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其機軸 自昌黎送孟東野來 而思尤婉而正이라
某聞傳曰 이라하니 君子之所學也 言以載事하고 而文以飾言하니 事信言文이라야 乃能表見於後世
詩書易春秋 皆善載事而尤文者
故其傳尤遠이라
荀卿孟軻之徒 亦善爲言이나 然其道有至有不至
故其書或傳或不傳 猶繫於時之好惡而興廢之
由此以來 去聖益遠 世益薄或衰하야周隋 其間亦時時有善文其言以傳者
然皆紛雜滅裂하야 不純信이라
故百不傳一하고 幸而一傳이라도 傳亦不顯하야 不能若前數家之然暴見而大行也하니 甚矣
言之難行也
事信矣 須文이요 文至矣 又繫其所恃之大小하야 以見其行遠不遠也
後之學者 蕩然無所載하니 則其言之不純信 其傳之不久遠 勢使然也
至唐之興하야 其臣下又爭載之하야 以文其詞하야 或播樂歌하며 或刻金石이라
故其間鉅人碩士閎言高論流前後者 恃其所載之在文也
故其言之所載者大且文이면 則其傳也章하고 言之所載者不文而又小 則其傳也不章이라
某不佞 守先人之緖餘하니
先人在太宗時하야 以文辭爲名進士하고 以對策爲이러니 旣而守道純正하야 爲賢하고 逢時太平하야 奮身揚名하니 宜其言之所載 文之所行 大而可恃以傳也
然未能甚行於世者 豈其嗣續不肖하야 不能繼守而泯沒之
抑有由也
夫文之行 雖繫其所載 猶有待焉하니 詩書易春秋 待仲尼之刪正하고 荀孟屈原無所待하되 猶待其弟子而傳焉하고 漢之徒 亦得其史臣之書하니
其始出也 或待其時之有名者而後發하고 其旣歿也 或待其後之紀次者而傳이라
其爲之紀次也 非其門人故吏 則其親戚朋友
伏惟閣下 學老文鉅하야 爲時雄人하야 出入三朝 其能望光輝接步武者 惟先君爲舊 則亦先君之所待也
豈小子之敢有請焉이리오
謹以家集若干卷數 寫獻門下하노니 惟哀其誠而幸賜之하소서
唐荊川曰 架空累層之文이라


12. 남을 대신하여 왕추밀王樞密에게 올려 선인先人의 문집 서문을 부탁한 편지
구상構想한창려韓昌黎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로부터 왔으나, 의사意思는 더욱 완곡婉曲하고 바르다.
나는 듣건대 에 이르기를 “말에 문장文章이 없으면 비록 행해지더라도 멀리 가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군자가 배우는 바는 말로써 일을 기록하고 문장으로 말을 수식修飾하니, 일은 신뢰를 받고 말은 문장으로 돼야 비로소 후세에 드러내어 보일 수 있습니다.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는 모두 일을 잘 기재하고 더욱 문장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해짐이 더욱 멀리 가는 것입니다.
순경荀卿맹가孟軻와 같은 이들 또한 말을 잘하였으나, 그 는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도 있고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저서들이 혹은 후세에 전해지고 혹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의 좋고 나쁨에 매어서 흥성興盛하기도 하고 쇠폐衰廢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나라에 대부大夫가 있어 그 노래를 문장으로 잘 표현하여 후세에 전했고, 나라가 융성할 때에는 가의賈誼동중서董仲舒사마상여司馬相如양웅揚雄 같은 이들이 그 문사文辭를 문장으로 잘 표현하여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이후로는 성인聖人과 시대가 더욱 멀어짐에 세상은 더욱 경박하고 쇠퇴하여, 아래로 후주後周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동안에도 때때로 자기 말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여 후세에 전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분잡紛雜하고 멸렬滅裂하여 순수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 개 중에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고, 다행히 하나가 전해지더라도 전해지는 것이 두드러지지 못하여, 전 시대 몇몇 대가大家들이 활짝 드러나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것과는 같을 수 없었으니, 심하도다!
말이 행해지기 어려움이여.
일이 신뢰할 만하면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고, 문장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면 또 그 글이 의지하는 인물과 내용의 대소大小와 관계되어, 세상에 행해지는 것이 멀리 가는지 멀리 가지 못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서경書經》에는 임금과 임금의 사적이 실려 있고, 《시경詩經》에는 나라와 나라의 사적이 실려 있고, 《주역周易》에는 구성九聖의 사적이 실려 있고, 《춘추春秋》에는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법도가 실려 있으며, 순경荀卿맹가孟軻 두 사람은 《시경》‧《서경》‧《주역》‧《춘추》를 저술에 실은 자이고, 《초사楚辭》는 풍아風雅를 내용에 실었으며, 나라의 작가들은 저마다 그 당시 군주의 명성과 문물의 성대함을 실어서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의 학자들은 텅 비어 아무것도 실은 것이 없으니, 그 말이 순수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한 것과 그 전해짐이 오래고 멀지 못한 것은 형세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라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태종太宗의 정치와 개원開元치세治世헌종憲宗의 공적을 그 신하들이 또 다투어 역사에 실어서 문장으로 표현하여 음악과 노래로 전파하기도 하고 금석金石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간에 위대한 인사들의 굉대宏大하고 고준高峻한 언론이 시대의 전후로 빛나는 것은 그 실린 글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던 데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말이 싣고 있는 내용이 크고 또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으면 그 전해지는 것이 드러나고, 말이 싣고 있는 것이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고 또 작으면 그 전해지는 것도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못난 사람인 내가 선친先親의 유업을 지키고 있습니다.
선친은 태종太宗 때 문장으로 이름난 진사가 되셨고 대책對策으로 현량방정賢良方正이 되었는데, 이윽고 를 지킴이 순정純正하여 어진 대제待制가 되었고 태평한 시대를 만나 분발하여 이름을 떨쳤으니, 의당 그 말이 싣고 있는 내용과 글이 세상에 행해지는 것이 커서 의지하여 후세에 전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 그다지 행해지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손이 불초하여 이어받아 지키지 못하고 민멸泯滅시켰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대저 문장이 행해지는 것은 비록 그것이 싣고 있는 내용에 달렸으나 그래도 기다리는 바가 있으니,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는 중니仲尼산정刪正을 기다렸고, 순자荀子맹자孟子굴원屈原은 기다리는 바는 없었으나 그래도 그 제자를 기다려 후세에 전해졌고, 나라의 작가들도 사신史臣들이 써준 덕분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문장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혹 그 시대의 유명한 사람을 기다린 뒤에 드러나기도 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혹 그 후대의 기록해준 사람을 기다려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그 문장을 기록해준 것은 유몽득劉夢得유자후柳子厚의 문집에 서문을 써주고 이한李漢한퇴지韓退之의 문집에 서문을 써준 것처럼, 그 문인이나 친분이 있는 관리가 아니면 친척이나 붕우들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각하閣下께서는, 학문은 노성老成하고 문장은 굉대宏大하여 당대의 우뚝한 인물이 되어 세 조정에 출입하심에, 그 광휘光輝를 바라보고 그 보무步武를 접할 수 있었던 분이 오직 친구이신 선친뿐이었으니, 또한 선친께서 기다리신 바입니다.
어찌 소자가 감히 마음대로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가집家集 약간 권을 베껴서 문하께 바치오니, 그 정성을 불쌍히 여겨 글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당형천唐荊川이 이르기를 “공중에 몇 층의 누각을 지은 것과 같은 글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代人上王樞密求先集序書 : 이 편지는 仁宗 景祐 원년(1034)에 쓴 것으로,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代筆하여 王樞密에게 그 사람의 先親의 문집 서문을 부탁한 것이다. 왕추밀은 王曙를 가리킨다. 왕서는 자가 晦叔으로 인종 明道 2년(1033)에 樞密使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歐陽脩는 경우 원년에 왕서의 추천을 받아 學士院의 試官이 되었고 館閣校勘에 임명되었다.
역주2 言之無文 行而不遠 : 《春秋左氏傳》 襄公 25년 조에 “仲尼가 이르기를 ‘옛날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을 해서 자기의 뜻을 보충하여 이루고 문장으로 그 말을 보충하여 이루는 것이니,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 뜻을 알겠는가. 말을 했다 하더라도 문장이 없으면 비록 행해지더라도 멀리 가지 못한다.’ 하였다.[仲尼曰 志有之 言以足志 文以足言 不言誰知其志 言之無文 行而不遠]”라고 하였다.
역주3 其次楚有大夫者 善文其謳歌以傳 : 춘추시대 楚나라 三閭大夫 屈原이 간신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뒤에 〈離騷經〉, 〈漁父辭〉, 〈懷沙〉 등 楚辭의 명문들을 지은 것을 가리킨다.
역주4 漢之盛時……能文其文辭以傳 : 賈誼는 文帝 때 사람으로 문학에 능하여 〈弔屈原賦〉와 같은 글을 남겼다.
董仲舒는 武帝 때 사람으로 〈天人策〉, 《春秋繁露》 등을 남겼다.
司馬相如는 무제 때 문학가로 〈子虛賦〉, 〈上林賦〉, 〈大人賦〉 등을 남겼다.
揚雄은 成帝 때 賦를 지어 올려 관직을 얻은 사람으로 〈甘泉賦〉, 《河東賦》, 〈長楊賦〉 등을 남겼다.
역주5 : 흘
역주6 : 작
역주7 書載堯舜 : 《書經》에 〈堯典〉과 〈舜典〉 두 편에 堯임금과 舜임금의 사적이 실려 있다.
역주8 詩載商周 : 《史記》 권47 〈孔子世家〉에서 孔子가 《詩經》을 刪定한 것에 대해 “위로는 契과 后稷의 사적을 채록하고, 중간으로는 殷나라와 周나라의 융성한 사적을 기술하고, 아래로는 幽王과 厲王의 缺損된 사적에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역주9 易載九聖 : 《周易》에 伏羲氏, 神農氏, 黃帝, 堯임금, 舜임금, 禹임금, 文王, 周公, 孔子의 아홉 성인이 나온다. 晉나라 葛洪의 《抱朴子》 〈釋滯〉에 “아홉 성인이 함께 《易經》을 만듦에 陰陽의 이치를 총괄해 정리할 수 있었다.[九聖共成易經 足以彌綸陰陽]”라고 하였다.
역주10 春秋載文武之法 : 《禮記》 〈中庸〉에 “仲尼는 멀리 堯임금과 舜임금을 이어받고 가까이 文王과 武王을 본받았다.[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라고 하였는데, 그 注에 “공자가 멀리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이어받아 《春秋》를 만들되 문왕과 무왕의 법도로 단정하였다.[孔子祖述堯舜之道而制春秋 而斷以文王武王之法度]”라고 하였다. 《禮記集說 권53 中庸》
역주11 荀孟二家 載詩書易春秋者 : 《史記》 권74 〈孟子荀卿列傳〉에서 孟子에 대해 “물러나 萬章 등 門徒들과 더불어 《詩經》과 《書經》을 서술하고, 仲尼의 뜻을 기술하여 《孟子》 7편을 지었다.[退而與萬章之徒 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라 하였고, 荀子에 대해 “荀卿은 혼탁한 세상의 정치를 미워하였으나 망하는 나라와 혼란한 임금이 서로 이어져 마침내 大道를 실현하지 못하였다.……이에 儒家‧墨家‧道德의 사적과 흥망을 미루어 서술하고 차례로 정리하여 數萬 자를 저술하였다.[荀卿嫉濁世之政 亡國亂君相屬 不遂大道……於是 推儒墨道德之行事興壞 序列著數萬言]”라고 하였다.
역주12 楚之辭 載風雅 : 屈原의 《楚辭》에 《詩經》의 〈國風〉과 〈大雅〉‧〈小雅〉의 정서를 아울러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史記》 권84 〈屈原傳〉에 “國風은 여색을 좋아하되 음란하지 않고, 小雅는 원망하되 문란하지 않은데, 〈離騷〉 같은 경우는 이 둘을 다 갖추었다 할 만하다.[國風好色而不淫 小雅怨誹而不亂 若離騷者 可謂兼之矣]”라고 하였다.
역주13 漢之徒 各載其時主聲名文物之盛以爲辭 : 漢나라 때 賦의 대표적인 작가들인 司馬相如, 揚雄 등의 작품들은 대개 제왕의 궁궐, 사냥 등의 광경을 매우 화려하게 묘사하였다. 사마상여의 〈子虛賦〉, 양웅의 〈長楊賦〉‧〈習獵賦〉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역주14 太宗之政……憲宗之功 : 唐 太宗은 魏徵, 房玄齡, 杜如晦 등을 등용하여 소위 貞觀之治라 일컬어지는 治世를 이루었다. 開元은 玄宗의 연호이다. 현종은 姚崇, 宋璟 등을 등용하여 소위 開元之治라 일컬어지는 치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天寶 연간에 楊貴妃에게 빠지고 간신 李林甫를 등용하였다가 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西蜀으로 파천하고 태자에게 讓位하여 上皇이 되었다. 헌종은 劉辟, 李錡, 吳元濟 등 藩鎭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소위 ‘中興’의 군주로 일컬어졌다. 태종과 신하들의 문답을 기록한 《貞觀政要》, 張說 등이 지은 〈破陣樂〉, 白居易의 〈七德舞〉, 韓愈의 〈平淮西碑〉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역주15 : 삭
역주16 賢良方正 : 漢 文帝 때 郡國에 詔書를 내려 賢良方正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한 데서 비롯하여, 唐宋시대에 이르러서는 賢良方正科라는 과거를 두었다. 여기서는 현량방정과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
역주17 待制 : 唐나라 때 생긴 관직으로, 宋나라 때에도 그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각 殿‧閣에 모두 설치하였다. 예컨대 保和殿待制, 龍圖閣待制와 같은 명칭이 있었다. 지위는 學士와 直學의 아래이다.
역주18 夢得之序子厚 : 夢得은 唐나라 때 문학가 劉禹錫의 자이고, 子厚는 당나라 때 문학가로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柳宗元의 자이다. 두 사람은 친구로 매우 우정이 두터웠다. 유종원이 죽을 때 자신의 문집을 편찬해달라고 유우석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유우석이 유종원의 유고를 가지고 《河東先生集》을 편집하고 그 서문을 썼다.
역주19 李漢之序退之 : 李漢은 자가 南紀이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韓愈의 제자요 사위이다. 退之는 한유의 자이다. 한유의 유고를 모아 《昌黎先生文集》을 편집하고 그 서문을 썼다. 《古文眞寶後集》에 이한의 〈昌黎文集序〉가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