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伯以征伐諸侯爲職事하니 其伐黎而勝也에 商人已疑其難制而惡之하야 使西伯赫然見其不臣之狀하야 與商竝立而稱王이어늘
如此十年
에 商人反晏然不以爲怪
하고 其父師老臣如
之徒
도 亦黙然相與熟視而無一言
하니 此豈近於人情邪
아
以紂之雄猜暴虐
으로 嘗
矣
어늘 西伯聞之竊歎
하니 遂執而囚之
하야 幾不免死
하고
至其叛己不臣而自王하얀 乃反優容而不問者十年이 此豈近於人情邪아
孔子曰
이라하니 使西伯不稱臣而稱王
이면 安能服事於商乎
리오
然二子不以爲非
하고 依之久而不去
라가 하야 始以爲非而棄去
하니
彼二子者始顧天下에 莫可歸일새 卒依僭叛之國而不去하야 不非其父하고 而非其子하니 此豈近於人情邪아
書之泰誓에 稱十有一年이어늘 說者因以謂自文王受命九年及武王居喪二年을 幷數之爾라
是以
로 西伯聽
을 謂之受命
이라하야 以爲元年
하니 此又妄說也
라
古者에 人君이 卽位必稱元年은 常事爾니 不以爲重也어늘 後世曲學之士가 說春秋에 始以改元爲重事라
西伯卽位에 已改元矣니 中間不宜改元이어늘 而又改元하고 至武王卽位하얀 宜改元이어늘 而反不改元하고 乃上冒先君之元年하야 幷其居喪하야 稱十一年하고 及其滅商而得天下하얀 其事大於聽訟이 遠矣어늘 又不改元하니
由是言之컨대 謂西伯以受命之年爲元年者는 妄說也라
後之學者
가 知西伯生不稱王而中間不再改元
하니 則
가 粲然明白而不誣矣
라
或曰 然則武王畢喪伐紂
어늘 而泰誓曷謂稱十有一年
고 對曰 畢喪伐紂
는 出於諸家之小說
이요 而泰誓
는 之明文也
라
昔者에 孔子當衰周之際하야 患衆說紛紜하야 以惑亂當世라
於是에 退而修六經하야 以爲後世法이러니 及孔子旣歿하야 去聖稍遠而衆說復興하야 與六經相亂이라
自漢以來로 莫能辯正하니 今有卓然之士가 一取信乎六經이면 則泰誓者는 武王之事也요 十有一年者는 武王卽位之十有一年爾니 復何疑哉리오
司馬遷作周本紀에 雖曰武王卽位九年에 祭於文王之墓然後에 治兵於盟津이라하고 至作伯夷列傳하얀 則又載父死不葬之說하니 皆不可爲信이라
《서경書經》에 주周나라가 여黎와 싸워 이긴 것을 상商나라가 허물하기 시작하였다고 일컬었으니, 여黎와 싸워 이긴 자는 서백西伯이다.
서백이 제후를 정벌하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는데, 그가 여를 정벌하여 이겼을 때에 상나라 사람이 이미 그를 제어하기 어렵다고 의심하고 미워해서, 서백으로 하여금 분명히 신복臣服하지 않는 상태를 드러내어 상나라와 병립하여 왕王이라고 일컫게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한 지 10년 만에 상나라 사람이 도리어 편안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조이祖伊‧미자微子와 같은 부사父師와 노신老臣들도 묵묵히 서로 더불어 익히 보고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이 어찌 인정人情에 가깝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서백이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라 일컬은 지 10년이라고 한 것은 망령된 설이다.
주紂의 시기심과 포학함으로 구후九侯는 죽여 육젓을 담그고 악후鄂侯는 포를 떠서 죽였는데, 서백西伯이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탄식하니 주왕이 드디어 서백을 잡아 가두어 거의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서백이 자신을 배반하여 신복臣服하지 않고 스스로 왕王이라 일컫기에 이르러, 곧 도리어 관용寬容을 베풀어 따져 묻지 않은 지가 10년이라는 것이 어찌 인정仁情에 가깝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서백이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라 일컬은 지 10년이라고 한 것은 망령된 설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천하를 3분하여 그 둘을 소유하고서도 은殷나라를 섬겼다.”라고 하였으니, 가령 서백西伯이 신하臣下라고 일컫지 않고 왕王이라고 일컬었다면 어찌 복종하여 상商나라를 섬겼겠는가.
또 생각건대, 서백이 왕이라고 일컬은 것이 어떤 설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서백이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라고 일컬은 지 10년이라고 한 것은 망령된 설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옛적의 의義를 아는 선비이다.
막 나라를 사양하고 떠나서 천하를 돌아봄에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서백西伯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가서 귀의하였다.
이때에 주왕紂王이 비록 무도하였으나 천자天子였다.
천자가 계시는데 상제후上諸侯가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왕이라고 일컬은 것은 바로 참람되고 반역한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가 그릇되게 여기지 않고 오래도록 의지하여 떠나지 않다가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기에 이르러 비로소 그릇되게 여겨 버리고 떠났다.
저 백이와 숙제가 처음 천하를 돌아볼 때에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참람되고 반역한 나라에 의지하여 떠나지 않아, 그 아버지인 문왕文王을 그릇되게 여기지 않고 그 아들인 무왕을 그릇되게 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에 가깝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서백이 천명을 받아 왕이라고 일컬은 지 10년이라는 것은 망령된 설이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泰誓〉에 11년이라고 일컬었는데, 설명하는 자가 인하여 문왕文王이 천명天命을 받은 9년으로부터 무왕武王이 거상居喪한 2년까지를 아울러 헤아렸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서백西伯이 우虞‧예芮의 송사를 다스린 것을 천명을 받았다고 하여 원년元年으로 삼았으니, 이는 또 망령된 설이다.
옛적에 인군人君이 즉위하면 반드시 원년元年이라고 일컬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지 중대한 일이 아닌데, 후세에 곡학曲學하는 선비가 《춘추春秋》에 비로소 원년을 고친 것을 중대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서백이 즉위함에 이미 개원改元하였으니 중간에 개원해서는 안 되는데 또 개원하였고, 무왕이 즉위하기에 이르러서는 개원해야 하는데 도리어 개원하지 않고 곧 위로 선군先君의 원년元年을 그대로 써서 거상居喪한 기간까지 아울러 11년이라 일컬었고, 상商나라를 멸하여 천하天下를 얻음에 이르러서는 그 일이 송사訟事를 다스린 것보다 현격하게 중대한데도 또 개원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서백이 천명을 받은 해를 원년으로 삼았다는 것은 망령된 설이다.
후일의 학자가 서백西伯이 살아서 왕이라고 일컫지 않고 중간에 거듭 개원改元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실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일이 찬연히 명백하여 속이지 않은 것이다.
혹자가 묻기를 “그렇다면 무왕武王이 문왕文王의 상을 마치고 주왕紂王을 정벌하였는데 〈태서泰誓〉에 어찌 11년이라고 일컬었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상을 마치고 주왕을 정벌한 것은 제가諸家의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설說에서 나온 것이고, 〈태서〉는 육경六經의 분명한 문장이다.
옛적에 공자孔子가 주周나라가 쇠퇴한 때에 뭇 설이 분분해서 당세를 혼란스럽게 만들까 근심하였다.
이에 물러나 육경六經을 편수하여 후세의 법칙을 세웠는데, 공자가 이미 돌아가시기에 이르러 성인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뭇 설이 다시 일어나서 육경六經과 뒤섞이게 되고 말았다.
한漢나라 이후로 변별하여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지금 특출한 선비가 한번 육경六經에서 믿음을 취한다면 〈태서〉라는 것은 무왕의 일이고, 11년이라는 것은 무왕이 즉위한 11년일 뿐이니, 다시 어찌 의심하겠는가.
사마천司馬遷이 〈주본기周本紀〉를 지을 때에 비록 무왕이 즉위한 9년에 문왕의 묘소에 제사한 뒤에 맹진盟津에서 열병閱兵하였다고 하고,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짓기에 이르러서는 또 아버지가 죽고 장례 지내지 않았다는 설을 실었으니, 모두 믿을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취하지 않으니 《서경》에서 믿음을 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