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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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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啓하노라
累日前 伏承惠然見過하고 仍以嘉什一筒寵示者 拜賜하고 刮目披文하야 紙弊墨渝 不能捨手
伏以逸軌 天驥上才
好學 浸潤淵源之奧하고 窺見天人之交
久已擅一鄕之評하고 早亦이라
而以 으로 去塵自遠할새 敢入者稀하니 是宜邈爲方外之遊하야 隔此俗中之軌어늘 而乃過存庸妄하야 曲借獎題
之閒居하야之餘思라가 灑乃藻麗하야 用飾愚矇하니 僅成輕發하고 徒使眩悲
矧夫峭格峻高하고 春華掞美
之句하고之評이어늘 內惟棗鈍之姿하니 奚稱之寵이리오
已服於淸標 蔑聞於絶調
未遑賡報하니 徒用靦慙이라


20. 석수재石秀才에게 사례하는
는 아룁니다.
며칠 전에 방문해주시고, 이어 아름다운 시편詩篇 한 통을 보여주셨기에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삼가 받아서 놀란 눈을 비비고 글을 펼쳐보느라 종이가 해지고 글자의 먹이 희미해지도록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모인某人은 출중한 자품資稟이요 천리마와 같은 인재라.
빈한貧寒한 집안 형편에 학문을 좋아하여 문장의 심오한 근원에 깊이 젖어들었고 구변九變의 뜻을 알아서 천인天人이 교감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미 한 고을의 칭찬을 독차지하였고 일찍이 또한 인재를 뽑는 과거에 응시하였습니다.
저속한 사람의 귀에 고상한 음악을 연주함에 알아듣기 어려웠건만 형산荊山에서 안고 있던 돌은 끝내 보옥寶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을에서 복건幅巾을 쓰고 향리에서 하택거下澤車를 탔던 옛일을 사모하였으며, 초야草野에 은둔하여 고상하게 살면서 안훈雁纁을 가볍게 여기고 굳게 은거하셨으니, 하늘 높이 날아올랐거늘, 우스워라, 주살을 쥔 자가 어찌 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은 조정에 앉아서 얘기하거늘 안타깝게도 어진 선비는 홀로 초야에 버려졌습니다.
금대錦帶를 띤 거사居士백련사白蓮社의 사람으로서 보살이 세속의 집에 살았던 것을 본받음에 속진俗塵이 절로 멀어졌고, 유마維摩의 방을 소제함에 감히 들어오는 자가 드무니, 의당 멀리 세상 밖을 노닐어 이 속세를 멀리 떠나야 할 터이거늘 과분하게도 이 용렬한 사람의 안부를 물어주고 칭찬하는 시를 지어주셨습니다.
안석에 기댄 채 한가할 때 붓을 잡고 한참 구상하다가 아름다운 글을 써서 우매한 나를 칭찬해주시니, 생쥐를 보고 강한 쇠뇌를 당김에 겨우 경솔히 쏜 것이 될 뿐이고, 원거鶢鶋를 기르면서 음악을 연주해도 어리둥절해 죽게 만드는 격입니다.
더구나 시편들의 격조가 매우 높고 문사가 아름다움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내운의일來雲依日의 구절을 펼치고 낙화영초落花映草의 호평을 독차지하셨거늘, 이 우둔한 자질을 돌아보건대 어찌 포곤褒袞의 칭찬에 걸맞겠습니까.
대궐과 가까운 곳에서 이미 맑은 풍모에 감복하였으나 높은 문재文才를 알아볼 이가 드무니 뛰어난 시문이 알려지지 못하였습니다.
미처 화답할 겨를이 없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역주
역주1 謝石秀才啓 : 石秀才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글의 뜻을 보면 石延年(994~1041)일 듯하다. 석연년은 자가 曼卿이고 宋城에 살았는데 누차 進士試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는 성품이 호탕하여 술을 좋아하였으며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썼다. 歐陽脩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구양수의 〈祭石曼卿文〉에 “슬프다! 만경의 盛衰는 그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음을 내가 알지만, 옛날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가 나도 모르게 멀리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잊는 것이 제일이라는 말에 부끄럽다.[嗚呼 曼卿盛衰之理 吾固知其如此 而感念疇昔 悲涼悽愴 不覺臨風而隕涕者 有媿乎太上之忘情]”라고 하였다. 석연년은 후에 벼슬하여 下僚가 되었는데, 이 글에서 秀才란 호칭을 쓴 것을 보면 그가 아직 벼슬하기 전에 쓴 것일 듯하다.
역주2 獵纓 : 갓끈을 당겨 매는 것으로 衣冠을 정제하여 공경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史記》 권127 〈日者列傳〉에 “갓끈을 당겨 매고 옷깃을 바로잡고서 단정히 앉았다.[瞿然而悟 獵纓正襟危坐]”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3 某人 : 상대방 石秀才를 가리킨다.
역주4 : 전
역주5 屢空 : 孔子가 제자 顔回를 두고, “안회는 道에 가까웠고 자주 끼니를 굶었다.[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한 데서 온 말로, 집이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임을 뜻한다. 《論語 先進》
역주6 知言九變 : 《漢書》 권6 〈武帝紀〉에 무제가 詔書에서 逸詩를 인용하여 “九變復貫 知言之選”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해서는 《詩經》에 빠진 逸詩인 만큼 서로 다른 해석이 많다. 이에 대해 應劭는 “陽의 數는 九이다. 임금이 陽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정치를 변화시키고 禮를 회복하여 先王의 옛 제도에 합치하게 함을 말한다. 知言之選의 選은 善이란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아래에 ‘窺見天人之交’라 한 것으로 보아 하늘과 사람의 변화하는 심오한 이치를 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일 듯하다.
역주7 應萬家之令 : 漢 文帝 12년에 孝廉을 선발할 때 문제가 내린 詔書에 “지금 만 집이나 되는 고을에서 이 令에 응할 만한 사람이 없다니, 이것이 어찌 실정이겠는가. 이는 관리들이 어진 이를 천거하는 방도가 미비했기 때문이다.[今萬家之縣 無應令者 豈實人情 是吏擧賢之道未備也]” 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文帝紀》
여기서는 인재를 뽑는 과거에 응시했음을 뜻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역주8 奏磬俚耳 難矣賞音 : 磬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로, 주로 궁중의 음악에 쓰인다. 여기서는 石秀才의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였다. 즉, 석수재의 문장이 뛰어났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역주9 抱石荊山 終爲至寶 : 春秋時代 楚나라 사람 卞和가 荊山에서 璞玉을 얻어 厲王과 武王에게 바쳤으나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 잘못 보고 돌이라 하여 두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 후 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형산 아래서 박옥을 안고 사흘 밤낮을 울어 피눈물이 흘렀다. 문왕이 그 사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묻자 화씨가 억울한 사정을 말하였다. 이에 문왕이 玉工을 시켜 박옥을 다듬게 하니, 직경이 한 자나 되고 티 하나 없는 큰 璧玉이 나왔다. 이것이 유명한 和氏璧이다. 《韓非子 和氏》
여기서는 석수재의 문장이 비록 아직까지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마침내 세상에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역주10 自慕幅巾於衡巷 乘下澤於鄕閭 : 幅巾은 주로 隱士가 쓰는 두건이다. 下澤은 下澤車의 준말로 논밭 사이를 마음대로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바퀴가 작은 수레이다. 後漢의 伏波將軍 馬援이 交趾를 정벌하여 크게 승전하고 軍士들을 犒饋하면서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從弟 少游가 예전에 말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살면서 衣食에 문제가 없으면 그만이니, 下澤車를 타고 款段馬를 몰고 郡의 하급관리가 되어서 선영의 墳墓나 잘 지켜 향리에서 善人이라 일컬어지면 그만이다. 그 밖에 넘치는 행복을 구하면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권24 馬援列傳》
역주11 輕雁纁 : 雁纁은 기러기와 붉은 비단이다. 纁雁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처음 뵐 때 올리는 폐백이다. 《隋書》 〈禮儀志〉에 “훈안의 의식은 이미 두 성씨의 만남에 맞다.[纁雁之儀 旣稱合於二姓]”라고 하였다. 석수재는 마치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뵙듯이 폐백을 갖추어 고관대작을 찾아가 만나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음을 뜻한다.
역주12 冥飛已遠 笑弋者之何求 : 초야에 멀리 은둔하여 모함하는 자의 中傷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漢 高祖가 태자를 폐위하고, 戚夫人 소생인 趙王 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는데, 張良이 商山四皓를 불러들여 태자의 자리를 안정시키자 한 고조가 척부인에게 춤을 추게 하고는 노래하기를 “큰기러기 높이 날아 일거에 천 리를 가네. 날개가 이미 이뤄져서 四海를 가로지르네. 사해를 가로지르니 어찌할 수 있으리오. 비록 矰繳 있다 한들 그 무슨 소용이리.[鴻鵠高飛 一擧千里 羽翮已就 橫絶四海 橫絶四海 當可奈何 雖有矰繳 尙安所施]”라고 하였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 《漢書 권40 張良傳》
역주13 齷齪坐談 嗟律魁之獨棄 : 漢나라 劉向의 〈九嘆 憂苦〉에 “어리석고 꽉 막힌 자들은 조정에서 얘기하는데, 어질고 큰 선비는 산간에 버려졌네.[偓促談於廊廟兮 律魁放乎山間]”라고 하였다.
역주14 錦帶居士 : 《禮記》 〈玉藻〉에 “居士는 비단 띠를 띠고 제자는 흰 명주 띠를 띤다.[居士錦帶 弟子縞帶]”라고 하였다. 鄭玄의 注에 “거사는 학문과 才藝가 있는 處士이다.[居士 道藝處士也]”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석수재가 佛法에 조예가 깊었음을 뜻한다.
역주15 白蓮社人 : 東晉의 승려 慧遠이 慧永ㆍ劉遺民ㆍ雷次宗 등 18명과 廬山의 東林寺에서 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수행했는데, 당대의 명사인 謝靈運ㆍ陶淵明ㆍ陸脩靖 등이 참여하였다. 여기서는 석수재가 불교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음을 뜻한다.
역주16 菩薩之坐家 : 維摩詰이 본래 보살이면서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서 살았던 것을 말한다.
역주17 掃維摩之一室 : 釋迦의 속가 제자로 인도의 毗耶離城에 살았던 維摩詰이란 居士가 병을 핑계로 법회에 나가지 않고는 文殊菩薩 등 많은 석가의 제자들이 문병하러 올 것을 예측하고, 신통력으로 침상 하나만 남겨두고 온 방 안을 깨끗이 치우고 침상에 있자 과연 문수보살 등이 와서 문병하였다. 문수보살 및 수많은 불제자들과 不二門에 들어가는 法門에 대하여 문답하다가, 최후에 침묵으로 답하니 문수보살이 크게 칭찬했다는 고사가 있다. 《維摩經 方便品》
역주18 隱几 : 안석에 기대 한가로이 앉아 있는 것이다. 《莊子》 〈齊物論〉에 “南郭子綦가 안석에 기대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었다.[南郭子綦隱几廳坐 仰天而噓]”라고 하였다.
역주19 吮毫 : 含毫와 같은 말로, 붓을 입에 물고 詩文을 구상하는 것이다. 원래 晉나라 陸機의 〈文賦〉에 “혹은 붓대를 잡고 빨리 지으며, 혹은 붓을 입에 물고 더디게 짓는다.[或操觚以率爾 或含毫而邈然]” 한 데서 온 말이다. 《六臣註文選 권17》
역주20 爲鼷(혜)鼠而抉機 : 삼국시대 魏나라 杜襲이 “천 균의 쇠뇌는 생쥐에게 발사하지 않는다.[千鈞之弩 不爲鼷鼠發機]”라고 하였다. 《資治通鑑 권68》
역주21 養鶢鶋而奏曲 : 鶢鶋는 海鳥의 이름이다. 원거가 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으니, 노나라 임금이 그 새를 宗廟에 모셔놓고 舜임금의 음악인 韶를 연주하고 소‧양‧돼지의 고기로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어리둥절하고 근심과 슬픔에 잠겨서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 《莊子 至樂》
역주22 來雲依月 : 매우 훌륭한 시를 뜻한다. 月은 日의 오자이다. 建元 2년(B.C. 139)에 漢 武帝가 騰光臺를 세워 사방을 조망하였는데, 등광대 위에는 碧玉으로 만든 종을 치고 懸黎로 만든 磬을 걸고 霜條로 만든 피리를 불고 來雲依日이란 곡을 불렀다고 한다. 현려는 옥의 일종이고, 상조는 대나무이다. 《洞冥記 권1》
역주23 落花映草 : 매우 아름다운 시를 뜻한다. 南朝 梁나라의 문학평론가인 鍾嶸의 《詩品》에서 “丘遲의 시는 點綴하여 꾸며서 아름다운 것이 마치 떨어진 꽃잎이 풀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丘詩點綴暎媚 似落花依草]”라고 하였다. 映자는 앞 구절의 來雲依月의 依자와 중복되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역주24 袞褒 : 孔子의 春秋筆法에 대해 晉나라 范寧의 〈春秋穀梁傳序〉에서 “한 글자의 칭찬은 그 상이 華袞보다도 나았고, 한마디 말의 비판은 그 벌이 斧鉞보다도 무서웠다.[一字之褒 賞逾華袞 片言之貶 誅深斧鉞]”라 한 데서 온 말로, 매우 큰 칭찬을 뜻한다. 화곤은 王公의 복장으로, 매우 영광스럽고 귀중한 물건을 뜻한다.
역주25 去天尺五 : 《辛氏三秦記》에 “성 남쪽의 韋氏와 杜氏는 하늘과의 거리가 한 자 다섯 치이다.[城南韋杜 去天尺五]”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래는 唐代에 대궐 가까이에 살았던 貴族인 韋氏, 杜氏 등을 가리켰는데, 대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곳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26 和者數人 : 시가 매우 뛰어나 화답할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라는 뜻이다. 楚나라 宋玉의 〈對楚王問〉에 나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어떤 사람이 郢中에서 처음에 〈下里巴人〉이란 곡을 부르니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陽阿薤露〉라는 곡을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다. 마지막으로 〈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文選 권4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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