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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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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通篇 交情相感欷하니 更比諸篇 有生色이니 文章中之國風也
故大理寺丞河南府司錄張君 諱汝士 字堯夫 開封襄邑人也
明道二年八月壬寅 以疾卒于官하니 享年三十有七이라 卒之七日 葬洛陽北邙山下
其友人河南尹師魯誌其墓하고 而廬陵歐陽脩爲之銘호되 以其葬之速也 不能刻石하고
乃得古甎하야 命太原하야 以丹爲隷書하야 納于壙中이러니 嘉祐二年某月某日 其子吉甫山甫 改葬君于之敎忠鄕積慶里하다
君之始葬北邙也 吉甫纔數歲 而山甫始生이라 余及送者相與臨穴하야 視窆且封하고 哭而去러라
今年春 余主試天下貢士러니 而山甫以進士試禮部 乃來告以將改葬其先君하고 因出銘以示余하니
蓋君之卒 距今二十有五年矣이라 守河南할새 公王家子 特以文學으로 仕至貴顯하야 所至 多招集文士러니
而河南吏屬 適皆當時賢材知名士 故其幕府 號爲天下之盛하니 君其一人也
文僖公善待士하야 未嘗責以吏職하고 而河南又多名山水 竹林茂樹하며 奇花怪石하고 其平臺淸池 上下荒墟草莽之間이라
余得日從賢人長者하야 賦詩飮酒以爲樂이러라 而君爲人靜默修潔하야 常坐府治事하야 省文書하되 尤盡心於獄訟이라
初以辟爲其府推官이라가 旣罷 又辟司錄하니 河南人多賴之 而守尹屢薦其材러라 君亦工書하고 喜爲詩
間則從余遊러니 其語言簡而有意 飮酒終日不亂하고 雖醉未嘗頹墮하니 與之居者 莫不服其德이라
故師魯誌之曰 飭身臨事 余嘗愧堯夫로대 堯夫不余愧也라하다
始君之葬 皆以其地不善이라 又葬速하야 其禮不備러라
君夫人崔氏 有賢行하야 能敎其子하니 而二子孝謹하야 克自樹立하야 卒能改葬君如吉卜하니 君其可謂有後矣로다
自君卒後 文僖公得罪貶死하고 吏屬 亦各引去 今師魯死且十餘年이요 王顧者死亦六七年矣
其送君而臨穴者及與君同府而遊者 十蓋八九死矣 其幸而在者 不老則病且衰하니 如予是也
嗚呼 盛衰生死之際 未始不如是하니 是豈足道哉 惟爲善者能有後 而託於文字者可以無窮이라
故於其改葬也 書以遺其子하야 俾碣於墓하고 且以寫余之思焉하노라 吉甫今爲大理寺丞 知緱氏縣이요 山甫始以進士 賜出身云이라


07. 河南府司錄 張君墓表
전편이 張君과 나눈 정리로 흐느끼고 있으니,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색이 있다. 文章에 있어서 國風이다.
大理寺丞 河南府司錄 張君汝士이고 堯夫이니 開封 襄邑 사람이다.
明道 2년(1033) 8월 壬寅에 임소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 37세였다. 죽은 지 7일에 洛陽北邙山 아래에 장사 지냈다.
그 벗 河南 尹師魯墓誌를 짓고 廬陵 歐陽脩을 지었는데 장례 시일이 촉박하여 돌에다 새기지 못하였다.
마침내 金谷의 오래된 벽돌을 얻어 太原 王顧에게 명하여 丹砂隷書를 적어 壙中에 넣었는데, 嘉祐 2년(1057) 某月 某日에 그 아들 吉甫山甫伊闕敎忠鄕 積慶里張君의 묘를 改葬하였다.
군을 처음 北邙山에 안장할 때 吉甫는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고 山甫는 갓난아기였다. 나는 영구를 전송하는 자들과 함께 墓穴에 가서 하관하고 봉분하는 것을 살피고서 곡하고 떠나왔다.
금년 봄에 내가 천하의 貢士들을 시험하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山甫가 진사로 禮部試에 응시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그 先君의 묘를 장차 개장하려 한다고 고하면서 내가 지었던 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대개 군이 세상을 떠난 것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다. 이보다 앞서 天聖明道 연간에 錢文僖公河南을 다스렸는데, 문희공은 王家의 자제이고 특히 文學으로 현달한 관직에 이르러 부임하는 곳마다 文士들을 많이 불러 모았다.
河南吏屬들이 마침 모두 당시 재능 있고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으므로 문희공의 幕府가 천하의 성대한 모임이라고 일컬어졌으니, 군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문희공은 선비 대우를 잘하여 관리의 일을 가지고 맡긴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하남은 또 이름난 山水가 많은지라 竹林이 울창하며 기이한 꽃들과 기괴한 모양의 암석이 있고, 누대와 맑은 연못이 황폐한 터와 풀숲 사이에 위아래로 있었다.
내가 날을 얻어 賢人 長者들을 따라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놀았다. 군은 사람됨이 고요하고 정결하여 항상 府中에 앉아 일을 보면서 처리할 문서들을 살폈는데 獄訟에 더욱 마음을 다하였다.
이보다 앞서 군이 초빙으로 하남부의 推官이 되었다가 직을 그만두고서 다시 司祿에 초빙되니 하남 사람들이 군의 덕택을 많이 입었다. 府尹인 문희공이 여러 차례 그 재주를 조정에 천거하였다. 군은 또한 글씨를 잘 썼고 시 짓기를 좋아하였다.
한가할 때면 나를 따라 노닐었는데 그 말은 과묵하면서도 뜻이 있었고 종일토록 술을 마셔도 흐트러지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취하더라도 쓰러지고 넘어진 적이 없으니 함께 있는 자들이 그 덕에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尹師魯가 지은 墓誌에 “자신을 檢飭하고 공무에 임하는 점에서 나는 堯夫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요부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처음 군을 장사 지낼 때에 모두 葬地가 좋지 않다고 하였다. 또 장례 시일이 급박하여 를 갖추지도 못하였다.
군의 부인 崔氏賢淑한 행실이 있어 그 자식들을 잘 가르쳤으니, 두 아들은 효성스럽고 謹愼하여 자립하여 마침내 길한 葬地에 군을 改葬하니 군은 훌륭한 후사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군이 졸한 뒤로 문희공은 죄를 얻어 폄적되어 죽고, 하남부의 吏屬들도 각자의 길로 떠나갔다. 지금 윤사로가 죽은 지 십여 년이고 왕고가 죽은 지도 6,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군의 영구를 전송하여 군의 무덤에 같이 갔던 자들 및 군과 함께 하남부에 있으면서 종유했던 자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죽었고,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도 늙지 않았으면 병들고 쇠약하였으니, 나 같은 사람이 그러한 경우이다.
오호라! 盛衰死生의 즈음은 애당초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어찌 말할 만한 것이겠는가. 오직 선을 행한 자는 훌륭한 후손을 두게 되고, 그 행적을 글로 남기면 무궁하게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군의 무덤을 개장할 때에 묘표를 지어 그 아들에게 주어서 묘소에 碑碣을 세우게 하는 한편 나의 그리움을 이 묘표에 토로한다. 길보는 지금 大理寺丞 知緱氏縣이 되었고, 산보는 비로소 진사로 出身의 자격을 받았다.


역주
역주1 河南府司錄張君墓表 : 이 글은 嘉祐 2년(1057)에 지은 것이다. 당시 구양수는 權知禮部貢擧로 나이가 51세였다. 張君은 張汝士이다.
우리나라의 成海應은 ≪硏經齋全集≫ 續集 14책 〈讀韓昌黎集〉에서 韓愈의 〈殿中少監馬君墓誌〉를 바람직하게 잘 모방한 작품 중 하나로 구양수의 이 작품을 들고 있다.
역주2 金谷 : 晉나라 때 石崇이 이곳에 園林을 짓고 金谷園이라 칭하였는데, 洛陽 동북쪽에 옛터가 있다.
역주3 王顧 : 北宋 초기의 저명한 隷書家이다.
역주4 伊闕 : 洛陽 남쪽에 있는 龍門山이, 두 산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宮門처럼 생겼고 伊水가 그 사이로 흘러지나가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역주5 初天聖明道之間 : 天聖은 宋 仁宗의 연호로 1023년에서 1032년까지, 明道 역시 인종의 연호로 1032년에서 1033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6 錢文僖公 : 錢惟演(977~1034)이다. 杭州 臨安 사람으로 字는 希聖, 시호는 文僖이다. 宋나라에 歸附한 吳越王 錢俶의 아들이다. 翰林學士, 樞密副使, 崇信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冊府元龜≫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박학다식하였고 문체가 화려하고 청신했다. 저서에 ≪典懿集≫ 등이 있다.
역주7 漢東 : 河南이 漢水의 동쪽이므로 하남을 가리켜 漢東이라 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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