某聞傳曰
이라하니 君子之所學也
는 言以載事
하고 而文以飾言
하니 事信言文
이라야 乃能表見於後世
라
由此以來
로 去聖益遠
에 世益薄或衰
하야 下
周隋
에 其間亦時時有善文其言以傳者
나
故百不傳一
하고 幸而一傳
이라도 傳亦不顯
하야 不能若前數家之
然暴見而大行也
하니 甚矣
라
事信矣면 須文이요 文至矣면 又繫其所恃之大小하야 以見其行遠不遠也라
後之學者는 蕩然無所載하니 則其言之不純信과 其傳之不久遠은 勢使然也라
至唐之興
하야 若
을 其臣下又爭載之
하야 以文其詞
하야 或播樂歌
하며 或刻金石
이라
故其間鉅人碩士閎言高論流
前後者
는 恃其所載之在文也
라
故其言之所載者大且文이면 則其傳也章하고 言之所載者不文而又小면 則其傳也不章이라
先人在太宗時
하야 以文辭爲名進士
하고 以對策爲
이러니 旣而守道純正
하야 爲賢
하고 逢時太平
하야 奮身揚名
하니 宜其言之所載
와 文之所行
이 大而可恃以傳也
라
然未能甚行於世者는 豈其嗣續不肖하야 不能繼守而泯沒之아
夫文之行이 雖繫其所載나 猶有待焉하니 詩書易春秋는 待仲尼之刪正하고 荀孟屈原無所待하되 猶待其弟子而傳焉하고 漢之徒는 亦得其史臣之書하니
其始出也에 或待其時之有名者而後發하고 其旣歿也에 或待其後之紀次者而傳이라
其爲之紀次也
는 非其門人故吏
면 則其親戚朋友
가 如
와 也
라
伏惟閣下 學老文鉅하야 爲時雄人하야 出入三朝에 其能望光輝接步武者는 惟先君爲舊니 則亦先君之所待也라
謹以家集若干卷數로 寫獻門下하노니 惟哀其誠而幸賜之하소서
12. 남을 대신하여 왕추밀王樞密에게 올려 선인先人의 문집 서문을 부탁한 편지
그 구상構想은 한창려韓昌黎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로부터 왔으나, 의사意思는 더욱 완곡婉曲하고 바르다.
나는 듣건대 전傳에 이르기를 “말에 문장文章이 없으면 비록 행해지더라도 멀리 가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군자가 배우는 바는 말로써 일을 기록하고 문장으로 말을 수식修飾하니, 일은 신뢰를 받고 말은 문장으로 돼야 비로소 후세에 드러내어 보일 수 있습니다.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는 모두 일을 잘 기재하고 더욱 문장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해짐이 더욱 멀리 가는 것입니다.
순경荀卿‧맹가孟軻와 같은 이들 또한 말을 잘하였으나, 그 도道는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도 있고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저서들이 혹은 후세에 전해지고 혹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의 좋고 나쁨에 매어서 흥성興盛하기도 하고 쇠폐衰廢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초楚나라에 대부大夫가 있어 그 노래를 문장으로 잘 표현하여 후세에 전했고, 한漢나라가 융성할 때에는 가의賈誼‧동중서董仲舒‧사마상여司馬相如‧양웅揚雄 같은 이들이 그 문사文辭를 문장으로 잘 표현하여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이후로는 성인聖人과 시대가 더욱 멀어짐에 세상은 더욱 경박하고 쇠퇴하여, 아래로 후주後周와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동안에도 때때로 자기 말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여 후세에 전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분잡紛雜하고 멸렬滅裂하여 순수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 개 중에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고, 다행히 하나가 전해지더라도 전해지는 것이 두드러지지 못하여, 전 시대 몇몇 대가大家들이 활짝 드러나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것과는 같을 수 없었으니, 심하도다!
일이 신뢰할 만하면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고, 문장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면 또 그 글이 의지하는 인물과 내용의 대소大小와 관계되어, 세상에 행해지는 것이 멀리 가는지 멀리 가지 못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서경書經》에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사적이 실려 있고, 《시경詩經》에는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사적이 실려 있고, 《주역周易》에는 구성九聖의 사적이 실려 있고, 《춘추春秋》에는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법도가 실려 있으며, 순경荀卿‧맹가孟軻 두 사람은 《시경》‧《서경》‧《주역》‧《춘추》를 저술에 실은 자이고, 《초사楚辭》는 풍아風雅를 내용에 실었으며, 한漢나라의 작가들은 저마다 그 당시 군주의 명성과 문물의 성대함을 실어서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의 학자들은 텅 비어 아무것도 실은 것이 없으니, 그 말이 순수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한 것과 그 전해짐이 오래고 멀지 못한 것은 형세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당唐나라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태종太宗의 정치와 개원開元의 치세治世와 헌종憲宗의 공적을 그 신하들이 또 다투어 역사에 실어서 문장으로 표현하여 음악과 노래로 전파하기도 하고 금석金石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간에 위대한 인사들의 굉대宏大하고 고준高峻한 언론이 시대의 전후로 빛나는 것은 그 실린 글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던 데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말이 싣고 있는 내용이 크고 또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으면 그 전해지는 것이 드러나고, 말이 싣고 있는 것이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고 또 작으면 그 전해지는 것도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못난 사람인 내가 선친先親의 유업을 지키고 있습니다.
선친은 태종太宗 때 문장으로 이름난 진사가 되셨고 대책對策으로 현량방정賢良方正이 되었는데, 이윽고 도道를 지킴이 순정純正하여 어진 대제待制가 되었고 태평한 시대를 만나 분발하여 이름을 떨쳤으니, 의당 그 말이 싣고 있는 내용과 글이 세상에 행해지는 것이 커서 의지하여 후세에 전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 그다지 행해지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손이 불초하여 이어받아 지키지 못하고 민멸泯滅시켰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문장이 행해지는 것은 비록 그것이 싣고 있는 내용에 달렸으나 그래도 기다리는 바가 있으니,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는 중니仲尼의 산정刪正을 기다렸고, 순자荀子‧맹자孟子‧굴원屈原은 기다리는 바는 없었으나 그래도 그 제자를 기다려 후세에 전해졌고, 한漢나라의 작가들도 사신史臣들이 써준 덕분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문장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혹 그 시대의 유명한 사람을 기다린 뒤에 드러나기도 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혹 그 후대의 기록해준 사람을 기다려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그 문장을 기록해준 것은 유몽득劉夢得이 유자후柳子厚의 문집에 서문을 써주고 이한李漢이 한퇴지韓退之의 문집에 서문을 써준 것처럼, 그 문인이나 친분이 있는 관리가 아니면 친척이나 붕우들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각하閣下께서는, 학문은 노성老成하고 문장은 굉대宏大하여 당대의 우뚝한 인물이 되어 세 조정에 출입하심에, 그 광휘光輝를 바라보고 그 보무步武를 접할 수 있었던 분이 오직 친구이신 선친뿐이었으니, 또한 선친께서 기다리신 바입니다.
어찌 소자가 감히 마음대로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가집家集 약간 권을 베껴서 문하께 바치오니, 그 정성을 불쌍히 여겨 글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당형천唐荊川이 이르기를 “공중에 몇 층의 누각을 지은 것과 같은 글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