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本知制誥時所遭逢處하야 感慨序次에 有憂深言遠之思라
慶曆三年春
에 丞相
이 病不能朝
어늘 上旣更用大臣
하야 銳意天下事
하야 러니
旣而
요 하고 又除富弼樞密副使
하니 弼仲淹琦
가 皆惶恐頓首
하야 辭讓至五六不已
라
手詔趣琦等就道甚急이어늘 而弼方且入求對以辭하되 不得見이라
觀琦等之所以讓과 上之所以用琦等者컨대 可謂聖賢相遭가 萬世一遇니
夏四月
에 하야 入諫院
하고 冬十二月
에 拜右正言知制誥
라
而
하야 以驚京西
하니 州縣之吏多不稱職
하고 而民弊矣
라
天子方慨然하야 勸農桑하며 興學校하고 破去前例하야 以不次用人하고
哀民之困
하야 而欲除其蠹吏
하고 知
法久之弊
하야 而思別材不肖以進賢能
하고 患百職之不修
하야 而申行賞罰之信
하니 蓋欲修法度矣
라
常得奏事殿中하야 從容盡聞天子所以更張庶事憂閔元元而勞心求治之意하고 退得載于制書하야 以諷曉訓勅在位者라
然予方與修
하고 又
하고 又修編勅
하야 日與同舍論議
하니 治文書
에 所省不一
이요
而
所下
가 率不一二時
에 已迫丞相出
이라 故不得專一思慮工文字
하야 以盡導天子難諭之意
하고 而復誥命於三代之文
이라
學者文章見用于世가 鮮矣온 況得施于朝廷하고 而又遭人主致治之盛가
若脩之鄙는 使竭其材라도 猶恐不稱이온 而況不能專一其職하니 此予所以常遺恨於斯文也라
明年秋에 予出爲河北轉運使하고 又明年春에 權知成德軍事라
事少間에 發嚮所作制草而閱之하니 雖不能盡載明天子之意나 於其所述而得一二足以彰示後世로라
予自直閣下
로 儤直八十始滿
하고 不數日
에 하고 還卽以來河北
이라
공이 지제고知制誥 때에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삼아 감개하여 사실을 서술함에 근심이 깊고 말이 원대한 생각이 있다.
경력慶曆 3년 봄에 승상丞相 여이간呂夷簡이 병으로 조회에 나오지 못하자, 상上이 이미 다시 대신大臣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에 매우 관심을 보여 비로소 간관諫官과 어사御史의 상소를 채납하여 하송夏竦을 추밀사樞密使에 제수하려던 조서詔書를 뒤미처 환수하였다.
이윽고 섬서陝西에서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을 불러들이고 또 부필富弼을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제수하니, 부필富弼‧범중엄范仲淹‧한기韓琦가 모두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서 대여섯 차례 사양해 마지않았다.
상上이 손수 조서를 내려 한기韓琦 등에게 상경上京할 것을 매우 급하게 재촉하자 부필富弼은 바야흐로 조정에 들어와 청대請對하여 사직하려 하였지만 상上을 만나볼 수 없었다.
상上이 환관을 파견하여 부필富弼이 있는 각문閣門에 급히 보내 즉시 명을 받게 하였으니, 아!
한기韓琦 등이 사양한 바와 상上이 한기韓琦 등을 등용한 바를 보건대,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만난 것이 만재일우萬載一遇라고 할 만하다.
이때에 천하의 선비 중에 어느 누가 재목이 되어 조정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또한 대간臺諫의 선발에 참여하였는가.
여름 4월에 활주滑州의 치소治所로부터 소환되어 간원諫院에 들어갔고, 겨울 12월에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에 배수되었다.
이때에 서하인西夏人이 비록 자주 화친을 청하였으나 서쪽의 군대는 여전히 계엄을 풀지 않았다.
경동京東은 수년간 도적이 창궐했고 최후에는 왕륜王倫이 갑자기 기주沂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차 강회江淮 일대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장해張海와 곽모산郭貌山 등이 또 상등商鄧에서 반란을 일으켜 경서京西를 경동시키니, 주현州縣의 관리가 대부분 직분에 걸맞지 않아 백성들이 피폐해졌다.
천자가 바야흐로 개연해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전례를 깨고서 상규常規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등용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 해를 끼치는 관리를 제거하려고 하였고, 마감磨勘하는 법이 오래되어 생겨난 폐단을 알아 훌륭한 재능을 가진 자와 불초不肖한 자를 가려내어 현명하고 능한 자를 등용시킬 것을 생각하고, 모든 직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함을 근심하여 미더운 상벌賞罰을 거듭 시행하였으니, 이는 법도를 정비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이때에 비록 고명誥命을 작성하는 일을 관장하였지만 오히려 간관諫官의 직책에 있었다.
그러므로 늘 대전大殿에서 일을 아뢰면서 조용히 천자가 뭇 일을 크게 개혁하고 백성을 우려하여 노심초사 치세治世를 이루고자 하는 뜻을 모두 듣고 물러나 제서制書에 실어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훈칙訓飭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창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고, 또 기거주起居注를 편수하였으며, 또 조서詔書를 편정編定하느라 매일 동료들과 논의하였으니 문서를 처리함에 살펴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목除目이 내려온 지 대략 한두 시신時辰이 되기 전에 벌써 승상丞相이 나갈 때에 임박하였기 때문에 전일하게 생각하여 문사文辭를 공교工巧하게 만들어 천자의 효유曉諭하기 어려운 뜻을 모두 말하고,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고명誥命했던 글로 회복시킬 수 없었다.
학자의 문장이 세상에 채용되는 경우가 드문데, 더구나 조정에 시행되고 또 군주가 선치善治를 이루는 성대함을 만날 수 있겠는가.
나처럼 비루한 사람은 가령 재주를 다하더라도 오히려 직책에 걸맞지 않을 듯한데, 더구나 이 직책에 전일하지 못하였으니 이점은 내가 이 글에 대해 늘 유감을 가지는 이유이다.
이듬해 가을에 내가 외직으로 나가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가 되었고, 또 다음 해 봄에 권지성덕군사權知成德軍事가 되었다.
일이 조금 한가할 때에 지난날 지었던 제서制書의 초고草稿를 꺼내 훑어보니, 비록 천자의 뜻을 모두 수록하여 밝히진 못했지만 서술한 바에서 후세에 드러내 보일 만한 한두 가지가 있었다.
대개 왕자王者의 고훈誥訓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나의 문장이 비루하다 해서 폐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각直閣이 된 뒤로 80일 동안 연이어 숙직을 하고 비로소 임기가 만료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하동로전운사河東路轉運使로 명을 받아 나갔고, 돌아온 즉시 하북河北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