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爲正統之論者는 皆欲相承而不絶하야 至其斷而不屬하면 則猥以假人而續之라
夫居天下之正하야 合天下於一이 斯正統矣니 堯舜夏商周秦漢唐이 是也요 始雖不得其正이나 卒能合天下於一하니 夫一天下而居正이면 則是天下之君矣라
天下大亂에 其上無君하야 僭竊竝興하야 正統無屬하니 當是之時하야 奮然而起하야 竝爭乎天下하야 有功者彊하고 有德者王하야 威澤皆被于生民하고 號令皆加乎當世라
幸而以大幷小하고 以彊兼弱하야 遂合天下於一하얀 則大且彊者를 謂之正統은 猶有說焉이어니와 不幸而兩立하야 不能相幷하고 考其跡則皆正하며 較其義則均焉이면 則正統者를 將安予奪乎아
其或終始不得其正하고 又不能合天下於一하니 則可謂之正統乎아
故正統之序가 上自堯舜으로 歷夏商周秦漢而絶하고 晉得之而又絶하고 隋唐得之而又絶하니 自堯舜以來로 三絶而復續이라
惟有絶而有續然後에 是非公하며 予奪當하야 而正統明이라
然諸儒之論이 至於秦及東晉後魏五代之際하얀 其說多不同하니 其惡秦而黜之以爲閏者誰乎아
其說有三
하니 不過曰滅棄禮樂
과 用法嚴苛
와 與其興也
에 不當
之運而已
라
五德之說은 可置而勿論이요 其二者는 特始皇帝之事爾라
昔者에 堯傳於舜하고 舜傳於禹러니 夏之衰也에 湯代之王하고 商之衰也에 周代之王하고 周之衰也에 秦代之王이라
其興也에 或以德하고 或以功하니 大抵皆乘其弊而代之라
初夏世衰而桀爲昏暴
어늘 湯救其亂而起
하야 稍治諸侯而誅之
하니 其書
에 曰
이 是也
요 其後卒以攻桀而滅夏
하고
及商世衰而紂爲昏暴
어늘 周之文武
가 救其亂而起
하야 亦治諸侯而誅之
하니 其詩所謂
이 是也
라 其後卒攻紂而滅商
하니
推秦之興컨대 其功德은 固有優劣이나 而其迹은 豈有異乎리오
至孫伯
하야 佐禹
하야 治水有功
일새 之間
에 賜姓
氏
하고
及非子하야 爲周養馬有功이어늘 秦仲始爲命大夫하고
亂始於穆王而繼以
라 平王東遷
하야 遂同列國
하니 而齊晉大侯
와 魯衛同姓
이 擅相攻伐
하야 共起而弱周
하니 非獨秦之暴也
라
秦於是時
에 旣平犬
하고 因取周所賜岐豐之地
러니 而繆公以來
로 始東侵晉地
하야 至于河
하고 盡滅諸戎
하야 拓國千里
라
其後關東諸侯彊僭者는 日益多하고 周之國地는 日益蹙하야 至無復天子之制하고 特其號在爾라
秦昭襄王五十二年에 周之君臣稽首하야 自歸於秦하고 至其後世하야 遂滅諸侯而一天下하니 此其本末之迹也라
始秦之興
에 務以力勝
이러니 至於始皇
하야 遂悖棄先王之典禮
하고 又自推水德
하야 益任法而少恩
하니 其制度
가 皆非古而自是
라
其私東晉之論者는 曰 周遷而東에 天下遂不能一이라
然仲尼作春秋하야 區區於尊周而黜吳楚者는 豈非以其正統之所在乎아
當其盛也하야 規方天下하야 爲大小之國하며 衆建諸侯하야 以維王室하고 定其名分하야 使傳子孫而守之하야 以爲萬世之計러니
及厲王之亂하야 周室無君者十四年이로되 而天下諸侯가 不敢僥倖而窺周라
於此然後에 見周德之深이요 而文武周公之作이 眞聖人之業也라
況平王之遷國에 地雖蹙이나 然周德之在人者未厭하고 而法制之臨人者未移라
平王以子繼父하고 自西而東하야 不出王畿之內하니 則正統之在周也는 推其德與迹에 可以不疑라
其德法之維天下者는 非有萬世之計聖人之業也요 直以其受魏之禪而合天下於一하니 推較其迹에 可以曰正而統耳라
自惠帝之亂으로 至于愍懷之間에 晉如線爾요 惟嗣君繼世하니 推其迹曰正이 焉可也리오
夫周之東也에 以周而東하니 晉之南也에 豈復以晉而南乎리오
自愍帝死賊庭으로 琅邪起江表하니 位非嗣君이요 正非繼世라
徒以晉之臣子有不忘晉之心이 發於忠義요 而功不就하니 可爲傷已라
使晉之臣子로 遭乎聖人이면 適當春秋之誅어든 況欲干天下之統哉아
若乃國已滅矣
어늘 以宗室子
로 自立於一方
하야 卒不能復天下於一
하니 則晉之
는 與夫後漢之
五代漢之
으로 何異
리오
魏之興也
는 其來甚遠
하니 으로 承天下衰弊
하야 得奮其力
하야 竝爭乎中國
이라가
七世至于孝文하야 而去夷卽華하야 易姓建都하야 遂定天下之亂然後에 修禮樂興制度而文之하니
考其漸積之基컨대 其道德은 雖不及於三代나 而其爲功은 何異王者之興이리오
今特以其不能幷晉宋之一方이라하야 以小不備而黜其大功하야 不得承百王之統者는 何哉오
今爲魏說者는 不過曰功多而國彊耳니 此聖人有所不與也라
春秋之時에 齊桓晉文은 可謂有功矣요 吳楚之僭이 迭彊於諸侯矣로되 聖人於春秋에 所尊者周也라
論者又曰 秦起夷狄이어늘 以能滅周而一天下로 遂進之하고 魏亦夷狄이어늘 以不能滅晉宋으로 而見黜하니
當魏之興也
하야 以匈奴
하며 以鮮卑
하며 以氐
하며 以羌
하고 之徒
는 皆四夷之雄者也
라
休兵革하며 興學校하야 庶幾刑政之方이러니 不幸未幾而敗亂이라
幸而傳數世而後亂하니 以是而言컨대 魏者纔優於苻堅而已니 豈能干正統乎리오
五代之得國者는 皆賊亂之君也어늘 而獨僞梁而黜之者는 因惡梁者之私論也라
唐自僖昭以來로 不能制命於四海하야 而方鎭之兵作하니 已而小者幷於大하고 弱者服於彊이라
其尤彊者
는 以梁
하며 以晉
하야 共起而窺唐
이라가 而梁先得之
어늘
李氏因之하야 借名討賊하야 以與梁爭中國하야 而卒得之하니 其勢不得不以梁爲僞也라
以爲契丹滅晉에 天下無君이라 而漢起太原하야 徐驅而入汴하니
方晉有契丹之亂也하야 竭其力以救難하야도 力所不勝而不能存晉이라
自契丹與晉戰者三年矣라 漢獨高拱而視之를 如齊人之視越人也러니 卒幸其敗亡而取之하고
하니 從益之勢
가 雖不能存晉
이나 然使忠於晉者
로 得而奉之
면 可以冀於有爲也
어늘 漢乃殺之而後入
하니
矧皆未嘗合天下於一也하니 其於正統에 絶之何疑리오
王者一四海에 其子孫之衰라도 苟一日廟祀不絶이면 則其統固在也라
東漢之亡也에 魏得其六하며 吳得其三하고 而蜀得其一耳로되
觀此則歐陽之以秦不當爲閏하고 以五代梁不得獨爲僞固是나 而其以東晉爲非統하야 而直欲黜之者는 恐亦未當也라
於是에 歐陽公求其說而不得하야 從而爲之辭하야 曰 正統有時而絶이라하니 愚特以爲統之在天下에 未嘗絶也라
愚當暇日作正統圖하야 特爲辯以折千古不決之疑가 可也라
按正統論凡七이러니 公晩年刪爲三하니 今所錄者蓋晩年所定也라
무릇 정통正統에 관한 논의를 하는 자들은 모두 계승하고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여, 끊어져서 연결되지 못하게 되면, 구차하게 다른 인물을 빌려 계속하게 한다.
이런 까닭에 그 의론이 왜곡되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 천하의 정正을 준수하여 천하를 하나로 합치시키면 그것이 정통正統이니, 요堯, 순舜, 하夏, 상商, 주周, 진秦, 한漢, 당唐이 그것이요, 처음에 비록 그 정正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천하를 하나로 합치시킬 수 있으니, 대개 천하를 통일하고 정正을 준수하면 천하의 임금인 것이다.
이를 일러 ‘정통正統’이라고 말한다면 가하니, 진晉나라와 수隋나라가 그런 경우이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짐에 그 위로 임금이 없어서 참칭僭稱하고 자리를 훔치는 일이 아울러 일어나 정통正統이 속할 곳이 없게 되니, 그러한 때를 당하여 분연히 일어나 함께 천하를 다투어서, 공功이 있는 자는 강자强者가 되고 덕德이 있는 자는 왕王이 되어, 위엄과 은택이 모두 생민生民들에게 미치고 호령號令이 모두 당세에 가해졌다.
다행히 큰 것이 작은 것을 병합倂合하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겸병兼倂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크고 강한 자를 정통正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논거가 있거니와, 불행하게도 양립하여 서로 병합하지 못하고 그 자취를 살펴보면 모두 바르고, 그 의리를 비교하면 균등한 경우에는, 정통正統이라는 이름을 장차 어찌 주고 뺏을 수 있겠는가?
더러 종시終始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또 천하를 하나로 합치지 못한다면, 정통正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불행하게도 그런 때를 만나게 되면 정통正統도 끊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통正統의 차서次序가 위로는 요堯, 순舜으로부터 하夏, 상商, 주周, 진秦, 한漢을 거쳐서 끊어지고, 진晉나라가 그것을 얻었다가 또 끊어지고, 수隋, 당唐이 그것을 얻었다가 또 끊어지니, 요堯, 순舜 이래로 세 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던 것이다.
다만 끊어짐이 있고 이어짐이 있은 연후에 시비是非가 공정하며, 주고 뺏는 것이 마땅하여 정통正統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유諸儒의 논의는 진秦나라 및 동진東晉, 후위後魏, 오대五代의 경계에 이르러서는 그 설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진秦을 미워하여 제외시켜 윤閏으로 삼은 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한漢나라 사람의 사사로운 논의로서, 성인의 도를 비난하고 학문을 왜곡하는 설에 빠진 경우이다.
그 설說이 세 가지 있으니, ‘예악禮樂을 없애버렸다는 것, 법法집행이 가혹했다는 것, 처음 흥할 적에 오덕五德의 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오덕五德의 설이야 놓아두고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나머지 두 가지는 다만 시황제始皇帝의 일일 따름이다.
그러나 진秦나라의 본말本末을 궁구하지는 못하였다.
옛날에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하고,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전하였더니, 하夏나라가 쇠했을 적에는 탕湯임금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상商나라가 쇠했을 적에는 주周나라가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고, 주周나라가 쇠했을 적에는 진秦나라가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였다.
그 흥할 적에 혹은 덕德으로써 하고 혹은 공功으로써 하니, 대개 모두 기존의 폐단을 빌미로 대신한 것이다.
처음에 하夏나라가 대대로 쇠하여져 걸桀임금이 혼포昏暴하였는데, 탕湯이 그 어지러움을 구하러 일어났고, 점차 제후諸侯를 다스려 주벌하니, 그 서書에 이르기를 “탕湯이 정벌을 갈葛로부터 하였다.”는 것이 그것으로, 그 후에 마침내 걸桀임금을 공격하여 하夏나라를 멸하였다.
상商나라가 대대로 쇠하여져 주紂임금이 혼포昏暴하였는데,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그 어지러움을 구하여 일어나 또한 제후諸侯를 다스려 주벌하니, 그 시詩에 이른바 “숭밀崇密”이 그것으로, 그 후에 마침내 주紂임금을 공격하여 상商나라를 멸하였다.
진秦나라의 흥興함을 미루어보건대, 그 공功과 덕德은 진실로 우열優劣이 있으나, 그 자취야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진秦나라의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그 선조 대업大業이 전욱顓頊의 후예에게서 나왔다.
손자 백예伯翳에 이르러 우禹를 보좌하여 치수治水에 공이 있었으므로 당우唐虞 연간에 영씨嬴氏라는 성姓을 하사하였고,
비자非子에 이르러서 주周나라를 위하여 말을 잘 기른 공로가 있어 진중秦仲이 비로소 대부大夫로 임명되었고,
양공襄公이 평왕平王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마침내 기岐‧풍豐 지역을 하사받았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주周나라가 쇠한 것이 본디 이미 오래되었다.
어지러움이 목왕穆王에게서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여유厲幽의 화禍가 있었으므로,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천도遷都하여 마침내 열국列國과 동급이 되니, 제齊나라‧진晉나라 같은 대후大侯와 노魯나라‧위衛나라 같은 동성同姓이 함부로 서로 공벌攻伐하면서 함께 일어나 주周나라를 약화시키니, 비단 진秦나라의 강포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秦은 이때에 이미 견융犬戎을 평정하고 인하여 주周에서 내려 준 기岐‧풍豐 지역을 취하였고, 목공繆公 이래로 비로소 동쪽으로 진晉나라 땅을 침략하여 황하黃河 유역까지 이르고, 여러 융戎들을 모두 섬멸하여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여 천 리가 되게 하였다.
그 후에 강성하고 참칭僭稱하는 관동關東의 제후諸侯들은 날로 많아지고, 주周나라의 땅은 날로 축소되어 다시는 천자天子의 제도를 회복함이 없이, 단지 그 호칭만 남게 되기에 이르렀다.
진秦 소양왕昭襄王 52년에 주周나라의 군신君臣이 머리를 조아리고 스스로 진秦나라에 귀의하였고, 그 후세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제후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니, 이것이 그 본말本末의 자취이다.
그 덕德이 비록 부족하기는 하나, 그 공력功力은 오히려 위魏나라‧진晉나라보다 낫지 않겠는가?
처음에 진秦나라가 흥기할 적에 힘으로 이기기를 힘쓰더니, 시황始皇에 이르러서 마침내 선왕先王의 전례典禮를 폐기하고, 또 스스로 수덕水德을 미루어 더욱 법에 의존하여 은혜를 줄이니, 그 제도制度와 문물文物 모두 옛것은 그르다 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대개 시황始皇의 부덕함은 걸桀‧주紂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걸桀‧주紂 때문에 하夏‧상商의 통統을 폐하지는 않았으니, 시황始皇 때문에 진秦나라의 통統을 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동진東晉을 편들어 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주周나라가 수도를 옮겨 동쪽으로 감에 천하가 마침내 통일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니仲尼가 《춘추春秋》를 지어서 주周나라를 높이는 것에 정성을 다하고 오吳나라와 초楚나라를 제외시킨 것은 아마도 그 정통正統의 소재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晉나라가 수도를 옮겨 동쪽으로 간 것은 주周나라와 차이가 없었는데도 이제 제외시키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으니, 그 덕德과 자취를 비교하여 그런 것일 따름이다.
주周나라가 처음 흥興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한창 성대할 때에는 천하를 규획하여 크고 작은 나라를 만들었고 많은 제후를 세워서 왕실을 수호하게 하였으며, 그 명분을 정하여 자손들에게 전해가며 지키게 하여 만세토록 공고히 할 계책으로 삼았었다.
그러다가 여왕厲王의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주周나라 왕실에 임금이 없은 지가 14년이었는데도 천하의 제후諸侯들이 감히 요행을 바라고 주周나라를 엿보지 못하였다.
이런 연후에 주周나라 덕德의 깊이를 볼 것이니,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업적이 참으로 성인聖人의 사업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평왕平王이 나라를 옮김에 땅이 비록 축소되기는 했으나, 주周나라의 덕德이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쇠하지 않았고, 법제法制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
평왕平王이 자식으로서 아비를 계승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왕기王畿의 안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정통正統이 주周나라에 있는 것은 그 덕과 자취를 미루어봄에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개 진晉나라가 진晉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周나라가 주周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
그 덕德과 법法이 천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만세萬世의 계책이나 성인聖人의 사업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위魏나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천하를 하나로 합쳤기 때문이니, 그 자취를 미루어 비교해봄에 ‘정正하면서 통統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혜제惠帝의 어지러움으로부터 민제愍帝‧회제懷帝 연간에 이르기까지 진晉나라의 운명은 실낱같았을 따름이요, 오직 임금 자리를 계승하여 대를 이었으니, 그 자취를 미루어 ‘정正’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건흥建興이 망하고 나서 진晉나라는 단절되었다.
대개 주周나라가 동쪽으로 천도遷都할 적에는 주周나라로서 동쪽으로 갔으니, 진晉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할 적에는 어찌 다시 진晉나라로서 남쪽으로 간 것이겠는가?
민제愍帝가 적의 뜰에서 죽은 뒤로부터 낭야琅邪가 강표江表에서 일어나니, 위位는 임금의 자리를 계승한 것이 아니요, 정正은 대를 이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진晉나라의 신자臣子로서 진晉나라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충의忠義로 드러난 것이요 공은 이루지 못하였으니, 가히 슬퍼해줄 만한 것이다.
만약 그로 인하여 마침내 정통正統의 칭호를 훔친다면, 가능하겠는가?
《춘추春秋》의 설說에는 임금이 시해弑害되었는데도 적賊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신자臣子가 없다고 여겼다.
진晉나라의 신자臣子로서 성인聖人을 만난다면 참으로 《춘추春秋》의 주벌誅伐에 해당할 것인데, 하물며 천하의 통統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나라가 이미 멸망하였는데도, 종실宗室의 자제子弟로서 스스로 일방一方에서 건립하여 결국 천하를 하나로 회복시키지 못하였으니, 진晉나라의 낭야琅邪가 저 후한後漢의 유비劉備, 오대五代 북한北漢의 유숭劉崇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비劉備와 유숭劉崇이 일찍이 정통正統이 되지 못하였으니, 동진東晉이야 알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魏나라가 흥한 것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으니, 소성昭成이 건국建國하여 개원改元한 뒤로 천하의 쇠폐衰弊함을 계승하여 그 힘을 쏟아서 나란히 중국中國을 다투다가
7세世를 내려와 효문孝文에 이르러 이적夷狄을 버리고 중화中華로 나아가 성姓을 바꾸고 도읍을 세워 마침내 천하의 어지러움을 평정한 연후에, 예악禮樂을 정비하고 제도制度를 일으켜 문식文飾을 가하였다.
그 누적된 기반을 살펴보건대, 그 도덕道德은 비록 삼대三代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공功은 왕자王者가 흥기하던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다만 진晉나라‧송宋나라의 한 지방을 병합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작은 것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큰 공功을 제외시켜서 백왕百王의 통統을 계승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성인聖人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다.
이제 위魏나라를 위하여 논하는 자들은 ‘공이 많고 나라가 강성했다.’고 말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이는 성인聖人께서 허여하지 않으신 바가 있다.
춘추春秋 때에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은 ‘공이 있다.’고 이를 만하고,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참칭僭稱함이 번갈아가며 제후들보다 강하였는데도, 성인聖人께서 《춘추春秋》에서 높인 바는 주周나라였다.
그렇다면 공功과 강성함은 성인께서는 취하지 않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자論者들은 또 이르기를 “진秦나라가 이적夷狄의 땅에서 일어났는데도 주周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추켜세우고, 위魏나라 역시 이적夷狄인데도 진晉나라와 송宋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제외를 당하였다.
이는 그 성패成敗로 인하여 헐뜯거나 기리는 것이니, 어찌 지극히 공정한 독실한 논의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주周나라와 진秦나라가 흥한 까닭은 그 설에 진실로 이미 자세하게 말하였다.
위魏나라가 흥했을 적에 유연劉淵은 흉노匈奴를, 모용慕容은 선비鮮卑를, 부생苻生은 저氐를, 익중弋仲은 강羌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혁련赫連, 독발禿髮, 석륵石勒, 계룡季龍의 무리는 모두 사이四夷 중에서 웅대한 자들이다.
그중 힘이 부족한 자는 약하고 넉넉한 자는 강하니, 그중 가장 강한 자가 부견苻堅이다.
부견苻堅의 시대에는 진晉나라 이외에는 천하가 모두 진秦나라가 되었다.
병혁兵革을 쉬게 하고 학교學校를 흥하게 하여 거의 형정刑政의 방책이 될 듯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패란敗亂하였다.
그중에서 또 강성한 자는 위魏나라이니, 양자강楊子江 북쪽은 천하天下가 모두 위魏나라가 되었다.
다행히 몇 대代를 전한 뒤에 어지러워지니, 이로써 말해보건대, 위魏나라는 겨우 부견苻堅보다 나을 뿐이니, 어찌 정통正統을 구할 수 있겠는가?
오대五代에서 나라를 얻은 자는 모두 적란賊亂한 임금이거늘, 유독 양梁나라를 위국僞國이라고 하여 제외시키는 것은 양梁나라를 미워하는 자의 사사로운 의론으로 인한 것이다.
당唐나라는 희제僖帝‧소제昭帝 이래로 사해四海에 명을 내릴 수 없어서 방진方鎭의 군대가 일어나니, 이윽고 작은 세력이 큰 세력에게 병합되고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였다.
그중 특히 강한 자로는 주씨朱氏가 양梁나라를 기반으로 하고 이씨李氏가 진晉나라를 기반으로 한 경우로, 함께 일어나서 당唐나라를 엿보다가 양梁나라가 먼저 얻었다.
이씨李氏가 그로 인하여 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빌려 양梁나라와 더불어 중국中國을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마침내 얻었으므로, 형세상 부득이 양梁나라를 위국僞國이라고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자들이 마침내 그대로 양梁나라로 하여금 홀로 이런 이름을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대개 양梁나라는 본디 정통正統이 되지 못한다면 당唐‧진晉‧한漢‧주周가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모두 제외시켰는데, 논자들은 오히려 한漢나라를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거란契丹이 진晉나라를 멸함에 천하天下에 임금이 없었으므로, 한漢나라가 태원太原에서 일어나 서서히 군대를 몰아 변汴으로 들어왔던 것이니,
양梁‧당唐‧진晉‧주周와는 그 자취가 다르거늘, 이제 마침내 똑같이 대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한다.
대답하기를 “그 마음의 자취를 비교해보건대, 대동소이大同小異할 따름이다.
바야흐로 진晉나라에 거란契丹의 소란스러움이 있을 때에 그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구원하였어도 힘이 감당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진晉나라를 보존시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니, 다른 네 나라에 비해 조금 다를 수 있다.
거란契丹이 진晉나라와 전쟁을 벌인 지 3년이 되었는데도, 한漢나라는 홀로 팔짱을 높이 낀 채 지켜보기를 마치 제齊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을 보듯이 하더니, 마침내 그 패망을 기화奇貨로 그것을 차지하였다.
거란契丹이 북쪽으로 돌아갈 적에 중국을 허왕許王 종익從益에게 맡기고 떠나가니, 종익從益의 세력이 비록 진晉나라를 보존할 수는 없었으나, 진晉나라에 충성스러운 자로 하여금 얻어서 받들게 하였더라면 큰일을 기약할 수 있었거늘, 한漢나라는 마침내 그를 죽인 뒤에 들어갔다.
이로써 그 마음의 자취를 비교해보건대, 다른 네 나라와 다른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모두 일찍이 천하를 하나로 합치시키지 못하였으니, 정통正統에 있어 끊어버린 것이 무엇이 의아스러울 것인가?”라고 하였다.
통統이라는 것은 실에 실마리가 있는 것과 같다.
왕자王者가 사해四海를 통일함에 그 자손이 쇠하였더라도 만약 하루라도 사당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 통統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주周나라가 쇠하였을 적에는 열국列國에 해당하는 나라가 1,000‧100 중에 10‧1에 불과하였는데도,
중니仲尼가 《춘추春秋》를 지음에 오히려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기록한 것은, 주周나라의 통統이 일찍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동한東漢이 망할 적에 위魏나라가 그중 6할을 차지하고, 오吳나라가 그중 3할을 차지하고, 촉蜀나라는 그중 1할을 차지하였을 뿐이었는데도,
주문공朱文公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을 적에 반드시 촉蜀나라를 황제로 하고 위魏나라를 외구外寇로 표현한 것은 한漢나라의 정통正統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구양공歐陽公이 진秦나라를 윤閏이라고 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고, 오대五代 양梁나라를 유독 위국僞國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이 진실로 옳거니와, 동진東晉을 통統이 아니라고 여겨 곧바로 제외하려고 한 것은 아무래도 온당치 못한 듯하다.
이에 구양공歐陽公이 그 설說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여 뒤이어 변명하기를 “정통正統이 끊어질 때가 있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나는 다만 통統은 천하天下에서 끊어진 적이 없다고 여긴다.
내 마땅히 한가한 날에 정통도正統圖를 만들어 특별히 논변하여 천고千古토록 해결되지 못한 의심을 꺾는 것이 좋겠다.
살펴보건대, 〈정통론正統論〉은 모두 일곱 편이었는데, 공이 만년晩年에 산절刪節하여 셋으로 하니, 지금 기록하는 것은 대개 만년에 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