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還
에 惠書及
하니 文辭馳騁之際
에 豈常人筆力可到
리오마는
蓋吾子自信甚銳하고 又嘗取信於某하니 苟以爲然이면 誰能奉奪이리오
凡今治經者
가 莫不患聖人之意不明
하고 而爲諸儒以自出之說
之也
라
今於經外에 又自爲說하니 則是患沙渾水而投土益之也니
하야 治其國
하며 臣其吏民者
가 十餘年
이요 死而入廟
하야 하니 則當時魯人
이 孰謂息姑不爲君也
리오
孔子修春秋
에 凡與諸侯盟會行師命將
을 一以公書之
하고 於其卒也
에 書曰公
이라하니 則聖人何嘗異隱於他公也
리오
據經
컨대 隱公立十一年而薨
이어늘 則
이며 이며 吾子亦何從而云云也
아
秋初許相訪이나 此不子細라 略開其端하노니 吾子必能自思而得之리라
공公의 〈춘추론春秋論〉과 참고해 보아야 한다.
보낸 사람이 돌아오는 편에 편지 및 〈시은서론始隱書論〉 등과 앞서 기록한 〈획린론獲麟論〉을 주셨는데, 문사文辭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것은 어찌 일반 사람들의 필력筆力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경서經書의 뜻을 변론함에 있어서는 감히 옳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그대는 자신自信하는 것이 너무 빠르고 또 일찍이 나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진실로 그렇다고 여긴다면 누가 그 생각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무릇 오늘날 경서를 연구하는 이들은 성인聖人의 뜻이 밝혀지지 않고 제유諸儒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설說로 경서의 뜻을 교란시키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서 외에 또 스스로 설을 만든다면 이는 모래가 물을 흐리는 것을 걱정하여 흙을 물에 더 던져 넣는 격입니다.
차라리 모래와 흙이 다 없어지도록 두느니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물은 절로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노魯 은공隱公이 남면南面하여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관리와 백성들을 신하로 삼은 것이 10여 년이었고, 죽어서 종묘宗廟에 들어가 시호諡號를 받고 공公이라 일컬어졌으니, 당시 노魯나라 사람들은 누군들 식고息姑를 임금이라 하지 않았으리오.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하시면서 무릇 제후와 회맹會盟하고 군대를 출동하고 장수를 임명한 일에 대해 한결같이 ‘공公’이라 쓰셨고, 그가 졸卒했을 때에는 “공公이 훙薨하였다.”라 썼으니, 성인께서 어찌 은공隱公을 다른 공公들과 다르게 취급하신 적이 있었으리오.
경문經文에 의거해보면, 은공은 즉위한 지 11년 만에 훙薨하였는데, 좌씨左氏는 무엇을 근거로 은공이 섭정했음을 알았으며, 공양公羊과 곡량穀梁은 또 무엇을 근거로 환공桓公에게 양위讓位한 자취가 있음을 알았으며, 그대는 또한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중니仲尼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동주東周를 만들 것이다.” 하셨으니, 《춘추》가 평왕平王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대의 주장과 어쩌면 그리도 몹시 상반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학자들에게 저술에 신중하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초가을에 방문하겠다고 하셨으나 이는 분명치 않으므로 대략 토론의 단서를 열었으니, 그대가 필시 스스로 생각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