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日
에 宣德郞
太子中允充館閣校勘 臣 歐陽脩
는 謹昧死再拜
하야 上書于皇帝闕下
하노이다
然臣迂儒不識兵之大計라 始猶遲疑하야 未敢自信이러니
今兵興旣久에 賊形已露하니 如臣素料가 頗不甚遠이라
故竊自謂有可以助萬一而塵聽覽者하야 謹條以聞하노니 惟陛下仁聖은 寬其狂妄之誅면 幸甚이라
當是時하야 吾之邊屯寡弱하며 城堡未完하고 民習久安而易驚하며 將非素選而敗怯하니
然國威未挫하며 民力未疲라 彼得城而居에 不能久守하고 虜掠而去에 可邀擊其歸하니
戎狄侵邊이 自古爲患이니 其攻城掠野에 敗則走하고 而勝則來가 蓋其常事니
若夫假僭名號하야 以威其衆하고 先擊吾之易取者一二하야 以悅其心하고 然後에 訓養精銳하야 爲長久之謀라
故其來也에 雖勝而不前하고 不敗而自退하니 所以誘吾兵而勞之也요
或擊吾東하고 或擊吾西하야 乍出乍入하니 所以使吾兵分備多而不得減息也라
吾欲速攻하면 賊方新銳요 坐而待戰하면 彼則不來라
不幸又遇水旱之災하야 調斂不勝而盜賊群起하니 彼方奮其全銳하야 擊吾困弊가 可也요 使吾不堪其困하야 忿而出攻하야 決於一戰이라도 彼以逸而待吾勞가 亦可也요 幸吾苦兵하야 計未知出하야 遂求通聘하야 以邀歲時之賂하고 度吾困急하야 不得不從이 亦可也니
今三十萬之兵
이 食於西者
가 二歲矣
어늘 又有十四五萬之
이 不耕而自食其民
하니 自古未有四五十萬之兵
이 連年仰食
하고 而國力不困者也
라
自初僭叛으로 嫚書已上하고 逾年而不出이라가 一出則鋒不可當이라
奈何彼能以上策而疲吾어늘 吾不自知其已困하며 彼爲久計以撓我어늘 我無長策而制之哉아
夫訓兵養士
하야 伺隙乘便
하야 用間出奇
가 此將帥之職也
니 所謂
而君不御者可也
라
至於外料賊謀之心하며 內察國家之勢하야 知彼知此하야 因謀制敵은 此朝廷之大計也니
今賊謀可知니 以久而疲我耳요 吾勢可察이니 西人已困也라
誠能豐財積粟하야 以紓西人하고 而完國壯兵하면 則賊謀沮而廟筭得矣리라
然皆以財用爲强弱也니 守非財用而不久는 此不待言이라
隋唐은 突厥吐蕃이 常與中國相勝敗하야 擊而勝之有矣요 未有擧而滅者라
天威所加에 雖終期於掃盡이나 然臨邊之將이 尙未聞得賊釁隙하야 挫其兇鋒하니
是攻守皆未有休息之期하고 而財用不爲長久之計니 臣未見其可也라
然關西之地에 物不加多하며 關東所有를 莫能運致하고 掊克細碎를 旣以無益而罷之矣라
至於
에 下無應者
하야 改法
而商旅不行
하니 是四五十萬之人
이 惟取足於西人而已
니
外爲賊謀之所疲하고 內遭水旱而多故하니 天下之患을 可勝道哉아
夫關西之物이 不能加多하니 則必通其漕運而致之요 漕運已通이라도 而關東之物不充이면 則無得而西矣라
故臣以謂通漕運盡地利權商賈三術竝施하면 則財用足而西人紓하며 國力完而兵可久하야 以守以攻이 惟上所使라
夫小瑣目前之利는 旣不足爲長久之謀니 非旦夕而可效라
故爲長久而計者는 初若迂愚而可笑나 在必而行之면 則其利博矣라
故臣區區不敢避迂愚之責하고 請上便宜三事하노니 惟陛下裁擇하소서
今京師在汴
하야 漕運不西
어늘 而人之習見者
가 遂以爲不能西
하니 不知秦漢隋唐
이 其都在
則天下之物
을 皆可致之西也
라
山川地形이 非有變易於古라 其路皆在하니 昔人可行이어늘 今人胡爲而不可리오
是時
에 運路未修
하야 其漕尙少
하고 其後武帝益修
하야 至漕百餘萬石
하고
而
之粟
이 皆至渭南
하야 運物最多
하니 其遺倉之迹
이 往往皆在
라
自唐
又尋隋迹
하야 於三門東西置倉
하고 開山十八里
하야 爲陸運以避其險
하고 卒泝河而入渭
하니
其後
遵耀卿之路
하야 悉漕江淮之米
하야 以實關西
하니
今江淮之米 歲入于汴者가 六百萬石이니 誠能分給關西면 得一二百萬石足矣라
有司不惜百萬之粟하야 分而及之에 其患者三門阻其中爾니
今宜浚治
하야 使歲運不阻
니 然後按求耀卿之迹
하야 不憚十許里陸運之勞
하면 則河漕通而物可致
하고 且紓關西之困
이라
使古無法이라도 今有可爲면 尙當爲之온 況昔人行之而未遠하니 今人行之而豈難哉아
耀卿與晏初理漕時에 其得尙少러니 至其末年하얀 所入十倍니 是可久行之法明矣라
曹操等起兵誅董卓
에도 亦欲自南陽道丹析而入長安
하고 是時
에 하니
臣嘗至南陽하야 問其遺老하니 云自鄧西北至永興六七百里에 今小商賈往往行之라하다
初漢高入關에 其兵十萬이니 夫能容十萬兵之路가 宜不甚狹而險也라
今能按求而通之
면 則武昌漢陽郢
沿漢之地十一二州之物
을 皆可漕而頓之南陽
이요
自南陽爲輕車人輦而遞之하되 募置遞兵하야 爲十五六舖하면 則十餘州之物이 日日入關而不絶이라
沿漢之地에 山多美木하야 近漢之民이 仰足而有餘하니 以造舟車가 甚不難也라
前日陛下深恤有司之勤하야 內賜禁錢數十萬하야 以供西用이러니
至於軍裝輸送하얀 多苦秋霖하야 邊州已寒에 冬服尙滯於路하니 其艱如此라
夫使州縣
로 遠輸京師
하야 轉冒艱滯然後得西
하니 豈若較南陽之旁郡
하야 度其道里入于武關與至京師遠近等者與其尤近者
하야 皆使直輸于關西
아
京師之用이 有不足이어든 則以禁帑出賜有司者하야 代而充用이니 其迂曲簡直이 利害較然矣라
臣聞昔之畫財利者는 易爲工하고 今之言財利者는 難爲術이라하니
故其不足은 則鑄山煮海하고 榷酒與茶하며 征關市而筭舟車라도 尙有可爲之法하야 以苟一時之用이러니
自漢魏迄今에 其法日增하고 其取益細하야 今取民之法이 盡矣라
昔者에 賦外之征하야 以備有事之用이러니 今盡取民之法하야 用於無事之時하야 悉以冗費而糜之矣니 至卒然有事하얀 則無法可增이라
然獨猶有可爲者
하니 民作而輸官者已勞
어늘 而遊手之人方逸
하며 地之産物者
어늘 而不墾之土
가 尙多
라
漢武帝時兵興用乏
이어늘 趙過爲畎田人犁
하야 以足用
하고
趙充國攻西羌
에 議者爭欲
罷兵而治屯田
하되 田於極邊
하야 以遊兵而防鈔寇
하니 則其理田不爲易也
로되 猶勉爲之
라
後漢之時
에 曹操屯兵
에 强敵四面
하니 以今視之
컨댄 疑其旦夕戰爭而不暇
라
然用
하야 建置官田
하야 募民而田近許之地
하야 歲得穀百萬石
이러니 其後郡國皆田
하야 積穀無數
하고 隋唐田制尤廣
하야 不可勝擧
라
其勢艱而難田은 莫若充國하고 迫急而不暇田은 莫如曹操라
然皆勉焉하야 不以迂緩而不田者는 知地利之博而可以紓民勞也라
自京以西에 土之不闢者가 不知其數하니 非土之瘠而棄也라 蓋人不勤農與夫役重而逃爾라
久廢之地가 其利數倍於營田하니 今若督之使勤與免其役이면 則願耕者衆矣라
充兵之人이 遂棄農業하고 託云敎習하야 聚而飮博하며 取資其家하야 不顧無有어늘
河東河北關西之鄕兵은 此猶有用이어니와 若京東西者는 平居不足以備盜하며 而水旱適足以爲盜라
京西는 素貧之地라 非有山澤之饒하여 民惟力農是仰이어늘 而今三夫之家一人五夫之家二人爲游手하니 凡十八九州에 以少言之라도 尙可四五萬人이 不耕而食하니
今誠能盡驅之
하야 使耕于棄地
하되 官貸其種
하고 歲田之入
을 與中分之
를 如民之法
하고 募吏之習田者爲
하야 優其課最而誘之
하면 則民願田者衆矣
라
時
에 嘗貸
民錢
하야 使市牛而耕
하고 時
에 亦用
하야 買牛湖南而治屯田
이라
今湖南之牛歲賈于北者가 皆出京西하니 若官爲買之면 不難得也요 又宜重爲法하야 以困所謂私牛之客者하야 使不容於民而樂爲官耕이라
凡民之家有牛者를 使自耕이면 則牛不足而官市者不多라
今幸其去農未久하야 尙可復驅還之田畝하야 使不得群游而飮博하야 以爲父兄之患하니 此民所願也라
使四五萬人皆耕하야 而久廢之田이 利又數倍면 則歲穀不可勝數矣라
京西之分
에 北有
가 南至漢而西接關
하니 若又通其水陸之運
이면 所在積穀
을 惟陛下詔有司而移用之耳
라
臣聞
하니 其上侵公利
하고 下刻細民
하야 爲國之患
이 久矣
라
蓋爲國者興利日繁하고 兼幷者趨利日巧하야 至其甚也하얀 商賈坐而權國利하니 其故非他라 由興利廣也일새라
夫興利廣이면 則上難專하니 必與下而共之然後에 通流而不滯라
然爲今議者는 方欲奪商之利하야 一歸於公上而專之라
하니 法每一變
이면 則一歲之間
에 所損數百萬
이어늘 議者不知利不可專
하고 欲專而反損
하야 但云 變法之未當
이라하야 變而不已
하니 其損愈多
라
夫欲十分之利皆歸于公이라도 至其虧少하얀 十不得三하니 不若與商共之하야 常得其五也라
茶自變法已來로 商賈不復하야 一歲之失을 數年莫補라 所在積朽하야 棄而焚之하니
今誠能復之하야 使商賈有利而通行이면 則上下濟矣라
今宜暫下其價하야 誘群商而散之하되 先爲令曰 三年將復舊價라하면
夫茶者生於山而無窮하며 鹽者出於水而不竭하니 賤而散之라도 三年十未減其一二라
必有販夫小賈
가 而分之
니 販夫小賈
는 無利則不爲
라
故大商不妬販夫之分其利者가 恃其貨博하야 雖取利少라도 貨行流速이면 則積少而爲多也라
今爲大國者가 有無窮不竭之貨로되 反妬大商之分其利하야 寧使無用而積爲朽壤은 何哉오
故大商之善爲術者는 不惜其利而誘販夫하고 大國之善爲術者는 不惜其利而誘大商하니 此與商賈共利取少而致多之術也라
故每有司變法에 下利旣薄하야 小商以無利而不能行하니
則大商方幸小商之不行하야 適得獨賣其貨하니 尙安肯勉趨薄利而來哉아
故變法而刻利者는 適足使小商不來而爲大商賈積貨也라
今必以術制商인댄 宜盡括其居積之物하고 官爲賣而還之하야 使其貨盡而後變法이라
夫大商以利爲生하니 一歲不營利하면 則有惶惶之憂라
彼必不能守積錢而閑居하야 得利雖薄이라도 猶將勉而來니 此變法制商之術也라
欲制商使其不得不從인댄 則莫若痛裁之하야 使無積貨니 此術之下也라
若乃縣官自爲鬻市之事는 此大商之不爲니 臣謂行之難久者也라
誠能不較錙銖而思遠大면 則積朽之物散而錢幣通하야 可不勞而用足矣라
臣愚不足以知時事어니와 若夫堅守以捍賊이라가 利則出而擾之하되 凡小便宜를 願且委之邊將하소서
至于積穀與錢하여 通其漕運하면 不二三歲而國力漸豐하며 邊兵漸習하고 賊鋒漸挫而有隙可乘이리니
願陛下以其小者責將帥하고 謀其大計而行之하시면 則天下幸甚이라
모월 모일에 선덕랑宣德郞 수태자중윤守太子中允 충관각교감充館閣校勘 신臣 구양수歐陽脩는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고서 황제의 궐하闕下에 글을 올립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국가가 원호元昊의 반역이 관서關西에서 있은 뒤로 국가를 위해 정사를 말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신이 처음에 세 가지 계책을 세워서 적의 실정을 헤아릴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오활한 선비라 병사兵事의 큰 계책을 알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오히려 머뭇거리고 의심하면서 감히 자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병란이 일어난 지 오래라 적의 형세가 이미 다 드러나고 보니 신이 평소에 짐작했던 바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의 계책이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 감히 성상의 이목을 더럽히며 삼가 조목조목 열거해 아뢰오니, 어질고 성스러우신 폐하께서는 광망狂妄한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대저 관서關西에 방비防備가 느슨해지고 백성들이 병란兵亂을 보지 못한 지가 2, 30년입니다.
가사 적이 병란이 싹튼 당초에 모습을 감추고 계책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해 온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 우리 변방邊方에 둔치고 있는 군사들은 숫자가 적고 약하며, 성곽城郭과 보루堡壘는 완전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오래도록 편안한 데 익숙해져서 쉽게 놀라며, 장수는 평소 선발한 사람이 아니라 겁이 많습니다.
그러니 양을 몰고 돼지가 치달리듯 적이 쳐들어온다면 기세를 떨치며 깊숙이 쳐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위세가 아직 꺾이지 않았고 백성의 기운이 아직 지치지 않았으니, 저들이 성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더라도 오래도록 지키지 못하고, 노략질을 하고 떠나가면 돌아가는 적군을 요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융적戎狄이 변방을 침입하는 것은 예로부터 우환거리이니, 성곽을 공격하고 들판을 노략질할 때 패배하면 달아나고 승리하면 쳐들어오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저 천자天子의 명호名號를 참람僭濫되게 사용하여 자기 무리들에게 위세를 부리고, 우리 쪽의 취하기 쉬운 한두 곳을 먼저 공격하여 자기 무리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그런 뒤에 정예병精銳兵을 훈련해 양성하여 장구한 계책을 도모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들이 올 때에 비록 승리해도 앞으로 나아오지 않고 패배하지 않아도 스스로 퇴각하니, 이는 우리 군사를 유인하여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동쪽을 치고 혹은 우리의 서쪽을 쳐서 언뜻 나왔다가 언뜻 들어가니, 이는 우리 군사로 하여금 나누어 방비할 곳을 많게 하여 병력兵力을 줄이거나 휴식休息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속공速攻하고자 하면 저들은 사기충천士氣衝天한 신예新銳이고, 우리들이 앉아서 싸움을 걸어오기를 기다리면 저들은 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버틴 지 3, 4년도 못 되어서 우리 군사는 이미 쇠약해지고 백성들의 힘은 이미 지쳤습니다.
게다가 불행히도 홍수와 가뭄의 재해를 만나 조세租稅는 감당하지 못하고 도적은 떼 지어 일어나니, 저들은 바야흐로 온전한 예기銳氣를 떨쳐 곤폐困弊한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고, 가사 우리가 곤폐함을 견디지 못해 분노하여 나와서 공격하여 일전一戰을 결행하더라도 저들은 편안히 쉰 군사를 가지고 지친 우리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전쟁에 지친 나머지 아무런 대책을 낼 수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마침내 화친을 청해 세시歲時의 뇌물을 요구하거나 우리의 사정이 곤궁하고 급박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힘이 한 번 곤궁해지면 적의 계책은 어느 쪽이든 불가할 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병법에서 이른바 ‘싸우지도 않고 남의 병력을 지치게 한다.’는 것이니, 상책上策입니다.
지금 30만의 병력이 서쪽 변방에서 군량을 먹고 있는 지가 2년인데, 또 14, 5만의 향병鄕兵이 농사를 짓지도 않고서 백성들의 식량을 먹고 있으니, 예로부터 4, 50만의 병력이 해를 이어 남의 힘에 의지해 먹고 살면서 국력이 곤핍困乏해지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은 듣건대 원호元昊라는 적은, 위엄威嚴은 아랫사람들을 두렵게 할 수 있고 은혜恩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죽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거만한 국서國書를 이미 올렸고, 해를 넘겨서도 나오지 않다가 한 번 나왔다 하면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변방의 관원을 잡아서 협박하고 우리 장수를 사로잡음에 예우하여 죽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니, 이는 그 마음속의 흉측한 계책이 창졸간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어이하여 저들은 좋은 계책으로 우리를 지치게 하거늘 우리는 이미 지친 줄 스스로 알지 못하며, 저들은 장구한 계책을 써서 우리를 흔드는데 우리는 이를 제압할 훌륭한 계책이 없단 말입니까.
대저 병졸을 훈련하고 군사를 양성하고서 틈을 엿보고 형편을 타서 간첩을 쓰고 기계奇計를 내는 것이 바로 장수將帥의 직분職分이니, 이른바 곤외閫外의 일로서 임금이 다스리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밖으로는 적들이 가진 계책의 내심을 헤아리고 안으로는 국가의 형세를 살펴서 적을 알고 나를 알아 계모計謀로 적을 제어하는 것은 조정의 큰 계책입니다.
이는 이른바 묘당廟堂에서 계책을 세워서 승리한다는 것이니,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적의 계책을 알 수 있으니 지구전을 써서 우리를 지치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의 형세를 알 수 있으니 서쪽 변방 사람들이 이미 지쳤습니다.
진실로 재물을 풍족히 갖추고 식량을 잘 비축하여 서쪽 변방 사람들을 편안히 풀어주고 국가를 완전하게 하고 군병을 씩씩하게 하면 적의 계책이 꺾이고 묘당의 계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저 병사兵事란 공격攻擊과 수비守備일 뿐입니다.
그러나 모두 재용財用으로 강약强弱이 결정되는 것이니, 수비에 재용이 아니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옛날에 진秦나라는 6대代에 걸친 부강富强을 깔고 앉아서 이를 바탕으로 삼아 호胡를 공격하다가 마침내 천하를 곤궁하게만 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漢나라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부강한 힘을 인하여 세 차례 군사를 일으켰으나 겨우 하남河南 지방을 얻었을 뿐이었습니다.
수隋‧당唐 때는 돌궐突厥과 토번吐藩이 늘 중국과 서로 승패를 주고받아 중국이 공격하여 승리하는 경우는 있으되 군사를 일으켜 멸망시킨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秦‧한漢은 그중에서도 더욱 강한 나라인데, 공격한 지역이 바로 지금 원호元昊의 땅입니다.
더구나 유평劉平이 패전한 이후로 적의 기세가 맹렬해져서 꺾이고 패한 적이 없습니다.
공격과 수비의 계책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폐하의 위엄이 미치는 바에 끝내 적을 다 소탕할 것을 기약하였으나,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 중 적의 틈을 찾아서 흉포한 기세를 꺾은 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는 공격과 수비 모두 휴식할 시기가 없고 재용財用 역시 장구한 계책을 세우지 못한 것이니, 신은 옳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4, 50만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양식을 받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서關西 지방에 물산이 더 보태지지 않으며 관동關東에 있는 물산을 운반해 올 수 없고, 자질구레하게 세금을 긁어모으는 것은 이미 무익한 것이라 하여 그만두었습니다.
관아에서 곡식을 사서 국고에 들여도 아래에서 호응하는 자가 없어, 법을 바꾸어 국가가 전매하는 바람에 상인들이 다니지 않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4, 50만 명의 사람들이 오직 서쪽 지방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서쪽 지방 사람들이 어찌 곤궁해지지 않겠습니까.
곤궁해도 일어나 도적이 되지 않는 자는 틀림없이 홍수와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밖으로는 외적의 계책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홍수와 가뭄을 만나 변고가 많으니, 천하의 우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관서關西의 물산이 더 많아질 수 없으니 반드시 조운漕運을 소통해서 운반해 와야 하고, 조운漕運이 소통되더라도 관동關東의 물산이 충분하지 못하면 관서로 운반해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생각건대 조운을 소통하는 것, 지리地利를 다하는 것, 상인들의 이익을 공평하게 해주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을 다 시행하면 재용이 풍족하여 서쪽 지방 사람들이 넉넉해질 것이며 국력이 완전하여 군사를 오래 유지할 수 있어, 수비든 공격이든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자잘한 목전目前의 이익은 이미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으니 조석朝夕의 짧은 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구한 기간을 두고 계책을 세우는 자는 처음에는 우활迂闊하고 어리석어 가소로운 듯하지만 기필코 시행한다면 그 이익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구한 신은 오활하다는 꾸짖음을 감히 피하지 않고 편의한 계책 3가지를 올릴까 하오니, 폐하께서 헤아려 선택하소서.
신은 듣건대 오늘날 서쪽 변방을 위해 계책을 내는 사람들이 모두 조운이 통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합니다.
그러나 신은 다만 소통할 방도를 찾지 않았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수도가 변경汴京에 있어 조운이 서쪽으로 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상태를 익히 보아온 사람들은 마침내 서쪽으로 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진秦‧한漢‧수隋‧당唐은 그 수도가 옹주雍州에 있었으므로 천하의 물산을 모두 서쪽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산천의 지형이 옛날과 바뀌지 않아 당시의 길들이 모두 있으니, 옛사람들이 갈 수 있었거늘 지금 사람들이라고 어찌하여 갈 수 없겠습니까.
한漢나라 초기에 해마다 산동山東의 곡식 수십만 석을 조운漕運하였습니다.
이때 조운로漕運路가 정비되지 못해서 조운하는 물산이 아직 적었고, 그 후에 무제武帝가 위거渭渠를 더욱 정비하여 백여만 석을 조운하기 이르렀습니다.
수隋 문제文帝 때에는 물길을 따라 곡식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운반하여 비축해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관동關東과 분수汾水‧진수晉水 일대의 곡식이 모두 위수渭水 이남 지역에 모여들어 물산을 운반함이 매우 많았으니, 당시의 창고 터가 왕왕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삼문산三門山 지역의 험한 물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唐나라 배요경裵耀卿이 수隋나라 때의 창고 터를 다시 찾아서 삼문산 동서쪽에 창고를 설치하고, 산길 18리를 열어 육운陸運을 하여 험한 물길을 피하고, 마침내 황하黃河를 거슬러 올라 위수渭水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해마다 운송하는 곡물이 2, 3백만 섬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유안劉晏이 배요경이 연 길을 따라 강회江淮(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의 미곡을 모두 조운하여 관서關西 지역에 채웠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재리財利를 잘 경영하고 조운을 잘한 사람을 말할 때 배요경과 유안을 으뜸으로 쳤습니다.
지금 강회江淮 일대의 미곡이 해마다 변수汴水로 들어오는 것이 6백만 섬이니, 진실로 관서關西 지역에 나누어줄 수 있다면 1, 2백만 섬을 얻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지금 군병들 중 변수로 조운한 곡식을 먹는 자가 매우 많이 변방에 나가 수자리를 서고 있습니다.
유사有司가 백만 섬의 곡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이들에게 나누어 보내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삼문산三門山이 그 중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변거汴渠를 준설하여 세운歲運이 막히지 않게 한 뒤에 배요경裴耀卿이 열었던 길의 자취를 다시 찾아서 10여 리 거리를 육로로 운송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는다면, 황하黃河의 조운이 통하여 물산을 운반해 보낼 수 있고 관서의 곤궁한 형편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법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 할 수 있다면 응당 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옛사람이 한 지 오래지 않으니, 지금 사람이 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배요경裴耀卿과 유안劉晏이 처음 조운을 다스릴 때에는 얻어지는 곡물이 오히려 적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들어오는 곡물이 열 배가 되었으니, 이는 오랫동안 시행할 만한 법임이 분명합니다.
신은 듣건대 한漢 고조高祖가 진秦나라에 들어갈 때 동관東關을 통하지 않고 남양南陽을 지나갔으며, 역酈‧석析을 지나서 무관武關에 들어갔습니다.
조조曹操 등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董卓을 주벌할 때도 역시 남양南陽으로부터 단丹‧석析을 지나서 장안長安에 들어갔으며, 이때 장제張濟가 또 장안으로부터 무관武關을 나와 남양南陽으로 달아났습니다.
곧 이곳은 예로부터 군사를 쓸 때 왕래하는 길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남양에 이르러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등주鄧州로부터 서북쪽으로 영흥永興에 이르기까지가 6, 7백 리인데 지금 작은 장사치들이 왕왕 그 길을 다닌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초 한 고조가 관문에 들어갈 때 그 군사가 10만이었으니, 10만의 군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의당 매우 좁고 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낙양洛陽이 수도가 되고나서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동관으로 달려가니, 그 길이 오랜 세월 사람이 안 다녀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 길을 찾아서 통하게 하면 무창武昌‧한양漢陽‧영郢‧복復‧양양襄陽‧양梁‧양洋‧금金‧상商‧균均‧방房‧광화光化 등 한수漢水 연안의 11, 2주州의 곡물을 모두 남양南陽에 옮겨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양으로부터 가벼운 수레와 사람이 끄는 수레로 그 곡물을 옮기되 운송하는 병사를 모집하여 15, 6곳의 역참을 두면, 10여 주州의 곡물이 날마다 무관으로 들어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한수漢水 연안 지역에는 산에 좋은 목재가 많아 한수 인근의 백성들이 이것에 의지하여 넉넉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이것으로써 배와 수레를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날 폐하께서 유사有司의 노고를 몹시 가엽게 여겨 궁중에서 관고官庫의 금 수십만 냥을 내어 서쪽 변방의 용도로 지급했습니다.
그러나 도로가 험하고 멀어 수레로 운반함에 해를 넘겨도 다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장軍裝의 수송으로 말하자면 가는 동안 가을 장맛비에 많이 시달려 변방 고을에 날씨가 이미 추워졌는데도 겨울옷은 아직 도로에서 지체되고 있으니, 그 고생스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대저 주현州縣의 강리綱吏로 하여금 멀리 경사京師로 수송하게 한 다음 다시 고생을 겪고 도중에서 지체된 뒤에야 서쪽에 당도할 수 있게 하니, 어찌 남양南陽 주변의 고을들을 비교해 무관武關에 들어가기까지와 경사에 이르기까지의 도로의 원근遠近이 같은 곳과 거리가 더욱 가까운 곳을 헤아려 모두 그 지역에서 직접 관서關西로 수송하게 하느니만 하겠습니까.
경사의 재용財用이 부족하면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꺼내어 유사有司에게 주어서 대신 비용에 충당하게 하면 될 것이니, 어느 쪽이 더 우회적이고 어느 쪽이 더 간편한 방법인지 그 이해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날에 재리財利를 계획하는 것은 공효가 되기 쉽고, 오늘날 재리를 말하는 것은 방법이 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부분은 동전을 주조하고 소금을 건조하며 술과 차를 전매하며 관문과 시장에 세금을 징수하고 배와 수레에 통행세를 부과하더라도 외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일시적인 소용을 그럭저럭 댈 수 있었습니다.
한漢‧위魏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세금의 법이 날로 증가하고 세금을 거두는 명목도 날로 세밀해지니 지금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는 법은 남김없이 거둔다 할 정도입니다.
옛날에는 부외賦外의 세금으로 유사시의 용도에 대비했는데, 지금은 백성에게 세금 깡그리 거두는 법을 일 없이 한가한 때에 써서 죄다 쓸데없는 비용으로 소모해버리니, 갑자기 큰일을 만나면 세금을 더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해볼 만한 것이 있으니,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서 국가에 실어보내는 것이 이미 수고로운데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편안하며, 땅에서 물산을 생산하는 것은 해를 걸러 휴경休耕할 수 없는데 개간하지 않은 땅은 아직도 많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남은 힘이 있고 땅에 남은 이익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해볼 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전대에 용병用兵한 이들을 훑어보면 둔전屯田을 우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漢 무제武帝 때 전쟁이 일어나 군량이 부족해지자 조과趙過가 농토를 나누어 번갈아 경작하는 법과 소를 이용해 경작하는 법을 만들어서 곡식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조충국趙充國이 서강西羌을 공격할 때 의논하는 이들은 다투어 출동해 공격하기를 바랐지만 조충국은 전승全勝을 거둘 계책을 깊이 생각하여 잘 참아서 적이 지칠 때를 기다리느라, 심지어 조명詔命을 어기고 군사 출동을 중지하고서 둔전을 설치하되 극변極邊에다 둔전을 개간하여 한가히 노는 군병으로 적의 침입을 막았으니, 그 둔전을 설치함이 쉽지 않았을 텐데도 힘써 하였습니다.
후한後漢 때에는 조조曹操가 허하許下에 둔전을 설치할 때 사방에 강적이 있었으니,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지경이라 겨를이 없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조지棗祗‧한호韓浩의 계책을 써서 관전官田을 설치, 백성을 모집하여 허하와 가까운 땅에 둔전을 개간하여 해마다 곡식 백만 석을 수확하였는데, 그 후에 군郡‧국國이 모두 둔전을 설치하여 곡식을 비축한 것이 무수하였고, 수隋‧당唐은 전제田制가 더욱 넓어서 이루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 형세가 곤란하여 둔전을 하기 어렵기로는 조충국의 경우만 한 것이 없고 형세가 급박하여 둔전을 할 겨를이 없기로는 조조의 경우만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힘써 했지 현실에 어두운 계책이라 하여 둔전을 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지리地利가 넓어서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하의 토지土地 중 경작耕作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신이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가까운 지역만 들어보겠습니다.
경사京師 서쪽에 개간되지 않은 땅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니, 이는 토질이 척박해서 버려둔 것이 아니라 대개 사람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신역身役이 무거워서 도망친 것입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는 땅은 그 지리地利가 둔전屯田을 운영하는 것보다 몇 배가 되니, 지금 만약 농사에 힘쓰도록 독책하고 신역身役을 면제해주면 농사짓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향병鄕兵 제도가 백성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에 대해 의논하는 이들이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병역兵役에 충당된 사람들이 드디어 농업을 버리고 군사훈련을 핑계로 삼아 모여서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일삼으며, 자기 집에서 재물을 가져와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관리들이 금지하지 않고 부형들도 감히 꾸짖지 못하니, 집집마다 근심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동河東‧하북河北‧관서關西의 향병은 그래도 쓸모가 있지만 경사 동쪽과 서쪽 지역의 경우 평시에는 도적을 방비하기에 부족하며 홍수와 가뭄이 든 때에는 단지 도적이 되기에 알맞습니다.
경사 서쪽은 본디부터 가난한 곳이라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넉넉함이 없어 백성들이 오직 농사만 믿고서 사는데, 지금 세 사내가 있는 집은 한 사람이, 다섯 사내가 있는 집은 두 사람이 향병이 되어 일손을 놀리고 있으니, 무릇 18, 9주州에 적게 잡아서 말해도 오히려 4, 5만 명이 농사를 짓지 않고 밥을 먹는 셈입니다.
이는 우리 자체 안에서 서로 힘을 소모하여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내들을 죄다 몰아서 버려진 땅에 농사를 짓게 하되 국가가 곡식 종자를 빌려주고 세전歲田의 수입을 백성들의 법과 같이 국가와 경작자가 공평하게 나누고, 관리 중에서 농사에 익숙한 자를 모집하여 전관田官을 삼아서 실적이 뛰어난 자를 우대하면 둔전을 원하는 백성들이 많을 것입니다.
태종황제太宗皇帝 때 일찍이 진陳‧채蔡 지역 백성들에게 관전官錢을 빌려주어 소를 사서 농사를 짓게 하였고, 진종眞宗황제 때에도 경망耿望의 말을 받아들여 호남湖南 지역에서 소를 사서 둔전을 개간하였습니다.
지금 호남 지역의 소를 해마다 북쪽에서 사는 것이 모두 경사京師 서쪽에서 나오니, 만약 국가가 이를 산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요, 또 무겁게 법을 만들어서 이른바 소를 사사로이 매매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백성들 사이에서 용납되지 못하게 하여 국가의 경작을 즐거이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백성들 중 집안에 소를 가진 자들로 하여금 자기 농사를 짓게 하면 소는 부족하고 국가가 사들이는 것도 많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향병은 본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군적軍籍에 넣어서 병사를 만들어 마침내 본업을 버리게 한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도 농사를 버린 지 오래지 않으므로 다시 이들을 몰아서 농토로 되돌려보내 떼를 지어 놀며 술 마시고 도박하여 부형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백성들의 바람입니다.
한 사내의 힘이 편안히 일하는 것을 기준으로 말하면 만전縵田 1경頃을 경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4, 5만 명으로 하여금 모두 농사를 짓게 하여, 오래 묵었던 농토에서 이익이 몇 배나 나게 하면 세곡歲穀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경사 서쪽 분야分野에 북쪽에는 대하大河가 남쪽으로 흘러 한수漢水에 이르고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과 접하니, 만약 또 수륙水陸의 운송을 소통하시면 곳곳마다 쌓은 곡식들을 오직 폐하께서 유사有司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옮겨다 쓰기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셋째는 상인商人들의 이익利益을 공평公平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진秦나라가 왕법王法을 폐지하고 겸병兼倂을 열었으니, 위로는 공리公利를 침탈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착취하여 국가의 근심이 된 지가 오래입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법을 만들어서 이들을 억제하고 이들의 부당한 이익을 빼앗으려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대개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이익을 일으킴이 날로 많아지고 겸병하는 자는 이익을 추구함이 날로 교묘해져서 심지어는 상인들이 가만히 앉아서 국가의 이익을 저울질하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익을 일으킴이 넓기 때문입니다.
대저 이익을 일으킴이 넓으면 윗사람이 독차지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아랫사람들과 함께한 뒤에야 유통하여 막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의논하는 이들은 바야흐로 상인들의 이익을 빼앗아서 오로지 조정에다 돌려서 조정이 독차지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 까닭에 상인의 이익을 빼앗으려는 계획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국가의 이익은 더욱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지난날 유사有司가 누차 그 법法을 바꾸니, 법이 한 번 바뀔 때마다 한 해 사이에 줄어드는 이익이 수백만이거늘, 의논하는 이들은 이익은 독차지할 수 없고 독차지하고자 하면 도리어 이익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단지 바뀐 법이 온당치 못하다 하여 법을 바꾸기를 그치지 않으니, 줄어드는 이익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대저 십분의 이익 모두를 조정에 돌리고자 하더라도 이익이 줄어듦에 이르러서는 10분의 3도 얻지 못하니, 상인들과 이익을 공유하여 늘 10분의 5를 얻는 것만 못합니다.
오늘날 국가의 많은 이익이 되는 것은 차와 소금입니다.
차는 법을 바꾼 이래로 상인들이 다시 오지 않아서 한 해의 손실을 몇 해 동안 보완하지 못하여 곳곳마다 쌓인 차가 썩어서 내버려 불태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날 의논하는 이가 삼설三說의 법이 편리함을 누차 말하였으니, 유사有司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참으로 이 법을 다시 시행하여 상인들에게 이익이 있게 해서 통행하게 한다면 국가와 상인, 상하上下의 일이 서로 잘 풀릴 것입니다.
지금 잠시 그 값을 내려 상인의 무리들을 끌어들여 소금을 각지로 흩어서 팔게 하되, 먼저 명령하기를 “3년 뒤에는 본래의 값을 회복할 것이다.”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익을 탐내는 상인들이 앞다투어 몰려들 것입니다.
대저 차란 것은 산에서 생산되어 무궁하고, 소금이란 것은 물에서 생산되어 무궁하니, 그 값을 싸게 하여 흩어서 팔더라도 3년 동안 10분의 1, 2도 수량이 줄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차와 소금, 두 가지 물산이 비싼 것은 국가의 자본, 재화財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들을 쌓아두고 흩지 않는다면 이는 썩은 흙을 아끼는 격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저 큰 상인이 재물을 불릴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자잘구레한 물건까지 자신이 직접 시장에 내다 팔아서이겠습니까.
반드시 판매販賣를 맡은 작은 상인들이 그중에서 나누어 파는데, 판매를 맡은 작은 상인은 이익이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판매상이 자기 이익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큰 상인이 질투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재물이 많아서 비록 가지는 이익이 적더라도 재물의 유통이 빠르면 적은 것을 쌓아서 많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국大國을 다스리는 이가 무궁하여 다하지 않는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도리어 큰 상인이 자기 이익을 나눠 가지는 것을 질투하여 차라리 재물을 쓸모없게 만들지언정 쌓아두어 썩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므로 방법을 잘 쓰는 큰 상인은 자기 이익을 아끼지 않고 판매상을 유인하며, 방법을 잘 쓰는 큰 나라는 자기 이익을 아끼지 않고 큰 상인을 유인하니, 이것이 상인과 이익을 공유하여 적은 것을 모아 많은 것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상인들을 방법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쌓아둔 재물이 많아서 형편이 다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익이 많으면 오고 이익이 적으면 그치니, 호령으로 오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양 유사有司가 법을 바꿀 때마다 아랫사람들의 이익이 이미 적어져 작은 상인들이 이윤이 없어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큰 상인들은 바야흐로 작은 상인들이 장사하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때마침 그 재물을 홀로 전매專賣할 수 있거늘, 어찌 애써 작은 이익을 추구해서 오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법을 바꾸어서 이익을 착취하는 것은 작은 상인을 오지 못하게 하고 큰 상인들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셈입니다.
지금 굳이 방법을 써서 상인들을 제압한다면 의당 그들이 쌓아둔 재물을 죄다 거두어들이고 국가가 이를 팔아서 그들에게 돌려주어 그들의 재물이 다하게 한 뒤에 법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대저 큰 상인은 이익을 가지고서 살아가니 한 해 동안 이익을 얻는 일을 하지 못하면 조급하고 불안한 기색이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필시 쌓아둔 돈을 지키고서 한가롭게 있지 못하고, 이윤 획득이 아무리 적더라도 외려 애써 오게 될 것이니, 이것이 법을 바꾸어 상인을 제어하는 방법입니다.
대저 상인을 유인하여 재물을 유통시키고자 한다면 그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이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상인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호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통렬히 제어하여 재물을 쌓아두지 못하게 해야 하니, 이것은 좋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다상茶商을 제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소금의 경우는 금법禁法이 치밀해질수록 범법 사례가 더욱 많아져 형벌이 늘어납니다.
현관縣官이 직접 소금을 파는 일 같은 것으로 말하자면 이는 큰 상인들도 하지 않는 것이니, 신은 오래 시행되기 어려운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진실로 작은 것을 따지지 않고 원대한 것을 생각한다면 쌓여 썩고 있는 물건이 판매되고 화폐가 유통되어 수고하지 않아도 재용이 풍족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시사時事를 알지 못하지만 만약 견고히 지켜서 적을 막다가 형세가 이로우면 출동하여 적을 교란시키되, 무릇 작은 편의便宜는 원컨대 우선 변장邊將에게 맡겨두소서.
돈과 곡식이 쌓여 조운이 소통되는 데 이르면 2, 3년이 못 되어서 국력이 점차 풍부해지고 변방의 군사들이 점차 단련되며 적의 예봉은 점차 꺾여 틈을 노릴 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일거에 섬멸하는 것이 만전萬全의 계책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작은 것은 장수에게 맡기고 큰 계책을 도모하시면 천하가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신 구양수歐陽脩는 죽음을 무릅쓰고 재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