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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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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敍事直而多大體
嘉祐元年閏三月己丑 鎭安軍節度使 檢校太師 同中書門下平章事 使持節陳州諸軍事 陳州刺史程公 薨于位
以聞하니 詔輟視朝二日하고 贈公中書令이라
於是 其孤以狀上하니 한대 而博士起曰 法宜諡라하야늘 乃諡曰文簡이라하다
明年十月十八日 한대
其孤又以請于太史어늘 而史臣脩曰 禮宜銘이라하고
乃考次公之世族官封爵號卒葬時日 與其始終之大節하야 合而誌於墓焉하고 且銘之曰
惟程氏 遠有世序
以來 其後居中山者 出於之後
公諱琳이요 字天球
曾祖 贈太師諱新이요 曾祖妣 吳國夫人齊氏 贈太師中書令諱贊明이요 祖妣 秦國夫人吳氏 袁州宜春令 贈太師中書令 兼尙書令 冀國公 諱元甸이요 晉國夫人楚氏
公以大中祥符四年으로 擧服勤辭學高第하야 하고 改著作佐郞 知壽陽縣 祕書丞 監左藏庫하고 天僖中 詔擧辭學履行할새 召試하야 直集賢院하다
是時 契丹所遣使者 數出不遜語生事로되
而主者應對多失辭하니 上患之러라
已而 契丹來賀卽位어늘 乃選公爲接伴使한대 而契丹使者言太后當遣使通書라하야늘
公遽以禮折之하니 乃已하다
史官修眞宗實錄할새 而起居注闕이라 命公修大中祥符八年以後起居注하야 遂修起居注러라
遷祠部員外郞 提擧在京諸司庫務하고 以本官으로 知制誥 同判吏部流內銓하다
天聖五年 館伴契丹賀乾元節使한대 使者言中國使 至契丹하야 坐殿上하야 位次高어늘 而契丹使來 坐次下하야 當陛라하야 語甚切不已어늘 而上與大臣 皆以爲小故不足爭이라하야 將許之러니
公以謂許其小 必啓其大라하야 力爭以爲不可하니 遂止하다
河決滑州 初議者言可塞이러니 役旣作而後 議者以爲不可라하야늘
乃命公往視之한대 公言可塞이라하야 遂塞之하다
歲中 遷右諫議大夫 權御史中丞하고 明年拜樞密直學士 知益州러니
蜀人輕而喜亂이어늘 公常先制於無事하고 至其臨時하야 如不用意 而略其細하고 治其大且甚者不過一二하니 而蜀人安之하고 自寮吏皆不能窺其所爲러라
正月 俗放燈이라 吏民夜會聚하야 遨嬉盛天下
公先戒吏爲火備하야 有失火者어든 使隨救之하고 勿白以動衆이러니 旣而大宴할새 城中火어늘 吏救止하야 卒宴하되 民皆不知하니 蓋其他設施 多類此러라
軍士見監軍하야 告其軍有變이라 監軍入白이어늘 公笑遣之하니 惶恐不敢去
公曰 軍中動靜 吾自知之하니 苟有謀者 不待告也
可使告者來라한대
監軍去而告者卒不敢來하고 公亦不問하야 遂止러라
蜀州妖人有自號李氷神子者 署官屬吏卒하야 聚徒百餘人이어늘 公命捕하야 置之法한대
而讒之朝者 言公妄殺人하니 蜀人恐且亂矣라하야늘
上遣中貴人馳視之하니 使者入其境 居人行旅 爭道公善이라
使者問殺妖人事하니 其父老皆曰 殺一人 可使蜀數十年無事라하야늘
使者問其故하니 對曰 前亂蜀者 非有智謀豪傑之才 乃里閭無賴小人爾
惟不制其始하야 遂至於亂也라하다
使者視蜀旣無事하고 又得父老語하야 還白하니 於是 上益以公爲能하야 遷給事中 知開封府하다
宦者治獄하야하야 已誣伏而下府
命公具獄한대 公立辨其非로되 禁中不得入이라
乃命工圖火所經하니 而後宮人多하야 所居隘하고 其烓竈近版壁하야 歲久燥而焚이라
曰 此豈一日火哉아하고 乃建言此殆天災也 不宜以罪人이라하니 上爲緩其獄이라
故卒得無死者러라
公在府 決事神速이라 一歲中 獄常空者四五
遷工部侍郞 龍圖閣直學士 守御史中丞하다
是歲 以翰林侍讀學士 復知開封府하고 明年爲三司使하야 治財賦할새 知本末하야 出入有節하야 雖一金不可妄取러라
累遷吏部侍郞하고 景祐四年 以本官으로 參知政事러니
言日食明年正旦하리니 請移閏月以避之라한대 公以謂天有所譴이면 非移閏可免이라 惟修德政而已라하니 乃止하다
러니 已而上悔悟하야 欲復用之하야 稍徙知어늘
而惡仲淹者復誣以事하니 語入 上怒하야 亟命置之嶺南이러라
自仲淹貶으로 而朋黨之論起하야 朝士牽連하야 出語及仲淹이면 皆指爲黨人이로되 公獨爲上開説하야 明其誣枉하야 上意解而後已러라
公爲人剛決明敏하야 多識故事하고 議論慨然이라
及知政事하야 益奮勵하야 無所回避하야 宰相有所欲私하면 輒以語折之하니 至今人往往能道其語로되
而小人僥倖多不得志하야 遂共以事中之하야 坐貶 知潁州
已而 上思之하야 徙知靑州하고 又徙라가 居一歲間 遷戶部吏部二侍郞 尙書左丞 資政殿學士하다
北京建할새 與宦者皇甫繼明으로 爭治行宮事하야 章交上이라
上遣一御史하야 視其曲直하니 御史直公이라 遂罷繼明하다
是時 繼明方信用하야 其勢傾動中外
自朝廷大臣으로 莫不屈意下之어늘 而公被中傷하야 方起未復하되 而獨與之爭하야 雖小故라도 不少假也
故議者不以公所直爲難하고 而以能不爲繼明屈爲難也
遷工部尙書 資政殿大學士 河北安撫使하다
慶曆六年 拜武昌軍節度使 陝西安撫使 知永興軍府事하고 明年하다
夏人以兵三萬臨界上한대 前三日 하니
以爲有備하야 引去하고 訖公去 不復窺邊이러라
子諒祚立하니 方幼 三大將共治其國이어늘
言事者謂可除其諸將하야 皆以爲節度使하야 使各有其所部하야 以分弱其勢 可遂無西患이라하야 事下公이어늘
公以謂幸人之喪 非所以示大信撫夷狄이라
而諒祚雖幼 君臣和하고 三將無異志하니 雖欲有爲 必無功而反生事
不如因而撫之라하니 上以爲然하다
皇祐元年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復判大名府兼留守하다
自元昊反으로 河西契丹亦犯約求地하야 二邊兵興하야 連歲不解어늘
而公方入與謀議하고 更守西北二方하야 尤知夷狄虛實情僞山川要害
所以行師制勝營陣出入之法 於河北尤詳이라
其奏議頗多하야 雖不能盡用이나 其指劃規爲之際 有可喜也
再居大名하야 前後十年 威惠信於其人하니 人爲立러라
公自罷政事 益不妄與人合하고 亦卒不復用이라
旣徙鎭安하야 上書曰 臣雖老 尙能爲國守邊이라한대 未報而得疾하니 享年六十有九
公累階하고하며 開國廣平郡爵公하야 食戶七千四百이나二千一百이요 賜號推誠保德守正翊戴功臣하다
娶陳氏하니 封衛國夫人이라
子男四人이니 曰嗣隆 太常博士 嗣弼 殿中丞이요 嗣恭 太常博士 嗣先 大理寺丞이라
女五人이니 適職方員外郞榮諲하고 適祕書丞韓縝하고 適都官員外郞晁仲約하고 適大理寺丞吳得하고 適將作監主簿王偁하다
孫三人이니 長曰伯孫이요 次曰公孫이니 皆太常寺太祝이요 次曰昌孫이니 守祕書郞이라
有文集奏議六十卷이라
公平生寡言笑하고 愼於知人이나 旣已知之 久而益篤이라
喜飮酒引滿이라
이나 而與余尤相好也
銘曰
君子之守
志於不奪이라
不學而剛이나
有摧必折이라
毅毅程公
其剛不屈이라
公在政事
有諤其言이라
直雖不容이나
志豈不完이리오
謂公不顯인댄
公位將相이라
豈無謀謨이리오마는
胡不以訪
老于輔藩하니
白首猶壯이라
公雖在外
邦國之光이라
奄其不存하니
士夫曷望
吉卜之從하야
兆此新岡하니
惟其休聲
逾遠彌長이리라
唐荊川曰
此與神道碑二文相比하면 其書不書互見이라


02. 진안군절도사 동중서문하평장사 증중서령 시문간 정공의 묘지명
일을 곧바로 서술하면서도 대체가 많다.
가우嘉祐 원년元年(1056) 윤3월 기축일에 진안군절도사鎭安軍節度使 검교태사檢校太師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사지절진주제군사使持節陳州諸軍事 진주자사陳州刺史 정공程公이 관직에 있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부음訃音을 아뢰니 황제가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할 것을 명하고 공을 중서령中書令에 추증하였다.
이때에 그 상주喪主 사륭嗣隆가장家狀을 올리니 고공사考功司에서 태상시太常寺로 보냈는데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법도로 볼 때 시호諡號를 내려야 마땅하다.”고 논의를 일으키니, 마침내 문간文簡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이듬해 10월 18일에 하남부河南府 이궐伊闕신음향神陰鄕 장류리張留里에 공을 장사 지냈는데
그 상주가 다시 이 일로 태사太史에게 청하자, 사신史臣 는 “예법으로 볼 때 을 지어야 마땅하다.”고 하고,
이에 공의 세족世族, 관봉官封, 작호爵號, 졸하고 장사 지낸 날짜와 그 시종始終대절大節을 차례대로 상고하여 합쳐서 묘지墓誌를 짓고 또 그 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정씨程氏는 멀리 세계世系가 있다.
중려重黎 이래로 뒤에 중산中山에 살던 자들은 안향후安鄕侯 에게서 나온 후손들이다.
공은 이고 천구天球중산中山 박야博野 사람이다.
증조부는 태사太師에 추증된 이고 증조모는 오국부인吳國夫人 제씨齊氏이며, 조부는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에 추증된 찬명贊明이고 조모는 진국부인秦國夫人 오씨吳氏이며, 부친은 원주袁州 의춘령宜春令으로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겸상서령兼尙書令 기국공冀國公에 추증된 원전元甸이고 모친은 진국부인晉國夫人 초씨楚氏이다.
공은 대중상부大中祥符 4년(1012)에 복근사학과服勤辭學科에 높은 등수로 급제하여 태령군절도장서기泰寧軍節度掌書記가 되었고, 저작좌랑著作佐郞 지수양현知壽陽縣 비서승祕書丞 감좌장고監左藏庫로 바뀌었고, 천희天僖 연간에 조명詔命으로 사학리행과辭學履行科를 치를 적에 불려가 시험을 보아 직집현원直集賢院이 되었다.
지금 천자天子께서 즉위하시자 태상박사太常博士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으로 옮겼다.
이때에 거란이 파견한 사신이 자주 불손한 말을 내뱉어 사달을 만들었다.
하지만 주관하는 자가 응대할 때 말을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상이 이를 근심하였다.
얼마 있다가 거란이 천자의 즉위를 하례하러 오자 이에 공을 선발하여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는데 거란의 사신이 태후太后께서 사신을 보내 교서敎書를 통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공이 대번에 예법으로 굴복시키니 비로소 그만두었다.
사관史官이 《진종실록眞宗實錄》을 편수編修할 적에 기거주起居注가 빠진지라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6) 이후의 기거주를 편수할 것을 공에게 명하여 마침내 기거주를 편수하였다.
사부원외랑祠部員外郞 제거재경제사고무提擧在京諸司庫務로 옮기고 본관本官으로 지제고知制誥 동판이부유내전同判吏部流內銓이 되었다.
천성天聖 5년(1028)에 거란이 건원절乾元節을 하례하는 사신의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는데, 거란의 사신이 중국中國의 사신은 거란에 이르러 전상殿上에 앉아 위차位次가 높은데 거란의 사신이 중국에 와서는 앉는 자리가 낮아 섬돌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 말이 몹시 준절하면서 그치지 않자 상과 대신들이 모두 이 일은 하찮으므로 다툴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란 사신의 말을 들어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하찮은 일을 허여하면 반드시 그 큰 일을 허락할 빌미를 열어주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힘써 간쟁하며 안 된다고 말하니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수河水활주滑州에서 터지자 처음에 논의하는 자들이 막을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공역을 일으키고 난 뒤에 논의하는 자들이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공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막을 수 있다고 말하여 마침내 하수를 막았다.
그해 중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권어사중승權御史中丞으로 옮겼고, 이듬해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지익주知益州에 배수되었다.
지방 백성들은 경박하여 반란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은 늘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제어하였고, 일에 닥쳐서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잘한 일은 놓아두고 단지 한두 가지 크고 심한 일을 다스리니, 촉 지방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고 요속僚屬들 이하로 모두 공이 하는 일의 의도를 엿볼 수가 없었다.
정월이 되면 민간에서 연등燃燈을 하느라 관리와 백성들이 밤에 모여 노닐고 즐기면서 천하에 가득하였다.
공이 미리 아전들에게 화재를 대비할 것을 경계하여 실화失火하는 자가 있으면 뒤따라가 소화消火하게 하고 불이 난 것을 말하여 대중을 동요치 말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오문五門에서 크게 연회할 적에 성중城中에 불이 났는데 아전들이 화재를 진압하여 연회를 마치도록 백성들 모두 불이 난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니 공의 여타 조치들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군사軍士감군監軍을 보고서 그 군대에 변란이 있음을 고하자 감군監軍이 공에게 들어가 아뢰었는데 공이 웃으면서 그를 돌려보내니 두려워하면서 감히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동정을 내가 본래 알고 있으니 만약 도모하는 자가 있다면 나에게 고할 필요가 없다.
이 일을 고한 자를 나에게 오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감군이 갔는데 고한 자가 끝내 감히 오지 못하였고 공도 불문에 부쳐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촉주蜀州이빙李氷신자神子라고 자신을 일컫는 요망한 이가 관속官屬이졸吏卒을 두고서 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는데 공이 체포할 것을 명하여 법에 따라 처리하였다.
그러자 조정에 참소하는 자가 공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니 촉주蜀州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상이 환관을 보내 달려가 이 일을 살피게 하니, 사자使者촉주蜀州의 경내에 들어가자 주민과 나그네들이 공의 선정善政을 다투어 말하였다.
사자가 요망한 자를 죽인 일을 물으니, 그 부로父老들이 모두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촉주蜀州를 수십 년 동안 무사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그 연유를 물으니, 부로들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촉주蜀州를 어지럽힌 자는 지모가 뛰어나고 호걸스러운 재주가 있던 자가 아니고 바로 마을을 돌아다니던 무뢰한 소인배일 뿐이었습니다.
오직 그 처음에 제재하지 않아서 결국 반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촉주蜀州가 이미 무사함을 보았고 또 부로들의 말을 듣고서 돌아가 상에게 아뢰니, 이에 상이 더욱 공을 유능하다고 여겨 급사중給事中 지개봉부知開封府로 옮겼다.
대궐에 큰 화재가 나서 양궁兩宮에 옮겨 붙었다.
환관이 옥사를 다스려 봉인縫人의 다리미로 불이 났다는 사실을 밝히고서 이미 거짓으로 자복시켜 개봉부에 보내졌다.
공에게 명하여 옥안獄案을 갖추게 하였는데 공이 곧바로 그 잘못됨을 분별하였으나 대궐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화공畵工에게 불길이 지나간 곳을 그리도록 명하니 후궁後宮에 사람이 많아 거처가 좁고 그 아궁이와 부뚜막이 판벽版壁에 가까워 세월이 오래됨에 벽지가 바짝 말라 불에 탄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일어난 불이겠는가.”라고 하고, 이어 이것은 거의 하늘이 내린 재앙이니 사람에게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상이 그 옥사를 가볍게 해주었다.
그래서 끝내 죽게 된 이가 없을 수 있었다.
공이 개봉부에 있을 적에 옥사를 결단함이 신속神速하였는지라 한 해 중에 늘 비어 있는 감옥이 네다섯 곳이었다.
공부시랑工部侍郞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수어사중승守御史中丞으로 옮겼다.
이해에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다시 지개봉부知開封府가 되었고, 이듬해 삼사사三司使가 되어 재부財賦를 다스릴 적에 본말本末을 알아 재물의 출납에 절도가 있어 비록 적은 돈이라도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옮기고, 경우景祐 4년(1038)에 본관本官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맡았다.
사천司天일식日食이 내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있을 것이니 윤월閏月을 옮겨 이를 피하자고 청하였는데, 공이 하늘이 견책하는 일이 있다면 윤월을 옮겨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덕정德政을 펼쳐야 할 뿐이라고 말하니 이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
범중엄范仲淹정사政事를 논한 일로 대신大臣의 심기를 건드려 요주饒州에 폄적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상이 뉘우치고서 다시 그를 기용하려고 하여 조금 내지內地로 옮겨 지륜주知潤州가 되었다.
그런데 범중엄을 미워하는 자가 다시 어떤 일로 그를 무함하니 그 말이 보고되자, 상이 노하여 그를 영남嶺南으로 폄적하라고 급히 명하였다.
범중엄이 폄적되고부터 붕당朋黨을 비판하는 논의가 일어나 조사朝士들이 연루되어 범중엄에 대한 말을 하는 자는 모두 그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었는데, 공만 홀로 상에게 이 일을 말하여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한 것임을 밝혀 상의 뜻이 풀리게 하고서야 그만두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결剛決하고 명민明敏하여 고사故事를 많이 알고 있었고 의론議論이 강개하였다.
공이 정사政事를 담당하고서는 더욱 분발하고 힘써 회피하는 일이 없어 재상이 사사로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말로 논척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공의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는 소인들이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마침내 함께 어떤 일을 가지고 공을 중상하여 죄를 받아 광록경光祿卿 지영주知潁州로 폄적되었다.
얼마 뒤에 상이 공을 생각하여 임지를 옮겨 지청주知靑州가 되었고 또 대명부大名府로 옮겼다가 한 해 만에 호부戶部이부吏部의 두 시랑侍郞상서좌승尙書左丞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로 옮겼다.
북경北京을 건립할 때 환관 황보계명皇甫繼明행궁行宮을 짓는 문제로 다투어 소장을 서로 올렸다.
상이 어사御史 한 명을 보내 그 시비是非를 살피게 하니 어사가 공이 옳다고 하므로 마침내 상이 황보계명을 파직하였다.
이때 황보계명이 바야흐로 상의 신임을 얻어 기용되어 그 권세가 중외中外를 경동시켰다.
조정의 대신부터 황보계명에게 뜻을 굽히고 자신을 낮추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공은 중상中傷을 당하여 실직되었다가 이제 막 기용되어 아직 복직되지 못했는데도 홀로 그와 다투어 비록 작은 일이라도 조금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의하는 자들이 공의 강직한 점을 어려운 일로 여기지 않고 황보계명에게 굽히지 않을 수 있는 것을 어려운 일로 여겼다.
공부상서工部尙書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하북안무사河北安撫使로 옮겼다.
경력慶曆 6년(1046)에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 섬서안무사陝西安撫使 지영흥군부사知永興軍府事에 배수되었고, 이듬해에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 판연주判延州의 직임이 더해졌다.
서하西夏 사람이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는데 사흘 전에 공은 서하가 올 것을 염탐하여 알고서 각 보루와 성채에 경계하여 수비하면서 성문을 닫았다.
그러자 적군이 이르러 대비가 되어 있다 여기고 군대를 이끌고 떠나서는 공이 떠날 때까지 다시 변방을 엿보지 않았다.
조원호趙元昊가 죽자 그 아들 양조諒祚가 즉위하니 이때 아직 어리므로 세 대장大將이 그 나라를 함께 다스렸다.
그런데 국사를 논하는 이가 “그 대장들에게 벼슬을 제수하여 모두 절도사로 삼아 저마다 지휘하는 부족을 차지하게 하여 그 세력을 나누고 약화시키면 마침내 서쪽 변방에 대한 근심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 일을 공에게 하달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남의 상사喪事를 기회로 여기는 것은 큰 신의를 보여 오랑캐를 위무慰撫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양조가 비록 어리지만 군신君臣이 화합하고 있고 세 대장이 다른 뜻을 품고 있지 않으니, 비록 일을 이루려고 하더라도 반드시 공은 없고 도리어 일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번 상사를 계기로 그들을 위무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공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황우皇祐 원년元年(1049)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임이 더해졌고, 다시 판대명부判大名府 겸북경유수兼北京留守가 되었다.
조원호가 반란하고 나서 하서河西거란契丹 역시 화약和約을 깨고 땅을 요구하여 두 변방에 전쟁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이때 막 조정에 들어와 함께 논의하고 다시 서북西北 두 변방을 지켜 오랑캐의 허실虛實정위情僞, 산천의 요해처要害處를 더욱 잘 알았다.
그래서 하북河北 지방에서 군대를 운용하여 적을 제압해 이기고 진을 치고 출입하는 방법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았다.
공이 올린 주의奏議가 자못 많아서 비록 다 쓰이지는 못했지만 공이 지적하여 계획하는 가운데 훌륭한 것들이 있었다.
대명부에 다시 부임하여 전후로 10년 동안 위엄과 은혜가 그 백성들에게 신뢰를 주니 백성들이 생사生祠를 세웠다.
공은 정사政事에서 물러난 뒤로 더욱 함부로 남들과 영합하지 않았고 또한 끝내 다시 기용되지 않았다.
진안鎭安으로 옮기고 나서 3년 만에 조정에 상소하여 “신이 비록 늙었으나 아직 국가를 위해 변방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리기도 전에 병이 드니 향년 69세였다.
공은 누차 관계官階가 올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상주국上柱國이 내려졌으며 개국광평군공開國廣平郡公이 내려져 식호食戶가 7,400호였는데 실봉實封은 2,100호였고 추성보덕수정익대공신推誠保德守正翊戴功臣이라는 공신호가 하사되었다.
공은 진씨陳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위국부인衛國夫人에 봉해졌다.
자식은 아들이 네 명이니, 사륭嗣隆태상박사太常博士이고, 사필嗣弼전중승殿中丞이고, 사공嗣恭태상박사太常博士이고, 사선嗣先대리시승大理寺丞이다.
딸은 다섯 명이니, 첫째는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영인榮諲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비서승祕書丞 한진韓縝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조중약晁仲約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대리시승大理寺丞 오득吳得에게 시집갔고, 다섯째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 왕칭王偁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세 명이니 맏손자는 백손伯孫이고, 둘째는 공손公孫이니, 모두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이고, 셋째는 창손昌孫이니 수비서랑守祕書郞이다.
문집文集주의奏議 60이 있다.
공은 평소 말수와 웃음이 적고 사람과 교제하는 데 신중하였으나, 이미 사람을 알고 나서는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잔에 술을 가득 붓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공이 즐거워할 때를 본 적이 드물었으나 나와는 더욱 친근하게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군자君子가 지키는 것은
지조를 빼앗기지 않음이라
배우지 않고도 굳세지만
꺾음이 있으면 반드시 꺾이고 마네
그러나 굳세고 과감한 정공程公
그 굳셈 굽히지 않았다네
공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을 적에
그 논의가 올곧았다네
그 곧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 지조 어찌 온전히 지키지 못했으랴
공이 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은 장수와 재상을 지냈다네
어찌 좋은 계책 없었으리오마는
어찌하여 공에게 묻지 않았던가
늙도록 변방을 지키었으니
백발에도 마음만은 씩씩하였네
공은 비록 외직에 있었지만
국가를 빛낸 인물이었도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시니
선비들이 누구를 우러르겠나
길한 점괘를 따라
이 새 터에 묏자리를 잡으니
오직 그 아름다운 명성은
멀어질수록 더욱 유구하리라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묘지墓誌신도비神道碑 두 글을 서로 비교하면 구양공이 쓰고 쓰지 않은 것을 상호 볼 수 있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嘉祐 2년(1057)에 지었다. 程公(988~1056)은 이름이 琳이고 자가 天球이며 諡號는 文簡이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歐陽脩는 程琳과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이 글은 천자의 詔命을 받들어 51세 때 지은 것이다. 정림이 졸한 해에 구양수는 〈祭程相公文〉을 지었고 2년 뒤에 또 〈程公神道碑銘〉을 지었다. 《宋史》 〈程琳傳〉은 이 〈程公神道碑銘〉을 축약하여 서술한 것이다.
역주2 嗣隆 : 정림의 맏아들로, 이때 太常博士로 있었다.
역주3 考功移于太常 : 考功은 吏部에 소속된 考功司로, 관리들의 업적을 심사하는 관청이다. 太常은 太常寺로 제사와 예악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역주4 葬公于河南伊闕之神陰鄕張留里 : 伊闕은 지금의 河南省 洛陽市 남쪽에 있다.
역주5 重黎 : 고대에 天地를 담당한 관원으로, 羲‧和 두 氏의 선조이다.
역주6 魏安鄕侯昱 : 三國시대 魏나라의 程昱이다. 자가 仲德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兗州都督이 되었고 文帝가 즉위하자 衛尉가 되고 安鄕侯에 봉해졌다. 졸하자 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三國志》에 傳記가 있다.
역주7 中山博野人也 : 中山博野는 지금의 河北省 博野縣이다.
역주8 爲泰寧軍節度掌書記 : 泰寧軍은 宋代에 京東西路 襲慶府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山東省 兗州에 있었다.
역주9 天僖中……三司戶部判官 : 天僖는 眞宗의 연호로 1017년에서 1022년까지이다. 지금 천자는 宋 仁宗 趙禎이다.
역주10 五門 : 옛날 천자는 五門이 있으니 안에서부터 밖으로 각각 路門, 應門, 皐門, 雉門, 庫門이다. 여기서는 皇城을 가리킨다.
역주11 禁中大火 延兩宮 : 《宋史》 〈仁宗紀 2〉에 “明道 원년(1032) 8월 임술일에 大內에 화재가 나서 八殿에 옮겨 붙었다.”라고 하였고, 〈地理志 1〉에는 “명도 원년 8월에 文德殿을 수리하여 완성하였다. 이날 밤에 禁中에 불이 나서 崇德殿, 長春殿, 滋福殿, 會慶殿, 延慶殿, 崇徽殿, 天和殿, 承明殿 여덟 곳에 옮겨 붙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2 縫人火斗 : 縫人은 궁중에서 의복 수선하는 일을 맡은 장인을 가리키고, 火斗는 熨斗로 다리미를 가리킨다.
역주13 司天 : 曆法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역주14 范仲淹以言事忤大臣 貶饒州 : 범중엄이 〈百官圖〉를 올리고 洛陽에 도읍을 건설하는 문제 등을 말한 일로 呂夷簡의 심기를 거슬러서 饒州에 폄적된 일을 가리킨다. 饒州는 지금의 江西省 波陽이다.
역주15 潤州 : 宋代에는 兩浙路에 속하였는데 治所는 지금 江蘇省 鎭江市에 있었다.
역주16 光祿卿 : 光祿寺主管으로 제사, 조회, 연향에 쓰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는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역주17 大名府 : 治所는 지금 河北省 大名에 있다. 河北의 大名, 魏縣, 成安, 廣平, 威縣, 臨西, 館陶와 山東의 臨淸, 夏津, 冠縣, 莘縣 및 河南의 內黃 등의 지역에 해당한다. 慶曆 연간 초에 이곳에 北京을 건설하여 명명하고서 도읍 汴京을 지키는 門戶로 삼았다.
역주18 加宣徽北院使 判延州 : 宣徽北院使는 唐代에 宣徽院南北使를 설치하여 환관을 임명하고서 궁중의 諸司와 三班內侍의 名籍과 郊祀, 조회, 연향 때 장막을 치는 등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宋代에는 官位가 높고 직임은 적어 항상 樞密院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北院使는 南院에 비해 資望은 조금 못하고 南使와 北使가 건물은 공유하면서 각기 일을 보았다. 여기서는 녹봉을 주기 위한 虛銜이다.
역주19 公諜知其來……按兵閉壁 : 《宋史》 〈程琳傳〉에 “얼마 있다 적이 과연 기마병 3만을 이끌고 국경으로 와서 투항한 자를 잡은 일을 구실로 대었다. 정림이 염탐으로 이 사실을 알고 벽을 굳게 닫고 깃발을 뒤집어놓고 장수들에게 출동하지 말라고 경계시키니 적이 대비가 있다고 의심하고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라고 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20 : 본집에는 ‘敵’으로 되어 있다.
역주21 趙元昊死 : 西夏國의 임금은 李元昊로, 황제의 성을 하사받아 趙氏가 되었다. 慶曆 8년(1068) 정월에 졸하니 향년 46세로, 재위 17년이었다.
역주22 北京 : 大名府의 치소로, 지금의 河北省 大名市 동북쪽에 있다. 慶曆 2년(1042) 仁宗이 遼나라에 대항하려고 親征을 준비할 때, 예전에 眞宗이 친정하면서 머물렀던 대명부의 치소에 북경을 건설하였다.
역주23 生祠 :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세우는 사당으로, 사람들이 존숭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역주24 居三歲 : 앞의 권22 〈鎭安軍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贈太師中書令程公神道碑銘〉에는 ‘在鎭四年’으로 되어 있다.
역주25 開府儀同三司 : 원래는 府署를 세워 僚屬을 스스로 선발할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하였음을 나타내는 官階를 가리키는 것으로 三公과 그 규례가 같다. 魏晉시대 처음 설치되었는데 唐宋 때에는 이것으로 文散官의 제1품계를 삼았다. 관직은 맡지 않고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면서 아울러 봉록을 받을 수 있었다.
역주26 上柱國 : 官名으로 戰國시대 楚나라의 제도인데 敵軍을 전복하고 敵將을 베는 전공을 세운 자를 상주국에 封하였는데 몹시 존귀하고 총애받는 지위였다. 唐宋 때에도 武官에게 내리는 勳級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역주27 實封 : 실제로 주는 封戶의 조세로, 封戶數를 헤아려 諸郡에서 조세를 거둬 취하는 것이다.
역주28 喜飮酒引滿 然人罕得其驩 : 宋나라 彭乘의 《墨客揮犀》에 “程丞相은 성품이 엄하고 굳세어 인정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大名府의 외직으로 나가 다스릴 적에 늘 새벽에 일어나 書案에 앉아 일을 처리하니 좌우의 요속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숨도 쉬지 못하였다. 한편 연회를 열어 보좌들을 불러 술을 마실 때에는 웃고 노래 부르며 장난을 치며 친근하게 격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의 강하고 과감한 성품을 두려워하면서도 공의 활달함을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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