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子之學은 或施之事業하며 或見於文章하되 而常患於難兼也라
故其常視文章爲末事하고 而又有不暇與不能者焉이어니와
至於失志之人이 窮居隱約하야 苦心危慮하야 而極於精思와 與其有所感激發憤을 惟無所施於世者하얀 皆一寓於文辭라
如
하고 而
하니 彼四人者
도 猶不能兩得
이온 況其下者乎
아
其決大事하며 定大議에 嘉謀讜論이 著在國史하고 而遺風餘烈이 至今稱於士大夫라
自少以文行推於鄕里하고 旣擧進士하여 獻其文百軸於有司하니 由是로 名動京師하다
公之事業은 顯矣어니와 其於文章에 氣質純深而勁正하니 蓋發於其志라 故如其爲人이라
公之文旣多로되 而往往流散於人間이어늘 公期能力收拾하니
蓋
에 始克類次而集之爲四十卷
하니 公期可謂能世其家者也
로다
04. 설간숙공薛簡肅公의 문집文集에 대한 서문
대략 〈한창려시서韓昌黎詩序〉에 근본한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혹 사업에 시행되며 혹 문장에 드러나지만 늘 겸하기 어려운 것이 걱정이다.
대개 좋은 때를 만난 선비는 공렬功烈이 조정에 드러나고 명성이 역사서에 빛난다.
그러므로 늘 문장을 보고서 말사末事로 여겼고, 게다가 겨를이 없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뜻을 잃은 선비가 궁벽한 곳에 곤궁하게 살면서 고심苦心하고 고사苦思해서 생각을 지극히 정밀히 한 것과 감격感激하고 발분發憤한 것을 세상에 베풀 곳이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결같이 문장에 의탁한다.
그러므로 곤궁한 사람의 말은 공교工巧하기가 쉽다고 말한다.
당唐나라의 유우석劉禹錫과 유종원柳宗元 같은 사람은 사업에는 일컬어질 것이 없고, 요숭姚崇과 송경宋璟 같은 사람은 문장에는 드러남이 없었으니, 저 네 사람도 오히려 둘 다 이루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오직 간숙공簡肅公만은 진종眞宗 때에 재능才能으로 명신名臣이 되었고, 인종仁宗의 모후母后 때에 강직과 정직으로 현명한 보상輔相이 되었다.
대사大事를 결정하고 대의大議를 결정할 때에 훌륭한 계책과 정직한 말이 국사國史에 드러나 있고, 유풍遺風과 공렬功烈이 지금까지 사대부들에게 일컬어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문장과 행실로 향리에서 인정받았고, 이미 진사進士에 급제해서는 문文 100편을 유사有司에게 바쳤으니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경사京師에 진동하였다.
평생 지은 문文이 800여 편에 이르니 어쩌면 이리도 성대한가.
〈문장과 사업을〉 둘 다 이루었다고 이를 만하다.
공公의 사업은 드러났지만 문장에 있어서는 기질氣質이 순수하고 강직하였으니, 대개 그 뜻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그 사람의 인품과 같았다.
공公은 아들 의유宜孺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후사後嗣가 없어서 조카 중유仲孺 공기公期를 후사로 삼았다.
공公의 문文이 이미 많지만 왕왕 사람에게 흩어져 있었는데, 공기公期가 힘을 다해 수습하였다.
대개 공公이 죽은 뒤 30년 만에 비로소 분류하고 편차하여 모아 40권으로 만들었으니, 공기公期는 집안을 잘 이었다고 이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