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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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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前輩風韻自在
二年 余方留守하야 已約梅聖兪 買田于潁上하니
其詩曰 優游琴酒逐漁釣하고 上下林壑相攀躋
라하니 此蓋余之本志也
時年四十有四
其後하고 服除還朝하야 遂入翰林爲學士
忽忽七八年間 歸潁之志 雖未遑也 然未嘗一日少忘焉이라
故其詩曰 라하니 蓋歎前言之未踐也
時年五十有二
自是 誤被選擢하야 하야 遂歷
蓋自嘉祐治平之間으로 國家多事하니 固非臣子敢自言其私時也
而非材竊位 謗咎已盈이로되 하야 始終保全하니 其出處俯仰 十有二年이라
今其年六十有四 蓋自有蹉跎之歎 又復一紀矣
中間在 幸遇朝廷無事하며 中外晏然하고 而身又不當責任일새 以謂臣子可退無嫌之時라하야 遂敢以其私言하니
天子惻然하되 閔其年猶未也하사 謂尙可以勉이라
故奏封十上이나 而六被詔諭하야 未賜允兪러니
今者蒙上哀憐하사 察其實病且衰矣 旣不責其避事하고 又曲從其便私하야 하야 俾以偸安하니
此君父廓大度之寬仁하야 遂萬物之所欲하야 覆載含容養育之恩也
而復蔡潁連疆일새 因得以爲歸老之漸하야 冀少償其夙願하니 玆又莫大之幸焉이라
以余自南都至在中書所作十有三篇으로 爲思潁詩하야 以刻于石이러니 今又得在亳及靑十有七篇以附之
蓋自南都至在中書十有八年而得十三篇하고 在亳及靑三年而得十有七篇하니 以見余之年益加老하고 病益加衰하야 其日漸短하고 其心漸迫이라 故其言愈多也


06. 〈속사영시續思潁詩〉에 대한 서문
전배前輩의 풍취가 절로 있다.
황우皇祐 2년(1050)에 내가 바야흐로 남도南都유수留守가 되어 매성유梅聖兪영상潁上에 밭을 사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지은 시에 “거문고와 술을 한가로이 즐기며 어부를 따라 낚시질하고, 숲과 골짝 오르내릴 제 서로 이끌어주리.
몸이 강건할 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즐거우리니, 노쇠하고 병들어 부축 필요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대체로 나의 본뜻이었다.
당시 나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그 뒤 집안의 상을 당했고 탈상脫喪하고 나서 조정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학사學士가 되었다.
문득 흘러가버린 7, 8년 사이에 영상潁上으로 돌아가려는 뜻은 비록 성취할 겨를이 없었으나 일찍이 어느 때고 그 뜻을 조금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 지은 시에 “마땅히 몸이 건강할 때 벼슬 그만두기를 청해야 하건만, 돌아보건대 나는 어영부영 시기를 놓쳐 이미 노쇠하였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에 했던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탄식한 것이다.
당시 나의 나이 쉰둘이었다.
이로부터 과분하게 발탁되어 외람되이 이부二府의 직임을 맡아 마침내 세 조정을 거쳤다.
대개 가우嘉祐치평治平 연간으로부터는 국가가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으니, 진실로 신하 된 자가 감히 스스로 자신의 사사로운 사정을 말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족한 재주로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있자니 비방과 책망이 이미 가득 찼는데 천자께서 인자하고 성스럽고 총명하시어 무망誣罔한 말들을 변별하여 통찰하신 덕분에 시종일관 이 몸을 보전保全하였으니, 그렇게 벼슬길에서 진퇴進退하고 부앙俯仰한 것이 12년 세월이다.
지금 내 나이 예순넷이니, 대개 어영부영하며 시기를 놓쳐버린 데 대한 탄식이 절로 난 지가 또다시 12년 세월이다.
중간에 박주亳州에 있을 때에 다행히 조정은 일이 없어 태평하며 중외中外가 편안한 때를 만났고 이 몸이 또 중책重責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신하 된 자가 물러나도 혐의쩍을 일이 없을 때’라 생각하여, 마침내 감히 나의 사사로운 사정을 천자께 진언하게 되었다.
천자께서는 나를 측은히 생각하시되 나의 나이가 아직 벼슬에서 물러나 쉴 때가 아님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오히려 직무에 힘쓸 수 있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열 번이나 올렸으나 여섯 차례 조유詔諭를 내려주시어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제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고서 실로 병들고 노쇠한 나의 상황을 살펴주셨으므로, 직사職事를 회피하려 한 책임을 이미 묻지 않으시고 또 나의 사사로운 소망을 곡진히 따라주시어, 나의 직임을 면해주시고 아울러 채주蔡州를 맡게 하여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셨다.
이는 군부君父가 큰 도량의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을 넓혀 만물이 원하는 바를 순히 따라 천지처럼 포용하고 길러주는 은혜이다.
게다가 채주와 영주는 서로 지역이 이어져 있기에, 노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전야田野로 돌아갈 단초를 열어 일찍부터 지녔던 바람을 조금이나마 이루는 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또 더할 나위 없는 다행인 것이다.
이보다 앞서 육자이陸子履가 내가 남도南都에 있을 때로부터 중서성中書省에 있을 때까지 지은 13편을 사영시思潁詩라 하고서 이를 돌에 새겼는데, 이제 또 박주亳州청주靑州에 있으면서 지은 17편을 거기에 보태었다.
대개 남도에서부터 중서성에 있을 때까지 18년 세월 동안 13편을 지었고 박주와 청주에 있던 3년 동안 17편을 지었으니, 이를 통해 나의 나이는 더욱더 늙어가고 병은 더욱더 몸을 쇠하게 만들어 살 날은 점점 짧아지고 마음은 점점 급박해져 갔으므로 그 말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바라건대 이 글을 보는 자들이 내가 강건했던 시절에 은거할 뜻을 지녔으나 노쇠한 뒤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아서, 그 말을 실천함이 늦었음을 나무라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역주
역주1 : 이 서문은 熙寧 3년(1070) 9월 7일에 지은 것이다. 歐陽脩가 일찍이 潁州知事로 부임하여 그곳의 순후한 풍속과 자연이 좋아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고 그곳을 떠나게 된 뒤로 영주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思潁詩〉라는 작품을 짓고 治平 4년(1067)에 〈思潁詩後序〉를 지었다. 그리고 1067~1070년 4월 사이에 다시 〈思潁詩〉를 짓고 이에 대한 서문인 〈續思潁詩序〉를 지었다. 이 서문에서 구양수는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나라를 근심하는 늙은 신하의 정회를 표출하였다. 영주는 지금의 安徽 阜陽이다.
역주2 皇祐 : 宋 仁宗의 연호(1049~1054)이다.
역주3 南都 : 지금의 河南 商丘로 宋나라 때의 南京이다.
역주4 優游琴酒逐漁釣……莫待衰病須扶携 : 본집 권5 〈寄聖兪〉의 일부이다.
역주5 丁家艱 : 皇祐 4년(1052) 3월에 모친 鄭氏의 상을 당하였다.
역주6 乞身當及强健時 顧我蹉跎已衰老 : 본집 권8 〈歸田四時樂春夏二首〉의 일부이다.
역주7 叨塵二府 : 宋나라 때에 樞密院을 西府, 中書門下省을 東府라고 불렀으며, 최고기관인 이들을 합하여 二府라 하였다. 구양수는 嘉祐 5년(1060)에 樞密 副使를 맡았고, 6년에 중서문하성의 參知政事를 맡은 바 있다.
역주8 三朝 : 宋 仁宗‧英宗‧神宗을 가리킨다.
역주9 賴天子仁聖聰明 辨察誣罔 : 《宋史》 권319 〈歐陽脩列傳〉에 따르면, 곡절은 다음과 같다. 당시 구양수의 처남 薛宗孺가 구양수에게 앙심을 품고 근거 없이 구양수를 비방하는 말을 지어내어 이를 中丞 彭思永에게 전달하였고 팽사영이 다시 이를 蔣之奇에게 전하니, 장지기가 마침내 소장을 갖추어 구양수를 탄핵하였다. 神宗이 처음 즉위하여 구양수를 보호하고자 하였으므로 옛 宮臣인 孫思恭에게 물으니 손사공이 구양수를 변호하였다. 이에 신종이 팽사영과 장지기에게 구양수를 비방한 근거를 따져 물으니 이들이 말이 궁해져 마침내 이들을 모두 폄출시켰다.
역주10 : 亳州로 지금의 安徽省 亳州市이다. 治平 4년(1067)에 구양수는 觀文殿學士와 知亳州에 제수되었는데 5월에 임지에 도착하여 정무를 살폈다.
역주11 免 幷得蔡 : 熙寧 3년(1070)에 兵部尙書와 知青州로 자리를 옮겨주고 宣徽南院使와 判太原府로 改差해주었으나 구양수가 이마저도 사양하고 숙배하지 않자 知蔡州로 옮겨주었다.
역주12 陸子履 : 陸經(?~?)이다. 越州人으로 子履는 그의 字이며 號는 嵩山老人이다. 일찍이 구양수와 함께 館閣에 있으면서 修撰을 지낸 적이 있다. 行書를 잘 썼으므로 구양수가 다른 사람을 위해 碑誌를 지을 때면 반드시 육경에게 글씨를 쓰게 했다. 이 때문에 書名을 더욱 날리게 되었다.
역주13 庶幾覽者……幸不譏其踐言之晩也 : 庶幾와 幸은 비록 분리되어 있으나 ‘바란다’는 뜻의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즉 이 서문을 본 이들이 구양수가 강건한 나이에 은거할 뜻을 품었으면서도 늘그막까지 조정에 얽매일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아 구양수 자신을 나무라지 않기 바란다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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