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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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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記明因塔 以因無他戒行及有禪慧 故特本其所言하야 以感慨今古云이라
明因大師道詮 姓衛氏 民家子
始爲童子 辭家人하고 入洛陽妙覺禪院하야 依眞行大師惠璿하야 學浮圖法하고 五年 始去氏하야 削髮入僧籍하고
後二十四年 하야 遂主其衆하고 又四年 賜號明因하야 하니 凡爲僧 三十有一年이라
卒之明年 其徒以骨葬城南龍門山下러라
始道詮未死時 予過其廬하야 問其年幾何하니 曰五十有二矣 問其何許人也하니 曰本太原農家也
因與語曰 하고 且詩多以儉刺
然其勤生以儉嗇하며 朴厚而純固하야 最得古之遺風이라
今能言其土風乎
其民俗何若
信若詩之所謂乎
詩去今餘千歲矣로되 猶若詩之時乎
其亦隨世而遷變也
曰 樹麻而衣하며 陶瓦而食하며 築土而室하야 甘辛苦薄滋味하고
歲耕日穡하야 有餘則窖而藏之하야 率千百年不輒發하니
其勤且儉 誠有古之遺風 至今而不變也라하고
又言 爲兒時 聞長老語晉自春秋爲盛國이러니 하고 이러니
하니 遭時之故 相次出러라
故民熟兵鬪하야 饟軍死戰하야 勞苦幾百年不得息이러니 旣而 四方次第平이라
一日兵臨城門하야 하니 幷民然後被政敎하야 棄兵專農하고 休息勞苦하야 爲太平之幸人이라
幷平後二歲 我始生하고 幼又依浮圖하야 生不見干戈하고 長不執耒耜하며 衣不麻하고 食不瓦하며 室不土하고 力不穡而休하니 乃幷人之又幸者也
今老矣且病하니 卽死無恨이라하야늘
予愛其語朴而詳하야 他日復過其廬하니 莫見也
訪之曰死矣 爲之惻然호라
及其葬하야 其徒有求予誌其始終者일새 因幷書其嘗語予者하고 志歲月云爾


11. 명인대사탑明因大師塔에 대한 기문記文
명인대사탑기明因大師塔記〉를 지음에 그에게 다른 계행戒行이나 선혜禪慧가 없었으므로, 단지 그가 말한 내용에 근본하여 고금古今에 대해 감개感慨한 것이다.
명인대사明因大師 도전道詮속성俗姓위씨衛氏이니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민가民家 자제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신사년辛巳年(981)에 태어나 명도明道 계유년癸酉年(1033) 정월에 입적하니 세수世壽 53세였다.
처음 동자童子 시절에 가족들과 작별하고 낙양洛陽묘각선원妙覺禪院에 들어가 진행대사眞行大師 혜선惠璿에게 의지하여 불법佛法을 배우고 함평咸平 5년(1002)에 비로소 속성俗姓을 버리고서 머리를 깎고 승적僧籍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4년 뒤에 자색紫色 가사袈裟를 하사받아 마침내 승려들의 종주宗主가 되었고, 또 4년 뒤에 명인明因이라는 법호法號를 하사받아 겸하여 우가右街 교단의 일을 통솔하니, 승려로서 산 세월이 31년이었다.
입적한 다음 해에 그 문도門徒들이 화장한 뼈를 성 남쪽 용문산龍門山 아래에 장사 지냈다.
이보다 앞서 도전道詮이 입적하지 않았을 때에 내가 그가 사는 곳을 방문하여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52세라 대답하였고, 어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본디 태원太原농가農家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서 그에게 말하기를 “《시경詩經》 〈당풍唐風〉에 이르기를 ‘나라는 나라의 풍속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었다.’라고 하였고, 또 그 시가 검소함으로 풍자한 내용이 많다.
그리하여 그 풍속은 생활이 근실하여 검소하며 소박하고 근후勤厚하여 순수하고 견고해서 옛날의 유풍遺風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지금 그 지방의 풍속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백성들의 풍속은 어떠한가?
참으로 《시경》에서 말한 것과 같은가?
《시경》이 찬집된 때가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데 아직도 《시경》이 찬집된 때와 풍속이 같은가?
아니면 그곳 또한 세상을 따라 풍속이 바뀌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도전이 말하기를 “를 심어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질그릇을 구워 거기에 음식을 담아 먹으며 흙을 쌓아올려 집을 만들면서 고생스러움을 달게 받아들이며 음식을 박하게 먹고,
해마다 경작하고 날마다 농사지어 남는 것이 있으면 움을 파서 보관하여 천백년千百年이 지나는 시간 동안 쉽게 꺼내어 쓰지 않는 풍속이 이어지니,
그 부지런하고도 검소함은 진실로 옛날의 유풍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제가 어린아이 시절에 들으니 어른이 말하기를 ‘나라는 춘추春秋시대로부터 흥성한 나라였는데 나라가 병주幷州를 기반으로 흥기하여 대대로 이곳을 북경北京으로 삼았고, 주씨朱氏중원中原을 차지하자 후당後唐병주幷州에 의지하여 군웅群雄이 되어 또한 마침내 왕 노릇을 하였다.
얼마 지나 후진後晉고조高祖가 또 이곳에서 왕 노릇하였고 후한後漢이 또 왕 노릇하였으니, 때를 만난 연고로 서로 차례를 이으며 3명의 천자가 나왔다.
그리고 유숭劉崇 부자父子가 또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
때문에 백성들이 전쟁에 익숙하여 군대에 군량을 대고 죽기로 싸워 고생과 괴로움이 거의 백 년 동안이나 그치지 않더니, 이윽고 성군聖君께서 출현하심에 사방이 차례대로 평정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의 군사가 성문城門에 와서 유계원劉繼元을 잡아 돌아가니, 병주幷州의 백성들이 그런 뒤에 교화를 입어 병기를 버리고 농사일에 전념하고 고생과 괴로움을 그치고 쉬면서 태평시대를 만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주가 평정된 지 2년 뒤에 제가 비로소 태어났고 어려서 또 불가에 의지하여, 태어나서는 병장기를 보지 못하였고 장성하여서는 농기구를 잡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밥그릇은 질그릇을 쓰지 않았으며, 집은 흙집이 아니었고 농사일에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쉬었으니, 바로 병주 사람 중에서도 더욱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곧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이 질박하고 자세한 것을 좋아하여, 뒷날 다시 거처를 찾아가니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어보니 죽었다고 하는지라 슬픈 마음이 일었다.
그를 장사 지낼 때에 그의 문도 중에 나에게 그의 일생을 기록해주기를 청하는 자가 있기에, 일찍이 그가 나에게 한 말을 아울러 적고 그와 만남을 가진 연월年月을 기록한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景祐 원년(1034)에 지은 것이다. 明因大師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 외에는 未詳이다.
역주2 幷州文水縣 : 幷州는 山西省의 옛 이름으로 宋나라 때에 河東路에 속했다. 文水縣은 그 屬縣으로 지금도 이름이 같다.
역주3 生於太平興國辛巳之歲 終於明道癸酉之正月 : 太平興國은 宋 太宗의 연호로 辛巳는 태평흥국 6년에 해당한다. 明道는 仁宗의 연호로 癸酉는 명도 2년에 해당한다.
역주4 咸平 : 宋 眞宗의 연호이다.
역주5 賜紫衣 : 조정으로부터 紫衣를 하사받는 것은 高僧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唐 則天武后가 法朗 등 아홉 사람에게 紫袈裟와 銀魚袋를 내린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역주6 兼領右街敎門事 : 당시에 불교 교단을 左街와 右街로 나누고 僧錄司라는 직위를 두어 각각 교단의 일을 통솔하게 하였다.
역주7 詩唐風……其民被堯之德化 : 《詩經》 〈唐風〉의 毛序에 이르기를 “이것은 晉나라 詩인데 唐風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진나라의 풍속이 唐나라의 風俗에 근본하여 근심이 깊고 생각이 원대하며 검소하면서도 禮를 따르고 堯임금의 遺風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周 成王이 아우 叔虞를 唐에 봉하였는데, 숙우의 아들인 燮父가 晉水 쪽으로 옮기면서 晉侯라고 부르게 되었다. 唐은 옛날 요임금이 다스리던 나라이다.
역주8 至唐基幷以興 世爲北京 : 唐 高祖 李淵은 隋나라 때에 太原留守로 있었고 태원에서 거병하여 천하를 얻어 唐나라를 개창하였다. 唐代에는 太原을 北京으로 삼았다.
역주9 及朱氏有中土……亦卒以王 : 唐나라 말기의 절도사였던 朱全忠이 중원을 차지하여 황제를 칭하고 後梁을 세워 汴京에 도읍하였으며, 그의 경쟁 세력이던 李存勖이 또 幷州를 근거로 하여 後唐을 개창하고 莊宗이 되었다. 後梁은 後唐에게 멸망당하였다.
역주10 旣而晉祖又以王 漢又以王 : 石敬瑭이 太原을 근거로 하여 後唐을 멸망시키고 後晉을 세워 高祖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劉知遠이 後晉을 멸망시키고 後漢을 세웠다.
역주11 三天子 : 李存勖, 石敬瑭, 劉知遠을 가리킨다. 세 사람 모두 太原을 근거지로 하여 천자가 되었다.
역주12 劉崇父子 又自爲國 : 劉崇은 後漢을 세운 劉知遠의 아우이다. 후한의 2대 황제인 隱帝가 신하들에게 피살되자 郭威가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곽위는 유숭의 아들 劉贇을 황제로 옹립하였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後周를 건국하였다. 그러자 河東節度使로 太原에 주둔하고 있던 유숭이 후한의 부흥을 주창하며 스스로 황제가 되어 北漢을 건국하였다. 유숭이 죽자 차남인 劉鈞이 새로 황제가 되어 後周와 그 뒤를 이은 宋과 대립하였다. 여기에서 유숭 부자는 유숭과 유균을 가리킨다.
역주13 聖人 : 宋 太祖 趙匡胤을 가리킨다.
역주14 係繼元以歸 : 北漢의 2대 황제 劉鈞이 죽은 뒤 養子 劉繼恩이 황위를 계승하였지만 곧 살해당하였고 또 다른 양자 劉繼元이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북한의 세력은 점점 위축되다가 결국 979년 宋나라의 2대 황제 太宗이 이끈 군대의 공격을 받고 항복하였다. 劉繼元은 후에 송나라의 彭城公에 봉해져 천수를 누렸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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