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義는 行於君子하고 而刑戮은 施於小人하나니 刑入于死者는 乃罪大惡極이니 此又小人之尤甚者也요 寧以義死언정 不苟幸生하야 而視死如歸는 此又君子之尤難者也라
方唐太宗之六年하야 錄大辟囚三百餘人하야 縱使還家하고 約其自歸以就死하니 是는 以君子之難能으로 期小人之尤者以必能也라
是는 君子之所難이어늘 而小人之所易也니 此豈近於人情이리오
或曰 罪大惡極은 誠小人矣나 及施恩德以臨之하야는 可使變而爲君子니
然安知夫縱之去也에 不意其必來以冀免이라 所以縱之乎며 又安知夫被縱而去也에 不意其自歸而必獲免이라 所以復來乎아
夫意其必來而縱之면 是는 上賊下之情也요 意其必免而復來면 是는 下賊上之心也니
吾見上下交相賊하야 以成此名也라 烏有所謂施恩德與夫知信義者哉아
不能使小人不爲極惡大罪하고 而一日之恩이 能使視死如歸而存信義하니 此又不通之論也라
曰 縱而來歸어든 殺之無赦하고 而又縱之而又來어든 則可知爲恩德之致爾라
若屢爲之면 則殺人者皆不死리니 是可爲天下之常法乎아
是以로 堯舜三王之治는 必本於人情하야 不立異以爲高하고 不逆情以干譽라
신의信義는 군자君子에게 행해지고 형륙刑戮은 소인小人에게 베풀어지나니, 사형 판결을 받은 자는 죄罪가 크고 악惡이 극에 이른 것이니, 이는 또 소인 중에 더욱 심한 자요, 차라리 의義에 따라 죽을지언정 구차히 요행僥倖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서 죽음 보기를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자는 이 또한 군자의 가장 어려운 일이다.
당唐 태종太宗 6년에 사형수 3백여 명을 기록한 다음 석방하여 집에 돌아가게 하고는 기한 내에 그들이 스스로 돌아와 죽음에 나아가도록 약속하였으니, 이는 군자도 하기 어려운 일로서 소인 중에서도 특히 심한 자에게 반드시 해내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형수들이 약속한 기한이 되자 마침내 스스로 돌아와서 기한을 넘긴 자가 없었다.
이는 군자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소인이 쉽게 행한 것이니, 어찌 인정人情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죄罪가 크고 악惡이 극에 이른 것은 진실로 소인小人들이나, 은덕恩德을 베풀면서 그들을 대한다면 군자君子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은덕이 사람에게 깊이 들어가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속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태종太宗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은덕을 베풀었다는 명예名譽를 구하기 위한 까닭이다.
그러나 태종이 사형수를 석방하여 보낼 때에 그들이 반드시 돌아와서 사면되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때문에 그들을 석방한 것이 아님을 어찌 알 것이며, 또 죄수들이 석방되어 갈 때에 스스로 돌아오면 반드시 사면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때문에 다시 온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여 석방하였다면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마음을 엿본 것이요, 반드시 사면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왔다면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심중을 엿본 것이다.
내가 보건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마음을 엿보아서 이런 명예를 이룬 것이니, 이른바 은덕恩德을 베풀었다는 것과 신의信義를 알았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태종이 천하에 은덕을 베푼 지가 이때에 6년이었다.
그런데도 소인으로 하여금 극악대죄極惡大罪를 짓지 않게 하지 못하고, 하루아침의 은혜로 죽음 보기를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게 하여 신의信義를 보존하게 한다는 것은 사리에 닿지 않는 의론이다.”라고 하였다.
“석방했다가 돌아오거든 사면하지 않고 죽이고, 그 후에 다시 석방하였는데 또 돌아온다면 은덕의 소치임을 알 수 있다.
사형수를 석방하였다가 돌아와 사면해주는 일로 말하자면 우연히 한 번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여러 번 이렇게 한다면 사람을 죽인 자가 모두 죽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천하의 떳떳한 법法이 될 수 있겠는가.
떳떳한 법이 될 수 없는 것이 어찌 성인聖人의 법이겠는가.
이러므로 요순堯舜과 삼왕三王의 정치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근본하여 특이한 것을 내세워 높이지 않았고, 인정人情을 미리 헤아려 명예名譽를 구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