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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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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公本知制誥時所遭逢處하야 感慨序次 有憂深言遠之思
慶曆三年春 丞相 病不能朝어늘 上旣更用大臣하야 銳意天下事하야 러니
旣而 하고 又除富弼樞密副使하니 弼仲淹琦 皆惶恐頓首하야 辭讓至五六不已
手詔趣琦等就道甚急이어늘 而弼方且入求對以辭하되 不得見이라
遣中貴人趣送閣門하야 使卽受命하니 嗚呼
觀琦等之所以讓 上之所以用琦等者컨대 可謂聖賢相遭 萬世一遇
而君臣之際 何其盛也
於是時 天下之士 孰不願爲材邪
顧予何人이완대 亦與臺選
夏四月 하야 入諫院하고 冬十二月 拜右正言知制誥
是時 이나 而西師尙未解嚴이라
하야 以驚京西하니 州縣之吏多不稱職하고 而民弊矣
天子方慨然하야 勸農桑하며 興學校하고 破去前例하야 以不次用人하고
哀民之困하야 而欲除其蠹吏하고法久之弊하야 而思別材不肖以進賢能하고 患百職之不修하야 而申行賞罰之信하니 蓋欲修法度矣
予時雖掌誥命하되 猶在諫職이라
常得奏事殿中하야 從容盡聞天子所以更張庶事憂閔元元而勞心求治之意하고 退得載于制書하야 以諷曉訓勅在位者
然予方與修하고하고 又修編勅하야 日與同舍論議하니 治文書 所省不一이요
所下 率不一二時 已迫丞相出이라 故不得專一思慮工文字하야 以盡導天子難諭之意하고 而復誥命於三代之文이라
嗟夫
學者文章見用于世 鮮矣 況得施于朝廷하고 而又遭人主致治之盛
若脩之鄙 使竭其材라도 猶恐不稱이온 而況不能專一其職하니 此予所以常遺恨於斯文也
明年秋 予出爲河北轉運使하고 又明年春 權知成德軍事
事少間 發嚮所作制草而閱之하니 雖不能盡載明天子之意 於其所述而得一二足以彰示後世로라
蓋王者之訓在焉하니 豈以予文之鄙而廢也리오
於是 錄之爲三卷하노라
予自直閣下 儤直八十始滿하고 不數日 하고 還卽以來河北이라
故其所作 纔一百五十餘篇云이로라


02. 《외제집外制集》에 대한 서문
공이 지제고知制誥 때에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삼아 감개하여 사실을 서술함에 근심이 깊고 말이 원대한 생각이 있다.
경력慶曆 3년 봄에 승상丞相 여이간呂夷簡이 병으로 조회에 나오지 못하자, 이 이미 다시 대신大臣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에 매우 관심을 보여 비로소 간관諫官어사御史의 상소를 채납하여 하송夏竦추밀사樞密使에 제수하려던 조서詔書를 뒤미처 환수하였다.
이윽고 섬서陝西에서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을 불러들이고 또 부필富弼추밀부사樞密副使에 제수하니, 부필富弼범중엄范仲淹한기韓琦가 모두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서 대여섯 차례 사양해 마지않았다.
이 손수 조서를 내려 한기韓琦 등에게 상경上京할 것을 매우 급하게 재촉하자 부필富弼은 바야흐로 조정에 들어와 청대請對하여 사직하려 하였지만 을 만나볼 수 없었다.
이 환관을 파견하여 부필富弼이 있는 각문閣門에 급히 보내 즉시 명을 받게 하였으니, 아!
한기韓琦 등이 사양한 바와 한기韓琦 등을 등용한 바를 보건대, 성군聖君현신賢臣이 만난 것이 만재일우萬載一遇라고 할 만하다.
군신의 관계가 어쩌면 이리도 성대한가.
이때에 천하의 선비 중에 어느 누가 재목이 되어 조정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또한 대간臺諫의 선발에 참여하였는가.
여름 4월에 활주滑州치소治所로부터 소환되어 간원諫院에 들어갔고, 겨울 12월에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에 배수되었다.
이때에 서하인西夏人이 비록 자주 화친을 청하였으나 서쪽의 군대는 여전히 계엄을 풀지 않았다.
경동京東은 수년간 도적이 창궐했고 최후에는 왕륜王倫이 갑자기 기주沂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차 강회江淮 일대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장해張海곽모산郭貌山 등이 또 상등商鄧에서 반란을 일으켜 경서京西를 경동시키니, 주현州縣의 관리가 대부분 직분에 걸맞지 않아 백성들이 피폐해졌다.
천자가 바야흐로 개연해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전례를 깨고서 상규常規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등용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해를 끼치는 관리를 제거하려고 하였고, 마감磨勘하는 법이 오래되어 생겨난 폐단을 알아 훌륭한 재능을 가진 자와 불초不肖한 자를 가려내어 현명하고 능한 자를 등용시킬 것을 생각하고, 모든 직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함을 근심하여 미더운 상벌賞罰을 거듭 시행하였으니, 이는 법도를 정비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이때에 비록 고명誥命을 작성하는 일을 관장하였지만 오히려 간관諫官의 직책에 있었다.
그러므로 늘 대전大殿에서 일을 아뢰면서 조용히 천자가 뭇 일을 크게 개혁하고 백성을 우려하여 노심초사 치세治世를 이루고자 하는 뜻을 모두 듣고 물러나 제서制書에 실어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훈칙訓飭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창 조종祖宗고사故事를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고, 또 기거주起居注를 편수하였으며, 또 조서詔書편정編定하느라 매일 동료들과 논의하였으니 문서를 처리함에 살펴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목除目이 내려온 지 대략 한두 시신時辰이 되기 전에 벌써 승상丞相이 나갈 때에 임박하였기 때문에 전일하게 생각하여 문사文辭공교工巧하게 만들어 천자의 효유曉諭하기 어려운 뜻을 모두 말하고, 삼대三代고명誥命했던 글로 회복시킬 수 없었다.
아!
학자의 문장이 세상에 채용되는 경우가 드문데, 더구나 조정에 시행되고 또 군주가 선치善治를 이루는 성대함을 만날 수 있겠는가.
나처럼 비루한 사람은 가령 재주를 다하더라도 오히려 직책에 걸맞지 않을 듯한데, 더구나 이 직책에 전일하지 못하였으니 이점은 내가 이 글에 대해 늘 유감을 가지는 이유이다.
이듬해 가을에 내가 외직으로 나가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가 되었고, 또 다음 해 봄에 권지성덕군사權知成德軍事가 되었다.
일이 조금 한가할 때에 지난날 지었던 제서制書초고草稿를 꺼내 훑어보니, 비록 천자의 뜻을 모두 수록하여 밝히진 못했지만 서술한 바에서 후세에 드러내 보일 만한 한두 가지가 있었다.
대개 왕자王者고훈誥訓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나의 문장이 비루하다 해서 폐기할 수 있겠는가.
이에 기록하여 3권으로 만들었다.
내가 직각直閣이 된 뒤로 80일 동안 연이어 숙직을 하고 비로소 임기가 만료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하동로전운사河東路轉運使로 명을 받아 나갔고, 돌아온 즉시 하북河北으로 왔다.
그러므로 지은 것이 겨우 150여 편뿐이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宋 仁宗 慶曆 5년(1045)에 지은 것이다. 歐陽脩가 仁宗 慶曆 3년(1043)에 知制誥가 되었는데, 2년 후에 知制誥 시절에 詔令을 초고한 것들을 모아 3권으로 만들고는 《外制集》이라 제목을 붙이고 서문을 지었다. 《外制集》은 《慶曆制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外制는 唐宋시대의 제도로서, 황제의 詔書를 기초하여 바치는 관직인 知制誥에는 內制와 外制의 구별이 있어서, 中書舍人을 外制라 하고 翰林學士를 內制라 하였다.
역주2 呂夷簡 : 979~1044. 字는 擔父, 시호는 文靖이다. 眞宗 咸平 3년(1000) 進士가 되었다. 仁宗이 즉위하자 右諫議大夫와 參知政事를 역임하였고, 天聖 6년(1028) 재상에 올랐다. 景祐 4년(1037) 탄핵을 받아 퇴임했지만, 康定 원년(1040)에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가 致仕하였다. 실무형 재상으로 10년 이상 仁宗을 보좌한 공적이 높이 평가된다.
역주3 始用諫官御史疏 追還夏竦制書 : 夏竦(985~1051)은 宋나라 江州 德安 사람으로 字는 子喬, 시호는 文莊이다. 아버지가 거란과의 전투에서 전사해 丹陽主簿에 올랐다. 仁宗 天聖 5년(1027) 樞密院副使가 되고, 2년 뒤 參知政事에 올랐지만 宰相 呂夷簡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시 樞密副使가 되었다. 慶曆 3년 부름을 받아 樞密使가 되었는데, 臺諫의 탄핵을 받아 亳州知州로 내몰렸다. 7년(1047) 다시 추밀사가 되었지만 얼마 뒤 論劾을 받아 河南知府로 나갔다. 저서에 《文莊集》, 《古文四韻聲》 등이 있다. 慶曆 3년 추밀사가 되었을 때, 諫官과 御史가 그의 간사함을 들어 번갈아 가며 논핵하였지만 채납되지 않다가 中丞 王拱辰이 간곡하게 수차례 상소를 하니 그제야 파직하였다. 《宋史 권283 夏竦傳》
역주4 召韓琦范仲淹於陝西 : 韓琦(1008~1075)와 范仲淹(989~1052)은 조정에서 부름을 받기 전에 陝西經略副使로 부임지에 있었다.
역주5 召自滑臺 : 慶曆 3년 4월에 歐陽脩는 滑州通判으로 부임지에 있었다. 滑臺는 滑州의 治所를 말한다.
역주6 夏人雖數(삭)請命 : 夏人은 西夏 李曩霄를 가리키는데, 宋나라에서 趙氏로 賜姓하였으므로 趙元昊라고도 부른다. 宋나라 신하 노릇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仁宗 明道(1032∼1033) 초에 西夏의 왕위를 세습, 顯道란 연호를 쓰고 寶元(1038∼1039) 초에 天授란 연호를 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宋나라와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상자가 많아 화의를 애걸하여 夏國主로 봉해졌다. 《宋史 권485 外國1 夏國 上》 여기서는 西夏가 慶曆 3년에 宋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화친을 청한 사실을 가리킨다.
역주7 京東 : 京東路이니, 北宋 至道 3년(997)에 설치한 15路 가운데 하나이다.
역주8 最後王倫暴起沂州 轉劫江淮之間 : 王倫은 본래 沂州 虎翼軍의 사졸이었다. 慶曆 3년(1043) 5월에 수십 명을 선동하여 兵變을 일으켜 巡檢使 朱進을 죽이고 密州와 靑州 일대에서 접전을 하였다. 京東都提擧巡檢 傅永吉이 진압하자 남쪽 江淮 지방으로 내려가 泰州와 揚州 등 楚 지방을 공격하였다. 결국 7월에 和州에서 피살되었다.
역주9 張海郭貌山等 亦起商鄧 : 張海는 陝西省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군의 두목으로 慶曆 3년(1043)에 郭邈山 등과 굶주린 백성 천여 명을 거느리고 商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얼마 뒤에 黨君子‧范三 등과 합세하여 10여 州에 걸쳐 세력을 떨쳤다. 뒤에 趙元喆‧張宏 등이 거느린 관군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었다.
역주10 磨勘 : 唐‧宋 때에 정기적으로 관원의 업무 성적을 평가하여 黜陟을 결정하던 일을 말한다.
역주11 祖宗故事 : 陳振孫의 《直齋書錄解題》 권5에 “慶曆 3년에 富弼이 관원을 선발하고 局을 설치하여 三朝의 典故를 部門을 나누고 종류대로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모범으로 삼을 것을 천자에게 아뢰자, 王洙‧余靖‧孫甫‧歐陽脩에게 명하여 함께 편찬하게 하였는데 慶曆 4년에 책을 완성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祖宗故事는 바로 이때에 편찬한 《三朝政要》를 가리킨다.
역주12 修起居注 : 起居注는 제왕의 언행록을 말한다. 歐陽脩의 〈行狀〉에 “慶曆 3년 10월에 同修起居注에 선발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역주13 除目 : 임금이 임명하고 면직하는 관리의 명단이다.
역주14 奉使河東 : 河東路轉運使로 河東에 간 것을 말한다. 〈行狀〉에 “慶曆 4년 8월에 龍圖閣直學士, 河北轉運按察使에 제수되었고, 11월에는 朝散大夫로 승진하고 信都縣開國子에 봉해져 식읍 500호를 하사받았다. 이해 河東路轉運使의 命을 받들고 河東에 갔다.”라는 내용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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