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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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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等兵疏 當與相上下
右臣伏見 釁隙已多하니 不越歲하야 必爲邊患이라
臣本庸暗하야 不達時機하고 輒以外料敵情하고 內量事勢하며 鑑往年已驗之失하고 思今日可用之謀하니 雖兵不先言이라 俟見形而應變이나 然坐而制勝 亦大計之可圖
謹具條陳하야 庶裨萬一하노이다
臣所謂外料敵情者
諒祚世有夏州하되以前 止於一鎭五州而已러니
太宗皇帝時 始爲邊患하고 其後遂陷靈鹽하야 盡有朔方之地
蓋自淳化咸平으로 用兵十五餘年하되 旣不能剪滅이라 遂務招懷러니
適會繼遷爲潘羅支所殺이어늘 其子德明乃議歸款이라
而我惟以恩信으로 復其王封하고 歲時俸賜 極於優厚하니 德明旣無南顧之憂하고 而其子元昊亦壯이라 遂倂力西攻回紇하야 拓地千餘里러라
德明旣死 地大兵强일새 元昊遂復背叛하니 國家自寶元慶曆以後 一方用兵 天下騷動하야 國虛民弊
如此數年 元昊知我有厭兵之患하고 遂復議和어늘 而國家待之 恩禮又異於前矣
號爲國主 僅得其稱臣하고 歲予之物 百倍德明之時 半於契丹之數
今者諒祚 雖曰이나
然而習見其家世所爲하니 蓋繼遷之叛而復王封하며 元昊再叛而爲國主하니 今若又叛이면 其志可知
是其欲自比契丹하야 抗衡中國하야 以爲鼎峙之勢爾
此臣竊料敵情 在於此也
夫所謂內量事勢者 蓋以慶曆用兵之時 視方今禦邊之備하야 較彼我之虛實强弱하야 以見勝敗之形也
自眞宗景德二年 盟北虜於澶淵하고 明年始納西夏之款하야 遂務休兵하고 至寶元初하야 元昊復叛하니 蓋三十餘年矣
天下安於無事하야 武備廢而不修하고 廟堂無謀臣하며 邊鄙無勇將이라
將愚不識干戈하고 兵驕不識戰陣하야 器械朽腐하고 城郭隳頹어늘
而元昊勇鷙桀黠之虜也 其包畜姦謀하야 欲窺中國者 累年矣로되
而我方恬然不以爲慮하고 待其謀成兵具하야 一旦反書來上然後 茫然不知所措하야 中外震駭 擧動倉惶하니 所以用兵之初 有敗而無勝也
旣而朝廷用韓琦范仲淹等하야 付以西事하야 極力經營하고 而勇夫銳將 亦因戰陣稍稍而出하니
數年之間 人謀漸得하고 武備漸修하야 似可支吾矣
然而天下已困일새
所以屈意忍恥하야 復與之和하니 此慶曆之事爾
今則不然하야 方今甲兵雖未精利 不若往年之腐朽也 城壘粗嘗完緝하니 不若往年之隳頹也 土兵 增添訓練하니 不若往年寡弱之驕軍也 大小將校曾經戰陣者 往往尙在하니 不若往年魏昭炳夏隨之徒綺紈子弟也 一二執政之臣 皆當時宣力者 其留心西事熟矣 不若往時大臣茫然不知所措者也
蓋往年以不知邊事之謀臣으로 馭不識干戈之將하고 用驕兵執朽器하야 以當桀黠新興之虜하니 此所以敗也
方今謀臣武將 城壁器械 不類往年하고 而諒祚狂童 不及元昊遠甚이요 往年忽而不思러니 今又已先覺하야 可以早爲之備하니 苟其不叛則已어니와 若其果叛이면 未必不爲中國利也
臣謂可因此時하야 雪前恥收後功이로되 但顧人謀如何爾
若上憑陛下神威睿算하야 係纍諒祚君臣하야 獻於廟社 此其上也 其次 逐狂虜於黃河之北하야 以復朔方故地 最下 盡取山界하야 奪其險而我守之하야 以永絶邊患이라
此臣竊量事勢하야 謂或如此
臣所謂鑑往年已驗之失者 其小失非一이라 不可悉數 臣請言其大者하리이다
夫夷狄變詐하야 兵交陣合 彼佯敗以爲誘어늘 我貪利而追之라가 或不虞橫出而爲其所邀하고 或進陷死地而困于束手하니 此前日敗之戒 今明習兵戰者 亦能知之하니
此雖小事也 亦不可忽이어니와 所謂大計之繆者 攻守之策 皆失爾
臣視慶曆禦邊之備컨댄 東起麟府하고 西盡하야 地長千餘里 分爲者五 而路分爲者又二十有四 而州軍分爲寨爲堡爲城者 又幾二百이니 皆須列兵而守之
故吾兵雖衆이나 不得不分이요 所分旣多 不得不寡어늘 而賊之出也 常擧其國衆하야 合聚爲一而來하니
是吾兵雖多 分而爲寡 彼衆雖寡 聚之爲多
以彼之多 擊吾之寡하니 不得不敗也
此城寨之法 旣不足自守矣
而五路大將所謂戰兵者 分在二十四州軍하니 欲合而出이면 則懼後空而無備하고 欲各留守備而合其餘 則數少不足以出攻하니 此當時所以用兵累年 終不能一出者 以此也
夫進不能出攻하고 退不能自守하니 是謂攻守皆無策者 往年已驗之失也
臣所謂今日可用之謀者 在定出攻之計爾 必用先起制人之術이라야 乃可以取勝也
蓋列兵分地而守하면 敵得時出而撓於其間하야 使我處處爲備 常如敵至하면 師老糧匱하고 我勞彼逸이라
하고 昨元昊亦用此策하야 以困我之西鄙
夫兵分備寡 兵家之大害也 其害常在我하고 以逸待勞 兵家之大利也 其利常在彼
所以往年賊常得志也
今誠能反其事하야 而移我所害者予敵하고 奪敵所利者在我하면 則我當先爲出攻之計하야 使彼疲於守禦리니 則我亦得志矣
凡出攻之兵 勿爲大擧 我每一出 彼必呼集而來拒하리니
彼集於東이어든 則別出其西하고 我歸彼散이어든 則我復出而彼又集이리니 我以五路之兵으로 番休出入하야 使其一國之衆으로 聚散犇走하야 無時暫停이면 則無不困之虜矣
此臣所謂方今可用之謀也
蓋往年之失 在守하고 方今之利 在攻이라
昔至道中 亦嘗五路出攻矣로되 當時將相 爲謀不密하니 蓋欲攻黠虜方强之國 不先以謀困之하고 而直爲一戰必取之計하야 大擧深入이라
所以不能成功也러라
夫用兵 至難事也
故謀旣審矣 則其發也必果
故能動而有成功也
若其山川之險易 道里之迂直 蕃漢兵馬之强弱 騎軍步卒長兵短兵之所利 與夫左右前後 一出一入 開闔變化 有正有奇 凡用兵之形勢 有可先知者 有不可先言者
臣願陛下遣一重臣하야 出而巡撫하야 遍見諸將하야 與熟圖之하야 以先定大計하되 凡山川道里蕃漢步騎出入之所宜可先知者 悉圖上方略하고 其餘不可先言 付之將率하야 使其見形應變 因敵制勝하고
至於諒祚之所爲하얀 宜少屈意含容而曲就之하야 旣以驕其心하고 亦少緩其事하야 以待吾之爲備하고 而且嚴戒五路하야 訓兵選將하고 利器甲하며 畜資糧하야 常具軍行之計라가
待其反書朝奏則王師暮出하야 以駭其心而奪其氣하야 使其支吾不暇하면
則勝勢在我矣
往年 議者亦欲招輯橫山蕃部하야 謀取山界之地
然臣謂必欲招之인댄 亦須先藉勝捷之威하야 使其知中國之彊이니 則方肯來附也
由是言之컨댄 亦以出攻爲利矣
凡臣之所言者 大略
然臣足未嘗踐邊陲하고 目未嘗識戰陣하니 以一儒生偏見之言으로 誠知未可必用이로되
直以方當陛下勞心西事廣詢衆議之時하야 思竭愚慮하야


04. 서변西邊사의事宜를 말한 첫째
이와 같은 병사兵事에 관한 들은 응당 조충국趙充國서강西羌을 헤아려 올린 열두 가지 방책과 서로 우열을 겨룰 만하다.
신은 삼가 보건대 양조諒祚가 미치고 참람된 짓을 하여 분란을 일으킨 것이 이미 많으니, 이해를 넘지 않아 필시 변방에 우환이 될 것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우매하여 시국의 기의機宜를 알지 못하고 문득 밖으로 적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안으로 일의 형세를 헤아리며 지난해 이미 징험한 잘못을 거울삼고 지금 쓸 만한 계책을 생각하였으니, 병사兵事에는 비록 말을 앞세우지 않는 법이라 적의 형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변화에 대응해야 하지만 앉아서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것이 역시 도모함직한 큰 계책입니다.
삼가 조목조목 진달하여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신이 말한 ‘밖으로 적의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양조諒祚는 대대로 하주夏州를 소유하였지만 이흥彛興극예克叡 이전에는 1 5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종太宗황제 때 계봉繼捧계천繼遷이 처음으로 우환거리가 되었고, 그 후에는 마침내 영주靈州염주鹽州를 함락시켜 북방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대개 순화淳化함평咸平 연간(990~1003)으로부터 전란이 일어난 지 15여 년이 되었지만 이미 적을 섬멸하지 못하였므로 마침내 적을 회유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런데 마침 계천이 반라지潘羅支에게 살해되자 그 아들 덕명德明이 귀순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직 은혜와 신의로 대하여 왕의 작봉爵封을 회복시켜주고 세시의 하사품을 극히 풍후豊厚하게 주니, 덕명德明이 이미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어졌고 그 아들 원호元昊도 장성한 터라 마침내 힘을 합쳐서 서쪽으로 회흘回紇을 공격하여 땅 천여 리를 넓혔습니다.
덕명德明이 죽었을 때에 땅은 크고 병력은 강해졌기 때문에 원호元昊가 마침내 다시 배반하니, 우리 국가가 보원寶元경력慶曆 연간(1038~1048) 이후부터 한 방면에 군사를 동원함에 천하가 소란하여 나라는 텅 비고 백성은 피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몇 해를 보내는 동안에 우리가 전란을 싫어해 근심한다는 것을 원호가 알고서 마침내 강화를 의논하거늘, 우리 국가가 저들을 대우함에 은혜와 예의가 또 예전보다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국주國主라 호칭하여 겨우 칭신稱臣만 얻었고 세시로 주는 하사품은 덕명 때보다 백 배를 더 주고 거란契丹에 보내는 수량에 반이 되었습니다.
지금 양조諒祚광동狂童입니다.
그러나 그 집안에서 대대로 해온 바를 익히 보았으니, 계천繼遷이 배반했다가 다시 왕에 봉해졌고 원호元昊가 다시 배반했다가 국주國主가 되었으니 지금 만약 또 배반한다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나라를 거란契丹에 비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세 나라가 정립鼎立하는 형세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이 헤아려보건대 적의 속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저 이른바 ‘안으로 일의 형세를 헤아린다.’는 것은 대개 경력慶曆 연간에 전쟁을 치렀을 때를 가지고 현재 변방 방어의 대비와 견주어 저들과 우리의 허실虛實과 강약을 비교하여 승패의 형세를 아는 것입니다.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1005)에 전연澶淵에서 북로北虜(거란)와 맹약을 맺었고, 그 이듬해 처음으로 서하西夏의 화친을 받아들여서 드디어 휴전하는 데 힘썼고, 보원寶元 초에 이르러 원호元昊가 다시 배반하였으니, 그동안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천하가 무사한 데 안주하여 무비武備를 팽개쳐두고 보수하지 않았고 조정에는 모신謀臣이 없으며 변방에는 용장이 없었습니다.
장수는 어리석어 전투를 알지 못하고 병사는 교만하여 전진戰陣을 알지 못하여 무기는 낡아 썩었고 성곽은 허물어졌습니다.
게다가 원호는 용맹하고 교활한 오랑캐라 간특한 꾀를 품고서 중국을 노린 지가 여러 해였습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편안히 여겨서 염려하지 않고 저들의 계책이 이루어지고 병력이 갖추어져서 하루아침에 반란을 통고하는 국서國書가 올라온 뒤에야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중외中外가 크게 놀라 거동에 경황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전쟁하던 당초에 패배만 있고 승리는 없었습니다.
이윽고 조정이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 등을 기용하여 서변西邊의 일을 맡겨 이들이 힘을 다해 경영하고 용감한 사내와 날랜 장수들 또한 전진戰陣을 통하여 조금씩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몇 해 동안에 사람의 계책이 점차 성과를 거두고 무비武備가 점차 보수되어 지탱할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천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래서 뜻을 굽히고 치욕을 참고서 다시 적과 강화를 맺었으니, 이는 경력慶曆 연간의 일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현재 갑옷과 병기가 비록 단단하고 예리하게 정비되지는 못했으나 왕년에 낡고 썩었던 경우와는 같지 않고, 성곽과 보루는 그런대로 튼튼히 보수되었으니 왕년의 허물어졌던 경우와는 같지 않고, 변방 토착민 출신의 병사들을 더 모아서 훈련하였으니 왕년의 소수에다 나약하고 교만한 군사와는 같지 않고, 대소 장교들로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자가 왕왕 있으니 왕년의 부유한 집안 자제인 위소병魏昭炳하수夏隨 같은 자들과는 같지 않고, 한두 집정대신執政大臣들이 모두 당시에 힘을 썼던 자들로서 서변西邊의 일에 마음을 두고 익히 생각해왔으니 망연히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왕년의 대신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대개 왕년에는 변방의 일을 알지 못하는 모신謀臣으로써 전투를 알지 못하는 장수를 부리고 교만한 군병으로 낡은 무기를 잡게 하여 새로 일어난 교활한 도적을 막았으니, 이것이 패배한 까닭입니다.
지금은 모신‧무장武將과 성곽‧무기가 왕년과 같지 않고 광동狂童에 불과한 양조諒祚는 사려가 깊은 원호元昊에 못 미치며, 왕년에는 소홀히 여겨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또 적의 뜻을 미리 깨달아 일찍이 대비할 수 있으니, 진실로 배반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과연 배반한다면 반드시 중국에 이롭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때를 기회로 삼아 예전의 치욕을 씻고 훗날의 전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지만 계책을 어떻게 잘 세우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만약 위로 폐하의 신령한 위엄과 슬기로운 결단에 힘입어 양조와 그 신하들을 사로잡아서 종묘사직에 바칠 수 있다면 이것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은 황하黃河 북쪽으로 미친 도적(거란)을 쫓아내어 북방의 옛 땅을 수복하는 것이고, 가장 낮은 방책은 저들이 살고 있는 산계山界의 땅을 죄다 점령해서 그중 험준한 곳을 빼앗아 우리가 지켜서 변방의 우환을 길이 끊는 것입니다.
이는 신이 일의 형세를 헤아려 혹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신이 말한 ‘지난해의 이미 징험한 잘못을 거울삼는다.’는 것은 그 작은 잘못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이루 다 셀 수 없으니, 신은 그중에 큰 것을 말하겠습니다.
대저 오랑캐는 속임수를 잘 부려 군진軍陣이 교전할 때 저들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유인하면 우리는 이로움을 탐내어 추격하다가 혹 뜻하지 못한 적의 기습이 갑자기 나와서 요격邀擊을 당하기도 하고 혹 나아가서 사지에 빠져 속수무책의 곤경에 처하기도 하니, 이것이 지난날 우리 군사의 패전에 대해 경계할 바로 지금 전투에 밝고 익숙한 사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작은 일이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거니와 이른바 큰 계책이 어긋났다는 것은 공수攻守의 계책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신은 경력慶曆 연간의 변방 방비를 보건대 동쪽으로 인부麟府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진롱秦隴 끝에 이르기까지 땅의 길이가 1천여 리에 나누어 로 된 것이 다섯이고 가 나뉘어 이 된 것이 또 스물넷이고 주‧군이 나뉘어 가 되고 가 되고 이 된 것이 또 거의 2백이니 모두 군대를 두어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사가 비록 많더라도 나뉘지 않을 수 없고, 나뉨이 이미 많음에 수가 적어지지 않을 수 없거늘 적이 출전할 때에는 늘 그 나라의 무리들을 다 동원하여 하나로 합쳐서 옵니다.
이렇고 보면 우리의 군사는 비록 많으나 나뉘어져서 적고 적의 무리는 비록 적으나 모여서 많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많은 군사로 우리의 적은 군사를 공격하니 우리가 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성채城寨의 법이 이미 스스로 수비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게다가 5 대장이 이른바 전투병이라는 것은 나뉘어 24에 있으니, 합쳐서 출전하고자 하면 후방이 텅 비어 방비가 없을까 염려되고 각각 머물러 수비하고 그 나머지 병력을 모으고자 하면 숫자가 적어서 나가 공격하기에 부족하니, 당시에 여러 해 동안 용병用兵하면서도 한 번도 나가 공격하지 못했던 까닭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대저 나아가 공격하지도 못하고 물러나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니, 이것을 공수攻守에 모두 계책이 없다는 것으로 왕년이 이미 징험한 잘못입니다.
신이 말한 ‘지금 쓸 만한 계책’이란 것은 나가 공격하는 계책을 결정하는 데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먼저 일어나 적을 제압하는 계책을 써야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대개 병력을 나열하고 땅을 나누어 지키면 적이 때때로 나와서 그 사이에 우리 군사를 동요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곳곳마다 방비하게 하기를 늘 적이 공격해오는 것처럼 하게 할 터이니, 이렇게 되면 군사는 지치고 군량은 떨어지며 우리는 피로하고 적은 편안할 것입니다.
옛날 후주後周 세종世宗이 이 계책으로 회남淮南에서 이경李景을 곤경에 빠뜨렸고 근래 원호元昊도 이 계책을 써서 우리의 서쪽 변병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대저 군사를 나누어 적은 적을 방비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큰 해로움이니 그 해로움은 늘 우리 쪽에게 있고,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군사를 기다리는 것은 병가의 큰 이로움이니 그 이로움은 늘 상대편에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왕년에 적이 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진실로 그 일을 반대로 뒤집어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옮겨서 적에게 주고 적에게 이로운 것을 빼앗아 우리에게 둘 수 있다면, 우리는 응당 먼저 나가서 공격하는 계책을 써서 저들로 하여금 수비하는 데 지치게 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나가 공격하는 군사는 대거 움직여서는 안 되니 우리가 한 번 나갈 때마다 저들은 반드시 군사를 불러모아서 와서 막을 것입니다.
저들이 동쪽에 모이면 따로 군사를 내어 저들의 서쪽으로 나가며, 우리는 돌아오고 저들은 흩어지면 우리는 다시 나가고 저들은 다시 모일 터이니, 우리가 5의 군병으로 번갈아 쉬며 나갔다 들어왔다 하여 저 한 나라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였다 흩어졌다 분주히 움직이느라 잠시도 쉴 때가 없게 하면 피곤하지 않을 오랑캐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말한 ‘지금 쓸 만한 계책’입니다.
대개 왕년의 잘못은 수비한 데 있었고, 지금의 이로움은 공격하는 데 있습니다.
옛날 지도至道 연간(995~997)에도 일찍이 5의 군사가 나가 공격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 장상將相이 계책을 쓰는 게 치밀하지 못했으니, 대개 교활한 적으로 바야흐로 강성한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면서 먼저 계책으로 상대편을 곤란하게 하지 않고 곧바로 일전을 겨루어 반드시 승리하려는 계책을 써서 군사를 대거 동원하여 깊이 쳐들어갔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저 용병用兵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계책이 이미 신중하면 그 출동은 반드시 과감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출동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지형, 도로의 굽음과 곧음, 변방 민족과 한족 병마兵馬의 강약, 기병‧보졸과 긴 병기‧짧은 병기의 이로움 및 좌우전후로 한 번 나가고 한 번 들어오는 것과 개합開合하고 변화함에 정공도 있고 기습도 있는 등 무릇 용병의 형세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미리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폐하께서 한 중신重臣을 보내서 중신이 나아가 변방을 순찰하고 위무慰撫하면서 장수들을 두루 만나 깊이 의논해 도모하여 먼저 큰 계책을 정하되, 무릇 산천과 도로, 변방 민족과 한족의 보병과 기병,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마땅히 미리 알아야 할 바를 도면에 자세히 그려 방략方略을 올리게 하고, 그 나머지 미리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장수에게 맡겨서 형세를 보고 임기응변하며 적의 동태에 따라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그리고 양조諒祚가 하는 바로 말하자면, 조금 뜻을 굽혀 포용하여 저들의 뜻에 맞추어주어 저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해놓고 또 그 일을 조금 늦춤으로써 우리가 대비를 갖출 때를 기다리는 한편, 5에 엄히 경계하여 병사를 훈련하고 장수를 선발하며 무기를 손질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군사가 출동할 수 대책을 늘 갖추어두게 하소서.
그렇게 해두고 기다렸다가 저들의 반란을 통고하는 국서國書가 아침에 올라오면 우리 군사는 저녁에 출동하여 저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저들의 기운을 빼앗아서 지탱하기에도 겨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승세勝勢는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왕년에 의논하는 이도 횡산橫山의 변방 부락 사람을 불러 모아서 산계山界의 땅을 탈취할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건대 반드시 변방 부락 사람들을 불러모으고자 한다면 역시 먼저 승첩의 위세를 빌어서 중국의 위엄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해야 비로소 와서 붙좇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말한다면 역시 나가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여겨집니다.
무릇 신이 말씀드린 바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은 발이 변방을 밟은 적이 없고 눈이 전진戰陣을 보아서 안 적이 없으니, 일개 유생의 편견으로 하는 말로 본다면 진실로 반드시 채택될 만하지는 않은 줄 압니다.
단지 바야흐로 폐하께서 서쪽 변방의 일에 노심초사하시어 뭇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묻고 계신 때에 어리석은 생각이나마 다 말씀드려 추요芻蕘의 한마디 말로 삼고자 생각했을 뿐입니다.


역주
역주1 言西邊事宜 第一狀 : 이 글은 英宗 治平 2년(1065)에 지어졌다. 歐陽脩는 당시에 59세였고 參知政事를 맡고 있었다.
역주2 趙充國度羌虜十二事 : 趙充國은 漢나라 때 隴西縣 上邽 사람으로 字는 翁孫이다. 武帝 때에 匈奴 정벌에 공을 세워 中郞將이 되었고, 宣帝 초기에는 천자를 옹립한 공으로 營平侯에 봉해졌다. 宣帝 때 오랑캐 先零이 여러 羌族과 함께 작은 종족 등을 협박하여 모두 한나라를 배반하게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충국이 70여 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詔書를 받들어 반란 진압에 나섰다. 그가 金城에 갔을 때 屯田 시행에 관하여 열두 가지 방략을 건의하였는데, 兵農一致 정책을 시행하자는 것이 그 골자였다. 《漢書 趙充國傳》 이 방략은 《漢書》에 “條不出兵留田便宜十二事”로 되어 있는데, 원래 제목이 〈屯田十二便宜策〉이다.
역주3 諒祚狂僭 : 本書 권3 〈乞獎用孫沔箚子〉 題下註 참조.
역주4 彛興克叡 : 彛興은 성이 李氏이고 본래 夏州 사람으로 彛超의 아우이다. 본명은 彛殷이었는데 宋 宣帝의 이름이 殷이었으므로 피휘하여 고쳤다. 本姓은 拓跋氏였는데 唐 貞觀 초에 拓拔赤辭란 자가 당나라로 귀순하니 太宗이 李氏를 姓으로 하사하고 靜州와 邊州 등을 주어서 처우하였다. 그 후 夏州에 거주하는 자를 平夏部라 불렀다. 당나라 말엽에 拓跋思恭이 夏州를 다스리면서 銀州‧夏州‧綏州‧宥州‧靜州를 통괄하였다.
克叡는 이흥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서 지위를 물려받았다. 극예는 初名은 光叡였는데 송 태종의 이름이 光이었으므로 避諱하여 고쳤으며, 부친 이흥이 죽은 뒤 權知州事로부터 檢校太保‧定難軍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송 태종은 본명이 匡義인데, 光義로 고쳤다가, 즉위한 뒤에 다시 炅으로 고쳤다. 《宋史 外國傳》
역주5 繼捧繼遷 : 繼捧과 繼遷은 모두 李繼筠의 아우이다. 송 태종 때 계봉이 송나라로 조회 왔고 계천은 도망쳐 망명하였다. 태종이 계봉을 보내 계천을 불렀고 그래도 오지 않자 여러 차례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眞宗 咸平 5년(1002)에 송나라를 침공하여 靈州‧定州‧懷遠 등지를 함락시켰으나 麟州의 일전에서 크게 패전하였다. 이때 화살을 맞고 潘羅支에게 살해되었다. 《宋史 外國傳》
역주6 狂童 : 《詩經》 〈鄭風 褰裳〉에 “그대가 진정 나를 그리워할진댄, 치마를 걷어올리고 溱水를 건너가겠지만, 그대가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진댄, 어찌 다른 남자가 없으리오. 狂童이 미쳤구나.[子惠思我 褰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 狂童之狂也且]” 한 데서 온 말로 미친 짓을 하는 아이란 뜻이다.
역주7 蕃落 : 변방 이민족 출신의 군사를 말한다.
역주8 : 本集에는 ‘屢’자로 되어 있다.
역주9 秦隴 : 秦嶺과 隴山의 병칭으로 現 陝西와 甘肅 일대이다.
역주10 : 本集에는 ‘二’자로 되어 있다.
역주11 : 宋‧元 때 행정구역 이름이다. 송나라 때의 路는 明‧淸 때의 省과 같고 元나라 때의 路는 명‧청 때의 府와 같다.
역주12 州軍 : 宋나라 때의 지방 행정구역의 명칭들이다. 宋나라는 全國을 18路로 나누고 路 아래에 州‧府‧軍‧監 322곳을 두었다.
역주13 昔周世宗以此策困李景於淮南 : 世宗은 성명이 柴榮이며 後周의 황제로 954~ 959년까지 재위하였다. 후주는 五代의 마지막 왕조이고 후주 세종은 오대를 통틀어 제일의 명군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英明한 임금으로 특히 儒學과 문장에 뛰어난 선비들을 불러 모아서 제도를 고찰하고 禮樂을 바로잡는 등 후세에 본받을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宋史》 〈李景傳〉에 “顯德 2년(955)에 후주 세종이 淮南을 정벌하여 正陽에서 李景의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진격하여 壽州를 포위하였다.” 하였다.
역주14 如此 : 本集에는 이 뒤에 ‘爾’자가 있다.
역주15 芻蕘之一說 : 芻蕘는 꼴을 베고 나무를 하는 사람으로 하찮은 사람을 뜻한다. 즉 아무리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쓸 만한 말이 있으므로 성인은 이를 취한다는 뜻이다. 《詩經》 〈大雅 板〉에 “선민이 말씀하셨나니, 꼴 베고 나무하는 사람에게도 묻는다.[先民有言 詢于芻蕘]” 한 데서 온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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