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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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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正統論下
凡爲正統之論者 皆欲相承而不絶하야 至其斷而不屬하면 則猥以假人而續之
是以 其論曲而不通也
夫居天下之正하야 合天下於一 斯正統矣 堯舜夏商周秦漢唐 是也 始雖不得其正이나 卒能合天下於一하니 夫一天下而居正이면 則是天下之君矣
斯謂之正統 可矣 晉隋 是也
天下大亂 其上無君하야 僭竊竝興하야 正統無屬하니 當是之時하야 奮然而起하야 竝爭乎天下하야 有功者彊하고 有德者王하야 威澤皆被于生民하고 號令皆加乎當世
幸而以大幷小하고 以彊兼弱하야 遂合天下於一하얀 則大且彊者 謂之正統 猶有說焉이어니와 不幸而兩立하야 不能相幷하고 考其跡則皆正하며 較其義則均焉이면 則正統者 將安予奪乎
東晉後魏 是也
其或終始不得其正하고 又不能合天下於一하니 則可謂之正統乎
魏及五代 是也
然則有不幸而丁其時 則正統有時而絶也
故正統之序 上自堯舜으로 歷夏商周秦漢而絶하고 晉得之而又絶하고 隋唐得之而又絶하니 自堯舜以來 三絶而復續이라
惟有絶而有續然後 是非公하며 予奪當하야 而正統明이라
然諸儒之論 至於秦及東晉後魏五代之際하얀 其說多不同하니 其惡秦而黜之以爲閏者誰乎
是漢人之私論 溺於非聖曲學之說者也
其說有三하니 不過曰滅棄禮樂 用法嚴苛 與其興也 不當之運而已
五德之說 可置而勿論이요 其二者 特始皇帝之事爾
然未原秦之本末也
昔者 堯傳於舜하고 舜傳於禹러니 夏之衰也 湯代之王하고 商之衰也 周代之王하고 周之衰也 秦代之王이라
其興也 或以德하고 或以功하니 大抵皆乘其弊而代之
初夏世衰而桀爲昏暴어늘 湯救其亂而起하야 稍治諸侯而誅之하니 其書 是也 其後卒以攻桀而滅夏하고
及商世衰而紂爲昏暴어늘 周之文武 救其亂而起하야 亦治諸侯而誅之하니 其詩所謂 是也 其後卒攻紂而滅商하니
推秦之興컨대 其功德 固有優劣이나 而其迹 豈有異乎리오
曰 其先大業 出於之苗裔러니
至孫伯하야 佐禹하야 治水有功일새 之間 賜姓하고
及非子하야 爲周養馬有功이어늘 秦仲始爲命大夫하고
而襄公與立平王하야 遂受岐豐之賜라하니
當是之時하야 周衰固已久矣
亂始於穆王而繼以 平王東遷하야 遂同列國하니 而齊晉大侯 魯衛同姓 擅相攻伐하야 共起而弱周하니 非獨秦之暴也
秦於是時 旣平犬하고 因取周所賜岐豐之地러니 而繆公以來 始東侵晉地하야 至于河하고 盡滅諸戎하야 拓國千里
其後關東諸侯彊僭者 日益多하고 周之國地 日益蹙하야 至無復天子之制하고 特其號在爾
秦昭襄王五十二年 周之君臣稽首하야 自歸於秦하고 至其後世하야 遂滅諸侯而一天下하니 此其本末之迹也
其德雖不足이나 而其功力尙不優於魏晉乎
始秦之興 務以力勝이러니 至於始皇하야 遂悖棄先王之典禮하고 又自推水德하야 益任法而少恩하니 其制度 皆非古而自是
此其所以見黜也
夫始皇之不德 不過如桀紂하니
桀紂不廢夏商之統하니 則始皇未可廢秦也
其私東晉之論者 曰 周遷而東 天下遂不能一이라
然仲尼作春秋하야 區區於尊周而黜吳楚者 豈非以其正統之所在乎
晉遷而東 與周無異어늘 而今黜之 何哉
曰 是有說焉하니 較其德與迹而然耳
周之始興 其來也遠이라
當其盛也하야 規方天下하야 爲大小之國하며 衆建諸侯하야 以維王室하고 定其名分하야 使傳子孫而守之하야 以爲萬世之計러니
及厲王之亂하야 周室無君者十四年이로되 而天下諸侯 不敢僥倖而窺周
於此然後 見周德之深이요 而文武周公之作 眞聖人之業也
況平王之遷國 地雖蹙이나 然周德之在人者未厭하고 而法制之臨人者未移
平王以子繼父하고 自西而東하야 不出王畿之內하니 則正統之在周也 推其德與迹 可以不疑
夫晉之爲晉 與乎周之爲周也異矣
其德法之維天下者 非有萬世之計聖人之業也 直以其受魏之禪而合天下於一하니 推較其迹 可以曰正而統耳
自惠帝之亂으로 至于愍懷之間 晉如線爾 惟嗣君繼世하니 推其迹曰正 焉可也리오
晉於是而絶矣
夫周之東也 以周而東하니 晉之南也 豈復以晉而南乎리오
自愍帝死賊庭으로 琅邪起江表하니 位非嗣君이요 正非繼世
徒以晉之臣子有不忘晉之心 發於忠義 而功不就하니 可爲傷已
若因而遂竊正統之號 其可得乎
使晉之臣子 遭乎聖人이면 適當春秋之誅어든 況欲干天下之統哉
若乃國已滅矣어늘 以宗室子 自立於一方하야 卒不能復天下於一하니 則晉之 與夫後漢之五代漢之으로 何異리오
備與崇 未嘗爲正統하니 則東晉可知焉耳
其私後魏之論者
魏之興也 其來甚遠하니 으로 承天下衰弊하야 得奮其力하야 竝爭乎中國이라가
七世至于孝文하야 而去夷卽華하야 易姓建都하야 遂定天下之亂然後 修禮樂興制度而文之하니
考其漸積之基컨대 其道德 雖不及於三代 而其爲功 何異王者之興이리오
今特以其不能幷晉宋之一方이라하야 以小不備而黜其大功하야 不得承百王之統者 何哉
曰 質諸聖人而不疑也
今爲魏說者 不過曰功多而國彊耳 此聖人有所不與也
春秋之時 齊桓晉文 可謂有功矣 吳楚之僭 迭彊於諸侯矣로되 聖人於春秋 所尊者周也
然則功與彊 聖人有所不取也
論者又曰 秦起夷狄이어늘 以能滅周而一天下 遂進之하고 魏亦夷狄이어늘 以不能滅晉宋으로 而見黜하니
是則因其成敗而毁譽之 豈至公之篤論乎
曰 是不然也
而已
周秦之所以興者 其說固已詳之矣
當魏之興也하야 以匈奴하며 以鮮卑하며 以氐하며 以羌하고 之徒 皆四夷之雄者也
其力不足者弱하고 有餘者彊하니 其最彊者苻堅이라
當堅之時하야 自晉而外 天下莫不爲秦이라
休兵革하며 興學校하야 庶幾刑政之方이러니 不幸未幾而敗亂이라
其又彊者曰魏 自江而北 天下皆爲魏矣
幸而傳數世而後亂하니 以是而言컨대 魏者纔優於苻堅而已 豈能干正統乎리오
五代之得國者 皆賊亂之君也어늘 而獨僞梁而黜之者 因惡梁者之私論也
唐自僖昭以來 不能制命於四海하야 而方鎭之兵作하니 已而小者幷於大하고 弱者服於彊이라
其尤彊者 以梁하며 以晉하야 共起而窺唐이라가 而梁先得之어늘
李氏因之하야 借名討賊하야 以與梁爭中國하야 而卒得之하니 其勢不得不以梁爲僞也
而繼其後者遂因之하야 使梁獨被此名也
夫梁固不得爲正統이면 而唐晉漢周 何以得之리오
今皆黜之어늘 而論者猶以漢爲疑하야
以爲契丹滅晉 天下無君이라 而漢起太原하야 徐驅而入汴하니
與梁唐晉周 其迹異矣어늘 而今乃一槪 可乎
曰 較其心迹컨대 小異而大同爾
晉之大臣也
方晉有契丹之亂也하야 竭其力以救難하야도 力所不勝而不能存晉이라
出於無可奈何하니 則可以少異乎四國矣
漢獨不然하야
自契丹與晉戰者三年矣 漢獨高拱而視之 如齊人之視越人也러니 卒幸其敗亡而取之하고
하니 從益之勢 雖不能存晉이나 然使忠於晉者 得而奉之 可以冀於有爲也어늘 漢乃殺之而後入하니
以是而較其心迹컨대 其異於四國者幾何
矧皆未嘗合天下於一也하니 其於正統 絶之何疑리오
統者 猶絲之有緖也
王者一四海 其子孫之衰라도 苟一日廟祀不絶이면 則其統固在也
周之衰也 所當列國者千百之什一耳로되
猶書曰春王正月者 周之統未嘗絶也
東漢之亡也 魏得其六하며 吳得其三하고 而蜀得其一耳로되
必帝蜀而寇魏者 以漢正統未絶也
觀此則歐陽之以秦不當爲閏하고 以五代梁不得獨爲僞固是 而其以東晉爲非統하야 而直欲黜之者 恐亦未當也
於是 歐陽公求其說而不得하야 從而爲之辭하야 曰 正統有時而絶이라하니 愚特以爲統之在天下 未嘗絶也
愚當暇日作正統圖하야 特爲辯以折千古不決之疑 可也
按正統論凡七이러니 公晩年刪爲三하니 今所錄者蓋晩年所定也


02. 정통正統에 대한
무릇 정통正統에 관한 논의를 하는 자들은 모두 계승하고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여, 끊어져서 연결되지 못하게 되면, 구차하게 다른 인물을 빌려 계속하게 한다.
이런 까닭에 그 의론이 왜곡되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 천하의 을 준수하여 천하를 하나로 합치시키면 그것이 정통正統이니, , , , , , , , 이 그것이요, 처음에 비록 그 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천하를 하나로 합치시킬 수 있으니, 대개 천하를 통일하고 을 준수하면 천하의 임금인 것이다.
이를 일러 ‘정통正統’이라고 말한다면 가하니, 나라와 나라가 그런 경우이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짐에 그 위로 임금이 없어서 참칭僭稱하고 자리를 훔치는 일이 아울러 일어나 정통正統이 속할 곳이 없게 되니, 그러한 때를 당하여 분연히 일어나 함께 천하를 다투어서, 이 있는 자는 강자强者가 되고 이 있는 자는 이 되어, 위엄과 은택이 모두 생민生民들에게 미치고 호령號令이 모두 당세에 가해졌다.
다행히 큰 것이 작은 것을 병합倂合하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겸병兼倂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크고 강한 자를 정통正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논거가 있거니와, 불행하게도 양립하여 서로 병합하지 못하고 그 자취를 살펴보면 모두 바르고, 그 의리를 비교하면 균등한 경우에는, 정통正統이라는 이름을 장차 어찌 주고 뺏을 수 있겠는가?
동진東晉후위後魏가 그런 경우이다.
더러 종시終始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또 천하를 하나로 합치지 못한다면, 정통正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라와 오대五代가 그런 경우이다.
그렇다면 불행하게도 그런 때를 만나게 되면 정통正統도 끊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正統차서次序가 위로는 , 으로부터 , , , , 을 거쳐서 끊어지고, 나라가 그것을 얻었다가 또 끊어지고, , 이 그것을 얻었다가 또 끊어지니, , 이래로 세 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던 것이다.
다만 끊어짐이 있고 이어짐이 있은 연후에 시비是非가 공정하며, 주고 뺏는 것이 마땅하여 정통正統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유諸儒의 논의는 나라 및 동진東晉, 후위後魏, 오대五代의 경계에 이르러서는 그 설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을 미워하여 제외시켜 으로 삼은 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나라 사람의 사사로운 논의로서, 성인의 도를 비난하고 학문을 왜곡하는 설에 빠진 경우이다.
이 세 가지 있으니, ‘예악禮樂을 없애버렸다는 것, 집행이 가혹했다는 것, 처음 흥할 적에 오덕五德의 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오덕五德의 설이야 놓아두고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나머지 두 가지는 다만 시황제始皇帝의 일일 따름이다.
그러나 나라의 본말本末을 궁구하지는 못하였다.
옛날에 임금이 임금에게 전하고, 임금이 임금에게 전하였더니, 나라가 쇠했을 적에는 임금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나라가 쇠했을 적에는 나라가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고, 나라가 쇠했을 적에는 나라가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였다.
그 흥할 적에 혹은 으로써 하고 혹은 으로써 하니, 대개 모두 기존의 폐단을 빌미로 대신한 것이다.
처음에 나라가 대대로 쇠하여져 임금이 혼포昏暴하였는데, 이 그 어지러움을 구하러 일어났고, 점차 제후諸侯를 다스려 주벌하니, 그 에 이르기를 “이 정벌을 로부터 하였다.”는 것이 그것으로, 그 후에 마침내 임금을 공격하여 나라를 멸하였다.
나라가 대대로 쇠하여져 임금이 혼포昏暴하였는데, 나라의 문왕文王무왕武王이 그 어지러움을 구하여 일어나 또한 제후諸侯를 다스려 주벌하니, 그 에 이른바 “숭밀崇密”이 그것으로, 그 후에 마침내 임금을 공격하여 나라를 멸하였다.
나라의 함을 미루어보건대, 그 은 진실로 우열優劣이 있으나, 그 자취야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나라의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그 선조 대업大業전욱顓頊의 후예에게서 나왔다.
손자 백예伯翳에 이르러 를 보좌하여 치수治水에 공이 있었으므로 당우唐虞 연간에 영씨嬴氏라는 을 하사하였고,
비자非子에 이르러서 나라를 위하여 말을 잘 기른 공로가 있어 진중秦仲이 비로소 대부大夫로 임명되었고,
양공襄公평왕平王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마침내 지역을 하사받았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나라가 쇠한 것이 본디 이미 오래되었다.
어지러움이 목왕穆王에게서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여유厲幽가 있었으므로,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遷都하여 마침내 열국列國과 동급이 되니, 나라‧나라 같은 대후大侯나라‧나라 같은 동성同姓이 함부로 서로 공벌攻伐하면서 함께 일어나 나라를 약화시키니, 비단 나라의 강포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 이때에 이미 견융犬戎을 평정하고 인하여 에서 내려 준 지역을 취하였고, 목공繆公 이래로 비로소 동쪽으로 나라 땅을 침략하여 황하黃河 유역까지 이르고, 여러 들을 모두 섬멸하여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여 천 리가 되게 하였다.
그 후에 강성하고 참칭僭稱하는 관동關東제후諸侯들은 날로 많아지고, 나라의 땅은 날로 축소되어 다시는 천자天子의 제도를 회복함이 없이, 단지 그 호칭만 남게 되기에 이르렀다.
소양왕昭襄王 52년에 나라의 군신君臣이 머리를 조아리고 스스로 나라에 귀의하였고, 그 후세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제후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니, 이것이 그 본말本末의 자취이다.
이 비록 부족하기는 하나, 그 공력功力은 오히려 나라‧나라보다 낫지 않겠는가?
처음에 나라가 흥기할 적에 힘으로 이기기를 힘쓰더니, 시황始皇에 이르러서 마침내 선왕先王전례典禮를 폐기하고, 또 스스로 수덕水德을 미루어 더욱 법에 의존하여 은혜를 줄이니, 그 제도制度문물文物 모두 옛것은 그르다 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라가 제외된 까닭이다.
대개 시황始皇의 부덕함은 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을 폐하지는 않았으니, 시황始皇 때문에 나라의 을 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동진東晉을 편들어 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나라가 수도를 옮겨 동쪽으로 감에 천하가 마침내 통일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니仲尼가 《춘추春秋》를 지어서 나라를 높이는 것에 정성을 다하고 나라와 나라를 제외시킨 것은 아마도 그 정통正統의 소재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수도를 옮겨 동쪽으로 간 것은 나라와 차이가 없었는데도 이제 제외시키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으니, 그 과 자취를 비교하여 그런 것일 따름이다.
나라가 처음 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한창 성대할 때에는 천하를 규획하여 크고 작은 나라를 만들었고 많은 제후를 세워서 왕실을 수호하게 하였으며, 그 명분을 정하여 자손들에게 전해가며 지키게 하여 만세토록 공고히 할 계책으로 삼았었다.
그러다가 여왕厲王의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나라 왕실에 임금이 없은 지가 14년이었는데도 천하의 제후諸侯들이 감히 요행을 바라고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런 연후에 나라 의 깊이를 볼 것이니,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업적이 참으로 성인聖人의 사업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평왕平王이 나라를 옮김에 땅이 비록 축소되기는 했으나, 나라의 이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쇠하지 않았고, 법제法制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
평왕平王이 자식으로서 아비를 계승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왕기王畿의 안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정통正統나라에 있는 것은 그 덕과 자취를 미루어봄에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개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
이 천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만세萬世의 계책이나 성인聖人의 사업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나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천하를 하나로 합쳤기 때문이니, 그 자취를 미루어 비교해봄에 ‘하면서 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혜제惠帝의 어지러움으로부터 민제愍帝회제懷帝 연간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운명은 실낱같았을 따름이요, 오직 임금 자리를 계승하여 대를 이었으니, 그 자취를 미루어 ‘’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건흥建興이 망하고 나서 나라는 단절되었다.
대개 나라가 동쪽으로 천도遷都할 적에는 나라로서 동쪽으로 갔으니, 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할 적에는 어찌 다시 나라로서 남쪽으로 간 것이겠는가?
민제愍帝가 적의 뜰에서 죽은 뒤로부터 낭야琅邪강표江表에서 일어나니, 는 임금의 자리를 계승한 것이 아니요, 은 대를 이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라의 신자臣子로서 나라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충의忠義로 드러난 것이요 공은 이루지 못하였으니, 가히 슬퍼해줄 만한 것이다.
만약 그로 인하여 마침내 정통正統의 칭호를 훔친다면, 가능하겠는가?
춘추春秋》의 에는 임금이 시해弑害되었는데도 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신자臣子가 없다고 여겼다.
나라의 신자臣子로서 성인聖人을 만난다면 참으로 《춘추春秋》의 주벌誅伐에 해당할 것인데, 하물며 천하의 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나라가 이미 멸망하였는데도, 종실宗室자제子弟로서 스스로 일방一方에서 건립하여 결국 천하를 하나로 회복시키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낭야琅邪가 저 후한後漢유비劉備, 오대五代 북한北漢유숭劉崇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비劉備유숭劉崇이 일찍이 정통正統이 되지 못하였으니, 동진東晉이야 알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위後魏를 편들어 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나라가 흥한 것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으니, 소성昭成건국建國하여 개원改元한 뒤로 천하의 쇠폐衰弊함을 계승하여 그 힘을 쏟아서 나란히 중국中國을 다투다가
7를 내려와 효문孝文에 이르러 이적夷狄을 버리고 중화中華로 나아가 을 바꾸고 도읍을 세워 마침내 천하의 어지러움을 평정한 연후에, 예악禮樂을 정비하고 제도制度를 일으켜 문식文飾을 가하였다.
그 누적된 기반을 살펴보건대, 그 도덕道德은 비록 삼대三代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왕자王者가 흥기하던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다만 나라‧나라의 한 지방을 병합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작은 것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큰 을 제외시켜서 백왕百王을 계승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성인聖人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다.
이제 나라를 위하여 논하는 자들은 ‘공이 많고 나라가 강성했다.’고 말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이는 성인聖人께서 허여하지 않으신 바가 있다.
춘추春秋 때에 환공桓公 문공文公은 ‘공이 있다.’고 이를 만하고, 나라와 나라의 참칭僭稱함이 번갈아가며 제후들보다 강하였는데도, 성인聖人께서 《춘추春秋》에서 높인 바는 나라였다.
그렇다면 과 강성함은 성인께서는 취하지 않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자論者들은 또 이르기를 “나라가 이적夷狄의 땅에서 일어났는데도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추켜세우고, 나라 역시 이적夷狄인데도 나라와 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제외를 당하였다.
이는 그 성패成敗로 인하여 헐뜯거나 기리는 것이니, 어찌 지극히 공정한 독실한 논의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각자 그 부류에 따를 뿐이다.
나라와 나라가 흥한 까닭은 그 설에 진실로 이미 자세하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했을 적에 유연劉淵흉노匈奴를, 모용慕容선비鮮卑를, 부생苻生를, 익중弋仲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혁련赫連, 독발禿髮, 석륵石勒, 계룡季龍의 무리는 모두 사이四夷 중에서 웅대한 자들이다.
그중 힘이 부족한 자는 약하고 넉넉한 자는 강하니, 그중 가장 강한 자가 부견苻堅이다.
부견苻堅의 시대에는 나라 이외에는 천하가 모두 나라가 되었다.
병혁兵革을 쉬게 하고 학교學校를 흥하게 하여 거의 형정刑政의 방책이 될 듯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패란敗亂하였다.
그중에서 또 강성한 자는 나라이니, 양자강楊子江 북쪽은 천하天下가 모두 나라가 되었다.
다행히 몇 를 전한 뒤에 어지러워지니, 이로써 말해보건대, 나라는 겨우 부견苻堅보다 나을 뿐이니, 어찌 정통正統을 구할 수 있겠는가?
오대五代에서 나라를 얻은 자는 모두 적란賊亂한 임금이거늘, 유독 나라를 위국僞國이라고 하여 제외시키는 것은 나라를 미워하는 자의 사사로운 의론으로 인한 것이다.
나라는 희제僖帝소제昭帝 이래로 사해四海에 명을 내릴 수 없어서 방진方鎭의 군대가 일어나니, 이윽고 작은 세력이 큰 세력에게 병합되고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였다.
그중 특히 강한 자로는 주씨朱氏나라를 기반으로 하고 이씨李氏나라를 기반으로 한 경우로, 함께 일어나서 나라를 엿보다가 나라가 먼저 얻었다.
이씨李氏가 그로 인하여 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빌려 나라와 더불어 중국中國을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마침내 얻었으므로, 형세상 부득이 나라를 위국僞國이라고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자들이 마침내 그대로 나라로 하여금 홀로 이런 이름을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대개 나라는 본디 정통正統이 되지 못한다면 가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모두 제외시켰는데, 논자들은 오히려 나라를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거란契丹나라를 멸함에 천하天下에 임금이 없었으므로, 나라가 태원太原에서 일어나 서서히 군대를 몰아 으로 들어왔던 것이니,
와는 그 자취가 다르거늘, 이제 마침내 똑같이 대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한다.
대답하기를 “그 마음의 자취를 비교해보건대, 대동소이大同小異할 따름이다.
유지원劉知遠나라의 대신大臣이다.
바야흐로 나라에 거란契丹의 소란스러움이 있을 때에 그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구원하였어도 힘이 감당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나라를 보존시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니, 다른 네 나라에 비해 조금 다를 수 있다.
나라는 홀로 그렇지 않았다.
거란契丹나라와 전쟁을 벌인 지 3년이 되었는데도, 나라는 홀로 팔짱을 높이 낀 채 지켜보기를 마치 나라 사람이 나라 사람을 보듯이 하더니, 마침내 그 패망을 기화奇貨로 그것을 차지하였다.
거란契丹이 북쪽으로 돌아갈 적에 중국을 허왕許王 종익從益에게 맡기고 떠나가니, 종익從益의 세력이 비록 나라를 보존할 수는 없었으나, 나라에 충성스러운 자로 하여금 얻어서 받들게 하였더라면 큰일을 기약할 수 있었거늘, 나라는 마침내 그를 죽인 뒤에 들어갔다.
이로써 그 마음의 자취를 비교해보건대, 다른 네 나라와 다른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모두 일찍이 천하를 하나로 합치시키지 못하였으니, 정통正統에 있어 끊어버린 것이 무엇이 의아스러울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라는 것은 실에 실마리가 있는 것과 같다.
왕자王者사해四海를 통일함에 그 자손이 쇠하였더라도 만약 하루라도 사당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 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가 쇠하였을 적에는 열국列國에 해당하는 나라가 1,000‧100 중에 10‧1에 불과하였는데도,
중니仲尼가 《춘추春秋》를 지음에 오히려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기록한 것은, 나라의 이 일찍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동한東漢이 망할 적에 나라가 그중 6할을 차지하고, 나라가 그중 3할을 차지하고, 나라는 그중 1할을 차지하였을 뿐이었는데도,
주문공朱文公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을 적에 반드시 나라를 황제로 하고 나라를 외구外寇로 표현한 것은 나라의 정통正統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구양공歐陽公나라를 이라고 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고, 오대五代 나라를 유독 위국僞國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이 진실로 옳거니와, 동진東晉이 아니라고 여겨 곧바로 제외하려고 한 것은 아무래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이에 구양공歐陽公이 그 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여 뒤이어 변명하기를 “정통正統이 끊어질 때가 있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나는 다만 천하天下에서 끊어진 적이 없다고 여긴다.
내 마땅히 한가한 날에 정통도正統圖를 만들어 특별히 논변하여 천고千古토록 해결되지 못한 의심을 꺾는 것이 좋겠다.
살펴보건대, 〈정통론正統論〉은 모두 일곱 편이었는데, 공이 만년晩年산절刪節하여 셋으로 하니, 지금 기록하는 것은 대개 만년에 정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五德 : 班固의 〈典引〉에 “비로소 백성의 주인인 천자를 명하니, 五德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肇命民主 五德初始]”라고 하였고, 蔡邕의 注에 “五德은 五行의 德으로, 伏羲 이후로 帝王들이 대를 이음에 각각 그 一行에 근거하였다. 木에서 시작하여 水에서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라고 하였다.
역주2 湯征自葛 : 《書經》 〈尙書 仲虺之誥〉에 “처음 정벌하기를 葛나라로부터 하시어 동쪽을 정벌하면 서쪽 오랑캐가 원망하고, 남쪽을 정벌하면 북쪽 오랑캐가 원망하여 이르기를 ‘어찌하여 홀로 우리나라를 뒤에 정벌하는가.’라고 하였다.[初征自葛 東征西夷怨 南征北狄怨 曰奚獨後予]”는 내용이 있다.
역주3 崇密 : 崇과 密은 각각 나라 이름으로, 《詩經》 〈大雅 皇矣〉에 대한 朱子의 集傳에 “이 詩는 太王, 太伯, 王季의 德을 서술하여 文王이 密나라를 정벌하고 崇나라를 정벌한 일에 미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 秦之紀 : 司馬遷이 지은 《史記》 권5 〈秦本紀〉를 가리킨다. 인용문은 〈秦本紀〉의 내용을 구양수가 정리한 것이다. 《詩經集傳》 〈秦風〉 첫머리의 注에도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역주5 顓頊 : 전욱
역주6 : 예
역주7 : 영
역주8 唐虞 : 陶唐氏 부락 출신인 堯임금과 有虞氏 부락 출신인 舜임금의 병칭이다.
역주9 厲幽之禍 : 중국 周나라 10대왕 厲王과 12대왕 幽王이 모두 暴政으로 인해 왕위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厲王은 억압을 견디지 못한 제후와 백성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幽王은 향락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犬戎의 침략을 받아 驪山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역주10 : 四庫全書本에서 《文忠集》에는 ‘戎’자로 되어 있고, 《唐宋八代家文抄》에는 ‘夷’자로 되어 있다.
역주11 文爲 : 明文化해놓은 禮法이나 制度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爲는 事의 의미이다.
역주12 建興之亡 : 建興은 晉 愍帝의 연호이다. 민제는 건흥 원년(313)에 帝位에 올랐고 건흥 4년에 前趙의 劉曜가 長安을 함락했을 때 포로로 잡혀 平陽으로 압송되었다. 懷安侯로 봉해져 수모를 겪다가 다음 해인 건흥 5년에 피살되었다.
역주13 春秋之說……則以爲無臣子也 : 魯 隱公은 弑害되었는데, 그 기록에 葬禮를 치렀다는 내용이 없는 것에 대해 《公羊傳》에서 풀이하기를 “《春秋》에서 임금이 시해를 당했는데도 賊을 토벌하지 않고, 장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신하다운 신하가 없다고 여겨서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4 琅邪 : 東晉을 建國한 中宗 元皇帝 司馬睿(276~323)를 가리킨다. 宣帝 司馬懿의 曾孫이며, 琅邪武王 司馬伷의 손자이다. 西晉의 왕족으로, 15세에 琅邪王을 세습하였다. 316년 서진의 愍帝가 匈奴의 劉曜에게 붙잡히자 晉王이라 일컫고 年號를 建武로 고쳤으며, 다음 해 愍帝가 죽자 스스로 帝位에 올랐다. 江北 지역을 이민족의 손에서 되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귀족 세력에 의해 크게 힘을 쓰지 못하였고, 만년에는 王敦이 이끄는 내란 세력에 밀리다가 병사하였다.
역주15 劉備 : 삼국시대 蜀漢을 建國한 昭烈帝(161~223)이다. 前漢 景帝의 皇子 中山靖王의 후손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후 諸葛亮을 휘하에 두고 袁紹, 曹操, 孫權 등과 패권을 다투었고, 220년 曹丕가 漢 獻帝의 讓位를 받아 魏나라의 황제가 되자, 그도 漢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漢으로 정하고 221년에 帝位에 올랐다. 關羽와 張飛의 복수를 위해 吳나라 孫權을 공격하였다가, 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白帝城에서 후사를 諸葛亮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역주16 劉崇 : 中國 五代十國시대 十國 중의 하나였던 北漢을 건국했던 神武帝 劉旻(895~954)의 초기 이름이다. 後漢의 武將인 郭威가 2대 황제 隱帝를 시해하고 옹립했던 劉贇의 아버지이다. 뒤에 郭威가 劉贇을 살해하고 後周를 건국하자 後漢을 북쪽에서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北漢을 건국하여 대립하였다. 954년 後周의 郭威가 죽고 柴榮이 즉위하자,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後周의 장군 趙匡胤에게 패배하였으며, 이후 얼마 못 가서 사망하였다.
역주17 自昭成建國改元 : 昭成은 昭成帝로 北朝 北魏의 拓跋什翼犍을 가리킨다. 서기 338년에 건국하여 改元하고 39년간 在位하였으나 前秦의 苻堅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피살되었다. 北魏의 道武帝 拓跋珪의 조부이다. 도무제가 즉위한 뒤 高祖昭成皇帝로 추존되었다. 《北史 권1》
역주18 各於其黨 : 《論語》 〈里仁〉에서 孔子가 “사람의 과실은 각기 부류에 따라 다르니, 그 과실을 보면 仁한지 알 수 있다.[仁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고 하였다.
역주19 劉淵 : ?~310. 중국 5胡16國의 하나인 漢, 즉 前趙를 건국했다. 八王의 난에 편승하여 독자적으로 정권을 수립하여 大鮮于라고 칭하고, 곧이어 皇帝를 칭했다. 前趙의 기초를 확립시킴으로써, 華北지방에서 5胡16國이 난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역주20 慕容 : 5胡16國시대 後燕의 건국자인 慕容垂(326~396)를 가리킨다. 中山을 도읍으로 하여 燕나라를 세웠으며, 華北 동부 지역을 평정, 高句麗 등에 빼앗겼던 遼河 유역을 빼앗아 국력을 신장시켰다.
역주21 苻生 : 335~357. 5胡16國시대 前秦의 제2대 황제이다. 황제에 즉위한 뒤 잔혹한 폭정을 일삼다가 苻堅의 반정으로 살해당했으며, 諡號를 厲王으로 하였다.
역주22 弋(익)仲 : 280~352. 姓은 姚이며, 5胡16國 때 羌族의 우두머리로서, 16國의 하나였던 後秦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이다.
역주23 赫連 : 5胡16國시대 大夏를 건국했던 赫連勃勃(381~425)을 가리킨다. 南匈奴 單于의 자손이며, 後秦을 배반하고 독립하여 天王大單于가 되었다. 성격이 잔인하여 백성이 학정에 시달렸다.
역주24 禿髮 : 5胡16國시대 南涼을 건국했던 禿髮烏孤를 가리킨다. 禿髮利鹿孤가 대를 이은 후 北涼을 격파하였으나, 禿髮傉檀 때에 西秦에게 멸망하였다
역주25 石勒 : 274~333. 5胡16國시대 後趙를 건국했다. 前趙를 멸한 뒤, 세력이 화북 일대에 미쳤다.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통치술에도 능하였다.
역주26 季龍 : 5胡16國시대 後趙의 제3대 황제인 石虎(?~349)의 字이다. 도읍을 鄴으로 옮기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는 한편, 원정군을 세 번이나 일으키며 폭정을 자행해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역주27 朱氏 : 중국 五代 後梁의 건국자인 朱全忠(852~912)을 가리킨다. 본명은 朱溫이다. 唐나라 말기 ‘黃巢의 난’의 잔당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각지의 절도사를 겸하는 등 華北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후 梁나라를 세우고 唐나라를 멸망시켰으나 그의 세력범위는 화북 일부에 한정되었고, 이후 50년에 걸친 5代10國 분쟁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역주28 李氏 : 중국 五代 後唐을 건립했던 李存勖과 그의 아버지 李克用(856~906)을 가리킨다. 李克用은 唐나라 말기의 장수로서, 黃巢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숙적 朱全忠에게 太原에서 포위되어 위협을 받던 중 병사하였다. 그 후 아들 存勖이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後梁을 멸망시키고 華北을 통일하였다.
역주29 劉知遠 : 895~948. 중국 五代 後漢을 건국하였다. 돌궐 沙陀族 출신이다. 거란과 손잡고 後唐을 멸망시켰던 後晉의 高祖 石敬瑭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河東節度使 등을 지냈다. 石敬瑭의 死後 조정에 불만을 품어 거란이 後晉을 침공하였을 때도 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少帝가 거란에게 연행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汴京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1년 만에 병사하였다.
역주30 及契丹之北也 以中國委之許王從益而去 : 거란 遼 太宗 耶律德光이 晉을 멸망시키고 북쪽으로 돌아가면서 蕭翰을 남겨두어 汴州를 지키게 하였다. 後漢 高祖 劉知遠이 太原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소한은 자신도 북쪽 거란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중원을 李從益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였다. 원래 이종익은 後唐 明宗 李嗣源의 넷째 아들로 許王에 봉해졌다. 후당이 멸망하자 後晉의 高祖 石敬瑭이 그를 郇國公에 봉했고, 거란이 후진을 멸망시킨 뒤 그를 彰信軍節度使에 임명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거란이 북쪽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중원을 맡겼던 것이다. 이종익은 後漢 劉知遠이 南下할 때 피살되었다. 《新五代史 권15 淑妃王氏傳》
역주31 仲尼作春秋 : 仲尼는 孔子의 字이다. 《春秋》는 중국 春秋時代 魯 隱公 元年에서 哀公 14년까지 12대 242년 동안의 역사를 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大義名分을 밝혀 천하의 질서를 바로세우려 하였으므로 ‘春秋筆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역주32 朱文公作綱目 : 朱文公은 宋나라의 대학자로 新儒學을 집대성했던 朱熹(1130~1200)를 가리킨다. 자는 元晦‧仲晦이고, 호는 晦庵, 시호는 文이다. 후세 사람들이 높여서 朱子‧朱夫子‧紫陽夫子‧考亭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綱目》은 宋나라의 역사가이자 학자‧정치가인 司馬光이 周 威烈王 13년(B.C. 403)부터 後周 顯德 6년(959)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編年體로 엮은 《資治通鑑》을 바탕으로, 朱子가 《춘추》의 체재에 따라 큰 제목인 綱을 세우고, 그 아래에 目을 기술하는 형식으로 편찬한 《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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