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伏見
에 請稱皇伯
하고 中書之議以謂事體至大
하니 理宜愼重
하야 必合典故
라야 方可施行
이어늘
方欲下三省百官하야 博訪群議하야 以求其當하니 陛下屈意하야 手詔中罷하되
謹按儀禮喪服記에 曰 爲人後者는 爲其父母報라하니
又按
國朝五服年月喪服令
에 皆云 爲人後者
는 爲其所生父
하야 齊衰
라하니
蓋以恩莫重於所生이라 故父母之名은 不可改요 義莫重於所繼라 故寧抑而降其服하니
此聖人所制之禮著之六經以爲萬世法者니 是中書之議所據依也라
若所謂稱皇伯者
는 考於六經無之
하고 方今國朝見行典禮及律令皆無之
하고 自三代之後秦漢以來諸帝由
入繼大統者 亦皆無之
하니 可謂無稽之臆說矣
라
夫儀禮者는 聖人六經之文이요 開元禮者는 有唐三百年所用之禮요 開寶通禮者는 聖宋百年所用之禮요
五服年月及喪服令은 亦皆祖宗累朝所定이요 方今天下共行之制어늘 今議者皆棄而不用하고 直欲自用無稽之臆說하니 此所以不可施行也라
故自古聖王이 逢災恐懼하야 多求闕政而修之하야 或自知過失而改悔之하야 庶幾以塞天譴이나
今者濮王之議는 本因兩制禮官이 違經棄禮하고 用其無稽之臆說하야 欲定皇伯之稱이라
中書疑其未可施行하야 乃考古今典禮하야 雖有明據라도 亦未敢自信而自專일새
方更求下外廷博議러니 而陛下遽詔中罷하고 欲使有司徐求典禮하니
君臣不敢輕議妄擧어늘 而天遽譴怒하야 殺人害物하니 此臣所謂厚誣天也요
議猶未決이어늘 仍罷不議하고 而便謂兩統二父以致天災者는 厚誣人也라
臣謹按漢書에 宣帝父曰悼皇考이니 初稱親하고 諡曰悼라하고 置奉邑寢園而已라가
皇考者는 親之異名爾라 皆子稱其父之名也니 漢儒初不以爲非也라
自元帝以後로 貢禹韋玄成等이 始建毁廟之議하야 數十年間에 毁立不一하야
至哀帝時하야 大司徒平晏等百四十七人奏議하야 云親諡曰悼라하고 裁置奉邑은 皆應經義니 是不非라하니 宣帝稱史皇孫爲親也라
所謂應經義者는 卽儀禮云 爲人後者는 爲其父母報가 是也라
惟其立廟京師하야 亂漢祖宗昭穆이라 故晏等以謂兩統二父는 非禮니 宜毁也라하니라
至其後立廟京師하야 欲去定陶하고 不繫以國하야 有進干漢統之漸하야 丹遂大非之라
故丹議云 定陶恭皇諡號는 已前定議하니 不得復改라하고 而但論立廟京師爲不可爾라
然則稱親置園은 皆漢儒所許以爲應經義者요 惟去其國號立廟京師는 則不可爾어늘
今言事者가 不究朝廷本議何事하고 不尋漢臣所非者何事하니 此臣故謂不原本末也라
中書之議는 本謂稱皇伯無稽요 而禮經有不改父名之義하니
而言事者便引漢去定陶國號立廟京師之事하야 厚誣朝廷하야 以爲干亂大統이라하니
夫去國號而立廟京師하여 以亂祖宗昭穆은 此誠可非之事니
若果爲此議면 宜乎指臣等爲姦邪之臣이요 而人主有過擧之失矣어니와
其如陛下之意가 未嘗及此하고 而中書亦初無此議어늘
而外庭之臣이 又不審知朝廷本議如何하고 但見言事者云云하야
而言事者欲必遂其皇伯無稽之說하야 牽引天災하야 恐迫人主하고 而中書守經執禮之議를 反指以爲姦邪之言하되
朝廷以言事之臣은 禮當優容이라하여 不欲與之爭辨하고 而外庭群論은 又不可家至而戶曉하니 是非之禮不辨하고 上下之情不通이라
夫爲人後者는 旣以所後爲父矣어늘 而聖人又存其所生父名者는 非曲爲之意也라
蓋自有天地以來로 未有無父而生之子也니 旣有父而生이면 則不可諱其所生矣라
此聖人所以不諱無子者立人之子以爲後하고 亦不諱爲人後者有父而生이니 蓋不欺天不誣人也라
故爲人後者
가 承其宗之重
하고 任其子之事
하야 而不得復歸於
하며 其所生父母
도 亦不得往與其事
하고 하되
惟其父母之名不易者는 理不可易也니 易之則欺天而誣人矣라
子爲父母服
을 謂之正服
이요 出爲人後者爲本生父母
을 謂之義服
이니
今若以本生父爲皇伯이면 則濮安懿王爲從祖父하야 反爲小功하고 而濮王夫人은 是本生嫡母也어늘 反爲義服하고 自宗懿以下本生兄弟는 於禮雖降이라도 猶爲大功이니 是禮之齊衰期어늘 今反爲小功이요 禮之正服이 今反爲義服이라
上於濮王父也에 反服小功하고 於宗懿等兄弟也에 反服大功하니
此自古所以不稱所生父爲伯父叔父者니 稱之則禮制乖違하고 人倫錯亂이 如此也라
今衆人之議如彼하고 中書之議如此하니 必將從衆乎인댄 則衆議不見其可하고 欲違衆乎인댄 則自古爲國이 未有違衆而能擧事者하니
願陛下霈然下詔하야 明告中外하되 以皇伯無稽라 決不可稱이요
而今所欲定者正名號爾니 至於立廟京師干亂統紀之事하얀 皆非朝廷本議라하면 庶幾群疑可釋이라
若知如此而猶以謂必稱皇伯이면 則雖孔孟復生이라도 不能復爲之辨矣라
予按濮議所請稱親置園立廟하야 濮王之子若孫이 世守其祀는 本出於天下萬世之公이요 而非有悖於典禮者니
至於本朝
하야도 大略與此相同
하니 盖亦天理人情之不容已者
라
張桂首議할새 時予方以髫年侍先輩間이러니 先輩每語及에 輒爲怒而裂眦라
然呂范諸公이 始以議禮被譴이라가 已而復起어늘 張桂用事後에 而議禮諸臣은 錮且没齒矣니
06.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전례典禮를 논의하는 차자箚子
송宋나라 사람들은 모두 구양공歐陽公의 건의를 그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經에 의거하여 논변한 곳은 실로 정밀하다.
신은 삼가 보건대 조정이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전례典禮를 논의함에 있어서 양제兩制와 예관禮官은 황백皇伯이라 일컫고, 중서성中書省의 의논에서는 “사체事體가 지극히 크니 이치상 신중히 해서 반드시 전고典故에 합치해야 비로소 시행할 수 있다.” 합니다.
한데 황백이란 칭호는 경전과 사서史書에 고찰해봐도 모두 근거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삼성三省의 백관百官에게 이 문제를 하달하여 널리 묻고 중론을 모아서 지당한 의논을 찾고자 하였지만, 폐하께서 뜻을 굽혀 손수 쓰신 조서를 내려 의논을 그만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론은 떠들썩하여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중론이 비록 많으나 주장하는 설은 세 가지에 불과합니다.
첫째 ‘황백이란 칭호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억설이고,
둘째 ‘종묘에 소홀하여 수재를 초래했다.’는 것은 하늘과 사람을 터무니없이 무함하는 말이고,
셋째 ‘한漢 선제宣帝와 애제哀帝의 고사를 본보기로 삼아서 통기統紀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은 본말을 미루어 살피지 못한 주장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상복기喪服記〉에 “남의 후사後嗣가 된 이는 그 부모를 위해 보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보답한다는 것은 자최기년복齊衰朞年服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복降服이라 한 것은 복服은 낮출 수 있고 부모의 이름은 바꿀 수 없음을 밝힌 것입니다.
또 살펴보건대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개보통례開寶通禮》에 실린 국조國朝 오복五服의 연월年月 및 상복喪服에 관한 영令에 지금 모두 “남의 후사가 된 이는 그 소생부所生父를 위해 자최부장기齊衰不杖朞를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는 소생所生보다 중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이름은 바꿀 수 없고, 의리는 소계所繼보다 중한 것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억눌러 그 복服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聖人이 제정한 예禮로 육경六經에 드러나 만세의 법이 되는 것이니, 바로 중서성中書省의 주장에 의거한 바입니다.
이른바 황백皇伯이라는 칭호는 육경을 살펴보아도 없고, 지금 국조에 현행하는 전례典禮 및 율령律令에도 모두 없으며, 삼대三代 이후 진秦‧한漢 이래 제왕으로서 번저藩邸로부터 대궐에 들어가 대통을 이은 이들 중에도 모두 없으니, 황당무계한 억설이라 할 만합니다.
대저 《의례》란 성인의 손을 거친 육경의 글이고, 《대당개원례》란 당唐나라 300년 동안 쓰인 예禮이고, 《개보통례》는 우리 송宋나라 100년 동안 쓰인 예禮입니다.
오복五服의 연월 및 상복에 관한 영令은 모두 우리 조종祖宗에서 누대에 걸쳐 제정된 것이고 지금 천하에 두루 행해지는 제도인데, 지금 의논하는 이들이 모두 이것을 버리고 쓰지 않고서 곧바로 황당무계한 억설을 스스로 쓰고자 하니, 이것이 시행해서는 안 되는 까닭입니다.
둘째 “종묘에 소홀하여 수재를 초래했다.”는 것에 대해 아룁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리는 것은 모두 사람이 한 일을 위주로 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왕聖王들이 재이를 만나면 두려워하여 대개 잘못된 정치가 있는지 찾아서 바로잡고, 혹 과실을 스스로 알아 고치고 뉘우쳐 거의 하늘을 견책에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사람이 한 일이 아래에 이미 드러나야만 하늘의 견책이 위에 나타나는 법입니다.
지금 복왕濮王에 관한 의논은 본래 양제兩制와 예관禮官이 경전과 예禮를 버리고 황당무계한 억설을 주장하여 황백皇伯이란 칭호를 정하고자 한 데서 생긴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시행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의심하여 고금의 전례典禮를 고찰하여 비록 분명한 증거가 있어도 감히 자신하여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다시 이 문제를 외정外廷에 하달하여 널리 중론을 모으기를 청하였는데, 폐하께서 갑자기 조서를 내려 중도에 그만두게 하시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천천히 전례典禮를 찾아보게 하셨습니다.
이렇고 보면 신하의 신중하기가 이와 같고, 임금의 겸외謙畏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감히 경솔히 의논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거늘 “하늘이 갑자기 노해 견책을 내려 사람을 죽이고 생물을 해쳤다.”는 주장을 펴니, 이것이 신이 말한 “하늘을 터무니없이 무함했다.” 하는 것입니다.
의논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늘 그대로 두고 의논하지 않고서 곧 “계통을 둘로 나누고 아버지를 둘로 만들어서 하늘의 재이를 초래했다.”는 주장을 펴니, 이것이 신이 말한 “사람을 터무니없이 무함했다.”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한漢 선제宣帝와 애제哀帝의 고사를 인용한 것에 대해 아룁니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漢書》에 선제의 부친은 도황고悼皇考인데 처음에는 ‘친親’이라 일컫다가 시호를 ‘도悼’라 하고, 봉읍奉邑과 침원寢園을 두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친親’을 ‘황고皇考’로 고치고 경사京師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황고皇考’란 ‘친親’의 이칭일 뿐으로 모두 자식이 그 아버지를 일컫는 명칭이니, 한漢나라 학자들이 애초에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제元帝 이후로 공우貢禹와 위현성韋玄成 등이 비로소 사당을 헐자는 주장을 하여 수십 년 동안 사당을 헐었다 세웠다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애제 때에 이르러 대사도大司徒 평안平晏 등 147인이 아뢰기를 “부친의 시호를 도悼라 하고 봉읍을 둔 것은 모두 경전의 뜻에 맞으니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하였으니, 선제는 사황손史皇孫을 부친으로 부른 것입니다.
이른바 경전의 뜻에 맞다는 것은 바로 《의례儀禮》에서 말한 “남의 후사가 된 이는 그 부모를 위해 보답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만 경사에 사당을 세워 한漢나라 조종祖宗의 소목昭穆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평안 등이 “계통을 둘로 나누고 아버지를 둘로 만든 것은 예禮가 아니니, 사당을 헐어야 한다.” 하였던 것입니다.
정도공왕定陶恭王은 처음에는 단지 공황共皇이란 칭호로만 부르고 본국에 사당을 세웠던 터라 사단師丹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 경사京師에 사당을 세우고 ‘정도定陶’란 호칭을 없애 제후국諸侯國에 매어두지 않고자 하여 한漢나라 왕통을 침범하는 조짐이 있음에 이르러 사단이 드디어 매우 그르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주장하기를 “공도정왕의 시호는 이미 의논이 정해졌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하고 단지 경사에 사당을 세운 것이 불가하다는 것만 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친이라 일컫고 원침園寢을 둔 것은 한나라 학자들이 인정하여 경전의 뜻에 맞다고 한 것이고, 오직 제후국의 국호를 떼어버리고 경사에 사당을 세운 것만 불가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언사言事하는 이들은 조정의 본래 의논이 무엇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한나라 신하들이 그르다 한 것이 무엇인지도 찾아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신이 “본말을 미루어 살피지 못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중서성中書省의 의논은 본래 ‘황백皇伯이란 호칭을 쓰는 것은 황당무계한 것이고, 《예경禮經》에도 부모의 이름은 바꾸지 않는 의리가 있다.
지금 명호名號를 의논하는 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생각한 것이므로, 존숭하는 예禮는 모두 미쳐 논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사하는 이들은 대뜸 한漢나라 때 ‘정도定陶’란 국호國號를 없애고 경사에 사당을 세운 일을 끌어와서, 조정을 터무니없이 무함하여 “대통大統을 침범해 어지럽힌다.”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토록 과격한 의논을 주장한단 말입니까.
대저 국호를 없애고 경사에 사당을 세워서 조종祖宗의 소목昭穆을 어지럽힌 것은 참으로 그르다고 할 만한 일입니다.
만약 과연 이런 의논을 주장했다면 마땅히 신 등을 지목해 간사한 신하라 하고 임금을 지목해 지나친 일을 한 잘못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폐하의 뜻이 결코 이런 데 미친 적이 없고 중서성中書省에서도 애초에 이런 의논이 없었습니다.
그렇거늘 언사하는 이들은 본말을 깊이 살피지 않고 한漢나라 때의 잘못이라 할 만한 일을 지나치게 끌어다가 자기 주장으로 삼았고,
외정外廷의 신하들은 또 조정의 본래 의논이 어떤 것인지 잘 살피지도 않고 그저 언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 보고서
드디어 “그릇된 예禮를 가하여 통기統紀를 어지럽히는 것이 참으로 사실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뭇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분분한 주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사하는 이들은 황백皇伯이란 호칭을 써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설을 기필코 관철하고자 하여 하늘의 재이를 억지고 끌어다가 임금을 협박하였고, 경전의 뜻과 예禮를 지키려는 중서성의 주장을 도리어 간사한 말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언사하는 신하는 예의상 너그러이 용납해야 한다.” 하여 그들과 쟁변爭辨하려 하지 않고, 외정外廷의 중론은 또 가가호호 일일이 찾아가 알아듣게 설명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시비是非의 예禮가 가려지지 않고 상하上下의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이 계속해 말하여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대저 남의 후사가 된 이는 이미 소후부所後父로 부친을 삼았거늘, 성인聖人이 또 소생부所生父의 이름을 그대로 두신 것은 일부러 마음을 써주신 게 아닙니다.
대개 천지가 있은 이래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이 없으니, 이미 아버지가 있어서 태어났고 보면 소생所生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아들이 없는 사람은 종자宗子를 후사로 삼을 수 있으니, 이는 예禮에서 허락한 바입니다.
그러나 어찌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들을 얻어서 후사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인이 아들 없는 사람이 남의 아들을 세워서 후사로 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또한 남의 후사가 된 사람도 아버지가 있어 태어났음을 숨기지 않으신 까닭이니, 하늘을 속이지 않고 사람을 속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은 그 종통宗統의 중重함을 이어받고 그 아들의 일을 맡아 다시 본종本宗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 소생부모도 친아들에게 가서 일에 간여하지 못하며, 상복에 이르러서는 낮추고 억제해 일체 의리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라는 명칭만은 바꾸지 않는 것은 이치상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니, 바꾸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복을 입는 것을 정복正服이라 하고, 나가서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 본생부모本生父母를 위해 자최기년복齊衰朞年服을 입는 것을 강복降服이라 하고, 또 소후부모所後父母를 위해 참최삼년斬衰三年을 입는 것을 의복義服이라 합니다.
지금 만약 본생부本生父를 황백皇伯이라 한다면 복안의왕濮安懿王은 종조부從祖父가 되어 도리어 소공小功에 해당하고, 복왕의 부인은 본생 적모嫡母이거늘 도리어 의복義服에 해당하고, 종의宗懿 이하 본생형제들은 예禮에 있어서는 비록 강복降服해야 하지만 오히려 대공大功에 해당하니, 이는 예禮로는 자최기년복이 지금 도리어 소공이 되고, 예로는 정복正服이 지금은 도리어 의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로 복왕인 부친에게는 도리어 소공을 입고, 종의宗懿 등 형제에게는 도리어 대공을 입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로부터 소생부를 백부, 숙부란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이니, 그렇게 부르면 예제禮制가 어긋나고 인륜이 어지러워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셔서 모든 이치를 환히 알지 못함이 없으십니다.
지금 뭇사람들의 의논이 저와 같고 중서성中書省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굳이 뭇사람들의 뜻을 따르고자 하신다면 뭇사람들의 의논은 아무래도 옳지 못하고, 뭇사람들의 뜻을 어기고자 하신다면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림에 뭇사람의 뜻을 어기고서 일을 잘할 수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시원스레 조서를 내려 중외에 분명히 알리되 “황백皇伯은 근거 없는 것이라 결코 호칭으로 삼을 수 없다.
지금 결정하고자 하는 것은 명호名號를 바로잡는 것일 뿐, 경사에 사당을 세워 왕통王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모두 조정의 본래 의논이 아니다.” 하시면 아마도 사람들의 의심이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반드시 황백이란 호칭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께서 다시 살아나셔도 더 이상 변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茅坤)는 살펴보건대 복의濮議에서 부친이라 부르고 원침園寢을 두고 사당을 세워 복왕濮王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제사를 지키게 하기를 청한 것은 본래 천하 만세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고 전례典禮에 어긋난 것이 있지 않다.
단지 당시 대간인 여회呂誨, 범진范鎭 등이 과격했기 때문에 의논이 분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조本朝(明나라)의 흥헌왕興獻王의 일에 이르러서도 대략 이 일과 같으니, 대개 천리天理와 인정상 마지못한 것이었다.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이 처음 발론發論할 때 당시 나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로 선배들을 모시고 있었는데, 선배들은 이 일을 언급할 때마다 노하여 눈을 크게 부릅뜨곤 하였다.
그리고 《대례혹문大禮或問》을 읽다가 망연자실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경우 여회, 범진 등이 처음에는 예禮를 의논한 문제로 견책을 받았으나 이윽고 다시 기용된 데 비해, 본조의 경우는 장총張璁과 계악桂萼 등이 권력을 잡은 뒤에는 예禮를 의논한 신하들은 금고를 당한 채 여생을 보내고 말았다.
내가 특별히 이 때문에 누차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