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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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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類昌黎
이요 山川之秀麗稱衡湘이라
人居其間하야 得之爲俊傑이라
秀才生於衡山之陽하야 而秀麗之精英者 得之尤多
故其文則雲霓 其材則杞梓
始以鄕進士 擧於有司어늘 不中이라
遂遊公卿間하니 所至 無不虛館設席하야 爭以禮下之러라
雅識沈正한대 器君尤深이라
初其鎭 請君與俱行하야 하니 則西方士君子得以承望乎風采矣
하야 將過京師以歸
予嘗以 客都中하야 하야 辱之以友益하고 獲餞於國門이러니
及夫斯來 又相見於洛하야 道語故舊하고 數日乃行하니라
夫山川固能産異物而不能畜之者 誠有利其用者爾
今君之行也 予疑夫不能久畜於衡山之阿也로다


09. 형산衡山으로 돌아가는 요의廖倚를 보내는 서문
한창려韓昌黎의 글을 닮았다.
원기元氣가 모여 맺힌 것이 산천山川이 되고 산천 가운데 수려한 것으로는 형산衡山상수湘水를 일컫는다.
거기서 피어올라 구름과 무지개가 되고 거기서 자라나서 기재杞梓가 되며 사람은 그 속에 살면서 이를 얻어 준걸이 된다.
요수재廖秀才형산衡山의 남쪽에서 태어나 수려한 정기精氣를 받은 것이 더욱 많았다.
그래서 그 문장은 구름과 무지개 같고 그 재주는 기재杞梓 같았다.
처음에 향진사鄕進士유사有司에게 천거되어 〈과거 시험을 치렀는데〉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공경公卿들과 종유하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머물 곳을 비워두고 자리를 마련하고서 다투어 그를 예우하였다.
지금 영흥永興태원공太原公은 고아한 식견에 진중하고 정직한데 요군廖君을 매우 깊이 인정하였다.
당초에 그가 진주秦州를 맡아 다스리게 되었을 적에 요군廖君에게 함께 가자고 청하여 마침내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경사京師를 유람하니 서쪽 지방의 사군자士君子들이 그의 풍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진주秦州에 거주한 지 몇 해 지나 동쪽으로 가면서 경사京師에 들렀다가 돌아가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상계上計의 임무를 띠고 경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교규交逵에서 요군廖君을 알게 되어 그를 벗으로 사귀었고 요군廖君이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자 국문國門에서 전별餞別을 하였다.
그랬는데 지금 이렇게 그가 오게 되어, 또 낙양에서 만나 옛 정을 이야기하고 며칠을 보낸 뒤 떠나갔다.
산천山川이 본디 기이한 사물을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품고 있을 수 없는 것은 참으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점이 있어서이다.
지금 요군廖君이 〈형산衡山으로〉 떠나가는데 나는 그가 형산의 기슭에 오래도록 품겨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明道 2년(1033)에 지은 것이다. 廖倚는 일생이 자세하지 않은데 歐陽脩가 〈廖氏文集序〉에서 廖倚와 30년 동안 종유한 연유로 그의 형 廖偁의 문집에 서문을 써준다고 밝히고 있다. 衡山은 지금의 湖南省 衡山縣 서쪽에 있다. 湘江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는데 산세가 웅장하여 南嶽으로 일컬어진다.
역주2 元氣之融結爲山川 : 옛사람들은 천지만물이 모두 元氣로부터 만들어진다고 인식하였다. 元氣는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기 전의 混一한 氣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晉나라 孫綽의 〈游天台山賦〉에 “태허는……녹아서 시내와 도랑이 되고 응집하여 산과 언덕이 된다.[太虛……融而爲川瀆 結而爲山阜]”라고 하였다.
역주3 其蒸爲雲霓 其生爲杞梓 : 雲霓는 구름과 무지개이다. 杞梓는 두 종류의 좋은 목재로, 후대에 우수한 인재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역주4 今永興太原公 : 永興은 벼슬하고 있는 곳의 지명으로 말한 것이고, 太原은 대대로 거주한 곳의 지명으로 말한 것이다. 明道 2년(1033) 몇 해 전에 永興軍知事를 지내고 太原公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王曙 한 사람뿐이다. 왕서는 자가 晦叔으로 대대로 河汾, 바로 山西 太原府에 거주하였고, 뒤에 河南 사람이 되었다. 그는 天聖 6년(1028)에 工部侍郞으로 영흥군지사가 되었고, 7년(1029) 2월에는 御史中丞이 되어 조정에 올라갔다. 영흥군은 京兆府로, 治所는 長安에 있다.
역주5 秦州 : 陝西 關中 일대로, 宋代에는 영흥군에서 관할하였다.
역주6 遂趨函關 以覽秦都 : 函關은 函谷關으로, 지금의 河南 靈寶 동북쪽에 있다. 관문이 골짜기 안에 있어 깊고 험하기가 방패 같다고 하여 이렇게 명명하였다. 동쪽 崤山에서부터 서쪽 潼津까지를 함곡이라고 일컫는다. 秦都는 陝西 長安을 가리킨다.
역주7 凡居秦幾歲而東 : 廖倚가 天聖 6년(1028)에서 明道 2년(1033)까지 6년 동안 長安에 있던 것을 말한다.
역주8 上計吏 : 戰國 및 秦漢시대에 地方官들이 연말에 관할하는 지역의 戶口, 賦稅, 盜賊, 獄訟 등의 일들을 문서로 만들어서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上計라고 하고 上計의 임무를 맡은 屬官을 上計吏라고 한다.
역주9 識君於交逵 : 歐陽脩가 낙양의 留守推官으로 있던 明道 2년(1033) 1월에 上計吏로 長安에 갔을 때 大路에서 처음 만난 것을 말한다. 交逵는 四通八達의 큰 길을 말한다.
역주10 當君之西也 : 廖倚가 서쪽 秦州로 돌아가게 된 때를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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