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圜은 京兆三原人也라 爲人明敏하야 善談辯하니 見者愛其容止라가 及聞其論議縱橫하고 益皆悚動이라
李嗣昭節度昭義에 辟圜觀察支使하다 梁兵築夾城圍潞州러니 踰年而晉王薨에 晉兵救潞者皆解去라
嗣昭危甚하야 問圜去就之計하니 圜勸嗣昭堅守以待요 不可有二心이라
已而오 莊宗攻破梁夾城하고 聞圜爲嗣昭畫守計하고 甚嘉之라 由是로 益知名이러라
其後에 嗣昭與莊宗有隙이어늘 圜數奉使往來하야 辯釋讒搆하니 嗣昭卒免於禍는 圜之力也라
嗣昭從莊宗戰胡柳
하야 擊敗梁兵
하니 圜頗有功
이라 莊宗勞之曰
아 仁者之勇
이 何其壯也
오
旣而오 文禮子處球等이 閉城堅守하야 不可下어늘 圜數以禍福諭鎭人하니 鎭人信之라
圜嘗擁兵至城下하니 處球登城呼圜曰 城中兵食俱盡하고 而久抗王師하니
若
自歸
라도 懼無以塞責
이라 幸公見哀
하야 指其生路
하라하니
圜告之曰 以子先人
으로는 固難容貸
나 然
하나니 子可從輕
이로되
其如拒守經年하야 傷吾大將이라가 一朝困竭에야 方布款誠하니 以此計之면 子亦難免이라 然坐而待斃가 曷若伏而俟命고하다
處球流涕曰 公言이 是也라하고 乃遣人送狀乞降하니 人皆稱圜其言不欺하다
旣而오 他將攻破鎭州하야 處球雖見殺이나 而鎭之吏民以嘗乞降이라 故得保其家族者甚衆이라
其後에 以鎭州爲北京하야 拜圜工部尙書하고 兼眞定尹北京副留守知留守事하니 爲政有惠愛라
明年에 郭崇韜兼領成德軍節度使하야 改圜行軍司馬하고 仍知眞定府事러라
圜與崇韜素相善하고 又爲其司馬일새 崇韜因以鎭州事託之어늘 而圜多所違異라
初에 圜推官張彭이 爲人傾險貪黷이어늘 圜不能察하고 信任之하야 多爲其所賣러라 及崇韜領鎭하야 彭爲圜謀隱其公廨錢이라
後에 莊宗遣宦者하야 選故趙王時宮人百餘人할새 有許氏者尤有色이어늘 彭賂守者匿之러라
後事覺하야 召彭詣京師하야 將罪之할새 彭懼하야 悉以前所隱公錢簿書獻崇韜라
崇韜深
彭
하야 不殺
하니 由是
로 與圜有隙
이라 同光三年
에 圜罷司馬
하고 守工部尙書
하다
魏王繼岌曁崇韜伐蜀에 懼圜攻己於後하야 乃辟圜參魏王軍事하다 蜀滅에 表圜黔南節度使어늘 圜懇辭不就하다
繼岌殺崇韜하고 以圜代將其軍而旋하다 康延孝反커늘 繼岌遣圜將三千人하야 會董璋孟知祥等兵하야 擊敗延孝於漢州어늘
而魏王先至渭南하야 自殺이라 圜悉將其軍以東하다 明宗嘉其功하야 拜圜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兼判三司하다
是時
에 한대 圜選辟才俊
하고 抑絶僥倖
하야 公私給足
하니 天下便之
라
是秋에 韋說豆盧革罷相한대 圜與安重誨鄭珏孔循으로 議擇當爲相者하니 圜意屬李琪로되 而珏循雅不欲琪爲相이라
謂重誨曰 李琪非無文藝나 但不廉耳라 宰相은 端方有器度者라야 足以爲之니 太常卿崔協이 可也라하니 重誨以爲然하다
佗日에 明宗問誰可相者오하니 重誨卽以協對하니 圜前爭曰 重誨는 未諳朝廷人物하야 爲人所賣라
天下皆知崔協不識文字
하고 而虛有儀表
하야 號爲
라 臣以陛下誤加採擢
하야 無功幸進
하고 比不知書
하니 以臣一人取笑
가 足矣
라
相位有幾완대 豈容更益笑端이릿고하니 明宗曰 宰相은 重位니 卿等更自詳審하라
然吾在藩時에 識易州刺史韋肅이라 世言肅名家子하고 且待我甚厚하니 置之此位가 可乎아
肅或未可
인댄 則
가 先朝判官
으로 稱爲長者
하니 可以相矣
라하니 馮書記者
는 道也
라
議未決이어늘 重誨等退休於中興殿廊下하니 孔循不揖하고 拂衣而去하야 行且罵曰 天下事를 一則任圜이요 二則任圜이니 圜乃何人고하다
圜謂重誨曰 李琪才藝
는 可兼時輩百人
이어늘 而讒夫巧沮
하야 忌害其能
하니 若舍琪而相協
은 如棄
而取蜣蜋之轉也
라하니 重誨笑而止
하다
然重誨終以循言爲信
하야 하다 協在相位數年
에 人多嗤其所爲
라 然圜與重誨交惡
는 自協始
하니라
故時使臣出四方에 皆自戶部給券이러니 重誨奏請自內出한대
圜以故事爭之나 不能得이라 遂與重誨辨於帝前하니 圜聲色俱厲라
明宗罷朝에 後宮嬪御가 迎前問曰 與重誨論事者誰오하니 明宗曰 宰相也라하다
宮人奏曰 妾在長安
에 見宰相奏事
호니 未嘗如此
라 蓋輕
耳
라하다 明宗由是不悅
하야 而使臣給券
이 卒自內出
하니 圜益憤沮
하다
重誨嘗
圜
에 圜出妓
하니 善歌而有色
일새 重誨欲之
어늘 圜不與
라 由是二人益相惡
라
而圜遽求罷職한대 乃罷爲太子少保하다 圜不自安하야 因請致仕하고 退居于磁州하다
朱守殷反于汴州에 重誨誣圜與守殷連謀하야 遣人矯制殺之하다 圜受命怡然하야 聚族酣飮而死하다
任圜은 京兆 三原 사람이다. 사람됨이 明敏하여 論辯을 잘하니 보는 자들이 그의 용모와 행동을 좋아하다가 그의 종횡무진한 論議을 듣고는 모두 더욱 놀랐다.
李嗣昭가 昭義節度使로 있을 때 임환을 觀察支使로 불렀다. 梁나라 군대가 夾城을 쌓고 潞州를 포위하였는데 한 해가 지나 晉王(李克用)이 薨逝하자 노주를 구원하던 晉나라 군대가 모두 포위를 풀고 떠났다.
이사소가 몹시 위급하여 임환에게 去就의 계책을 물으니 임환이 이사소에게 굳게 지키며 기다릴 것이요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권유하였다.
얼마 있다가 唐 莊宗이 梁나라의 협성을 격파하고는 임환이 이사소에게 굳게 지키자는 계책을 내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그를 가상히 여겼다. 이로부터 더욱 임환의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에 이사소가 장종과 틈이 벌어졌는데 임환이 여러 차례 使命을 받들고 그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讒言과 모함을 변론하고 해소하니, 이사소가 마침내 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임환의 공로였다.
이사소가 장종을 따라 胡柳에서 전투하여 梁나라 군대를 격파하니 임환이 자못 전공이 있는지라, 장종이 그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儒士 또한 신체를 훼손하는가. 仁者의 용맹함이 어찌 이리 장렬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張文禮가 王鎔을 시해하자 莊宗이 李嗣昭를 보내 토벌하였다. 이사소가 전사하자 任圜이 그를 대신해 군사를 통솔하니 號令이 嚴肅하였다.
얼마 있다가 장문례의 아들 張處球 등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함락할 수가 없었는데, 임환이 누차 禍福을 가지고 鎭州 사람들을 曉諭하니 진주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임환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城下에 이르니 장처구가 성에 올라 임환을 부르며 말하기를 “城中의 군대의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오랫동안 朝廷의 군대에 저항하였으니
만약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조정에 歸附하더라도 罪責을 모면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부디 공께서 불쌍히 여겨주어 제가 살길을 가리켜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임환이 그에게 고하기를 “그대의 先人으로 말하자면 진실로 용서받기 어렵다. 그렇지만 罰은 후대에 미치지 않나니 그대는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를 넘기며 버티고 지키면서 우리의 大將을 殺傷하였다가 하루아침에 곤란한 처지가 되어서야 겨우 誠心을 보이니 이를 가지고 헤아려보면 그대 역시 처벌을 면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엎드려 명을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장처구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하고, 이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는 글을 보내 투항하니 사람들이 모두 임환의 말이 남을 속이지 않는다고 칭탄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른 장수가 진주를 함락하여 장처구가 비록 죽임을 당했으나, 진주의 관리와 백성들은 이전에 투항하였다는 연유로 자기 家族을 보전할 수 있게 된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후에 鎭州를 北京으로 삼고서 任圜을 工部尙書에 배수하고 眞定尹 北京副留守 知留守事를 겸임하게 하니 정사를 펼침에 백성들에게 은택을 끼쳤다.
이듬해 郭崇韜가 成德軍節度使를 겸임하고서 任圜을 行軍司馬로 고쳐 임명하고 知眞定府事는 그대로 맡게 하였다.
임환이 평소 곽숭도와 사이가 좋았던 데다 그의 司馬가 되므로 곽숭도가 이에 鎭州의 일을 그에게 맡겼는데 임환이 그와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가 많았다.
당초에 임환의 推官 張彭이 사람됨이 음험하고 탐욕스러웠는데 임환이 살피지 못하고 그를 신임하여 그에게 기만당하는 일이 많았다. 곽숭도가 진주를 통솔하게 되자 장팽이 임환을 위해 도모하여 그 官府의 돈을 빼돌렸다.
뒤에 莊宗이 宦官을 보내 옛 趙王 때의 궁녀 100여 사람을 뽑을 때 許氏라는 여인이 더욱 美色이 있었는데 장팽이 宮女를 관리하는 자에게 뇌물을 주어 허씨를 숨겼다.
뒤에 이 일이 발각되어 장팽을 불러서 京師로 오게 하여 그에게 죄를 주려고 할 때, 장팽이 두려워져서 일전에 빼돌린 관부의 돈을 기록한 장부를 가지고 전부 곽숭도에게 바쳤다.
곽숭도가 장팽을 매우 고맙게 여겨 죽이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임환과 틈이 벌어졌다. 同光 3년(925)에 임환은 행군사마에서 파직되고 守工部尙書가 되었다.
魏王 李繼岌과 郭崇韜가 蜀을 정벌할 때 任圜이 배후에서 자신을 공격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임환을 불러서 위왕의 軍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蜀이 멸망하자 表奏하여 임환을 黔南節度使로 삼았는데 임환은 간곡히 사양하며 就任하지 않았다.
이계급이 곽숭도를 죽이고 임환에게 곽숭도의 군대를 대신 거느리게 하여 개선하였다. 康延孝가 배반하자 이계급이 임환을 보내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董璋‧孟知祥 등의 군대와 회합하여 漢州에서 강연효를 공격해 물리쳤는데,
위왕이 먼저 渭南에 이르러 自殺한지라 임환이 그 군대를 전부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明宗이 그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임환에게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배수하고 判三司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때에 명종이 막 孔謙을 주벌하자 임환이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하고 요행을 바라는 소인들을 압제하여 국가와 백성이 모두 풍족하게 되니 天下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이해 가을에 韋說‧豆盧革이 宰相에서 파직되자 任圜이 安重誨‧鄭珏‧孔循과 함께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뽑는 문제를 의논하니, 임환은 李琪에게 뜻이 있었으나 정각과 공순은 평소 이기가 재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터라
안중회에게 이르기를 “이기는 文藝가 없지 않지만 청렴하지 못합니다. 재상은 단정하고 정직하면서 器度가 있는 자라야 족히 할 수가 있으니 太常寺卿 崔協이 좋습니다.”라고 하니 안중회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후일에 明宗이 누가 재상으로 좋은지 묻자 안중회가 곧바로 최협이라고 대답하니, 임환이 앞에 나와 爭執하기를 “안중회는 朝廷의 人物을 잘 알지 못해 남에게 잘 기만당합니다.
천하 사람들 모두 최협이 文字를 모르고 한갓 威儀만 있다는 것을 알아 沒字碑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은 陛下께서 잘못 뽑아주셔서 공로는 없이 요행으로 승진하고 전혀 글을 알지 못하니 신 한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재상이 몇 자리나 되기에 어찌 다시 비웃음을 사는 빌미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명종이 말하기를 “재상은 중요한 자리이니 卿 등은 다시 따로 자세히 熟考하라.
그렇지만 내가 藩鎭에 있을 때 易州刺史 韋肅을 알고 지냈다. 세상 사람들이 위숙이 명문가 출신이라고 말하고 게다가 나를 매우 극진히 대우하였으니 이 자리에 두는 것이 괜찮겠는가?
위숙이 혹 안 된다면 馮書記가 先朝의 判官으로서 長者로 일컬어지니 재상이 될 만할 것이다.”라고 하니 풍서기라는 자는 馮道이다.
논의가 결정되지 않자 안중회 등이 中興殿의 회랑 아래에 물러나 쉬고 있으니, 공순이 揖하지 않고 옷을 털며 떠나 걸어가면서 투덜대기를 “天下의 일을 첫째도 임환이 하고 둘째도 임환이 하니 임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였다.
임환이 안중회에게 이르기를 “이기의 才藝는 지금의 同流 100인을 아우를 만한데 讒訴하는 이가 교묘하게 그를 저지하여 그의 재능을 질시하고 훼방하니, 이기를 버리고 최협을 재상으로 삼는 것은 마치 蘇合丸을 버리고 쇠똥구리가 굴린 똥을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니, 안중회가 웃으면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안중회는 결국 공순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여겨 한 달 남짓 지나 최협과 풍도가 모두 재상에 배수되었다. 최협이 재상의 자리에 있은 수년 동안 그가 한 일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임환과 안중회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최협의 일로부터 비롯하였다.
예전에는 使臣이 四方으로 나갈 때 모두 戶部에서 信標를 발급받았는데 安重誨가 宮中에서 발급하자고 奏請하자,
任圜이 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반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지라, 마침내 황제의 면전에서 안중회와 論辨하니 임환의 목소리와 낯빛이 모두 사나웠다.
明宗이 조회를 파한 뒤에 後宮 嬪御가 앞으로 나와 맞으면서 묻기를 “안중회와 정사를 논한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하니, 명종이 말하기를 “宰相이다.”라고 하였다.
宮人이 아뢰기를 “妾이 長安에 있을 때 재상이 정사를 아뢰는 것을 보니 이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皇上을 경시해서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이 이로 인해 마음이 좋지 않아 사신에게 발급하는 신표가 결국 궁중에서 나가게 되니 임환이 더욱 분노하고 상심하였다.
안중회가 일찍이 임환의 집에 들렀을 때 임환이 妓女를 나오게 하니 노래를 잘 부르고 美色이 있기에 안중회가 그 기녀를 달라고 했는데 임환이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더욱 서로 미워하였다.
임환이 갑자기 罷職되기를 청하자 이에 파직하여 太子少保로 삼았다. 임환은 자신의 처지를 불안하게 여기고서 이에 致仕하기를 청하고 물러나 磁州에 살았다.
朱守殷이 汴州에서 반란하자 安重誨가 任圜이 주수은과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고 誣告하여 사람을 보내 조서를 위조하여 그를 죽이게 하였다. 임환은 詔命을 받고 태연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모아놓고 술에 잔뜩 취하여 죽었다.
明宗은 이를 알고도 따지지 않고 조서를 내려 임환이 주수은과 書信을 주고받으며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주었다. 愍帝가 즉위하여 임환에게 太傅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