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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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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太史公 爲絶佳 而歐公職方論 似勝하니 須千百이라야 始得之
嗚呼 自三代以上으로 莫不分土而治也러니 後世鑒古矯失하야 始郡縣天下
而自秦漢以來 爲國孰與三代長短이리오 及其亡也하얀 未始不分하고 至或無地以自存焉이라
蓋得其要則雖萬國而治 失其所守則雖一天下라도 不能以容이니 豈非一本於道德哉
而其勢未分이러니 旣其衰也 置軍節度하야 號爲方鎭하니 鎭之大者 連州十餘 小者 猶兼三四
故其兵驕則逐帥하고 帥彊則叛上하야 土地爲其世有하고 干戈起而相侵하니 天下之勢 自玆而分이라
然唐自中世 多故矣 其興衰救難 常倚鎭兵扶持하고 而侵凌亂亡 亦終以此하니 豈其利害之理然歟
自僖昭以來 日益割裂이러니 梁初 天下別爲十一하야 南有吳浙荊湖閩漢하고 西有岐蜀하고 北有燕晉하고 而朱氏所有七十八州以爲梁이러라
初起幷代하야 取幽滄하야 有州三十五하고 其後又取梁魏博等十有六州하야 合五十一州하야 以滅梁이라
稱臣 又得其州七하고 하야 惟得秦鳳階成四州하고 而營平二州 陷于契丹하고 其增置之州一이라 合一百二十三州하야 以爲唐하다
하야 獻十有六州于契丹而得蜀金州하고 又增置之州一이니 合一百九州하야 以爲晉하다
之初 하고 隱帝時 增置之州一이니 合一百六州하야 以爲漢하다
十州入于하고 取秦鳳階成瀛莫及淮南十四州하고 又增置之州五而廢者三이니 合一百一十八州하야 以爲周하다
宋興因之하니之大略也
其餘外屬者 彊弱相幷하야 不常其得失이라 至于周末하야 하고 而在者七國이라
自江以下二十一州爲南唐이며 自劍以南及山南西道四十六州爲蜀이며 自湖南北十州爲楚 自浙東西十州爲吳越이며南北四十七州爲南漢이며
自太原以北十州爲東漢이며 而荊歸陝三州爲南平이니 合中國所有하야 二百六十八州不在焉이라
唐之封疆 遠矣 前史備載 在其間이라
五代亂世 文字不完하야 而時有廢省하고 又或陷于夷狄이로되 不可考究其詳하니 其可見者


02. 〈직방고職方考〉에 대한
태사공太史公제왕표諸王表서문序文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우나 구양공歐陽公의 〈직방고론職方考論〉이 더 나은 듯하니, 천백千百개의 척안隻眼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지을 수 있다.
오호라! 삼대三代 이상으로는 제후에게 땅을 분봉分封하여 나라를 다스리지 않음이 없었는데, 후세에는 옛일을 거울삼아 잘못을 시정하느라 비로소 천하에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 이래로 어느 국가가 삼대三代 시절과 장단長短을 따져볼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할 때에는 분열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혹 자신의 몸을 둘 땅조차 없기까지 하였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얻으면 비록 만국萬國이라도 잘 다스려질 것이고 지켜야 할 원칙을 잃으면 비록 천하를 통일하더라도 용납될 곳이 없으리니, 어찌 일체 도덕道德에 근본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가 흥성할 때는 비록 천하를 10로 호칭하였으나 그 형세는 분열되지 않았는데 쇠약해지고 나서는 절도사를 두어서 방진方鎭이라 불렀으니, 방진 중에서 큰 것은 10여 개 를 연이었고 작은 것도 서너 개는 아울렀다.
그러므로 그 병사들이 통제를 벗어나면 장수를 쫓아냈고, 장수의 세력이 강성하면 조정을 배반하여 토지가 대대로 그의 소유가 되고 군사를 일으켜 서로 침범하니, 천하의 형세가 이로부터 분열되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중기中期부터 변고가 많았으므로 쇠잔한 국세國勢중흥中興하고 곤란한 상황을 구제하는 일을 항상 방진 병력의 도움에 의지하였고 침범 당해 능욕을 받고 난리 속에 멸망한 일 또한 마침내 이 때문이었으니, 어쩌면 그 이해利害의 이치가 그러한 것인가?
희종僖宗소종昭宗 이래로 날이 갈수록 나라가 더욱 분열되었는데, 나라 초에 천하가 11개로 나뉘어 남쪽에는 , , , , , 이 있고 서쪽에는 , 이 있고 북쪽에는 , 이 있었으며, 주씨朱氏가 차지한 78나라가 되었다.
장종莊宗은 처음 병주幷州대주代州에서 일어나 유주幽州창주滄州를 차지하여 35개 를 소유하였고, 그 후에 또 나라의 위주魏州박주博州 등 16를 차지하여 도합 51를 소유하여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왕岐王칭신稱臣하자 또 그 일곱 를 얻었고 동광同光 연간(923~926)에 을 정복했다가 얼마 뒤 다시 잃고서 오직 진주秦州봉주鳳州계주階州성주成州의 4만을 얻었고 영주營州평주平州의 2거란契丹에 빼앗겼고, 증설增設는 하나였다. 그리하여 도합 123나라(후당後唐)가 되었다.
석씨石氏경사京師에 들어와 즉위하여 거란契丹에 16를 바치고 금주金州를 얻었으며, 또 증설增設가 하나이니, 도합 109주가 나라가 되었다.
유씨劉氏의 초기에 진주秦州봉주鳳州계주階州성주成州가 다시 에 들어가고, 은제隱帝증설增設가 하나이니 도합 106나라가 되었다.
곽씨郭氏나라를 대신할 때 10유민劉旻에게 들어갔고, 세종世宗봉주鳳州계주階州성주成州영주瀛州막주莫州회남淮南의 14를 취하고 또 증치增置가 다섯이고 없앤 주가 셋이니 도합 118주가 나라가 되었다.
나라가 일어나서 이를 그대로 이어받으니, 이것이 중국中國의 대략이다.
그 나머지 중국 밖의 나라들은 강자가 약자를 병탄幷呑하여 그 득실이 일정하지 않았다. 나라 말기에 이르러 이 먼저 망하고 남은 것은 일곱 나라였다.
양자강揚子江 이하 21남당南唐이고, 검각劍閣으로부터 남쪽 및 산남山南서도西道 46이고, 동정호洞庭湖로부터 남북쪽 10이고, 절강浙江으로부터 동서쪽 13오월吳越이고, 오령五嶺으로부터 남북쪽 47남한南漢이고,
태원太原으로부터 북쪽 10동한東漢이며, 형주荊州귀주歸州섬주陝州 3남평南平이니, 중국이 소유한 지역을 합하여 268이고 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나라의 변경은 먼 지역에 있었으니 전대의 역사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나 기미주羈縻州기치寄治 등의 유명무실有名無實가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오대五代난세亂世에는 기록이 온전하지 못하여 때로 없어진 곳도 기재되어 있고 또 오랑캐에게 함락된 지방도 있었지만 상세한 실정을 상고하여 알 수 없으니, 알 수 있는 것은 도보圖譜와 같이 기록해둔다.


역주
역주1 職方考論 : 職方은 곧 職方氏로 周代에 地理에 관한 업무를 맡은 관직의 명칭이다. ≪周禮≫ 〈夏官 職方氏〉에 “직방씨는 천하의 지도를 관장하고 천하의 땅을 관장하여 그 邦國, 都鄙, 四夷, 八蠻, 七閩, 九貉, 五戎, 六狄의 인민을 분별한다.[職方氏掌天下之圖 以掌天下之地 辨其邦國都鄙四夷八蠻七閩九貉五戎六狄之人民]”라고 하였다. 〈職方考論〉은 ≪新五代史≫ 권60에 실린 〈職方考〉의 내용 가운데 각 지역의 명칭과 내력을 설명한 내용을 생략하고 歐陽脩의 議論 부분만을 발췌하여 실은 것이다. ≪舊五代史≫에도 지리지인 〈직방고〉에 해당하는 권150 〈郡縣志〉가 있다. 구양수는 이 論에서 나라가 망할 때는 분열되지 않은 적이 없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인 도덕에 근본을 두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그렇지 않으면 천하를 통일해도 용납될 곳이 없음을 말하고 唐나라 이래로 五代의 各國이 땅을 얻고 잃은 내력을 서술하여 대략을 드러내었다.
역주2 諸王表序 : ≪史記≫ 卷13에서 卷22까지는 三代부터 당대까지의 왕과 제후와 將相名臣들의 世表와 年表와 月表이다. 이 가운데 將相名臣의 表 외에는 모두 태사공의 서문이 있다.
역주3 隻眼 : 뛰어난 안목을 가리킨다. 佛家의 말로 摩醯首羅天의 세 개의 눈 가운데 정수리에 있는 외눈을 頂門隻眼이라 하는데 가장 뛰어난 눈이다.
역주4 唐之盛時 雖名天下爲十道 : 唐 太宗 貞觀 元年(627)에 전국을 關內, 河南, 河東, 河北, 山南, 淮南, 隴右, 劍南의 10개 道로 나누었다. 이후 玄宗 때는 이러한 道가 15개로 늘어났고 唐나라 말기에는 40개로 늘어났다.
역주5 莊宗 : 晉王으로 있다가 後梁을 멸망시키고 後唐을 건국한 李存勖(885~926)의 廟號이다.
역주6 岐王 : 岐王은 唐나라 말기 昭宗 때 병권을 장악하고 梁王 朱溫에게 대항하다가 後梁이 건국되자 岐王으로 자칭하며 할거했던 李茂貞(856~924)이다. 이무정은 後唐 莊宗 同光 2년(924)에 稱臣하고 秦王에 봉해졌다.
역주7 同光破蜀……復(부)失 : 後唐 莊宗 同光 3년(925)에 郭崇韜와 魏王 李繼岌이 군사를 이끌고 前蜀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후당 조정 내부에 분열이 생겨 莊宗이 시해당하고 明宗이 즉위하자 蜀을 맡았던 董璋과 孟知祥이 반란을 일으켰고, 맹지상이 다시 동장을 격파하고서 명종에게 겉으로만 稱臣한 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명종이 죽자 맹지상은 독립을 선포하고 後蜀을 건국하여 高祖가 되었다.
역주8 石氏入立 : 後唐의 河東節度使로 있던 石敬瑭(892~942)이 末帝와 반목하여 반란을 일으켜 契丹의 도움을 받아 후당을 멸하고 後晉을 세운 일을 가리킨다. 석경당은 군사적 열세를 거란의 도움으로 역전하였으므로 거란의 황제에게 신하를 자칭하고 燕雲 16주를 할양하였다.
역주9 劉氏 : 後晉이 契丹에 멸망당하자 河東節度使로 있다가 汴 땅에 도읍하고 後漢을 세운 劉知遠(895~948)이다.
역주10 秦鳳階成 復入于蜀 : 중원이 後晉에서 後漢으로 교체되는 혼란기에 後蜀의 孟昶이 공격하여 이들 주를 빼앗았다.
역주11 郭氏代漢 : 後漢의 隱帝가 신하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당시 권력자였던 郭威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곽위가 반란을 일으켜 951년에 後漢을 멸망시키고 後周를 건국하였다.
역주12 劉旻 : 985~954. 五代 北漢의 건국자이다. 後漢 高祖 劉知遠의 동생으로 太原尹으로 있다가 郭威가 후한을 멸하고 後周를 세우자 태원에서 稱帝하고 북한을 세웠다. 묘호는 世祖이다.
역주13 世宗 : 後周의 2대 황제인 柴榮(921~959)이다. 어려서 후주 太祖 郭威의 養子가 되었는데 곽위의 일족들이 모두 後漢의 隱帝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시영이 뒤를 이었다.
역주14 中國 : 여기에서 中國은 지금의 전체 국가 개념이 아니라 현재의 陝西省, 河南省, 山西省, 山東省, 河北省 일부 지역에 걸친 黃河의 중상류 남북 兩岸 일대를 가리킨다. 대체적으로 夏․殷․周 三代의 통치 지역에 해당하며 당시 문명의 중심지로 여겼다.
역주15 閩已先亡 : 閩은 唐나라 말기 武威軍節度使 王審知가 이곳에서 세력을 확립한 이후 왕심지의 아들인 王延鈞이 後唐의 明宗이 죽고 후당이 혼란해진 틈을 이용하여 933년에 독립하여 개국하였다. 後周 말기에 王延政이 폭정을 일삼고 조카 王繼勳과 王繼成이 자립하여 나라가 분열되자 945년에 南唐의 군주 李璟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洞庭君山圖洞庭君山圖
역주16 (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7 : 중국 江西와 湖南과 廣東과 廣西省 접경의 다섯 領인 大庾嶺, 越城嶺, 騎田嶺, 萌渚嶺, 都龐嶺이다.
역주18 : 唐나라 때 군사를 두어 戍守하던 지역의 군사조직으로 독립적인 행정체계를 갖추어 여타의 행정구역과 유사하였다. ≪新唐書≫ 〈兵志〉에 “당나라 초기에 변경을 지키는 군대 중에 큰 단위는 軍, 작은 단위는 守捉, 城,鎭이라고 하였는데, 총칭하여 道라고 하였다.[唐初 兵之戍邊者 大曰軍 小曰守捉曰城曰鎭 而總之者曰道]”라고 하였다.
역주19 羈縻寄治虛名之州 : 羈縻는 羈縻州이다. 唐나라 때 먼 邊境의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설치했던 州로,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킬 수 없었으므로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그 지역 풍속에 따라 다스려 일반적인 州縣과는 차이가 있었다. 寄治는 적국의 침공이나 여타의 사정 등에 의해 해당 지역을 잃었을 경우 그 지역의 관서를 가까운 다른 지역에 설치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0 具之如譜 : ≪新五代史≫ 〈職方考〉에는 이 다음에 나라별 각 행정구역의 도표가 실려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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