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明因塔에 以因無他戒行及有禪慧라 故特本其所言하야 以感慨今古云이라
始爲童子
에 辭家人
하고 入洛陽妙覺禪院
하야 依眞行大師惠璿
하야 學浮圖法
하고 五年
에 始去氏
하야 削髮入僧籍
하고
後二十四年
에 하야 遂主其衆
하고 又四年
에 賜號明因
하야 하니 凡爲僧
이 三十有一年
이라
始道詮未死時에 予過其廬하야 問其年幾何하니 曰五十有二矣요 問其何許人也하니 曰本太原農家也라
然其勤生以儉嗇하며 朴厚而純固하야 最得古之遺風이라
曰 樹麻而衣하며 陶瓦而食하며 築土而室하야 甘辛苦薄滋味하고
歲耕日穡하야 有餘則窖而藏之하야 率千百年不輒發하니
又言 爲兒時
에 聞長老語晉自春秋爲盛國
이러니 하고 이러니
故民熟兵鬪
하야 饟軍死戰
하야 勞苦幾百年不得息
이러니 旣而
出
에 四方次第平
이라
一日兵臨城門
하야 하니 幷民然後被政敎
하야 棄兵專農
하고 休息勞苦
하야 爲太平之幸人
이라
幷平後二歲에 我始生하고 幼又依浮圖하야 生不見干戈하고 長不執耒耜하며 衣不麻하고 食不瓦하며 室不土하고 力不穡而休하니 乃幷人之又幸者也라
及其葬하야 其徒有求予誌其始終者일새 因幷書其嘗語予者하고 志歲月云爾라
〈명인대사탑기明因大師塔記〉를 지음에 그에게 다른 계행戒行이나 선혜禪慧가 없었으므로, 단지 그가 말한 내용에 근본하여 고금古今에 대해 감개感慨한 것이다.
명인대사明因大師 도전道詮은 속성俗姓이 위씨衛氏이니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의 민가民家 자제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신사년辛巳年(981)에 태어나 명도明道 계유년癸酉年(1033) 정월에 입적하니 세수世壽 53세였다.
처음 동자童子 시절에 가족들과 작별하고 낙양洛陽의 묘각선원妙覺禪院에 들어가 진행대사眞行大師 혜선惠璿에게 의지하여 불법佛法을 배우고 함평咸平 5년(1002)에 비로소 속성俗姓을 버리고서 머리를 깎고 승적僧籍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4년 뒤에 자색紫色 가사袈裟를 하사받아 마침내 승려들의 종주宗主가 되었고, 또 4년 뒤에 명인明因이라는 법호法號를 하사받아 겸하여 우가右街 교단의 일을 통솔하니, 승려로서 산 세월이 31년이었다.
입적한 다음 해에 그 문도門徒들이 화장한 뼈를 성 남쪽 용문산龍門山 아래에 장사 지냈다.
이보다 앞서 도전道詮이 입적하지 않았을 때에 내가 그가 사는 곳을 방문하여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52세라 대답하였고, 어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본디 태원太原의 농가農家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서 그에게 말하기를 “《시경詩經》 〈당풍唐風〉에 이르기를 ‘진晉나라는 당唐나라의 풍속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요堯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었다.’라고 하였고, 또 그 시가 검소함으로 풍자한 내용이 많다.
그리하여 그 풍속은 생활이 근실하여 검소하며 소박하고 근후勤厚하여 순수하고 견고해서 옛날의 유풍遺風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시경》이 찬집된 때가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데 아직도 《시경》이 찬집된 때와 풍속이 같은가?
아니면 그곳 또한 세상을 따라 풍속이 바뀌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전이 말하기를 “마麻를 심어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질그릇을 구워 거기에 음식을 담아 먹으며 흙을 쌓아올려 집을 만들면서 고생스러움을 달게 받아들이며 음식을 박하게 먹고,
해마다 경작하고 날마다 농사지어 남는 것이 있으면 움을 파서 보관하여 천백년千百年이 지나는 시간 동안 쉽게 꺼내어 쓰지 않는 풍속이 이어지니,
그 부지런하고도 검소함은 진실로 옛날의 유풍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제가 어린아이 시절에 들으니 어른이 말하기를 ‘진晉나라는 춘추春秋시대로부터 흥성한 나라였는데 당唐나라가 병주幷州를 기반으로 흥기하여 대대로 이곳을 북경北京으로 삼았고, 주씨朱氏가 중원中原을 차지하자 후당後唐이 병주幷州에 의지하여 군웅群雄이 되어 또한 마침내 왕 노릇을 하였다.
얼마 지나 후진後晉의 고조高祖가 또 이곳에서 왕 노릇하였고 후한後漢이 또 왕 노릇하였으니, 때를 만난 연고로 서로 차례를 이으며 3명의 천자가 나왔다.
그리고 유숭劉崇 부자父子가 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
때문에 백성들이 전쟁에 익숙하여 군대에 군량을 대고 죽기로 싸워 고생과 괴로움이 거의 백 년 동안이나 그치지 않더니, 이윽고 성군聖君께서 출현하심에 사방이 차례대로 평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宋나라의 군사가 성문城門에 와서 유계원劉繼元을 잡아 돌아가니, 병주幷州의 백성들이 그런 뒤에 교화를 입어 병기를 버리고 농사일에 전념하고 고생과 괴로움을 그치고 쉬면서 태평시대를 만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주가 평정된 지 2년 뒤에 제가 비로소 태어났고 어려서 또 불가에 의지하여, 태어나서는 병장기를 보지 못하였고 장성하여서는 농기구를 잡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밥그릇은 질그릇을 쓰지 않았으며, 집은 흙집이 아니었고 농사일에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쉬었으니, 바로 병주 사람 중에서도 더욱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곧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이 질박하고 자세한 것을 좋아하여, 뒷날 다시 거처를 찾아가니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어보니 죽었다고 하는지라 슬픈 마음이 일었다.
그를 장사 지낼 때에 그의 문도 중에 나에게 그의 일생을 기록해주기를 청하는 자가 있기에, 일찍이 그가 나에게 한 말을 아울러 적고 그와 만남을 가진 연월年月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