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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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識好
問 春秋何爲 曰 吾不知也로라
問者曰 此學者之所盡心焉이어늘 不知 何也 曰 春秋之起止 吾所知也어니와 子所問者 始終之義 吾不知也 吾無所用心乎此也
昔者 孔子仕於魯 不用이라 去之諸侯한대 又不用이라
하고 하고 記自隱公至于獲麟일새 遂刪修之하니
其前遠矣 聖人著書 足以法世而已 不窮遠之難明也
故據其所得而修之하니
孔子非이라 不常職乎史
故盡其所得하야 修之而止耳
魯之史記 則未嘗止也
曰 然則始終無義乎 曰 義在春秋 不在起止하니 春秋
予厭衆說之亂春秋者也
盾止之弑 據經而廢傳하니
經簡矣 待傳而詳이어늘
可廢乎 曰 吾豈盡廢之乎리오
夫傳之於經 勤矣 其述經之事 時有賴其詳焉이어니와 至其失傳하얀 則不勝其戾也
其述經之意 亦時有得焉이어니와 及其失也하얀 欲大聖人而反小之하고 欲尊經而反卑之하니
取其詳而得者하고 廢其失者 可也 嘉其尊大之心 可也 信其卑小之說 不可也
問者曰 傳有所廢 則經有所不通이리니 奈何 曰 經不待傳而通者十七八이요 因傳而惑者十五六이라
日月 萬物皆仰이나 然不爲盲者明이요 而有物蔽之者 亦不得見也
聖人之意 皎然乎經이나 惟明者見之 不爲他說蔽者見之也


04. 《춘추春秋》에 대한 혹문或問
식견識見이 좋다.
혹자가 묻기를 “《춘추春秋》는 어찌하여 은공隱公에서 시작하여 획린獲麟에서 끝마쳤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묻는 자가 말하기를 “이는 학자가 마음을 다해야 할 바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춘추春秋》의 기사記事가 시작되고 끝마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이지만, 그대가 물은 바는 시작되고 끝마친 의의이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여기에 마음을 쓴 바가 없다.
옛적 공자孔子나라에서 벼슬할 때에 쓰이지 못하였으므로 제후諸侯에게 갔는데 또 쓰이지 못하였다.
곤궁해져 돌아오니 또 노쇠하였는지라 비로소 저술하였다.
시경詩經》은 〈관저關雎〉에서부터 〈노송魯頌〉까지 얻었고, 《서경書經》은 〈요전堯典〉에서부터 〈비서費誓〉까지 얻었고, 나라의 역사는 은공隱公에서부터 기록하여 획린獲麟까지 기록된 것을 얻었으므로 마침내 산정刪定하여 편수編修하였다.
전대前代는 너무 먼 일인지라 성인의 저술은 세상의 법이 되기에 충분하면 될 뿐, 밝히기 어려운 먼 전대의 일을 궁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얻은 바에 의거하여 편수하였다.
공자孔子사관史官이 아니었기에 역사를 찬술하는 일에 종사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얻은 바를 다하여 편수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라의 역사 기록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으니, 지금 《좌씨전左氏傳》에서 그 기록들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그렇다면 시작과 마침에는 별다른 의의가 없는 것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의의는 《춘추春秋》에 있는 것이지 기사가 시작되고 끝마침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니, 《춘추春秋》는 한마디 말을 삼가서 만세에 신표가 된 것이다.
나는 많은 설이 《춘추》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그대는 은섭隱攝, 조돈趙盾, 의 시해에 대해 에만 의거하고 은 무시하였다.
그러나 은 간략하기 때문에 이 있은 뒤에라야 상세해진다.
그런데도 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 어찌 을 다 무시할 수 있겠는가?
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부연설명한 글이니, 의 일을 서술한 것 중에는 때때로 타당한 것도 있지만 잘못 해석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어그러진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의 뜻을 서술한 것 중에도 때로는 상세한 기록의 덕을 보기도 하지만, 잘못 해석한 것에 이르러서는 성인을 크게 하려다가 도리어 작게 만들어버리고 을 높이려다가 도리어 낮게 만들어버렸다.
상세하여 타당한 것을 취하고 잘못 해석한 것을 무시하는 것도 옳고, 경을 높이고 성인을 크게 하려고 했던 마음을 가상히 여기는 것도 옳지만, 경을 낮게 만들고 성인을 작게 만든 설을 신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묻는 자가 말하기를 “을 무시하는 바가 있으면 에 통하지 않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어찌하겠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 없어도 뜻이 통하는 것은 열에 일고여덟이고, 때문에 의혹이 생기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다.
해와 달은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지만, 맹인盲人에게는 밝은 것이 아니고 가리는 물건이 있으면 또한 보지 못한다.
성인의 뜻이 에 명백하게 드러났으나 눈이 밝은 자만이 볼 수 있고, 다른 설에 가려진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春秋或問 : 이 글은 〈春秋論〉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작품이다. 或問은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견해를 진술하는 방식의 하나로 반드시 실제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역주2 始於隱公 而終於獲麟 : 《春秋》의 記事는 魯 隱公 元年(B.C. 722)에서부터 시작하여 魯 哀公 14년(B.C. 481) 麒麟을 포획하였다는 데서 끝났다. 哀公 14년의 기록에 “봄에 서쪽으로 사냥 가서 麒麟을 포획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春秋》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고 이 다음부터는 기록되지 않았다. 麒麟은 전설상의 仁獸이다.
역주3 昔者……始著書 : 《史記》 권47 〈孔子世家〉에 의하면, 孔子는 56세에 魯나라의 大司寇가 되어 相事를 섭행하였고, 執政 季桓子가 齊나라가 보내온 女樂을 받아들인 일로 魯나라를 떠나 諸侯들을 遍歷하다가 魯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인 70세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詩經》과 《書經》을 편수하고, 《禮記》와 《樂記》를 산정하였으며, 《周易》을 찬술하고, 《春秋》를 지었다.
역주4 得詩 自關雎至于魯頌 : 孔子는 《詩經》을 얻어 단지 刪削만 하였고, 그 編次는 한결같이 옛것을 따랐다. 〈關雎〉는 《詩經》 〈周南〉의 篇名으로 《詩經》의 첫 번째 작품이다. 〈魯頌〉은 《詩經》의 頌 가운데 하나로 모두 4편이다. 《詩經》 序文에서는 〈魯頌〉의 모든 작품을 魯 僖公을 찬양한 작품으로 생각하였다. 지금의 《詩經》은 〈商頌 殷武〉에서 끝나는데, 여기에서 “〈魯頌〉에까지 이르렀다.”라고 한 것은 작자의 誤記일 것이다.
역주5 得書 自堯典至於費誓 : 孔子는 《書經》을 얻어 단지 刪削만 하였고, 次序는 조정하지 않았다. 원래의 《書經》은 지금보다 많았는데, 孔子가 직접 刪定하여 그 가운데 100편을 취하였다. 〈堯典〉은 《書經》의 篇名으로 가장 첫 번째 편이며 堯舜시대의 政事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晉나라 때 뒷부분 반절을 따로 떼어내고 28자를 더하여 〈舜典〉으로 독립시켰다. 〈費誓〉 역시 《書經》의 篇名으로 周公의 아들 伯禽이 淮夷와 徐戎을 토벌하면서 魯나라 費 땅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한 말이다. 지금의 《書經》은 〈秦誓〉에서 끝나고 있다.
역주6 魯史 : 魯나라의 史官이 기록한 魯나라 및 春秋時代 각국의 史實을 가리킨다.
역주7 史官 : 本集에는 ‘史官’ 다음에 ‘也’자가 더 있다.
역주8 今左氏經 可以見矣 : 《春秋》의 記事는 魯 哀公 14년(B.C. 481)에서 끝났지만, 《左氏傳》은 魯 哀公 27년(B.C. 468)에서 끝난다. 《左氏經》은 바로 《좌씨전》을 말한다. 歐陽脩는 일반적으로 左氏가 쓴 《春秋》의 해설에 대해 《左氏傳》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左氏經》이라고 한 것은 착오일 것이다.
역주9 謹一言而信萬世者也 : 《春秋》에서는 글자 하나를 사용하는 데에도 신중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신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역주10 (予)[子] : 저본에 ‘予’자로 되어 있는데, ‘子’의 오자이므로 고쳤다.
역주11 隱攝 : 隱公을 가리킨 말로 은공이 攝政했다고 하여 이렇게 지칭한 것이다. 은공은 惠公의 繼室인 聲子의 소생으로, 仲子의 소생인 桓公을 임금으로 세워 부친의 뜻을 이루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환공이 어렸기 때문에 그를 太子로 세우고 대신 攝政하였다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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