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梁爲
하야 以身死國
하야 葬於
하고 晉
二年
에 始贈太師
하니라
公在梁
에 以智勇聞
하니 梁
之爭數百戰
에 其爲勇將
이 多矣
로되 而晉人獨畏彦章
이러라
及梁末年
하야 하야 梁之大臣老將
이 多以讒不見信
하야 皆怒而有怠心
하고 而梁亦盡失河北
하야 事勢已去
라
諸將多懷顧望하되 獨公奮然自必하야 不少屈懈하니 志雖不就나 卒死以忠이라
五代終始가 纔五十年에 而更十有三君하야 五易國而八姓하니 士之不幸而出乎其時하야 能不汙其身하고 得全其節者鮮矣라
平生嘗謂人曰 豹死留皮하고 人死留名이라하니 蓋其義勇忠信이 出於天性而然이라
至於公傳하야 未嘗不感憤歎息호되 惜乎舊史殘略하야 不能備公之事러니
하야 求於滑人
하야 得公之孫睿所錄家傳
하니 頗多於舊史
라
又言公五子에 其二는 同公死節이라하니 此皆舊史無之요
又云公在滑에 以讒自歸於京師라하야늘 而史云召之라
是時에 梁兵盡屬段凝이요 京師羸兵이 不滿數千이라
公之攻德勝也에 初受命於帝前하야 期以三日破敵하니 梁之將相聞者皆竊笑러니
是時에 莊宗在魏라가 聞公復用하고 料公必速攻하야 自魏馳馬來救로대 已不及矣라
雖予나 亦惑不能自信이러니 及讀公家傳이라가 至於德勝之捷하야 乃知古之名將이 必出於奇然後能勝이라
奇在速하고 速在果하니 此天下偉男子之所爲요 非拘牽常算之士可到也라
每讀其傳에 未嘗不想見其人이러니 後二年에 予復來通判州事하야 歲之正月에 過俗所謂鐵槍寺者라가 又得公畫像而拜焉하니
亟命工完理之하되 而不敢有加焉하니 懼失其眞也일새라
公死巳百年이로되 至今俗猶以名其寺하고 童兒牧豎가 皆知王鐵槍之爲良將也라
一槍之勇이 同時豈無리오마는 而公獨不朽者는 豈其忠義之節使然歟아
然公之不泯者는 不繫乎畫之存不存也로되 而予尤區區如此者는 蓋其希慕之至焉耳이라
讀其書에 尙想乎其人이온 況得拜其像하야 識其面目에 不忍見其壞也라
畫旣完에 因書予所得者于後而歸其人하야 使藏之하노라
此文은 凡五段이니 一段是總敍其略이요 二段是言其能全節이요 三段是辨其事이요 四段是言其善出奇策이요 五段是寺中畫像之事라
而通篇은 以忠節善戰으로 分作兩項이나 然不見痕跡이라
09. 왕언장王彦章의 화상畫像에 대한 기문記文
서사敍事의 방법으로 의론議論을 펼쳤으니, 감개感慨한 부분에 정회情懷가 많다.
태사太師 왕공王公은 휘諱는 언장彦章이요 자字는 자명子明이니, 운주鄆州 수장壽張 사람이다.
후량後梁을 섬겨 선의군절도사宣義軍節度使가 되어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국殉國하여 정주鄭州의 관성管城에 장사 지냈고 후진後晉 천복天福 2년(937)에 비로소 태사太師로 증직되었다.
공이 후량에 있을 적에 지혜와 용맹으로 알려졌으니, 후량과 진晉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수백여 차례의 전쟁에 용맹한 장수가 많았지만 진인晉人들은 유독 왕언장을 두려워하였다.
건화乾化 이후로부터는 항상 진晉나라와 전투하여 여러 차례 하상河上에서 장종莊宗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리고 후량 말년에 이르러 소인小人인 조암趙巖 등이 권력을 잡고서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후량의 대신大臣과 노장老將들이 대부분 참소로 신임을 받지 못하게 되자 모두 노여워하며 나태한 마음이 생겼고, 후량 또한 하북河北의 땅을 거의 잃어 사세가 이미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사세를 관망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공만은 분연히 굳건하게 흔들림 없는 자세를 취하여 조금도 굽히거나 나태하지 않았으니, 뜻은 비록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죽음으로 충성하였다.
공이 죽고 나자 후량 또한 멸망하였으니 슬프도다!
오대五代의 전全 시기가 겨우 50년밖에 되지 않는데 13명의 황제가 교체되면서 다섯 번 나라가 바뀌고 여덟 개의 성씨가 갈렸으니, 선비로 불행히도 그때에 태어나 그 몸을 더럽히지 않고 그 절의를 온전히 할 수 있었던 자가 드물다.
공은 본래 무인武人이니 글을 알지 못하고 그 말도 질박하였다.
평소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 의용義勇과 충신忠信이 천성에서 나와 그러한 것이었다.
내가 《오대사기五代史記》를 편찬할 적에 선善한 것을 선하게 여기고 악惡한 것을 미워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의 전傳을 지음에 이르러 비분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되, 아쉽게도 《구오대사舊五代史》의 기록은 누락되고 소략하여 공의 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였다.
강정康定 원년(1040)에 내가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이곳에 와서 활주滑州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공의 손자 예睿가 기록한 가전家傳을 얻어 보니, 《구오대사舊五代史》의 기록보다 사적이 퍽 많았다.
덕승德勝 전투를 기록한 것은 더욱 상세하였고,
또 ‘말제末帝가 공을 쓰려 하지 않는 것에 경상敬翔이 노하여 말제 앞에서 스스로 목을 매려고 하였으며, 공이 홀笏을 가지고 산천山川을 그어 보인 일로 인하여 어사御史의 탄핵을 받고 폐출을 당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공의 다섯 아들 중에 두 아들이 공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구오대사舊五代史》에는 없는 기록이다.
또 가전에는 ‘공이 활주滑州에 있을 때에 참소를 받고 스스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고 하였는데,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는 ‘소명召命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후량의 병사들이 모두 단응段凝에게 귀속되어 있었고, 경사京師는 나약한 병졸이 수천도 되지 않았다.
공이 황제의 근위병 500명을 얻어 운주鄆州로 가서 병력이 부족하여 중도中都에서 패하였다.
그런데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는 ‘5,000명을 거느리고 갔다.’고 하였으니 또한 모두 잘못된 기록이다.
공이 덕승德勝을 공격할 때, 처음에 말제末帝 앞에서 명을 받으면서 3일 만에 적을 격파하겠노라고 약속하니 이 말을 들은 후량의 장상將相들이 모두 몰래 비웃었다.
그러나 덕승德勝의 남성南城을 격파하는 데에 과연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때에 장종莊宗이 위魏 땅에 있다가 공이 다시 기용되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공이 반드시 신속하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고서 위魏에서 말을 달려 구원하러 왔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장종이 예측을 잘하고 공이 기습을 잘 펼친 것이 어쩌면 그리도 신묘한가.
지금 나라에서 전쟁이 그친 지 40년인데 하루아침에 원호元昊가 반란하여 군사들이 패주하고 장수들이 살해되는 사태를 4, 5년이나 끌고 있으면서 공수攻守의 계책을 지금까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일찍이 기습하여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논의를 홀로 주장해왔는데, 변방의 장수들이 누차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탄식하였다.
당시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혹은 미쳤다고 비웃고 혹은 무시하면서 듣지 못한 것처럼 대하였다.
나 자신조차도 나의 논의를 의혹스러워하면서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의 가전을 읽다가 덕승에서 승첩勝捷한 부분에 이르러서야 옛날의 명장은 반드시 기습을 펼친 후에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계책을 자세하게 짜지 못하는 자라면 기습을 펼칠 수 없다.
기습은 신속함에 달려 있고 신속함은 과감함에 달려 있으니, 이는 천하의 위대한 대장부가 할 수 있는 일이지 평범한 계책에 얽매여 있는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가 그 전傳을 읽을 때마다 공의 모습을 상상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더니, 2년 뒤 내가 다시 활주滑州의 통판주사通判州事로 와서 올해 정월에 세간에서 이른바 철창사鐵槍寺라고 하는 곳을 지나다가 다시 공의 화상畫像을 보고 절하였다.
화상은 세월이 오래되어 마멸되었으나 은은히 공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급히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수선하게 하되 감히 채색을 더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의 진모眞貌를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공은 특히 창을 잘 다루었으니 당시에 왕철창王鐵槍이라고 불렸다.
공이 죽은 지 이미 백 년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까지도 세간에서는 오히려 그 이름으로 절의 이름을 붙이고, 어린 아이들과 목동들도 모두 왕철창이 훌륭한 장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 한 자루를 잘 다루는 용맹스러운 장수가 당시에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공의 이름만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 충의忠義의 절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공의 화상이 이미 백여 년의 세월을 지나왔으니, 보수하여 완전하게 만들면 다시 백 년 세월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화상의 보존 여부와는 상관없을 것인데 내가 이처럼 더욱 정성을 쏟는 것은, 공을 앙모하는 마음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어봄에 오히려 그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거늘, 더군다나 그 화상에 절하고서 그 면목을 알게 된 터에 그 화상이 훼손된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화상이 완성된 뒤에 내가 뒤에 알게 된 사실들을 기록하여 화상의 주인에게 보내어 보관하게 하노라.
“이 글은 모두 다섯 단락이니, 첫 번째 단락은 그 대략을 총괄하여 서술하였고, 두 번째 단락은 왕언장이 절조를 온전히 했던 것을 말하였고, 세 번째 단락은 왕언장의 사적을 분별하였고, 네 번째 단락은 왕언장이 기습책을 잘 펼쳤던 것을 말하였고, 다섯 번째 단락은 철창사에 있는 왕언장의 화상의 일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 편은 충절忠節와 선전善戰 두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글을 지었으나 나눈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