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公
이 旣葬于曲江之明年
에 其子仲荀
이 走于
以來告曰
自曾高以來
로 晦跡
이러니 至于
하야 始有祿仕
하고 而襄公繼之以大
러라
自始興
有聲于唐
하야 爲賢相
으로 至公
하야 復出爲宋名臣
이라
蓋余氏徙韶하야 歷四世하야 始有顯仕하고 而曲江寂寥三百年然後에 再有聞人이러니
惟公位登天臺
하고 하야 하야 以繼美前哲
하야 而爲韶人榮
하고
蓋褒有詔
하며 恤有物
하며 贈有
하고 而諡行考功
엔 有議有狀
하고 合而誌之
하야 以閟諸幽
엔 有銘
하니 可謂備矣
로되
惟是
가 揭于墓隧
하야 以表見于後世而昭示其子孫者
엔 宜有辭而闕焉
이라 敢以爲請
하노라
公諱靖이요 字安道니 官至朝散大夫 守工部尙書 集賢院學士 知廣州軍州事 兼廣南東路兵馬鈐轄 經略安撫使 柱國 始興郡開國公하고 食邑二千六百戶나 食實封二百戶라
治平元年에 自廣朝京師라가 六月癸亥에 以疾薨于金陵하니 天子惻然하야 輟視朝一日하고 賻以粟帛하고 贈刑部尙書하고 諡曰襄이라
公爲人이 質重剛勁하되 而言語恂恂하야 不見喜怒라
自少博學强記하야 至於歷代史記雜家小說陰陽律曆과 外曁浮圖老子之書하야도 無所不通이러라
天聖二年擧進士
하야 爲
하야 하고 하고 再遷祕書丞刋校三史
라가 充集賢校理
하다
天章閣待制范公仲淹
이 한대 不敢言
이어늘 公疏論之
하야 坐貶
하고 稍徙
라
已而天子感悟하야 亟復用范公하고 而因之以被斥者皆召還이로되
旣已
하고 又增置諫官四員
하야 使言天下事
하니 公其一人也
라
卽改右正言供職하니 公感激奮勵하야 遇事輒言하야 無所迴避하니
將加封冊할새 而契丹以兵臨境上하야 遣使言爲中國討賊하고 且告師期하고 請止毋與和하니 朝延患之라
欲聽인댄 重絶夏人하야 而兵不得息이요 不聽인댄 生事北邊이라
議未決이어늘 公獨以謂中國厭兵久矣니 此契丹之所幸이라
朝廷雖是公言이나 猶留夏冊不遣하고 而假公諫議大夫以報라
公從十餘騎
하야 馳出
하야 見虜於
하야 從容坐帳中辯折
하야
往復數十에 卒屈其議하고 取其要領而還하니 朝廷遂發夏冊하야 臣元昊하다
是歲에 以本官知制誥史館修撰한대 而契丹卒自攻元昊라
凡六年에 天子每思之하야 欲用者數矣로되 大臣有不喜者라 第遷光祿少卿于家하고 又以爲某衛將軍壽州兵馬鈐轄이어늘 辭不拜하다
而蠻賊
陷
하고 連破嶺南州縣
하고 圍廣州
어늘 乃卽廬中起公爲
라
公奏曰 賊在東而徙臣西는 非臣志也라하니 天子嘉之하야 卽詔公經制廣東西賊盜라
公以謂智高는 交趾叛者니 宜聽出兵이요 毋沮其善意라하야 累疏論之하되 不報라
至是하야 公曰 邕州與交趾接境하니 今不納이면 必忿而反助智高라하니
乃以便宜趣交趾會兵
하고 又募
하야 皆縻以職
하고 與之誓約
하야 使聽節制
하니
或疑其不可用한대 公曰 使不與智高合이 足矣라하더니 及智高入邕州하야 遂無外援이라
旣而宣撫使
이 會公兵
하야 敗賊於
하니 智高走入海
러라
諸將班師할새 以智高尙在로 請留公廣西하야 委以後事하다
遷給事中한대 諫官御史가 列疏言公功多而賞薄이라하야 再遷尙書工部侍郞하다
拜集賢院學士하고 久之에 徙知潭州하고 又徙靑州하고 再遷吏部侍郞하다
嘉祐五年에 交趾冦邕州하야 殺五巡檢하니 天子以謂恩信著於嶺外而爲交趾所畏者公也라하야 驛召以爲廣西體量安撫使하고 悉發荊湖兵以從이라
公至則移檄交趾하야 召其臣費嘉祐하야 詰責之한대 嘉祐皇恐하야 對曰 種落犯邊하니 罪當死라
明年에 以尙書左丞知廣州하고 英宗卽位에 拜工部尙書라
凡治六州할새 所至에 有惠愛하고 雖在兵間이라도 手不釋卷이라
仲荀은 今爲屯田員外郞이요 叔英은 太常寺太祝이라
시흥始興의 양공襄公이 이미 곡강曲江에 장사된 이듬해에 그 아들 중순仲荀이 박주亳州로 와서 나에게 말하였다.
“여씨余氏는 대대로 민閩 땅 사람이었다가 오대五代 시절에 소주韶州로 난을 피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증조부 이래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은둔하였더니 박사부군博士府君 때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였고 양공襄公이 그 뒤를 이어 크게 창성하였습니다.
곡강曲江은 오령五嶺 너머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흥始興의 장문헌공張文獻公 때부터 당唐나라 조정에 이름이 알려져 어진 재상이 되었고 우리 양공襄公에 이르러 다시 조정에 나아가 송宋나라의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대개 여씨余氏가 소주韶州로 이주하여 4대를 지나 비로소 현달한 벼슬을 하는 이가 나왔고, 곡강曲江에 큰 인물이 없이 적막한 지 30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명망 있는 인물이 나왔습니다.
오직 우리 양공께서는 천대天臺(상서성尙書省)의 지위에 오르고 정3품의 관질이 되어 마침내 작위爵位와 봉토封土를 가져 향주鄉州에 개국開國하여 전현前賢의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여 소주韶州 사람들의 영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공을 포장褒獎하고 무휼撫恤하고 증직贈職하고 시호諡號를 내림에 이르러서는 시종일관 내리신 은총이 성대하였습니다.
대개 포장褒獎할 때에는 조서詔書가 내려지고 무휼撫恤할 때에는 물품이 하사되고 증직贈職할 때에는 고신告身이 있고 시호諡號를 정하기 위한 조치를 행하고 공로를 고찰할 때에는 생전 행적에 대한 의론과 이에 대해 보고해 올리는 시장諡狀이 있었고, 이것들을 합하여 기록해서 무덤에 묻을 때에는 묘지명墓誌銘이 있었으니, 구비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오직 이수螭首와 구부龜趺가 묘도墓道에 세워져 그 행적을 후세에 드러내 보이고 자손들에게 밝게 보이는 신도비명에는 의당 글이 있어야 하는데 빠졌는지라, 감히 글을 써주시기를 청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씨余氏는 소주韶州 곡강曲江 사람이다.
증조부 휘 아무개와 조부 휘 아무개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휘 아무개는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냈고 여러 차례 증직하여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르렀다.
공의 휘는 정靖이요 자字는 안도安道이니, 관직이 조산대부朝散大夫 수공부상서守工部尙書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 지광주군주사知廣州軍州事 겸광남동로병마검할兼廣南東路兵馬鈐轄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 주국柱國 시흥군개국공始興郡開國公에 이르렀고, 식읍은 2,600호였으나 실제 식읍은 200호였다.
치평治平 원년(1064)에 광동廣東에서 도성으로 조회하러 가다가 그해 6월 계해癸亥에 질병으로 금릉金陵에서 죽으니, 천자가 슬퍼하여 조정에 나가 정사 보는 일을 하루 동안 그치고 속백粟帛을 부의로 내리고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증직하고 양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듬해 7월 아무 날에 곡강曲江의 용귀향龍歸鄉 성산成山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중후하고 굳세었으되 말은 공순恭順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역대의 역사 기록, 잡가雜家, 소설小說, 음양陰陽, 율력律曆과 밖으로는 불교佛敎, 노자老子 등의 책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천성天聖 2년(1024)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현위贛縣尉가 되어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에 합격하고 장작감승將作監丞 신건현령新建縣令으로 개차改差되고 다시 비서승祕書丞 천교삼사刋校三史로 옮겼다가 집현교리集賢校理에 충원되었다.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범중엄공范仲淹公이 국사에 대해 발언한 일로 재상의 심기를 건드려 죄를 얻었는데, 간관어사諫官御史가 감히 이에 대해 말을 하지 못하자 공이 상소하여 이 일을 논했다가 죄를 얻어 감균천주세監筠川酒稅로 폄적되었고 얼마 후 태주현령泰州縣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안 가 천자가 자신의 처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범공范公을 다시 등용하고서 그 일로 인해 배척을 받았던 자들을 모두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오직 공은 어버이를 봉양하기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영주지주英州知州가 되기를 청하였고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자리를 옮겼다.
모친상을 당해 상을 치르고 탈상脫喪함에 드디어 다시 집현교리集賢校理 동판태상례원同判太常禮院이 되었다.
경우景祐와 경력慶曆 연간에 천하가 오랫동안 태평한 나머지 나태해진지라 관리들이 구태를 인습因襲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조원호趙元昊가 서하西夏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오랫동안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관부官府는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은 거듭 피폐해지니 천자가 발끈 노하여 쇠퇴하고 무너진 것들을 일신하여 수많은 제도들을 정비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두세 사람의 대신大臣들을 다시 기용하고서 또 간관諫官 네 사람을 더 두어 천하의 일을 말하게 하였으니, 공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즉시 공을 우정언右正言으로 개차改差하여 직무를 보게 하니, 공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일을 만날 때면 번번이 간언하여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첨하고 권세를 휘두르던 간신들이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였으니, 공이 정사政事에 보탬이 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또한 공에 대한 원망과 질시도 넘쳐났다.
경력慶曆 4년(1044)에 조원호趙元昊가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면서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조원호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려 하였는데 거란이 병사들을 이끌고 국경에 와서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적도賊徒를 토벌하겠다.”라 하고, 또 출병할 기일을 알리고서 조원호와의 강화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근심하였다.
그들의 청을 들어주자니 다시 서하西夏 사람들과 단교하여 병사들이 쉬지 못할 것이요, 들어주지 않자니 북쪽 변경에 사단이 날 판이었다.
이에 대한 논의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공이 홀로 말하기를 “중국이 전쟁을 지겹도록 겪은 지가 오래이니 이것은 거란의 다행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쉬고 있던 우리의 군사로 하여금 용맹함을 기르게 하는 것은 거란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책을 써서 우리를 어지럽히려는 것이니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비록 공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오히려 서하西夏의 조원호趙元昊를 책봉하는 사신을 머물러두면서 파견하지 않고 공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직책을 임시로 주어 거란에 가서 답변하게 하였다.
공이 십여 기騎를 거느리고 거용관居庸關을 달려 나가 구십구천九十九泉에서 거란과 만나 조용히 장막 안에 앉아 변론하였다.
수십 차례 변론이 오감에 마침내 거란의 주장을 꺾고 그들의 진짜 의도를 간파하고서 돌아오니, 조정에서 마침내 서하西夏로 갈 책봉사冊封使를 출발시켜 조원호趙元昊를 신하로 삼았다.
서쪽의 군대가 이미 계엄戒嚴을 풀고 북쪽 변경 또한 일이 없게 되었다.
이해에 우정언右正言의 직책을 지니고 있으면서 지제고知制誥 사관수찬史館修撰을 겸하였는데, 거란이 마침내 스스로 조원호趙元昊를 공격하였다.
이듬해에 거란의 사신이 와서 승첩勝捷을 알리거늘, 다시 공을 보내어 답변하게 하고는 오랑캐의 말을 익혔다는 이유로 폄적되어 길주지주吉州知州로 나가게 되었다.
공을 원망하던 자가 이 일로 말미암아 일을 꾸며서 공을 중상모략하여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 좌천되어 남경南京의 분사分司가 되었다.
공은 기쁜 마음으로 향리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빈객을 사양하고 인사人事를 끊었다.
이렇게 모두 6년이 흐르는 동안 천자가 항상 공을 그리워하여 등용하려고 한 것이 여러 차례였으되 공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大臣이 있었는지라, 단지 가거家居하면서 광록소경光祿少卿의 직임으로 옮겨졌고 다시 아무 위장군衛將軍 수주병마검할壽州兵馬鈐轄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황우皇祐 3년(1051)에 명당明堂에서 황제가 제사를 지낼 때 널리 은택을 베풀어 위위경衛尉卿으로 선발되었다.
다음 해에 건주지주虔州知州가 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그런데 만적蠻賊 농지고儂智高가 옹주邕州를 함락시키고 연이어 영남嶺南의 주현州縣들을 격파하고서 광주廣州를 포위하자, 조정에서는 즉시 상중喪中에 있는 공을 기용하여 비서감祕書監 담주지주潭州知州로 삼았다.
공이 명을 받은 날 즉시 말을 달려갔는데 도중에 계주지주桂州知州 광남서로경략안무사廣南西路經略安撫使로 개차改差되었다.
공이 상주하기를 “적도들이 동쪽에 있는데 신을 서쪽으로 옮기시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즉시 광남동로廣南東路와 광남서로廣南西路의 경리절제經理節制가 되어 도적들을 퇴치하게 하였다.
공이 이에 광주廣州로 갔는데 농지고가 다시 서쪽 옹주邕州로 도주하였다.
농지고儂智高가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교지交趾에서 자신들도 출병하여 적도를 토벌하는 일을 돕겠다고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공은 ‘농지고는 교지에 반란을 일으킨 자이니 마땅히 그들이 출병하겠다는 청을 들어주어야지 그 선의善意를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여 누차 상소하여 이에 대해 논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말하기를 “옹주邕州는 교지와 접경지역이니 지금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분노하여 도리어 농지고를 도울 것입니다.”라고 하니,
조정에서 편의대로 서둘러 교지의 병사와 회합하게 하고, 또 농씨儂氏와 황씨黃氏 등 여러 성씨姓氏의 토호土豪 추장酋長들을 불러 모아서 모두 관직을 주어 결속하고 그들과 맹약하여 경리절제經理節制의 명을 따르게 하였다.
혹자가 그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의심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들이 농지고와 결탁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하였더니, 농지고가 옹주로 들어가서는 마침내 외부의 원조가 없게 되었다.
얼마 후 선무사宣撫使 적청狄靑이 공의 병사와 회합하여 귀인歸仁에서 적도들을 쳐부수니 농지고가 도망하여 바닷가 지역으로 들어갔다.
옹주邕州가 평정되자 공이 다시 부친상을 마치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장수들이 회군하면서 농지고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이유로 공을 광서廣西에 남겨 뒷일을 맡길 것을 청하였다.
공을 급사중給事中의 벼슬로 옮기자 간관어사諫官御史가 연이어 상소하여 말하기를 “공의 공적이 많은데 상이 박합니다.”라고 하여 다시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으로 옮겼다.
공이 광서廣西에 머물면서 해를 넘기도록 안무按撫하여 안정을 회복하니 영해嶺海 지방이 고요히 평온해졌다.
다시 특마特磨로 사람을 파견하여 농지고의 어미와 아우 한 사람을 기습하여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보내 참수하였다.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에 배수되고 오래 지나 담주지주潭州知州로 옮기고 다시 청주지주靑州知州로 옮기고 다시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옮겼다.
가우嘉祐 5년(1060)에 교지交趾가 옹주邕州를 침략하여 순검사巡檢使 다섯 사람을 살해하니, 천자가 은덕과 신의가 영외嶺外에 드러나 교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는 공이라고 생각하여, 역마로 공을 불러 광서체량안무사廣西體量安撫使로 삼고 형호荊湖 지방의 병사를 모두 출병시켜 따르게 하였다.
공이 도착함에 교지에 격문檄文을 보내 그 신하 비가우費嘉祐를 불러들여 힐문하자, 가우嘉祐가 황공해하면서 대답하기를 “부락 사람들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원컨대 돌아가 괴수魁首를 잡아다가 바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즉시 다섯 사람을 형틀을 채워 흠주欽州로 보내 경계境界에서 참수하였다.
공이 돌아갈 적에 옹주 사람들이 길을 막고서 유임해달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 해에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광주지사廣州知事가 되었고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공부상서工部尙書에 배수되었다.
대환代還할 적에 길에서 병이 들어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공이 오관五管에 경리절제經理節制로 있은 것이 전후로 10년 세월이다.
무릇 여섯 주州를 다스리면서 부임하는 곳마다 은택과 자애를 베풀었고 비록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집文集 20권과 주의奏議 5권과 《삼사간오三史刊誤》 40권이 있다.
임씨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임씨는 노군부인魯郡夫人에 봉해졌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맏이 장莊은 전중승殿中丞을 역임하였고 요절하였다.
둘째 순荀은 지금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으로 있고, 막내 영英은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