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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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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爲南園記하되 而特本其世孝一節立論하니 此其文章一地位可法處
高陽許君子春 治其海陵郊居之南하야 爲小園하고 作某亭某堂於其間이라
許君爲制置發運使 其所領六路七十六州之廣 凡賦斂之多少 山川之遠近 舟楫之往來 均節轉徙하야 視江湖數千里之外 如運諸掌하야 能使人樂爲而事集이라
夫理繁而得其要則簡이니 簡則易行而不違
惟簡與易然後 其力不勞而有餘니라
夫以制置七十六州之有餘 治數畝之地爲園하니 誠不足施其智 而於君之事 亦不足書
君之美 衆矣로되 予特書其一節可以示海陵之人者하노라
이니 世有孝德이라
喪其父母하고 事其兄如父하며 戒其妻事其嫂如姑
衣雖弊 兄未易이면 衣不敢易하며 食雖具 兄未食이면 不敢先食이라
司封之亡 一子當得官이라
君今遂顯于朝하야 以大其門이러라
君撫兄弟諸子 猶己子
歲當京師어늘 而弟之子病이라
君留不忍去하고 其子亦不忍捨君而留하야 遂以俱行이러라
君素淸貧이라 罄其家貲하야 走四方以求醫하고 而藥必親調하며 食飮必親視하고
至其矢溲하야도 亦親候其時節顔色하야 所疾如可理則喜하고 或變動逆節則憂戚之色 不自勝이라
其子卒 君哭泣悲哀 行路之人皆嗟歎이러라
嗚呼 予見許氏孝悌著于三世矣
凡海陵之人 過其園者 望其竹樹하고 登其臺榭하야 思其宗族 少長相從하야 愉愉而樂於此也하고 愛其人하며 化其善하야 自一家而刑一鄕하고 由一鄕而推之無遠邇하리니
使許氏之子孫 世久而愈篤이면 則不獨化及其人이라 將見其園間之草木有 禽鳥之翔集于其間者 不爭巢而棲하고 不擇子而哺也리라
嗚呼 事患不爲與夫怠而止爾
惟力行而不怠以止 然後 知予言之可信也


09. 해릉海陵 허씨許氏남원南園에 대한 기문記文
해릉허씨남원기海陵許氏南園記〉를 짓되 특별히 대대로 효성을 다했던 한 가지 사실에 근본하여 입론立論하였으니, 이는 구양수歐陽脩 문장의 본받을 만한 하나의 경지이다.
고양高陽 허자춘許子春 해릉海陵 교외의 남쪽 땅을 일구어 작은 동산을 만들고 그곳에 모정某亭, 모당某堂을 지었다.
허군許君강제형회제치발운사江淛荊淮制置發運使이니 그가 다스리는 넓은 6 76부렴賦斂다소多少, 산천山川원근遠近, 선박들의 왕래往來를 고루 분배하고 적절히 조절하여 강호江湖 수천 리 밖을 마치 손바닥 위에서 운용하듯이 보아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즐겁게 일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였다.
국가國家가 전쟁을 시작한 뒤를 만나서 전인前人이 오랫동안 폐하였던 직무職務수보修補하고 경사京師에 부족했던 공물供物을 보충하여 발운사發運使가 된 지 6년 만에 그 공적이 크게 드러났다.
국자박사國子博士로부터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으로 옮기고 판관判官을 거쳐 부사副使가 되었다.
번다한 일을 처리하되 그 요령을 얻으면 간략하니, 간략하면 행하기 쉬워 어긋나지 않는다.
오직 간략하고 쉬운 뒤에야 힘이 수고롭지 않고 여유가 있게 된다.
대저 76를 다스리고 남은 여유로 몇 의 땅을 일구어 동산을 만들었으니, 진실로 지혜를 쓸 만한 일이 아니고 허군許君사적事績에도 기록할 만한 일이 아니다.
허군許君미행美行이 많은데, 나는 다만 해릉海陵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한 가지 일을 기록할 뿐이다.
허군許君은 본래 흡주歙州 사람이니 대대로 효덕孝德(부모를 잘 섬기는 마음)이 있었다.
선군先君 사봉司封은 부모를 잃고서 아버지처럼 형을 섬기고, 아내에게 시어머니처럼 형수를 섬기라고 당부하였다.
옷이 비록 해지더라도 형이 바꾸지 않으면 자신도 옷을 감히 바꾸지 않았으며, 음식이 비록 갖추어졌더라도 형이 먹지 않으면 감히 먼저 먹지 않았다.
사봉司封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중 한 명만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형제들이 서로 양보하더니, 오랜 시간이 지나자 형들이 끝내 허군許君에게 양보하였다.
허군許君이 지금 마침내 조정에서 현달하여 그 집안을 현양顯揚하고 있다.
허군許君은 자신의 자식처럼 형제의 자식들을 돌보았다.
어떤 해에 경사京師상계上計해야 될 시기가 되었는데, 조카가 병을 앓고 있었다.
허군許君은 머물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조카 또한 차마 허군許君의 상황을 개의치 않고 허군許君을 머물러 있게 할 수 없어 마침내 함께 경사京師로 떠났다.
허군許君은 평소 청빈淸貧하였는지라 집안의 재물을 털어 사방을 다니며 의원을 찾았고 약은 반드시 직접 달였으며 음식은 반드시 직접 살폈다.
그리고 대소변까지도 때와 색깔을 직접 살펴 병이 나을 듯하면 기뻐하고, 혹 변화가 생겨 병이 심해지면 근심하는 기색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였다.
그 조카가 죽자 허군許君곡읍哭泣하고 슬퍼함에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였다.
아, 나는 허씨許氏효제孝悌가 3에 드러난 것을 보았다.
남원南園을 지나는 해릉海陵 사람들이 그 대나무와 나무를 보고 누대樓臺와 정자에 올라 허군許君종족宗族이 젊은이와 어른이 서로 어울려 화락하게 이곳에서 즐길 것을 생각하며, 그 사람을 아끼고 그 에 감화되어 한 집안에서 비롯하여 한 고을에 본보기가 되고 한 고을에서 비롯하여 멀고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미루어 나아갈 것이다.
가령 허씨許氏의 자손이 세대가 오래갈수록 더욱 돈독하게 지낸다면 교화가 그 사람들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장차 남원南園에 있는 초목까지도 이어져 연리지連理枝가 되며 동산에 날아 모여드는 날짐승들이 둥지를 다투지 않고 깃들고 새끼를 가리지 않고 먹여주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일은 하지 않거나 게을리하다 그만두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오직 힘써 행하고 게을리하다 그만두지 않아야 하니 그런 뒤라야 내 말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慶曆 8년(1048)에 작자가 揚州知州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海陵은 泰州의 治所가 있는 곳이다. 許氏는 〈眞州東園記〉에 등장하는 許元이다.
역주2 江淛荊淮 : 〈眞州東園記〉, 175쪽 주석 2) ‘江淮兩浙荊湖’ 참조. 淛는 浙과 같으니, 兩浙을 가리킨다.
역주3 當國家用兵之後……厥績大著 : 趙元昊가 河西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에 京師에는 곡식이 부족하고 江淮에서 올라오는 漕穀은 운송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范仲淹이 許元만이 이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하여 許元을 江淮兩浙荊湖發運判官으로 삼았는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京師에는 곡식이 풍족해졌다. 《宋史 許元傳》
역주4 自國子博士……爲副使 : 〈尙書工部郎中充天章閣待制許公墓誌銘〉에 “許元은 蔭補로 太廟齋郞이 되었다가 大理寺丞이 되었고, 여러 번 國子博士에 천거되었다. 尙書主客員外郞으로 재임 중에 副使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주5 君本歙人 : 《宋史》와 歐陽脩가 지은 〈尙書工部郎中充天章閣待制許公墓誌銘〉에는 許元을 宣州 宣城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歙은 宣州와 함께 江南東路에 속해 있는데, 宋 宣和 3년(1121)에 歙州를 徽州로 바꾸었다.
역주6 先君司封 : 許元의 아버지인 許逖을 가리키는데, 그는 尙書司封員外郞을 역임하였고 工部侍郞에 贈職되었다.
역주7 司封之亡……諸兄卒以讓君 : 許氏는 대대로 孝謹으로 향리에서 칭송받았다.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중 한 명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형제가 서로 양보하다 형제들이 “우리 아우의 재주는 훗날 반드시 우리 집안을 비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許元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尙書工部郎中充天章閣待制許公墓誌銘〉 참조.
역주8 上計 : 지방관으로서 임기가 만료되어 京師에 와서 정사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9 騈枝而連理 : 뿌리와 줄기가 서로 다른 두 나무의 가지와 가지결이 서로 이어져 하나가 된 것을 이르는 말로 連理枝를 가리키는데, 부부나 형제 등의 애정과 우애가 깊은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許氏의 교화로 인하여 초목 또한 화목하게 지내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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