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於詩譜補亡하니 非獨見公之潛心六藝之學이요 又可幷見公之不沒鄭氏之善如此로다
昔者聖人已沒에 六經之道가 幾熄於戰國而焚棄於秦이러니 自漢已來로 收拾亡逸하고 發明遺義하야 而正其訛繆하야 得以粗備하니
後之學者가 因迹前世之所傳하야 而較其得失은 或有之矣어니와 若使徒抱焚餘殘脫之經하야 倀倀於去聖千百年後하야 不見先儒中間之說하고 而欲特立一家之學者가 果有能哉아
然則先儒之論이 苟非詳其終始而牴牾하고 質於聖人而悖理害經之甚하야 有不得已而後改易者면 何必徒爲異論以相訾也리오
予嘗依其箋傳하야 考之於經而證以序譜하니 惜其不合者頗多라
蓋詩述商周
하야 自
로 上陳稷契
하고 下迄
千五六百歲之間
하고 旁及列國君臣世次國地山川封域圖牒鳥獸草木魚蟲之名與其風俗善惡方言訓詁盛衰治亂美刺之由
가 無所不載
라
予疑毛鄭之失이 旣多나 然不敢輕爲改易者는 意其爲說不止於箋傳而已니 恨不得盡見二家之書하야 未能徧通其旨로다
夫不盡見其書而欲折其是非는 猶不盡人之辭而欲斷其訟之曲直이니 其能果於自決乎며
世言鄭氏詩譜最詳
이라하야늘 求之久矣
로되 不可得
이요 雖
祕書所藏
에도 亦無之
러니
慶曆四年에 奉使河東하야 至于絳州하야 偶得焉하니 其文有注而不見名氏라
其
이 尤易爲訛舛
하야 悉皆顚倒錯亂
하야 不可復考
라
凡詩雅頌
은 兼列商魯
하고 其
이 十有四國
이로되 而其次
莫詳其義
나
陳齊衛晉曹鄭秦은 此封國之先後也요 豳齊衛檜陳唐秦鄭魏曹는 此變風之先後也요 周南召南邶鄘衛王鄭齊豳秦魏唐陳曹는 此孔子未刪詩之前周太師樂歌之次第也요 周召邶鄘衛王檜鄭齊魏唐秦陳曹豳은 此鄭氏詩譜次第也요 黜檜後陳은 此今詩次第也라
初에 予未見鄭譜하고 嘗略考春秋史記本紀世家年表하고 而合以毛鄭之說하야 爲詩圖十四篇이라
今因取以補鄭譜之亡者하니 足以見二家所說世次先後가 甚備라
因據而求면 其得失較然矣라 而仍存其圖하야 庶幾以見予於鄭氏之學에 盡心焉耳라
夫盡其說而有所不通然後에 得以論正이니 予豈好爲異論者哉아
凡補其譜十有五요 補其文字二百七이요 增損塗乙改正者三百八十三에 而鄭氏之譜復完矣라
02. 《시보詩譜》의 망실된 부분을 보충補充한 데 대한 후서後序
구양공歐陽公이 《시보詩譜》의 망실된 부분을 보충補充하였으니, 공公이 육예六藝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였음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공公이 이와 같이 정씨鄭氏의 좋은 부분을 없애지 않았음을 아울러 볼 수 있다.
옛적에 성인聖人께서 돌아가신 뒤에, 육경六經의 도道가 전국戰國시대 때 거의 소멸되고 진秦나라 때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는데, 한漢나라 이래로 망실된 것을 수습하고 남겨진 뜻을 발명하여 그 오류를 바로잡아 대강이나마 육경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육경의 도가〉 지금 세상에 전해진 것이 어찌 한 사람의 힘이겠는가.
후세의 학자가 이로 인해 전세前世에서 전한 것을 좇아 그 득실得失을 비교할 수는 있겠지만, 가령 한갓 타고 남은 잔결殘缺된 경전을 가지고서 성인聖人의 시대에서 천백 년이 떨어진 시점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선유先儒들이 그 사이에 남긴 학설은 보지 않고 혼자서 일가一家의 학문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나는 그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유先儒가 남긴 논설이 진실로 그 시종始終을 자세히 따져볼 적에 모순되며, 성인聖人의 표준에 질정하였을 적에 이치를 어그러뜨리고 경전의 뜻을 손상시킴이 심하여, 부득이한 점이 있은 뒤에 고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한갓 이론異論을 제기하여 헐뜯을 필요가 있겠는가.
모씨毛氏와 정씨鄭氏는 《시경詩經》에 있어서 그 학문이 또한 이미 넓다.
내가 일찍이 그들의 주석에 의거하여 《시경》을 고찰해보고 모씨毛氏의 《모서毛序》와 정씨鄭氏의 《시보詩譜》로 증험해보니 안타깝게도 합치하지 않는 점이 퍽 많았다.
대개 시詩는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때의 일을 기술하여 〈생민生民〉과 〈현조玄鳥〉로부터 위로는 직稷과 설契의 일을 말하고 아래로는 진陳 영공靈公의 시기까지 천오륙백 년의 기간에 이르렀으며, 곁으로는 열국列國 군신君臣들의 세차世次와 영토와 산천山川과 분봉分封한 강역疆域의 도첩圖牒과 조수鳥獸와 초목草木과 어충魚蟲의 이름 및 그 풍속의 좋고 나쁨과 방언方言에 대한 훈고訓詁와 성쇠치란盛衰治亂에 대한 칭탄과 풍자의 연유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들 이렇게 방대한 내용 속에서 실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의심컨대 모씨와 정씨의 오류가 이미 많으나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하는 것은, 생각건대 그들의 학설이 지금 남아 있는 주석에 그치고 말 뿐이 아니기 때문이니, 두 사람의 글을 다 볼 수 없어서 그들의 뜻에 두루 통할 수 없는 점이 한스럽도다.
대저 그 글을 다 보지 않고서 시비是非를 가르려고 하는 것은 남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서 송사訟事의 시비를 결단하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스스로 판결하기를 과감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학설에 반드시 복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말하기를 “정씨의 《시보》가 가장 상세하다.”라고 하기에 그 책을 구한 지 오래되었지만 얻을 수가 없었고, 《숭문총목崇文總目》의 비서祕書 소장 목록에도 《시보》는 없었다.
그러다가 경력慶曆 4년(1044)에 사명을 받들고 하동河東으로 가다가 강주絳州에 이르러 우연히 《시보》를 얻어 보니, 그 글에 주注가 달려 있고 작자의 명씨名氏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미首尾가 결락되어 “주공이 태평을 이루었다.[주공치태평周公致太平]” 부분 이상은 모두 망실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국보國譜와 방행旁行은 더욱 착오가 생기기 쉬워서 모두 다 뒤바뀌고 어지럽게 섞여 있어 다시 고찰할 수가 없었다.
무릇 《시경》의 아雅와 송頌에는 상商나라와 노魯나라의 것이 겸하여 실려 있고,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이 14개 나라인데 그 편차한 뜻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열국列國의 분봉分封과 변풍이 된 순서는 몰라서는 안 된다.
〈주남周南〉-〈소남召南〉-〈왕王〉-〈빈豳〉은 모두 주周나라에서 나왔고, 〈패邶〉-〈용鄘〉은 위衛나라에 귀속되고, 〈회檜〉-〈위魏〉는 사서史書에 〈세가世家〉가 없다.
〈진陳〉-〈제齊〉-〈위衛〉-〈진晉〉-〈조曹〉-〈정鄭〉-〈진秦〉은 열국列國이 분봉分封된 순서이고, 〈빈豳〉-〈제齊〉-〈위衛〉-〈회檜〉-〈진陳〉-〈당唐〉-〈진秦〉-〈정鄭〉-〈위魏〉-〈조曹〉는 변풍變風이 된 순서이고, 〈주남周南〉-〈소남召南〉-〈패邶〉-〈용鄘〉-〈위衛〉-〈왕王〉-〈정鄭〉-〈제齊〉-〈빈豳〉-〈진秦〉-〈위魏〉-〈당唐〉-〈진陳〉-〈조曹〉는 공자孔子께서 시詩를 산정하시기 전에 주周나라의 악관樂官인 태사太師가 악가樂歌를 배열한 순서이고, 〈주남周南〉-〈소남召南〉-〈패邶〉-〈용鄘〉-〈위衛〉-〈왕王〉-〈회檜〉-〈정鄭〉-〈제齊〉-〈위魏〉-〈당唐〉-〈진秦〉-〈진陳〉-〈조曹〉-〈빈豳〉은 정씨가 《시보》를 편찬할 때의 순서이고, 〈회檜〉와 〈진陳〉을 뒤쪽으로 빼서 편차한 것은 지금 현재 《시경詩經》의 순서이다.
애초에 내가 정씨鄭氏의 《시보詩譜》를 보기 전에 일찍이 《춘추春秋》와 《사기史記》의 〈본기本紀〉‧〈세가世家〉‧〈연표年表〉를 대략 참고하고 모씨와 정씨의 설을 합쳐서 《시도詩圖》 14편을 만들었다.
지금 《시도》를 취하여 정씨의 《시보》에서 망실된 부분을 보충하니, 모씨와 정씨가 말했던 세차世次의 순서가 매우 갖추어졌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여기에 의거하여 구하면 그 득실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에 《시도》를 그대로 남겨두어 내가 정씨의 학문에 마음을 다한 사실을 보이노라.
대저 그 말을 다하고서도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은 연후에 논정論正할 수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론異論을 세우기 좋아하는 자이겠는가.
무릇 보계譜系를 보충한 곳이 15부분이요, 글자를 보충한 곳이 207부분이요, 증감하고 수정하고 개정한 곳이 383부분이니, 이에 정씨의 《시보》가 다시 완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