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年
에 余方留守
하야 已約梅聖兪
로 買田于潁上
하니
忽忽七八年間에 歸潁之志는 雖未遑也나 然未嘗一日少忘焉이라
蓋自嘉祐治平之間으로 國家多事하니 固非臣子敢自言其私時也라
而非材竊位
에 謗咎已盈
이로되 하야 始終保全
하니 其出處俯仰
이 十有二年
이라
中間在
에 幸遇朝廷無事
하며 中外晏然
하고 而身又不當責任
일새 以謂臣子可退無嫌之時
라하야 遂敢以其私言
하니
今者蒙上哀憐
하사 察其實病且衰矣
라 旣不責其避事
하고 又曲從其便私
하야 하야 俾以偸安
하니
此君父廓大度之寬仁하야 遂萬物之所欲하야 覆載含容養育之恩也라
而復蔡潁連疆일새 因得以爲歸老之漸하야 冀少償其夙願하니 玆又莫大之幸焉이라
初
가 以余自南都至在中書所作十有三篇
으로 爲思潁詩
하야 以刻于石
이러니 今又得在亳及靑十有七篇以附之
라
蓋自南都至在中書十有八年而得十三篇하고 在亳及靑三年而得十有七篇하니 以見余之年益加老하고 病益加衰하야 其日漸短하고 其心漸迫이라 故其言愈多也라
황우皇祐 2년(1050)에 내가 바야흐로 남도南都의 유수留守가 되어 매성유梅聖兪와 영상潁上에 밭을 사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지은 시에 “거문고와 술을 한가로이 즐기며 어부를 따라 낚시질하고, 숲과 골짝 오르내릴 제 서로 이끌어주리.
몸이 강건할 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즐거우리니, 노쇠하고 병들어 부축 필요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대체로 나의 본뜻이었다.
그 뒤 집안의 상을 당했고 탈상脫喪하고 나서 조정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학사學士가 되었다.
문득 흘러가버린 7, 8년 사이에 영상潁上으로 돌아가려는 뜻은 비록 성취할 겨를이 없었으나 일찍이 어느 때고 그 뜻을 조금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 지은 시에 “마땅히 몸이 건강할 때 벼슬 그만두기를 청해야 하건만, 돌아보건대 나는 어영부영 시기를 놓쳐 이미 노쇠하였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에 했던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탄식한 것이다.
이로부터 과분하게 발탁되어 외람되이 이부二府의 직임을 맡아 마침내 세 조정을 거쳤다.
대개 가우嘉祐와 치평治平 연간으로부터는 국가가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으니, 진실로 신하 된 자가 감히 스스로 자신의 사사로운 사정을 말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족한 재주로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있자니 비방과 책망이 이미 가득 찼는데 천자께서 인자하고 성스럽고 총명하시어 무망誣罔한 말들을 변별하여 통찰하신 덕분에 시종일관 이 몸을 보전保全하였으니, 그렇게 벼슬길에서 진퇴進退하고 부앙俯仰한 것이 12년 세월이다.
지금 내 나이 예순넷이니, 대개 어영부영하며 시기를 놓쳐버린 데 대한 탄식이 절로 난 지가 또다시 12년 세월이다.
중간에 박주亳州에 있을 때에 다행히 조정은 일이 없어 태평하며 중외中外가 편안한 때를 만났고 이 몸이 또 중책重責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신하 된 자가 물러나도 혐의쩍을 일이 없을 때’라 생각하여, 마침내 감히 나의 사사로운 사정을 천자께 진언하게 되었다.
천자께서는 나를 측은히 생각하시되 나의 나이가 아직 벼슬에서 물러나 쉴 때가 아님을 안타까이 여기시어 오히려 직무에 힘쓸 수 있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열 번이나 올렸으나 여섯 차례 조유詔諭를 내려주시어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제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고서 실로 병들고 노쇠한 나의 상황을 살펴주셨으므로, 직사職事를 회피하려 한 책임을 이미 묻지 않으시고 또 나의 사사로운 소망을 곡진히 따라주시어, 나의 직임을 면해주시고 아울러 채주蔡州를 맡게 하여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셨다.
이는 군부君父가 큰 도량의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을 넓혀 만물이 원하는 바를 순히 따라 천지처럼 포용하고 길러주는 은혜이다.
게다가 채주와 영주는 서로 지역이 이어져 있기에, 노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전야田野로 돌아갈 단초를 열어 일찍부터 지녔던 바람을 조금이나마 이루는 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또 더할 나위 없는 다행인 것이다.
이보다 앞서 육자이陸子履가 내가 남도南都에 있을 때로부터 중서성中書省에 있을 때까지 지은 13편을 사영시思潁詩라 하고서 이를 돌에 새겼는데, 이제 또 박주亳州와 청주靑州에 있으면서 지은 17편을 거기에 보태었다.
대개 남도에서부터 중서성에 있을 때까지 18년 세월 동안 13편을 지었고 박주와 청주에 있던 3년 동안 17편을 지었으니, 이를 통해 나의 나이는 더욱더 늙어가고 병은 더욱더 몸을 쇠하게 만들어 살 날은 점점 짧아지고 마음은 점점 급박해져 갔으므로 그 말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바라건대 이 글을 보는 자들이 내가 강건했던 시절에 은거할 뜻을 지녔으나 노쇠한 뒤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아서, 그 말을 실천함이 늦었음을 나무라지 않으면 다행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