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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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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書似而義不失己일새 存之하노라
某聞古者堯舜禹之爲君也之徒者爲其臣하고 而湯之王也 亦有하고 周之始興也하고 其復興也之徒하고
下而至漢하얀 其初也 功臣尤多而稱善相者曰 其後曰이며 唐之始則曰 旣而曰
是皆能以功德佐其君而卓然하야 特以名出衆而見於世者
夫詩書之所美 莫大乎堯舜三代하고 其後世之盛者 莫盛乎漢與唐이로되 而其興也 必有賢哲之臣 出其際하야 而能使其君之功業名譽 赫然光顯於萬世而不泯이라
故每一讀其書하야 考其事하고 量其功하야 而想乎其人 疑其瓌傑奇怪 若神人然이요 非如今世之人可得而識也
夫其人已亡하고 其事己久 去數千百歲之後 徒得其書而一讀之라도 猶灼然如在人耳目之際하야 使人希慕稱述之不暇어든 況得身出於其時하야 親見其所爲而一識其人이면 則雖奔走俯伏하야 이라도 猶爲幸歟인저
某嘗誦於此而私自爲恨者 有日矣
國家之興 七十有五年矣 禮樂文章 可謂太平이라
而傑然稱王公大人於世者 往往而出하니 凡士之得身出於斯時者 宜爲幸矣
又何必忽近以慕遠하며 違目而信耳리오
且安知後之望今 不若今之望昔者邪
然其實有若不幸者하니 某生也少賤而愚하니
賤則不接乎朝廷之間하고 愚故不能與於事하니 則雖有王公大人者竝出하야 而欲一往識之라도 乃無一事可因而進焉이라
古之君子 在上하되 不幸而不得出其間하고 今之君子 在上하되 幸而親見矣
又以愚賤見隔而莫可望焉하니 是眞可閔歎也已
然嘗獨念 似有可以藉而爲說하야 以干進於左右者일새 試一陳之호리라
先君之生也 好學勤力하되
以孤直不自進於時라가 其晩也 始登朝廷享榮祿하야 使終不困其志而少伸者 蓋實出於大君子之門하니 則相公之於楊氏 不爲無恩矣
某不肖 能繼大先君之世하고 而又苟欲藉之以有하니 誠宜獲罪於者矣
然而不詢於長者하며 不謀於하고 而決然用是以自進者 蓋冀萬一得償其素所願焉이니 雖及門而獲罪라도 不猶愈於望古而自爲恨者耶
言狂計愚하니 伏惟聰明 幸賜察焉하소서


13. 추관推官 양계楊洎를 대신하여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려 만나 뵙기를 청한 편지
편지 내용은 윗사람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 같으나 의리상 자기를 잃지 않았기에 이 문초文抄에 수록해둔다.
저는 듣건대 옛날에 가 군주로 있을 때 고요皐陶백익伯益 같은 이들이 그 신하로 있었고, 이 왕으로 있을 때에도 중훼仲虺이윤伊尹 같은 이들이 있었고, 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주공周公소공召公이 있었고, 부흥할 때는 방숙方叔소호邵虎신백申伯중산보仲山甫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로 나라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공신이 매우 많았으나 훌륭한 재상으로 일컬어진 이는 소하蕭何조참曹參이었고 뒤에는 병길丙吉위상魏相이었으며, 나라 초기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였고 그 뒤에는 요숭姚崇송경宋璟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공덕으로 자기 군주를 보좌하여 우뚝이 두드러져서 특별히 이름이 출중하여 세상에 드러난 자들입니다.
대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찬미한 것으로는 요순堯舜삼대三代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후세에 융성한 나라로는 나라와 나라보다 융성한 것이 없는데, 이러한 나라들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현철賢哲한 신하들이 그 시대에 나와서 자기 임금의 공업功業명예名譽만세萬歲에 길이 환하게 빛나고 드러나 민멸泯滅되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매양 한 번 그 책을 읽고 그 사적을 살펴보고 그 공적을 헤아려보아 그 사람을 상상해봄에, 걸출하고 기괴奇怪하기가 마치 신인神人과 같고, 오늘날 세상에서 만나서 알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지 않을까 여겨지곤 합니다.
그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사적은 이미 오래된지라 수천백 년이 떨어진 후대에서 한갓 그 책을 얻어서 한 번 읽어만 보아도 오히려 마치 귀로 말을 듣고 눈으로 그 사람을 보는 것처럼 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사모하고 칭술稱述하기에도 겨를이 없게 하는데, 하물며 몸이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직접 보고 그 사람을 한 번 만나보았다면, 비록 분주히 달려가 그 아래 부복俯伏하여 하인들을 따라 수레를 모는 말의 채찍을 잡더라도 오히려 다행일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이 말을 되뇌면서 스스로 한스럽게 여긴 지가 오래입니다.
우리 국가가 일어난 지 75년이라 예악禮樂문물文物태평太平이라 이를 만합니다.
그래서 걸출하여 세상에서 왕공王公 대인大人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이 왕왕 출현하였으니, 무릇 선비가 이러한 시대에 그 몸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의당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찌 가까운 것은 소홀히 여기고 먼 것을 사모하며 눈으로 본 것은 어기고 귀로 들은 것만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후세에서 오늘날을 보는 것이 오늘날에서 옛날을 보는 것과 같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실 마치 불행한 듯한 것이 있으니, 저는 세상에 태어나 젊을 때는 신분이 미천하고 우매하였습니다.
신분이 미천했으므로 조정朝廷의 세계를 접할 수 없었고 우매하기 때문에 일에 참여할 수 없었으니, 비록 왕공 대인이 같은 시대에 함께 출현하여 한 번 찾아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도 찾아갈 계기로 삼을 만한 한 가지 일도 없었습니다.
아!
옛날의 군자君子들은 위에 계시되 불행히 제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고, 오늘날의 군자는 위에 계시되 다행히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매하고 미천하므로 만나뵐 엄두도 낼 수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마음이 답답해 탄식할 만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홀로 생각하기를 옛날에 선군先君 대부大夫상공相公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에 이를 빙자해 말하여 상공께 뵙기를 청할 수 있을 듯하기에, 감히 이렇게 한 번 편지를 보내 제 뜻을 말씀드립니다.
선군先君께서는 생존하실 때 학문을 좋아해 부지런히 노력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처지가 외롭고 성품이 곧으셔서 스스로 당시 세상에 진출하시지 못하다가, 만년에 비로소 조정에 올라 영화로운 작록爵祿을 누려 끝까지 그 뜻을 곤궁하게 하지 않고 조금 펴실 수 있도록 했던 것은 실로 대군자大君子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이었으니, 상공相公께서 우리 양씨楊氏 집안에 끼친 은혜가 없지 않습니다.
불초한 제가 선군의 유업을 계승하여 키우지 못하고, 게다가 선군을 빙자하여 만나뵙길 청한다는 말을 문지기에게 먼저 넣었으니, 참으로 하집사下執事께 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자長者에게 묻지도 않고 시귀蓍龜에게 묻지도 않은 채 결행하여 스스로 찾아온 것은 만나뵙고 싶었던 평소의 소원을 만분의 일이라도 풀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니, 비록 상공의 문에 이르러 죄를 얻더라도 옛날만 바라보면서 스스로 한스럽게 여기는 편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말은 주제넘고 생각은 고지식하니, 삼가 바라옵건대 총명하신 상공께서는 양찰諒察해주소서.


역주
역주1 代楊推官洎上吕相公求見書 : 이 편지는 推官 楊洎를 대신하여 당시의 재상 呂夷簡에게 보내 만나달라고 청한 편지이다. 내용 중에 ‘국가가 일어난 지 75년’이라 한 것으로 추산해보면, 이 글은 仁宗 景祐 3년(1034)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주2 援上 : 《中庸》에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잡아당기지 않는다.[在上位 不陵下 在下位 不援上]”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윗사람의 도움을 받고자 함을 뜻한다.
역주3 皐夔益稷 : 皐陶‧夔‧伯益‧稷으로, 모두 舜임금의 신하이다. 고요는 刑獄을 맡았고, 기는 음악을 맡았다. 백익은 柏翳라고도 하는데 鳥獸를 조련하는 일을 하였고 禹를 도와 治水를 하였으며, 직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周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역주4 仲虺(훼)伊尹 : 두 사람 모두 殷나라 湯王의 재상이다. 《書經》 〈仲虺之誥〉와 〈伊訓〉에 두 신하가 湯임금에게 한 말이 실려 있다.
역주5 周公召公 : 周 武王의 두 아우이면서 무왕을 보좌한 대신들이다. 周公은 이름이 姬旦이고, 召公은 이름이 姬奭이다. 주공은 주나라 천자의 재상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고, 소공은 采邑이 召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역주6 方叔邵虎申甫 : 方叔‧邵虎‧申伯‧仲山甫로, 네 사람 모두 周나라 中興의 군주인 宣王 때의 신하들이다. 방숙은 卿士로서 玁狁과 蠻荊을 정벌하였다. 그 사실이 《詩經》 〈小雅 采芑〉에 보인다. 소호는 召穆公으로 이름이 虎이고 召公의 후손이다. 신백은 周 宣王의 외숙이다. 《詩經》 〈大雅 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이 산에서 신령을 내려, 甫侯와 申伯을 내셨도다. 보후와 신백 두 사람은, 주나라의 기둥이라, 四國의 藩屛이 되어, 사국에 덕을 베풀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維申及甫 維周之翰 四國于蕃 四國于宣]”라고 하였다. 仲山甫 역시 宣王 때의 名臣이다. 《詩經》 〈大雅 烝民〉에 “袞職에 闕失이 있으면, 중산보가 이를 기운다.[袞職有闕 惟仲山甫補之]”라고 하였다.
역주7 蕭曹 : 漢 高祖의 재상들인 蕭何와 曹參을 병칭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開國功臣이다.
역주8 丙魏 : 漢 宣帝 때의 명재상인 魏相과 丙吉을 병칭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정치의 大體를 알고 정사를 관대하고 공평하게 처리했다는 평판을 받았다. 병길은 邴吉이라고도 하는데 자는 少卿이고, 위상은 자가 弱翁이다. 《漢書 권74 魏相丙吉傳》
역주9 房杜 : 唐 太宗 때의 명재상인 房玄齡(579〜648)과 杜如晦(585〜630)를 병칭한 것이다. 방현령은 齊州 臨淄 사람으로 자는 喬이다. 隋나라에서 進士가 되었으나 뒤에 당나라에 귀의하여 太宗 貞觀 원년에 中書令이 되고 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魏國公과 梁國公에 봉해졌다. 15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었다. 두여회는 京兆 杜陵 사람으로 자는 克明이다. 李世民이 정벌을 나갈 때 참모로 공을 세워 뒤에 兵部尙書가 되었고 蔡國公에 봉해졌다. 방현령과 두여회가 함께 조정의 정치를 맡아서 제도와 문물을 크게 정비하였다. 그래서 “방현령이 도모하고 두여회가 결단한다.[房謀杜斷]”는 말이 생겼다.
역주10 姚宋 : 唐나라 睿宗‧玄宗 때의 명재상인 姚崇(650〜721)과 宋璟(663〜737)의 병칭이다. 요숭은 陝州 사람으로 자는 元之이다. 본명은 元崇이었는데 玄宗의 연호인 開元의 元자를 피해 요숭으로 바꾸었다. 則天武后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올랐고 여러 차례 재상이 되었다. 송경은 당나라 邢州 南和 사람이다. 문장에 뛰어나 측천무후 때 누차 左台御使中丞에 임명되었으며, 강직한 관리로서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았다. 예종 복위 후에 폐단을 혁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太平公主의 미움을 받아 楚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현종 開元 초년에 다시 刑部尙書로 임명되었다. 개원 4년에 요숭을 이어 재상이 되어 요숭과 함께 개원 연간의 賢相으로 일컬어진다. 姚宋은 당나라 때 명재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역주11 從妾圉(어)執鞭扑 : 그 사람을 위해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하겠다는 뜻이다. 妾과 圉는 모두 말을 기르는 천한 일을 하는 남녀를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僖公 17년 조에 “남자는 圉라 하고, 여자는 妾이라 한다.[男曰圉 女曰妾]”라고 하였는데, 杜預의 注에 “圉는 말을 기르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鞭扑은 《書經》 〈虞書 舜典〉에 “채찍은 官府의 형벌로 삼고, 회초리는 학교의 형벌로 삼는다.[鞭作官刑 扑作敎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나, 여기서는 말을 부릴 때 쓰는 채찍을 말한다.
역주12 昔者有聞於先君大夫 : 先君大夫는 楊洎의 부친을 가리킨다. 양계의 부친이 조정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양계의 부친이 呂夷簡과 친교가 있었던 사이였음을 ‘자기 선친에게서 당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는 말로 은근히 표현한 것이다.
역주13 : 本集에는 ‘豈’자로 되어 있다.
역주14 : 緖言과 같은 말로, 말을 꺼냈고 다 말하지 않은 것이다. 《莊子》 〈漁父〉에 “접때 선생께서 말을 꺼내놓고는 떠나셨다.[曩者先生有緖言而去]”라고 하였는데,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緖言은 先言과 같다.”라고 하였다. 本集에는 ‘請’자로 되어 있다.
역주15 閽人 : 《周禮》 〈天官 冢宰〉에 “閽人은 王宮의 中門을 맡아 지킨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후세에는 문지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상대방을 높이는 뜻에서 문지기를 통해 편지를 전달한다고 한 것이다.
역주16 下執事 : 執事와 같은 말이다. 편지에서 상대방을 곧바로 호칭하지 않고, 그 밑에서 집안의 일을 돌보는 집사라 부름으로써 자신을 낮춘다. 즉 일종의 겸사이다.
역주17 蓍龜 : 蓍草와 거북이다. 옛날에 점을 칠 때 시초와 거북껍질을 사용했던 데서 온 말로, 占卜을 뜻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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