而世宗區區五六年間
에 取秦
하고 平淮右
하고 復三關
하야 威武之聲
이 震懾夷夏
하고
而方內延儒學文章之士하야 考制度하며 修通禮하며 定正樂하며 議刑統이라 其制作之法이 皆可施於後世하고
其爲人이 明達英果하고 議論偉然이라 卽位之明年에 廢天下佛寺三千三百三十六하니
是時에 中國乏錢이어늘 乃詔悉毁天下銅佛像以鑄錢하고
使其眞身尙在라도 苟利於世면 猶欲割截이어든 況此銅像이 豈有所惜哉아하니 由是로 群臣皆不敢言이러라
嘗夜讀書
에 見唐
均田圖
하고 慨然嘆曰 此致治之本也
로다
王者之政이 自此始라하고 乃詔頒其圖法하야 使吏民先習知之하야 期以一歲로 大均天下之田하니 其規爲志意가 豈小哉아
其伐南唐
에 問宰相
以計策
하고 後克淮南
에 出穀疏
하야 使學士
爲贊
하고 而盛以錦囊
하야 常置之坐側
하니 其英武之材
가 可謂雄傑
이라
其北取三關에 兵不血刃이로되 而史家猶譏其輕社稷之重而僥倖一勝於倉卒하니 殊不知其料彊弱較彼我하고 而乘述律之殆하야 得不可失之機니
09. 《오대사五代史》 〈주세종기周世宗紀〉에 대한 논論
《오대사五代史》 〈본기本紀〉는 기록이 자세하다.
군신君臣의 사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양梁나라에서 우규友珪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당唐나라에서 극녕克寧을 죽이고 존예存乂와 종찬從璨을 살해하였으니, 부자父子와 골육骨肉의 은혜가 어찌 끊어지지 않겠는가.
태비太妃가 훙어薨御하자 조회를 거두고, 유씨劉氏와 풍씨馮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았으니, 부부夫婦의 의리가 얼마나 가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금수에 이르지 않겠는가.
한식에 들제사를 지내고 지전紙錢을 사르며, 거상居喪하면서 개원改元을 하고 음악을 쓰며, 마연馬延 및 임환任圜을 죽였으니,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어찌 무너지지 않겠는가.
뇌산雷山에 제사를 올리고 화살을 쏘고 말을 잡아 제사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얼마나 가서 오랑캐가 되지 않으리오.
그러나 세종世宗이 구구區區한 5, 6년 사이에 진롱秦隴을 취하고 회우淮右를 평정하고 삼관三關을 회복하여 위무威武의 명성이 오랑캐와 중국에 진동하였다.
그리고 안으로 유학儒學과 문장文章의 선비를 초빙하여 제도制度를 고증하고 통례通禮를 편수하고 정악正樂을 설정하고 형통刑統을 논의한지라, 제작制作의 법도가 모두 후세에 시행될 수 있었다.
사람됨이 명달明達‧영과英果하고 의론議論이 웅위雄偉한지라 즉위한 이듬해에 천하天下의 불사佛寺 3,336개를 없앴다.
이때에 중국中國이 동전銅錢이 부족하거늘 이에 조서를 내려 천하의 동불상銅佛像을 모두 녹여 동전을 주조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듣자니 불가佛家의 설에는 육신과 세상을 허망虛妄하게 여기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급무로 여긴다고 한다.
가령 진짜 살아 있는 몸이라 하더라도 만약 세상에 이롭다면 오히려 잘라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이 구리 불상이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로부터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밤에 책을 읽을 때에 당唐나라 원진元稹의 〈균전도均田圖〉를 보고 개연慨然히 탄식하여, “이것이 지극한 정치의 근본이다.
왕자王者의 정치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고는, 곧 조서를 내려 그 도법圖法을 반포하여 이민吏民으로 하여금 먼저 익혀 알게 하여 1년 만에 천하의 전야田野를 크게 고르게 하기를 기약하니, 지의志意를 기획함이 어찌 작겠는가.
남당南唐을 정벌할 때에 재상宰相 이곡李穀에게 계책計策을 묻고, 뒤에 회남淮南을 칠 적에 이곡李穀의 소장疏章을 꺼내어 학사學士 도곡陶穀에게 찬贊을 짓게 하여 금랑錦囊에 담아 늘 자리 곁에 놓아두니, 영무英武한 재질이 웅걸雄傑이라 하겠다.
마음을 비우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며, 사람을 쓸 때에 의심하지 않는 것에 미쳐서는 어찌 이른바 현주賢主가 아니겠는가.
북쪽으로 삼관三關을 취함에 병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되, 사가史家가 오히려 막중한 사직社稷을 가벼이 여기고 창졸간倉卒間에 한 번의 승리를 바란다고 비판하였으니, 이는 세종世宗이 강약彊弱을 헤아리고 피아彼我를 가늠하였으며 술률述律의 위태로움을 타서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를 잡은 것인 줄을 〈사가史家가〉 전혀 모른 것이다.
이는 결승決勝에 밝은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이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