내니 회계會稽에서 참수斬首하고 멸족滅族시켰다. 전류가 이에 표주表奏하여 동창으로 유한굉을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항주杭州에 머물렀다.
광계光啓 3년(887)에 전류錢鏐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항주자사杭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창董昌월주관찰사越州觀察使에 임명하였다. 이해에 필사탁畢師鐸고변高駢을 감옥에 가두니 회남淮南이 크게 혼란해졌다. 이에 육합진六合鎭의 장수 서약徐約소주蘇州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윤주潤州아장牙將 유호劉浩가 그 주수主帥 주보周寶를 쫓아내자 주보가 상주常州로 달아나니 유호가 도지최감관度支催勘官 설랑薛朗을 추대하여 주수主帥로 삼았다. 전류가 도장都將 성급成及, 두릉杜稜 등을 보내 상주를 공격하여 주보를 잡아 돌아오니 전류가 군례軍禮를 갖추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고 주보를 장정樟亭에 머물게 하였다.
주보가 병으로 죽자 두릉 등이 진군하여 윤주를 공격하여 유호를 몰아내고 설랑을 잡고는 그 심장을 도려내어 주보에게 제사 지냈다. 그런 뒤에 전류는 자기 아우 전구錢銶를 보내 서약을 공격하니 서약이 패주敗走하여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추격하여 죽였다.
소종昭宗전류錢鏐항주방어사杭州防禦使에 임명하였다. 이때에 양행밀楊行密손유孫儒회남淮南쟁탈爭奪하면서 전류와 소주蘇州, 상주常州 지역에서 전투하였는데 오래 지나 손유가 양행밀에게 살해당하였다. 양행밀이 회남을 점거하고서 윤주潤州를 차지하였고 전류 역시 소주, 상주를 차지하였다.
나라가 월주를 위승군威勝軍으로 승격昇格하고서 동창董昌절도사節度使로 삼고 농서군왕隴西郡王에 봉하였고, 항주를 무위군武威軍으로 승격昇格하고서 전류를 도단련사都團練使로 삼고 성급成及도단련부사都團練副使로 삼았다.
성급은 홍제弘濟니 전류와 전투하고 토벌하는 일을 함께하며 전략戰略이 성급에게서 나온 경우가 많았는데, 전류가 자기 여식女息을 성급의 아들 성인수成仁琇에게 시집보냈다. 전류가 이에 두릉杜稜, 원결阮結, 고전무顧全武 등을 장교將校로 삼고 심숭沈崧, 피광업皮光業, 임정林鼎, 나은羅隱빈객賓客으로 삼았다.
경복景福 2년(893)에 전류錢鏐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윤주자사潤州刺史에 임명하였다. 건녕乾寧 원년元年(894)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건녕乾寧 2년(895)에 월주越州동창董昌이 배반하였다.
동창은 평소 어리석어 일을 결단決斷하지 못하여 백성의 송사訟事를 처리할 때 골패骨牌를 던져 이긴 자를 옳다고 판정하였다. 요인妖人 응지應智, 왕온王溫무격巫覡 한오韓媪 등이 요언妖言으로 동창을 미혹迷惑하여 조수鳥獸를 바쳐 부서符瑞라고 하였다.
아장牙將 예덕유倪德儒가 동창에게 이르기를, “예전 요언謠言나평조羅平鳥라는 새가 월인越人화복禍福주관主管한다는 말이 있어 민간民間에서 많이들 그 형상을 그려 기도하고 제사하였는데 왕께서 이름을 쓰신 것을 보니 그 그림과 비슷합니다.”라고 하고 이를 인하여 그림을 꺼내 동창에게 보이니 동창이 크게 기뻐하여 이에 황제皇帝자칭自稱하고 국호國號나평羅平이라고 하며 순천順天으로 개원改元하고 그 군대를 양군兩軍으로 나누어 중군中軍황색黃色 옷을 입고 외군外軍백색白色 옷을 입고서 그 옷에 귀의歸義라는 글자를 새겼다.
부사副使 황갈黃竭이 동창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간절하게 경계하였는데 동창이 크게 노하여 사람을 시켜 황갈을 참수斬首하고 그 머리를 가져 오게 하고서 꾸짖기를, “이 적인賊人이 나를 저버렸도다. 성명聖明한 좋은 시절에 삼공三公이 되려고는 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죽기를 구한단 말이냐!”라고 하고 그 머리를 측간에 던져버렸다.
동창董昌이 이에 서신으로 이 사실을 전류錢鏐에게 알리니 전류가 동창이 배반한 정상情狀을 보고하였다. 소종昭宗조명詔命을 내려 동창의 관작官爵삭탈削奪하고 전류를 팽성군왕彭城郡王에 봉하고 절강동도초토사浙江東道招討使에 임명하였다. 전류가 말하기를, “동씨董氏가 우리에게 은혜가 있으니 대뜸 토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에 주둔하고서 그 문객門客 심방沈滂을 보내 동창을 타일러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 그러자 동창이 200 을 가지고 군대를 호궤犒饋하고 응지應智 등을 잡아 전류의 군중軍中에 보내고서 대죄待罪하기를 자청自請하니 전류가 이에 군대를 돌렸다.
그런데 동창이 다시 명을 거역하고 자기 장수 진도陳都, 최온崔溫 등을 보내 향엄香嚴, 석후石侯에 주둔하고 양행밀楊行密에게 원군을 청하니 양행밀이 안인의安仁義를 보내 동창을 구원하였다. 그러자 전류는 고전무顧全武를 보내 동창을 공격하여 최온을 참수斬首하였다.
동창이 임용한 장수들인 서순徐珣, 탕구湯臼, 원빈袁邠 등은 모두 용렬한 사람이라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고전무를 맞닥뜨릴 때마다 패하였으나 동창의 조카 동진董眞이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므로 고전무 등이 그를 공격하여 해를 넘기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동진이 자기 비장裨將 자우刺羽와 사이가 좋지 않기에 자우가 그를 참소하였다. 동창이 동진을 죽이니 동창의 군대가 그제야 패배하였다.
고전무가 동창을 잡아 항주杭州로 돌아가 행군하여 서소강西小江에 이르렀을 때 동창이 좌우左右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전공錢公과 함께 향리鄕里에서 일어나 내가 일찍이 대장大將이 되었었는데 지금 무슨 면목面目으로 다시 그를 본단 말인가!”라고 하니 좌우左右의 수하들이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동창이 이에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치고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소종昭宗재상宰相 왕보王溥에게 월주越州진수鎭守하게 하니 왕부가 전류에게 제수除授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위승군威勝軍진동군鎭東軍으로 고치고 전류를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진동군절도사鎭東軍節度使에 임명하고 검교태위檢校太尉 중서령中書令을 더하고 철권鐵券하사下賜하여 아홉 번 사죄死罪사면赦免해주도록 하였다. 전류가 월주에 가서 조명詔命을 받고는 돌아와 전당錢塘을 다스리면서 월주를 동부東府라고 불렀다.
광화光化 원년元年(898)에 진해군을 항주杭州로 옮기고 전류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하고 전류의 향리鄕里광의향廣義鄕 훈귀리勳貴里라고 고쳐 부르고 전류가 평소 지내는 군영을 의금영衣錦營이라고 하였다. 무주자사婺州刺史 왕단王壇이 배반하여 회남淮南에 붙으니 양행밀楊行密이 자기 장수 강유康儒를 보내 왕단에게 호응하여 이를 인하여 목주睦州를 공격하였다. 전류가 자기 아우 전구錢銶를 보내 강유를 헌저軒渚에서 패배시키니 왕단이 선주宣州로 달아났다.
소종이 조명詔命을 내려 능연각凌烟閣에 전류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고 의금영을 승격하여 의금성衣錦城으로 삼고 석감산石鑑山의금산衣錦山이라고 하고 대관산大官山공신산功臣山이라고 하였다. 전류가 의금성에서 노닐면서 고향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산림山林을 모두 비단으로 덮었고 어린 시절 일찍이 놀았던 큰 나무를 의금장군衣錦將軍이라고 불렀다.
천복天復 2년(902)에 전류錢鏐월왕越王에 봉하였다. 전류가 의금성衣錦城순행巡行할 때 무용우도지휘사武勇右都指揮使 서관徐綰좌도지휘사左都指揮使 허재사許再思가 배반하여 성곽城郭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고 내성內城을 공격하자 전류의 아들 전전영錢傳瑛 및 그 장수 마작馬綽, 진위陳爲 등이 문을 닫고 저항하였다.
전류가 돌아와 북곽문北郭門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자 성급成及이 전류를 대신하여 서관과 싸워 백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니 서관이 용흥사龍興寺에 진을 쳤다.
전류가 미복微服을 입고 성을 넘어 들어가 마작, 왕영王榮, 두건휘杜建徽 등을 보내 각 성문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고전무顧全武에게 동부東府방비防備하도록 하니 고전무가 말하기를, “동부는 염려할 것이 없고 우려되는 것은 회남淮南일 뿐입니다. 서관이 다급해지면 반드시 회남의 군대를 부를 것이니 회남의 군대가 오면 작은 걱정거리가 아닐 것입니다. 양공楊公(양행밀楊行密)은 대장부大丈夫니 지금 난처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니, 전류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고전무가 말하기를, “혼자 가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공자公子들 가운데 함께 갈 만한 분을 택하소서.”라고 하니 전류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원료元璙양씨楊氏와 혼인을 맺게 하고 싶었다.”라고 하고서 전원료錢元璙에게 고전무를 따라 광릉廣陵에 가게 하였다. 서관이 과연 선주宣州에서 전군田頵을 불렀다.
고전무 등이 광릉에 이르니 양행밀楊行密여식女息을 전원료에게 시집보내고 급히 전군을 소환召還하였는데 전군이 전류의 100 을 취하고 전류의 아들 전원관錢元瓘을 인질로 잡아 돌아갔다.
천우天祐 원년元年(904)에 전류錢鏐오왕吳王에 봉하였다. 전류가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공훈功勳을 기록하여 막료幕僚관리官吏, 장교將校성명姓名을 비석 뒷면에 새긴 것이 5백 명이었다. 천우天祐 4년(907)에 의금성衣錦城을 승격하여 안국의금군安國衣錦軍으로 삼았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전류를 오월왕吳越王에 봉하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문객門客 가운데 전류에게 양나라의 명을 거절하라고 한 자가 있었는데 전류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 어찌 손중모孫仲謀가 되는 데 문제가 있겠느냐.”라고 하고 마침내 임명을 받아들였다.
태조가 일찍이 오월吳越진주리進奏吏에게 묻기를, “전류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라고 하니 진주리가 아뢰기를, “옥대玉帶명마名馬를 좋아합니다.”라고 하였는데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영웅英雄이로다.”라고 하고서 옥대玉帶 1과 격구할 때 타는 어마御馬 10을 하사하였다.
강서江西위전풍危全諷 등이 양악楊渥에게 패배하여 신주信州 위자창危仔倡이 전류에게 달아나니 전류가 그의 을 싫어하여 으로 고쳤다.
개평開平 2년(908)에 전류에게 수중서령守中書令을 더하고 임안현臨安縣을 고쳐 안국현安國縣으로 삼고 광의향廣義鄕을 고쳐 의금향衣錦鄕으로 삼았다.
후량後梁 태조太祖후량後梁 태조太祖
개평開平 3년(909)에 수태보守太保를 더하였다. 양악楊渥의 장수 주본周本, 진장陳章소주蘇州를 포위하자 전류錢鏐가 자기 아우 전거錢鋸, 전표錢鏢를 보내 구원하였다. 회남淮南의 군대가 수책水栅을 만들어 성을 포위하고 구리 방울을 그물에 달아 물속에 가라앉혀 잠수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막았다.
수군水軍 병졸 사마복司馬福이 꾀가 많고 수영水泳을 잘하였기에 이에 먼저 큰 대나무를 가지고 그물을 건드리니 회남淮南 군사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마침내 그물을 들어올리자 사마복이 이 틈을 타 잠수하여 그물 있는 곳을 지나 성중城中에 들어갔고, 나올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중城中군호軍號를 알아내어 내외內外에서 협공夾攻하면서 호령號令이 서로 호응하니 회남淮南 군사들이 귀신같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남淮南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주본 등이 달아나자 그 장수 여구직閭丘直, 하명何明 등을 사로잡았다.
개평開平 4년(910)에 전류錢鏐의금군衣錦軍에 가서 〈환향가還鄕歌〉를 지어 노래하기를, “삼진절도사三鎭節度使로 고향에 돌아올 때 금의錦衣를 걸치니 부로父老들이 멀리 나와 서로 뒤따르도다. 두수斗宿우수牛宿 사이 살별이 없고 인간 세상에 속이는 이 없으니 오월吳越의 한 왕이 사마駟馬 타고 돌아가네.”라고 하였다.
건화乾化 원년元年(911)에 전류에게 수상서령守尙書令 겸회남선륜등도사면행영도통兼淮南宣潤等道四面行營都統을 더하고 의금군衣錦軍생사生祠를 세웠다. 전류의 아우 전표錢鏢호주湖州에 있었는데 수장戍將 반장潘長을 마음대로 죽이고 죄를 받을까 두려워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건화乾化 2년(912)에 나라 영왕郢王 주우규朱友珪가 즉위하여 책명冊命을 내려 전류를 상보尙父로 높였다. 말제末帝 정명貞明 3년(917)에 전류에게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를 더하고 개부開府하여 관속官屬을 두게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에 양융연楊隆演건주虔州를 취하니 전류가 처음으로 바닷길을 통해 경사京師에 들어가 공물을 바쳤다. 용덕龍德 원년元年(921)에 전류에게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이름은 쓰지 않았다.
장종莊宗낙양洛陽에 들어가자 전류錢鏐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옥책玉冊을 청하였다. 장종이 유사有司에게 내려 보내 그 일을 의논하게 하니 신료들이 모두 천자天子가 아니면 옥책을 쓸 수 없다고 하고 곽숭도郭崇韜는 더욱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윽고 장종이 허락하고는 이에 전류에게 옥책과 금인金印하사下賜하였다.
전류가 이에 진해군鎭海軍 절도사節度使를 자기 아들 전원관錢元瓘에게 제수하고 오월국왕吳越國王이라고 자칭自稱하고 지내는 거처를 궁전宮殿으로, 로 명칭을 고치고 관속官屬들을 모두 신하라 칭하고 옥책루玉冊樓, 금권루金券樓, 조서루詔書樓 세 누각을 의금군衣錦軍에 세우고 사신을 보내 신라왕新羅王발해왕渤海王책봉冊封하고 해중海中의 여러 나라에 대해 모두 그 군장君長을 봉해주고 직책을 주었다.
명종明宗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안중회安重誨전권專權을 휘둘렀는데, 전류錢鏐가 안중회에게 서신書信을 보낼 때 서신의 말이 거만하여 안중회가 크게 노하였다. 이때에 공봉관供奉官 오소우烏昭遇, 한매韓玫오월吳越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에 한매가 오소우가 전류에게 칭신稱臣하면서 무도舞蹈를 행하였다고 무고誣告하니 안중회가 이에 전류의 왕작王爵, 원수元帥, 상보尙父삭탈削奪할 것을 상주上奏하여 전류가 태사太師치사致仕하였다.
전원관錢元瓘 등이 사람을 보내 비단과 표문表文을 들고 샛길로 찾아가서 스스로 아뢰었는데 안중회가 죽자 명종이 그제야 전류의 관작官爵을 회복해주었다. 장흥長興 3년(932)에 전류가 하니 향년 81세였다. 시호諡號무숙武肅이다. 아들 전원관이 즉위하였다.
오호라!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로부터 술자術者들이 기괴奇怪함을 좋아하여 요행히 들어맞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영웅호걸英雄豪傑이나 산야山野의 도적들에 이르기까지도 흔히 요망妖妄징조徵兆에 스스로 가탁하였으니 어쩌면 어리석은 대중들을 속이는 데 쓸 만한 점이 있어서인가?
대개 그들이 흥기興起할 때에는 공덕功德을 점차로 쌓아가는 노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형벌을 받은 죄인이나 도적과 상인의 세력이 갑자기 일어나 왕후王侯가 된 것인데 사람들이 또한 요망한 징조를 전하기 좋아해서인가? 전씨錢氏전말顚末을 상고해보면 덕택德澤이 한 지방에 베풀어진 것이 아니고 백 년 사이에 그 지방 백성들을 매우 잔혹하게 부렸으니 그 천문天文, 역상曆象에 나타난 것이 어찌 그 요얼妖孼이 아니겠는가.
이때에 사해四海분열分裂하여 그 포악하기가 그지없었으나 또 어찌 다 그러했겠는가. 이것이 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추측한 것이겠는가. 술자術者의 말은 적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적중하는 경우가 적은데 사람들이 단지 그 적중한 일만 말하기 좋아해서였을 것이다.


역주
역주1 錢鏐世家 : 錢鏐(852~932)는 杭州 臨安 사람으로, 初名은 婆留이다. 전류의 事跡은 ≪舊五代史≫에는 卷133 〈世襲列傳 第2〉에 수록되어 있고, ≪新五代史≫에는 卷67〈吳越世家 第7〉에 수록되어 있다.
전류는 十國 중의 하나인 吳越國을 세웠는데, 吳越國은 南唐의 동쪽인 兩浙 지방을 세력 기반으로 하였다. 전류는 唐나라 말엽 董昌 밑에서 이 지역을 지키며 반란군을 물리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鎭海軍節度使가 되었는데 동창이 唐나라를 배반하고 稱帝하자 그를 토벌하여 鎭東軍節度使를 더하였다. 이후 杭州를 중심으로 兩浙 13州를 점차로 점거하였으나 中原 王朝의 正朔을 받들고 稱臣하여 唐나라 말엽에 越王, 吳王에 봉해졌고 後梁, 後唐 때 차례로 吳越王, 吳越國王에 봉해졌다. 이는 오월국이 약소한 데다 3面을 强敵들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그가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류가 41년 동안 오월국을 다스리면서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安集하는 정책을 펴자, 경제는 번영하여 漁鹽과 桑蠶의 이익이 江南 지방에서 으뜸이었고 文士들이 모여 들어 人才가 넘쳐 文藝의 수준이 한껏 高揚되었다. 또한 錢塘江에 石塘을 쌓아 바닷물의 역류를 막고 太湖 流域에 보를 축조하고 開墾 사업을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펴서 양절 지방이 부유하고 번성해지는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전류의 治積들로 인해 백성들은 그를 海龍王이라 일컬었다.
오월국은 전류의 만년에 南吳와 우호 관계를 맺은 뒤 閩國을 두 차례 침입한 일을 제외하면 대체로 큰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전류 사후 後晉, 後漢, 後周 및 北宋 등 중원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오월국은 그의 아들 錢元瓘, 손자 錢佐, 錢倧, 錢俶 등이 先祖의 정책을 지켜 계속하여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았다. 하지만 북송 太宗 太平興國 3년(978)에 전숙이 북송에 땅을 바치며 歸附하여 결국 72년 만에 멸망하였다.
전류는 ≪구오대사≫에 秦王 李茂貞, 南平王 高季興과 함께 〈僭僞列傳〉이 아니라 〈世襲列傳〉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이 황제를 참칭하지 않고 중원 왕조의 正朔을 받들면서 대를 이어 襲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구오대사≫에 전류에 대한 史評이 실려 있는데 참고로 들면 다음과 같다.
“史臣은 말한다. ‘唐나라 말엽 난리가 일어나고부터 海內가 나뉘고 찢어져 荊, 湖, 江, 浙이 각기 한 지방을 점거하여 子孫에게 물려주며 오랜 세월을 이어내려갔으니, 이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이는 중원이 多事多難하여 조정의 세력이 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宋나라가 天運을 향유한 때에 이르러 朗, 陵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王師를 명하여 속히 토벌하게 하였는데 화살 하나도 소비하지 않고 두 지방이 모두 복속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玉과 이름난 대나무가 모두 법도를 따라 공물로 올라오게 되고 江, 漢, 睢, 漳이 다 조정에 귀의하게 되었으니, 이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이는 마침 통일의 대업이 돌아갈 주인이 있고 천하의 민심이 흡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錢氏가 杭, 越을 80년이 넘도록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대개 大國을 섬기고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節操가 荊楚, 湖湘과 같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史臣曰自唐末亂離 海內分割 荊湖江浙 各據一方 翼子貽孫 多歷年所 夫如是者何也 蓋値諸夏多艱 王風不兢故也 洎皇宋之撫運也 因朗陵之肇亂 命王師以遄征 一矢不亡 二方俱服 遂使瑤琨篠簜(소탕)咸遵作貢之文 江漢睢漳 盡鼓朝宗之浪 夫如是者何也 蓋屬大統有歸 人寰允洽故也 惟錢氏之守杭越 逾八十年 蓋事大勤王之節 與荊楚湖湘不侔矣]”
역주2 臨安 : 臨安縣으로, 西晉 太康 元年(280)에 臨水縣을 고쳐 命名한 것인바 吳興郡에 속하였다. 가까이 있는 臨安山에서 縣名이 유래하였다. 隋나라 때는 없앴다가 唐나라 垂拱 4년(688)에 다시 임안현을 설치하고 杭州에 소속시켰다. 後梁 開平 2년(908)에 吳越이 安國縣으로 고쳤다.
역주3 牛斗 錢塘分也 : 牛斗는 牽牛星과 北斗星의 별자리로, 12星次 가운데 하나인 星紀를 가리킨다. 고대에는 星紀, 玄枵, 娵訾, 降婁, 大梁, 實沈, 鶉首, 鶉火, 鶉尾, 壽星, 大火, 析木 등 12성차의 위치에 따라 지상의 지역과 나라의 위치를 대응시켰는데, 이것을 천상에서는 分星이라고 하고 지상에서는 分野라고 한다. 錢塘은 吳越로 星紀의 분야인바, ≪周禮≫ 〈春官․保章氏〉에 “星과 土로써 九州의 땅을 나누어 分封한 封域에 모두 分星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鄭玄의 注에 “이에 대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십이성차의 分野이다. 星紀의 분야는 吳越이고 玄枵의 분야는 齊이고 娵訾의 분야는 衞이고 降婁의 분야는 魯이고 大梁의 분야는 趙이고 實沈의 분야는 晉이고 鶉首의 분야는 秦이고 鶉火의 분야는 周이고 鶉尾의 분야는 楚이고 壽星의 분야는 鄭이고 大火의 분야는 宋이고, 析木의 분야는 燕이다.” 하였다.
역주4 (遇)[過] : 저본에는 ‘遇’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와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過’로 바로잡았다.
역주5 石鑑鎭 : 원래 石鏡鎭으로 臨安縣의 동남쪽에 있는데, 가까이 있는 石境山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北宋 초에 宋 太祖 趙匡胤의 조부 趙敬의 諱를 피하여 石鑑鎭으로 고쳤다.
역주6 董昌 : 847(?)~896. 杭州 臨安 사람으로 唐나라 말엽에 義勝軍節度使가 되어 兩浙에서 割據하였다. 乾寧 2년(895) 稱帝에 반대하는 黃竭, 吳鐐, 張遜 등을 죽이고 越州에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國號를 大越羅平이라 하고 順天으로 改元하였다. 이듬해 錢鏐가 越州를 함락하자 西小江에 빠져 자살하였다고도 하고(≪新五代史≫) 전류가 사로잡아 唐 昭宗에게 바쳤다고도 한다.(≪舊五代史≫)
역주7 越州 : 隋나라 大業 元年(605)에 吳州를 고쳐 命名한 곳으로, 治所는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에 있었다. 대업 3년(607)에 會稽郡으로 고쳤다가 唐나라 武德 4년(621)에 다시 월주로 고쳤는데 이후 天寶, 至德 연간에 다시 회계군으로 고쳤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월주로 고쳤다. 杭州의 남동쪽에 있다.
역주8 諸曁 : 秦나라 때 설치한 縣으로 회계군에 속하였다. 縣內에 曁浦와 諸山이 있는 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唐나라 때는 월주에 속하였다.
역주9 蕭山 : 唐나라 천보 元年(742)에 永興縣을 고쳐 명명한 縣으로 회계군에 속하였다. 縣의 서쪽에 있는 소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건원 원년(758)에 월주에 소속되었다.
역주10 望海 : 後梁 開平 3년(909)에 吳越에서 설치한 縣으로 明州에 속하였다. 治所는 지금의 浙江省 寧波市 동북쪽에 있었다.
역주11 平水 : 지금의 절강성 紹興縣 동남쪽 22리에 있는 平水鎭이다. 大木山에서 발원하여 剡江에서 합류하는 平水溪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지금의 平水江이 흐르는 지역이다. 唐나라 光啓 2년(886)에 錢鏐가 諸曁에서 平水까지 산을 뚫어 500리에 걸쳐 길을 냈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역주12 曹娥埭(태) : 지금의 절강성 上虞市의 百官鎭 서쪽 曹娥江의 西岸을 가리킨다. 조아강은 옛날에 柯水 혹은 上虞江이라고도 하였는데 상류에 剡溪가 있으며 錢塘江 하류 가운데 최대 支流이다. 後漢 때 단오날 迎神하다가 익사한 부친의 시신을 찾으며 울부짖던 孝女 曹娥가 빠져 죽은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역주13 豐山 :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동북쪽 조아강 강변에 있는 지명이다.
역주14 台州 : 지금의 절강성 臨海市와 台州市 및 天台, 仙居, 寧海, 象山, 三門, 溫嶺 여섯 縣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天台山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唐나라 天寶 元年(742)에 臨海郡으로 고쳤다가 乾元 元年(758)에 다시 台州로 고쳤다.
역주15 光啓 : 唐 僖宗의 마지막 연호(885~888)이다.
역주16 六合鎭 : 지금의 江蘇省 六合縣에 있던 鎭으로, 隋나라 때 설치하였다. 육합현은 尉氏縣을 고쳐 명명한 것으로 方州의 치소이다. 가까이 있는 六合山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隋나라 大業 초에 江都郡에 속하였다. 唐나라 武德 7년(624)에 그대로 방주의 치소가 되었다가 貞觀 초에 揚州에 속하였다. 南唐은 이곳에 雄州 치소를 두었는데 後周 顯德 연간에 웅주 치소를 옮기면서 그대로 六合縣이 되었다.
역주17 牙將 : 軍中의 中下級 軍官을 가리킨다. 참고로, ≪韻會≫에 “牙는 旗의 이름이니 상아로 깃대를 장식하여 휘장 앞에 세우고 이것을 牙門이라 한다.”라고 하였는바, 군대가 출동할 때 장군이 있는 곳에 牙旗를 세웠던 데서 비롯하여 일을 다스리는 곳을 牙 혹은 衙라 하였다.
역주18 : 사고전서본에는 ‘擁’으로 되어 있다.
역주19 樟亭 : 樟亭驛으로, 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남쪽 白塔嶺 아래 錢塘江 가에 있는 驛이다. 唐나라 때 이곳에 驛을 두고 강물을 조망하는 장소로 삼았다. 浙江亭이라고도 하는데 明나라 초에 浙江驛으로 고쳐 명명하였다.
역주20 寶病卒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新唐書≫ 〈本紀〉에는 ‘錢鏐가 周寶를 죽였다.’로 되어 있고, 〈周寶傳〉에는 ‘전류가 櫜鞬을 갖추어 주보를 맞이하여 樟亭에 머물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였다.’로 되어 있다. 〈本紀〉는 文忠公의 손에서 나왔거니와 朱子가 歐陽公의 文集의 異同을 상고한 〈修唐書〉라는 한 조목에서, ‘李氏 所藏本의 이 단락에 같지 않은 부분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맨앞에서 公이 唐書를 編修할 때 제일 뒤에 史局에 합류하여 오로지 本紀와 志만 편수하였을 뿐이고 列傳은 尙書 宋祁가 편수한 것이니 朝廷에서 한 책이 두 사람 손에서 나와 體制가 통일될 수 없다고 여겨서 마침내 공에게 詔命을 내려 열전을 자세히 살펴 刪修하여 통일된 체제가 되게 하였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던바, 열전 역시 공이 확정한 것이니 어찌 도리어 열전만 다르겠는가. ≪資治通鑑≫에는 ≪吳越備史≫(范坰, 林禹 撰)를 따라 ‘주보가 抗州에서 졸하였다.’로 되어 있고, ≪宋史≫ 〈呂夏卿傳〉에는 呂夏卿이 또 譜學에 통달하여 世系의 여러 表를 창시하여 ≪신당서≫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공로가 있다고 하였고, 四朝國史와 宋史의 〈文忠公傳〉, 또 正憲公 吳充이 撰述한 〈行狀〉, 魏公 韓琦가 찬술한 〈墓誌銘〉, 文定公 蘇轍이 찬술한 〈神道碑〉, ≪畵墁錄≫(張舜民 撰)에 魏公이 仁宗을 마주하여 아뢴 말을 실어놓았는데 모두 ‘公이 ≪唐書≫의 紀, 志, 表를 편찬하였다.’로 되어 있으니 필시 여하경이 創始하고서 공에게서 받아 이룬 것일 것이다. 그러하니 表 역시 공이 편수한 것이다.[按新唐書本紀作鏐殺周寶 寶傳作鏐具櫜鞬迎寶舍樟亭未幾殺之 本紀自出文忠公手 而朱子攷公集異同修唐書一條曰 李本此段 不同者三 一則首云公於修唐書最後至局 專修紀志而已 列傳則宋尙書祁所修也 朝廷以一書出於兩手 體不能一 遂詔公看詳列傳 令刪修爲一體 傳亦公所定也 何乃自異 通鑑從吳越備史作寶卒于抗州 宋史呂夏卿傳 夏卿又通譜學 創爲世系諸表 于新唐書最有功 而四朝國史及宋史文忠公傳 又吳正憲公充所撰行狀韓魏公琦所撰墓誌銘蘇文定公轍所撰神道碑畵墁錄載魏公對仁宗語 皆作公撰唐書紀志表 必夏卿創始而受成于公也 則表亦公修]”로 되어 있다.
역주21 孫儒 : ?~892. 河南 蔡州 사람으로, 唐나라 말엽의 軍閥이다. 보유한 군대가 強盛하였고 사람됨이 殘暴하였는데 江淮 지방에서 횡행하였다. 처음에 蔡州節度使 秦宗權의 휘하 都將이었는데 진종권이 朱全忠과 싸울 때 급히 그를 불렀는데 진종권의 동생 秦宗衡을 죽이고 주전충에게 歸順하였다. 唐 昭宗이 淮南節度使로 임명하였는데 景福 元年(892)에 廬州刺史 楊行密과의 싸움에서 죽임을 당했다.
역주22 1) 景福 : 唐 昭宗의 네 번째 연호(892~893)이다.
역주23 2) 骰(투)子 : 주사위로, 占卜을 치거나 벌주를 먹일 때 혹은 遊戲할 때 사용한다. 대체로 짐승의 뼈로 만드는데 육면체 모양에 1부터 6까지 점을 새기고 네 면에는 붉은색을 칠하고 나머지 두 면에는 검은색을 칠한다. 던져서 나온 점의 숫자나 색깔로 승부를 겨루므로 投子, 色子라고도 한다. 전하기로는 三國 시대 魏나라 曹植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역주24 符瑞 : 祥瑞로운 徵兆로, 대체로 帝王이 천명을 받은 징조를 가리킨다.
역주25 改元順天 : ≪舊五代史≫ 卷133에는 ‘年號를 大聖으로 하였다.[年號大聖]’로 되어 있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改元은〉 僭元이라고 해야 마땅하다.[按宜曰僭元]”로 되어 있다. 참고로, 僭元은 分義를 넘어 年號를 僭稱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26 : 사고전서본에는 ‘諫’으로 되어 있다.
역주27 (圖)[圊] : 저본에는 ‘圖’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圊’으로 바로잡았다. 참고로 사고전서본에는 ‘溷’으로 되어 있다. ‘圊’과 ‘溷’은 모두 廁間의 뜻이 있다.
역주28 昌乃以書告鏐……鏐乃還兵 : ≪新五代史≫ 卷22 〈考證〉에 “살펴보건대, ≪資治通鑑≫에 ‘錢鏐가 서신을 보내 董昌을 질책하였는데 동창이 듣지 않았다. 이에 군대 3만을 거느리고 越州城 아래에 이르니 동창이 두려워 주모자를 잡아 전류에게 보내고 待罪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전류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동창의 반란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또 表奏하여 本道의 군대로 동창을 토벌하기를 청하니 5월에 詔命을 내려 동창의 官爵을 削奪하고 전류에게 맡겨 토벌하도록 하면서 전류를 浙東招討使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내용에 근거하면 전류가 군대 3만을 거느리고 월주성에 이른 일은 아직 동창의 반란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기 전이고, 조명을 내려 동창의 관작을 삭탈하고 전류를 절동초토사로 삼은 일은 또 전류가 표주하여 동창을 토벌하기를 청한 뒤이니 本紀의 내용과 다르다.[按通鑑載鏐移書責昌 昌不聽 乃將兵三萬詣越州城下 昌懼 執首謀者送鏐 請待罪 鏐引兵還 以狀聞 又表請以本道兵討昌 五月詔削董昌官爵 委錢鏐討之 以鏐爲浙東招討使 據此則鏐以兵三萬詣越州城 尙在未以狀聞之先 而詔削昌官爵 以鏐爲招討使 又在鏐表請討昌之後 與本紀異]”라고 하였다. 迎恩門은 浙江省 紹興市 古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문으로 西郭門이라고도 한다. 水陸 兩用의 城門으로 옛날 朝庭에서 관리를 임명할 때나 皇帝가 親臨할 때 반드시 이 문을 지나기 때문에 영은문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하기로는 越王 勾踐이 영은문 밖에 箭樓를 세우고 그 전루 위에서 臥薪嘗膽하였다고 한다.
역주29 西小江 : 錢淸江으로, 지금의 浙江省 蕭山市 동남과 紹興市 서북에 있다.
역주30 鐵券 : 옛날에 임금이 공신에게 내려 주어 免罪 등의 특권을 누리게 한 증명서를 말하는데, 鐵製의 契券에 丹砂로 썼으므로 보통 丹砂契券이라고 한다.
역주31 凌烟閣 : 唐 太宗 때 長安에 세운, 당나라 공신들의 화상을 보관하던 누각 이름이다. 처음에는 房玄齡, 杜如晦, 長孫無忌, 魏徵 등을 위시한 24명의 공신 畫像을 걸어 두었다.(≪大唐新語≫ 〈褒錫〉) 漢나라 때 麒麟閣과 더불어 功臣閣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로 쓰인다.
역주32 鏐子傳瑛 : 878~913. 본명은 傳鍇로, 傳瑛은 뒤에 고친 이름이다. 錢鏐의 셋째 아들로, 모친은 莊穆夫人 吳氏이다. 文穆王 錢元瓘의 형이고 동복 형제로 錢傳璟, 錢元璙, 錢傳璛, 錢元琳이 있다. 그는 騎射에 뛰어났고 草書와 隷書를 잘 썼다. 武勇都의 반란 때 杭州를 수비하는 데 공을 세워 兩浙副大使를 맡았다. 뒤에 後梁의 朱友貞이 조서를 내려 그를 壽昌公主의 駙馬都尉로 간택하여 大同軍節度使가 되고 霅國公에 봉해졌다. 913년 9월에 錢傳璙, 錢傳瓘을 거느리고 常州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여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太尉에 추증되었다.
역주33 其將馬綽 : ≪二十二史考異≫ 권66에 “≪資治通鑑≫의 注에 路振의 ≪九國志≫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馬綽은 餘杭 사람이다. 젊어서 錢鏐와 함께 董昌을 섬겼는데 여동생을 전류의 아내로 보냈다. 전류는 다시 鏐元瓘에게 마작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라고 하고 또 薛居正의 ≪舊五代史≫를 인용하여 ‘梁나라 貞明 4年에 秦州節度使 檢校太傅 同平章事 마작에게 檢校太尉를 더하였다.’라고 하였다. 살펴보면 秦州는 吳나라의 관할 안에 있지 않으니 대체로 官銜만 제수하고 부임하지 않은 것이다.[通鑑注引路振九國志云 馬綽 餘杭人 少與錢鏐俱事董昌 以女弟妻鏐 鏐復爲元瓘娶綽女 又引薛史梁貞明四年 秦州節度使檢校太傅同平章事馬綽加檢校太尉 考秦州不在吳管內 蓋遙授也]”라고 하였다.
역주34 成及代鏐與綰戰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吳世家〉에는 乾寧 2년(895)에 蘇州에 주둔하여 그 刺史 成及을 사로잡았다고 하였으니 天復 2년(902)에 어떻게 吳越에 다시 성급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서술을 빠뜨리고 歸結處를 빼놓아서일 것이다. 이 책의 節刪한 부분에서 整合하지 못한 것이 매양 이렇다.[按吳世家 乾寧二年 次蘇州 擒其刺史成及矣 天復二年 安得吳越復有及 蓋脫敍遺歸 此書之節刪失當 每如此]”로 되어 있다.
역주35 孫仲謀 : 三國 시대 吳나라 孫權으로, 仲謀는 그의 字이다. 부친인 長沙太守 孫堅과 형인 討逆將軍 孫策의 뒤를 이어 오나라 땅을 다스렸는데, 曹操의 대군이 침입했을 때 赤壁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 뒤에 吳王으로 봉해졌으며, 魏王과 蜀主가 차례로 황제를 칭하자 자신도 黃龍 1년(229)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諡號는 大皇帝이다.
역주36 江西危全諷等 爲楊渥所敗 : 楊渥(886~908)은 字가 奉天으로, 五代十國 시기 吳나라 太祖 楊行密의 맏아들이다. 양행밀이 재위할 때 牙內諸軍使를 맡았고 양행밀의 晩年에 宣州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양행밀이 병으로 죽자 즉위하였는데 정사를 소홀히 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여 張顥, 徐溫이 누차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907년에 장호, 서온이 兵變을 일으켜 軍政을 장악한 뒤 시해당하였다. 이후 그의 아우 楊隆演(897~920)이 뒤를 이었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鍾傳傳〉, 〈吳世家〉에는 開平 3년(909)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開平 元年(907)에 서술하였고 또 그 당시는 양융연이 다스리던 때이니 여기서 楊渥으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착오이다.[按鍾傳傳吳世家在開平三年 此敍元年 又其時爲隆演 此作渥皆誤]”라고 하였다.
역주37 開平 : 後梁 太祖 朱全忠의 開國 연호(907~911)이다.
역주38 楊渥將周本陳章圍蘇州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吳世家〉, 〈十國年譜〉에는 楊渥이 天祐 5년(908) 5월에 被殺되고 楊隆演이 즉위한 것이 바로 開平 2년(908)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開平 3년(909)에 楊渥을 일컬은 것은 착오이다.[按吳世家十國年譜 渥天祐五年五月被殺 隆演立卽開平二年 此三年稱渥誤]”라고 하였다.
역주39 三節 : 鎭海, 鎭東, 鎭南 3軍의 절도사가 된 것을 이른다.
역주40 斗牛 : ≪新五代史≫에는 ‘牛斗’로 되어 있다.
역주41 乾化 : 後梁 太祖의 마지막 연호(911~915)이다.
역주42 生祠 : 善政이나 功勞를 찬양하기 위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세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가리킨다.
역주43 開府置官屬 : 開府는 높은 품계의 관원, 이를테면 三公, 大將軍, 將軍 등이 府署를 만드는 것으로 僚屬들을 선발해 둘 수 있다.
역주44 楊隆演 : 897~920. 字는 鴻源, 初名은 楊瀛,다른 이름은 楊渭로, 吳 太祖 楊行密의 둘째 아들이고 吳 烈祖 楊渥의 동생이다. 908년에 徐溫, 張顥가 楊渥을 시해한 뒤 그를 옹립하였다. 919년에 吳王에 즉위하고 武義로 改元하였다. 920년에 徐溫의 전횡에 시달리며 울울하게 죽었다. 이후 아우 楊溥가 자리를 이어 稱帝하였다.
역주45 (虐)[虔] : 저본에는 ‘虐’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와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虔’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6 玉冊 : 帝王이나 后妃에게 尊號를 올릴 때 그 덕을 기리는 글을 새긴 옥 조각을 엮어 매어 책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역주47 郭崇韜 : 後唐 莊宗 李存勖 정권에서 樞密使로 있으면서 專權을 휘두르면서 뒤에 前蜀을 멸망시키는 戰功까지 세웠으나, 그곳에서의 행실이 문제가 되어 환관 向延嗣, 莊宗의 妃 劉皇后, 莊宗의 아들 李繼岌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그의 死後 明宗이 즉위하면서 安重誨가 樞密使가 되어 다시 專權을 휘둘렀다.
역주48 尤爲不可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彭注本에는 ‘尤’ 뒤에 ‘以’字가 있다.[按彭注本尤下有以字]”로 되어 있다.
역주49 明宗初卽位……以太師致仕 : 舞蹈는 신하가 손을 휘젓고 발을 구르며 임금을 朝見할 때의 禮節을 가리킨다.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安重誨傳〉의 내용과 중복된다.[按複重誨傳]”로 되어 있다.
역주50 長興 : 後唐 明宗의 마지막 연호(930~933)이다.
역주51 百年之際 : ≪新五代史≫ 卷67의 徐無黨의 註釋에는 “錢鏐의 世系의 興亡은 여러 史書가 모두 같으니 대체로 唐나라 乾寧 2년(895)에 鎭海鎭東軍節度使가 되어 兩浙을 모두 소유하고부터 宋나라 太平興國 3년(978)에 국가가 사라지기까지 모두 84년이다.[鏐世興滅 諸書皆同 蓋自唐乾寧二年爲鎭海鎭東軍節度使兼有兩浙 至皇朝太平興國三年國除 凡八十四年]”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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