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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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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大約本韓昌黎詩序中來
君子之學 或施之事業하며 或見於文章하되 而常患於難兼也
蓋遭時之士 功烈顯於朝廷하며 名譽光於竹帛이라
故其常視文章爲末事하고 而又有不暇與不能者焉이어니와
至於失志之人 窮居隱約하야 苦心危慮하야 而極於精思 與其有所感激發憤 惟無所施於世者하얀 皆一寓於文辭
故曰 라하니라
하고하니 彼四人者 猶不能兩得이온 況其下者乎
其決大事하며 定大議 嘉謀讜論 著在國史하고 而遺風餘烈 至今稱於士大夫
絳州正平人也
自少以文行推於鄕里하고 旣擧進士하여 獻其文百軸於有司하니 由是 名動京師하다
其平生所爲文 至八百餘篇하니 何其盛哉
可謂兼於兩得也로다
公之事業 顯矣어니와 其於文章 氣質純深而勁正하니 蓋發於其志 故如其爲人이라
러니 早卒이라
無後하야 以其弟之子仲孺公期爲後하다
公之文旣多로되 而往往流散於人間이어늘 公期能力收拾하니
始克類次而集之爲四十卷하니 公期可謂能世其家者也로다
嗚呼
公爲有後矣로다


04. 설간숙공薛簡肅公문집文集에 대한 서문
대략 〈한창려시서韓昌黎詩序〉에 근본한 것이다.
군자의 학문은 혹 사업에 시행되며 혹 문장에 드러나지만 늘 겸하기 어려운 것이 걱정이다.
대개 좋은 때를 만난 선비는 공렬功烈이 조정에 드러나고 명성이 역사서에 빛난다.
그러므로 늘 문장을 보고서 말사末事로 여겼고, 게다가 겨를이 없고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뜻을 잃은 선비가 궁벽한 곳에 곤궁하게 살면서 고심苦心하고 고사苦思해서 생각을 지극히 정밀히 한 것과 감격感激하고 발분發憤한 것을 세상에 베풀 곳이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결같이 문장에 의탁한다.
그러므로 곤궁한 사람의 말은 공교工巧하기가 쉽다고 말한다.
나라의 유우석劉禹錫유종원柳宗元 같은 사람은 사업에는 일컬어질 것이 없고, 요숭姚崇송경宋璟 같은 사람은 문장에는 드러남이 없었으니, 저 네 사람도 오히려 둘 다 이루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오직 간숙공簡肅公만은 진종眞宗 때에 재능才能으로 명신名臣이 되었고, 인종仁宗모후母后 때에 강직과 정직으로 현명한 보상輔相이 되었다.
대사大事를 결정하고 대의大議를 결정할 때에 훌륭한 계책과 정직한 말이 국사國史에 드러나 있고, 유풍遺風공렬功烈이 지금까지 사대부들에게 일컬어지고 있다.
강주絳州 정평正平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과 행실로 향리에서 인정받았고, 이미 진사進士에 급제해서는 100편을 유사有司에게 바쳤으니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경사京師에 진동하였다.
평생 지은 이 800여 편에 이르니 어쩌면 이리도 성대한가.
〈문장과 사업을〉 둘 다 이루었다고 이를 만하다.
의 사업은 드러났지만 문장에 있어서는 기질氣質이 순수하고 강직하였으니, 대개 그 뜻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그 사람의 인품과 같았다.
은 아들 의유宜孺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후사後嗣가 없어서 조카 중유仲孺 공기公期를 후사로 삼았다.
이 이미 많지만 왕왕 사람에게 흩어져 있었는데, 공기公期가 힘을 다해 수습하였다.
대개 이 죽은 뒤 30년 만에 비로소 분류하고 편차하여 모아 40권으로 만들었으니, 공기公期는 집안을 잘 이었다고 이를 만하다.
아!
에게는 훌륭한 후사가 있구나.


역주
역주1 : 이 글은 宋 神宗 熙寧 4년(1071) 5월에 지은 것이다. 《薛簡肅公文集》은 薛奎(?~1034)가 죽은 지 37년에 嗣子인 仲孺가 설규가 지은 文 800여 편을 정리하여 만든 것이다. 歐陽脩는 薛奎의 넷째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薛奎의 사위이다. 簡肅은 薛奎의 諡號이고, 그의 字는 叔藝이며, 絳州 正平 사람이다. 宋 太宗 淳化(990~994) 연간에 進士가 되었고, 仁宗 때에 參知政事를 지냈다.
역주2 窮者之言 易工 : 곤궁한 사람은 문장을 정교하게 짓기가 쉽다는 말로 唐‧宋의 문장가들이 습관적으로 하던 말이다. 歐陽脩의 〈梅聖兪詩集序〉에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곤궁하게 된 뒤라야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이다.[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뜻이다.
역주3 唐之劉柳 無稱於事業 : 劉柳는 대문장가인 劉禹錫과 柳宗元을 가리킨다. 柳宗元은 唐 順宗 때 監察御史로 있으면서 兵權을 장악하여 천하를 제압하려고 음모했던 王叔文의 黨에 가담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자 연좌되어 柳州刺史로 좌천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舊唐書 권160 柳宗元傳》
劉禹錫은 唐 順宗 때 屯田員外郞으로 세도를 믿고 권세를 부리는 인사들을 함부로 대하다가 憲宗 때에 벼슬을 빼앗겼다. 《舊唐書 권160 劉禹錫傳》
역주4 姚宋 不見於文章 : 姚宋은 姚崇과 宋璟을 가리킨다. 唐 玄宗 開元(713~741) 연간에 재상이 되어 開元之治를 이루었으나 문장으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역주5 眞宗時 以材能爲名臣 : 薛奎는 宋 眞宗 때에 尙書戶部員外郞, 淮南轉運副使, 三司戶部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宋史 권286 薛奎傳》
역주6 仁宗母后時 以剛毅正直爲賢輔 : 仁宗母后時는 仁宗 초에 章獻王后가 垂簾聽政한 것을 말한다. 賢輔가 되었다는 것은 薛奎가 天聖 7년(1029)에 參知政事가 된 것을 말한다.
역주7 公有子宜孺 : 《唐宋八大家文抄》 권53 〈資政殿學士尙書戶部侍郞簡肅薛公墓誌銘〉에는 ‘宜孺’가 ‘直儒’로 되어 있다.
역주8 自公薨後三十年 : 薛奎가 죽은 연도는 景祐 원년(1034)이고, 이 서문이 지어진 시기는 熙寧 4년(1071) 5월이니, 죽은 연도와 37년 차이 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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