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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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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襄公 旣葬于曲江之明年 其子仲荀 走于以來告曰
余氏世爲閩人이라가 五代之際 逃亂于韶
自曾高以來 晦跡이러니 至于하야 始有祿仕하고 而襄公繼之以大러라
曲江 僻在
自始興有聲于唐하야 爲賢相으로 至公하야 復出爲宋名臣이라
蓋余氏徙韶하야 歷四世하야 始有顯仕하고 而曲江寂寥三百年然後 再有聞人이러니
惟公位登天臺하고 하야 하야 以繼美前哲하야 而爲韶人榮하고
至於贈諡하얀 始終之寵盛矣
蓋褒有詔하며 恤有物하며 贈有하고 而諡行考功 有議有狀하고 合而誌之하야 以閟諸幽 有銘하니 可謂備矣로되
惟是 揭于墓隧하야 以表見于後世而昭示其子孫者 宜有辭而闕焉이라 敢以爲請하노라
謹按余氏 韶州曲江人이라
曾祖諱某 祖諱某 皆不仕
父諱某 太常博士 累贈太常少卿이라
公諱靖이요 字安道 官至朝散大夫 守工部尙書 集賢院學士 知廣州軍州事 兼廣南東路兵馬鈐轄 經略安撫使 柱國 始興郡開國公하고 食邑二千六百戶 食實封二百戶
治平元年 自廣朝京師라가 六月癸亥 以疾薨于金陵하니 天子惻然하야 輟視朝一日하고 賻以粟帛하고 贈刑部尙書하고 諡曰襄이라
明年七月某甲子返葬于曲江之龍歸鄉成山之原하다
公爲人 質重剛勁하되 而言語恂恂하야 不見喜怒
自少博學强記하야 至於歷代史記雜家小說陰陽律曆 外曁浮圖老子之書하야도 無所不通이러라
天聖二年擧進士하야하야 하고 하고 再遷祕書丞刋校三史라가 充集賢校理하다
天章閣待制范公仲淹 한대 不敢言이어늘 公疏論之하야 坐貶하고 稍徙
已而天子感悟하야 亟復用范公하고 而因之以被斥者皆召還이로되
惟公以便親으로 乞知하고 遷太常博士하다
丁母憂하야 服除 遂還爲集賢校理하다
天下怠於久安이라 吏習因循하야 多失職이러니
하야 師出久無功이라
縣官財屈而民重困하니 天子赫然思振頹弊以修百度
旣已하고 又增置諫官四員하야 使言天下事하니 公其一人也
卽改右正言供職하니 公感激奮勵하야 遇事輒言하야 無所迴避하니
姦諛權倖 屛息畏之하니 其補益多矣
然亦不勝其怨嫉也러라
慶曆四年 元昊納誓請和
將加封冊할새 而契丹以兵臨境上하야 遣使言爲中國討賊하고 且告師期하고 請止毋與和하니 朝延患之
欲聽인댄 重絶夏人하야 而兵不得息이요 不聽인댄 生事北邊이라
議未決이어늘 公獨以謂中國厭兵久矣 此契丹之所幸이라
一日使吾息兵養勇 非其利也
故用此以撓我爾 是不可聽이라하니
朝廷雖是公言이나 猶留夏冊不遣하고 而假公諫議大夫以報
公從十餘騎하야 馳出하야 見虜於하야 從容坐帳中辯折하야
往復數十 卒屈其議하고 取其要領而還하니 朝廷遂發夏冊하야 臣元昊하다
西師旣解嚴하고 而北邊亦無事
是歲 以本官知制誥史館修撰한대 而契丹卒自攻元昊
公怡然還鄉里하야 闔門謝賓客하고 絶人事
凡六年 天子每思之하야 欲用者數矣로되 大臣有不喜者 第遷光祿少卿于家하고 又以爲某衛將軍壽州兵馬鈐轄이어늘 辭不拜하다
皇祐三年 祀明堂할새 選衛尉卿이라
明年知라가 丁父憂하야 去官한대
而蠻賊하고 連破嶺南州縣하고 圍廣州어늘 乃卽廬中起公爲
卽日疾馳할새 在道改知廣南西路經略安撫使하다
公奏曰 賊在東而徙臣西 非臣志也라하니 天子嘉之하야 卽詔公經制廣東西賊盜
乃趨廣州한대 而智高復西走邕州
自智高初起 請出兵助討賊한대 詔不許어늘
公以謂智高 交趾叛者 宜聽出兵이요 毋沮其善意라하야 累疏論之하되 不報
至是하야 公曰 邕州與交趾接境하니 今不納이면 必忿而反助智高라하니
乃以便宜趣交趾會兵하고 又募하야 皆縻以職하고 與之誓約하야 使聽節制하니
或疑其不可用한대 公曰 使不與智高合 足矣라하더니 及智高入邕州하야 遂無外援이라
旣而宣撫使 會公兵하야 敗賊於하니 智高走入海러라
邕州平 公請復終喪한대 不許
諸將班師할새 以智高尙在 請留公廣西하야 委以後事하다
遷給事中한대 諫官御史 列疏言公功多而賞薄이라하야 再遷尙書工部侍郞하다
公留廣西逾年 撫緝完復하니 嶺海肅然이라
又遣人入하야 하야 俘于京師하야 斬之
拜集賢院學士하고 久之 徙知潭州하고 又徙靑州하고 再遷吏部侍郞하다
嘉祐五年 交趾冦邕州하야 殺五巡檢하니 天子以謂恩信著於嶺外而爲交趾所畏者公也라하야 驛召以爲廣西體量安撫使하고 悉發荊湖兵以從이라
公至則移檄交趾하야 召其臣費嘉祐하야 詰責之한대 嘉祐皇恐하야 對曰 種落犯邊하니 罪當死
公還 邕人遮道留之不得이러라
明年 以尙書左丞知廣州하고 英宗卽位 拜工部尙書
道病卒하니 享年六十有五
公經制 前後十年이라
凡治六州할새 所至 有惠愛하고 雖在兵間이라도 手不釋卷이라
有文集二十卷 奏議五卷 三史刊誤四十卷이라
娶林氏하니 封魯郡夫人이라
子男三人이니 伯莊 殿中丞이요 早卒하고
仲荀 今爲屯田員外郞이요 叔英 太常寺太祝이라
女六人 皆適士族하다
孫男四人이요 孫女五人이라
銘曰
余遷曲江하야
仍世不顯이러니
奮自襄公하야
有聲甚遠이라
始興開國하야
襲美于前하니
兩賢相望
三百年間이라
偉歟襄公이여
惟邦之直이니
始登于朝하야
官有言責이라
左右獻納
姦諛屛息하니
慶曆之治
實多補益이라
逢時有事하야
奔走南北하니
功書史官이요
名在夷狄이라
出入艱勤하야
險夷一德이어늘
小人之讒
公廢于里러니
一方有警
公起于家하니
威行信結
嶺海幽遐
公之在焉
帝不南顧러니
胡召其還
殞于中路
返柩來歸
韶人負土
伐石刻辭하야
立于墓門하니
以貽來世
匪止韶人이니라


03. 증형부상서 여양공의 신도비명
시흥始興양공襄公이 이미 곡강曲江에 장사된 이듬해에 그 아들 중순仲荀박주亳州로 와서 나에게 말하였다.
여씨余氏는 대대로 땅 사람이었다가 오대五代 시절에 소주韶州로 난을 피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증조부 이래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은둔하였더니 박사부군博士府君 때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였고 양공襄公이 그 뒤를 이어 크게 창성하였습니다.
곡강曲江오령五嶺 너머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흥始興장문헌공張文獻公 때부터 나라 조정에 이름이 알려져 어진 재상이 되었고 우리 양공襄公에 이르러 다시 조정에 나아가 나라의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대개 여씨余氏소주韶州로 이주하여 4대를 지나 비로소 현달한 벼슬을 하는 이가 나왔고, 곡강曲江에 큰 인물이 없이 적막한 지 30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명망 있는 인물이 나왔습니다.
오직 우리 양공께서는 천대天臺(상서성尙書省)의 지위에 오르고 정3품의 관질이 되어 마침내 작위爵位봉토封土를 가져 향주鄉州개국開國하여 전현前賢의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여 소주韶州 사람들의 영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공을 포장褒獎하고 무휼撫恤하고 증직贈職하고 시호諡號를 내림에 이르러서는 시종일관 내리신 은총이 성대하였습니다.
대개 포장褒獎할 때에는 조서詔書가 내려지고 무휼撫恤할 때에는 물품이 하사되고 증직贈職할 때에는 고신告身이 있고 시호諡號를 정하기 위한 조치를 행하고 공로를 고찰할 때에는 생전 행적에 대한 의론과 이에 대해 보고해 올리는 시장諡狀이 있었고, 이것들을 합하여 기록해서 무덤에 묻을 때에는 묘지명墓誌銘이 있었으니, 구비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오직 이수螭首구부龜趺묘도墓道에 세워져 그 행적을 후세에 드러내 보이고 자손들에게 밝게 보이는 신도비명에는 의당 글이 있어야 하는데 빠졌는지라, 감히 글을 써주시기를 청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씨余氏소주韶州 곡강曲江 사람이다.
증조부 휘 아무개와 조부 휘 아무개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부친 휘 아무개는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냈고 여러 차례 증직하여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르렀다.
공의 휘는 이요 안도安道이니, 관직이 조산대부朝散大夫 수공부상서守工部尙書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 지광주군주사知廣州軍州事 겸광남동로병마검할兼廣南東路兵馬鈐轄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 주국柱國 시흥군개국공始興郡開國公에 이르렀고, 식읍은 2,600호였으나 실제 식읍은 200호였다.
치평治平 원년(1064)에 광동廣東에서 도성으로 조회하러 가다가 그해 6월 계해癸亥에 질병으로 금릉金陵에서 죽으니, 천자가 슬퍼하여 조정에 나가 정사 보는 일을 하루 동안 그치고 속백粟帛을 부의로 내리고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증직하고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듬해 7월 아무 날에 곡강曲江용귀향龍歸鄉 성산成山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중후하고 굳세었으되 말은 공순恭順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역대의 역사 기록, 잡가雜家, 소설小說, 음양陰陽, 율력律曆과 밖으로는 불교佛敎, 노자老子 등의 책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천성天聖 2년(1024)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현위贛縣尉가 되어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에 합격하고 장작감승將作監丞 신건현령新建縣令으로 개차改差되고 다시 비서승祕書丞 천교삼사刋校三史로 옮겼다가 집현교리集賢校理에 충원되었다.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범중엄공范仲淹公이 국사에 대해 발언한 일로 재상의 심기를 건드려 죄를 얻었는데, 간관어사諫官御史가 감히 이에 대해 말을 하지 못하자 공이 상소하여 이 일을 논했다가 죄를 얻어 감균천주세監筠川酒稅로 폄적되었고 얼마 후 태주현령泰州縣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마 안 가 천자가 자신의 처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범공范公을 다시 등용하고서 그 일로 인해 배척을 받았던 자들을 모두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오직 공은 어버이를 봉양하기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영주지주英州知州가 되기를 청하였고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자리를 옮겼다.
모친상을 당해 상을 치르고 탈상脫喪함에 드디어 다시 집현교리集賢校理 동판태상례원同判太常禮院이 되었다.
경우景祐경력慶曆 연간에 천하가 오랫동안 태평한 나머지 나태해진지라 관리들이 구태를 인습因襲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조원호趙元昊서하西夏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오랫동안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관부官府는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은 거듭 피폐해지니 천자가 발끈 노하여 쇠퇴하고 무너진 것들을 일신하여 수많은 제도들을 정비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두세 사람의 대신大臣들을 다시 기용하고서 또 간관諫官 네 사람을 더 두어 천하의 일을 말하게 하였으니, 공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즉시 공을 우정언右正言으로 개차改差하여 직무를 보게 하니, 공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일을 만날 때면 번번이 간언하여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첨하고 권세를 휘두르던 간신들이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였으니, 공이 정사政事에 보탬이 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또한 공에 대한 원망과 질시도 넘쳐났다.
경력慶曆 4년(1044)에 조원호趙元昊가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면서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조원호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려 하였는데 거란이 병사들을 이끌고 국경에 와서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적도賊徒를 토벌하겠다.”라 하고, 또 출병할 기일을 알리고서 조원호와의 강화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근심하였다.
그들의 청을 들어주자니 다시 서하西夏 사람들과 단교하여 병사들이 쉬지 못할 것이요, 들어주지 않자니 북쪽 변경에 사단이 날 판이었다.
이에 대한 논의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공이 홀로 말하기를 “중국이 전쟁을 지겹도록 겪은 지가 오래이니 이것은 거란의 다행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쉬고 있던 우리의 군사로 하여금 용맹함을 기르게 하는 것은 거란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책을 써서 우리를 어지럽히려는 것이니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비록 공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오히려 서하西夏조원호趙元昊를 책봉하는 사신을 머물러두면서 파견하지 않고 공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직책을 임시로 주어 거란에 가서 답변하게 하였다.
공이 십여 를 거느리고 거용관居庸關을 달려 나가 구십구천九十九泉에서 거란과 만나 조용히 장막 안에 앉아 변론하였다.
수십 차례 변론이 오감에 마침내 거란의 주장을 꺾고 그들의 진짜 의도를 간파하고서 돌아오니, 조정에서 마침내 서하西夏로 갈 책봉사冊封使를 출발시켜 조원호趙元昊를 신하로 삼았다.
서쪽의 군대가 이미 계엄戒嚴을 풀고 북쪽 변경 또한 일이 없게 되었다.
이해에 우정언右正言의 직책을 지니고 있으면서 지제고知制誥 사관수찬史館修撰을 겸하였는데, 거란이 마침내 스스로 조원호趙元昊를 공격하였다.
이듬해에 거란의 사신이 와서 승첩勝捷을 알리거늘, 다시 공을 보내어 답변하게 하고는 오랑캐의 말을 익혔다는 이유로 폄적되어 길주지주吉州知州로 나가게 되었다.
공을 원망하던 자가 이 일로 말미암아 일을 꾸며서 공을 중상모략하여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 좌천되어 남경南京분사分司가 되었다.
공은 기쁜 마음으로 향리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빈객을 사양하고 인사人事를 끊었다.
이렇게 모두 6년이 흐르는 동안 천자가 항상 공을 그리워하여 등용하려고 한 것이 여러 차례였으되 공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大臣이 있었는지라, 단지 가거家居하면서 광록소경光祿少卿의 직임으로 옮겨졌고 다시 아무 위장군衛將軍 수주병마검할壽州兵馬鈐轄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황우皇祐 3년(1051)에 명당明堂에서 황제가 제사를 지낼 때 널리 은택을 베풀어 위위경衛尉卿으로 선발되었다.
다음 해에 건주지주虔州知州가 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그런데 만적蠻賊 농지고儂智高옹주邕州를 함락시키고 연이어 영남嶺南주현州縣들을 격파하고서 광주廣州를 포위하자, 조정에서는 즉시 상중喪中에 있는 공을 기용하여 비서감祕書監 담주지주潭州知州로 삼았다.
공이 명을 받은 날 즉시 말을 달려갔는데 도중에 계주지주桂州知州 광남서로경략안무사廣南西路經略安撫使개차改差되었다.
공이 상주하기를 “적도들이 동쪽에 있는데 신을 서쪽으로 옮기시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즉시 광남동로廣南東路광남서로廣南西路경리절제經理節制가 되어 도적들을 퇴치하게 하였다.
공이 이에 광주廣州로 갔는데 농지고가 다시 서쪽 옹주邕州로 도주하였다.
농지고儂智高가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교지交趾에서 자신들도 출병하여 적도를 토벌하는 일을 돕겠다고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공은 ‘농지고는 교지에 반란을 일으킨 자이니 마땅히 그들이 출병하겠다는 청을 들어주어야지 그 선의善意를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여 누차 상소하여 이에 대해 논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말하기를 “옹주邕州는 교지와 접경지역이니 지금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분노하여 도리어 농지고를 도울 것입니다.”라고 하니,
조정에서 편의대로 서둘러 교지의 병사와 회합하게 하고, 또 농씨儂氏황씨黃氏 등 여러 성씨姓氏토호土豪 추장酋長들을 불러 모아서 모두 관직을 주어 결속하고 그들과 맹약하여 경리절제經理節制의 명을 따르게 하였다.
혹자가 그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의심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들이 농지고와 결탁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하였더니, 농지고가 옹주로 들어가서는 마침내 외부의 원조가 없게 되었다.
얼마 후 선무사宣撫使 적청狄靑이 공의 병사와 회합하여 귀인歸仁에서 적도들을 쳐부수니 농지고가 도망하여 바닷가 지역으로 들어갔다.
옹주邕州가 평정되자 공이 다시 부친상을 마치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장수들이 회군하면서 농지고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이유로 공을 광서廣西에 남겨 뒷일을 맡길 것을 청하였다.
공을 급사중給事中의 벼슬로 옮기자 간관어사諫官御史가 연이어 상소하여 말하기를 “공의 공적이 많은데 상이 박합니다.”라고 하여 다시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으로 옮겼다.
공이 광서廣西에 머물면서 해를 넘기도록 안무按撫하여 안정을 회복하니 영해嶺海 지방이 고요히 평온해졌다.
다시 특마特磨로 사람을 파견하여 농지고의 어미와 아우 한 사람을 기습하여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보내 참수하였다.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에 배수되고 오래 지나 담주지주潭州知州로 옮기고 다시 청주지주靑州知州로 옮기고 다시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옮겼다.
가우嘉祐 5년(1060)에 교지交趾옹주邕州를 침략하여 순검사巡檢使 다섯 사람을 살해하니, 천자가 은덕과 신의가 영외嶺外에 드러나 교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는 공이라고 생각하여, 역마로 공을 불러 광서체량안무사廣西體量安撫使로 삼고 형호荊湖 지방의 병사를 모두 출병시켜 따르게 하였다.
공이 도착함에 교지에 격문檄文을 보내 그 신하 비가우費嘉祐를 불러들여 힐문하자, 가우嘉祐가 황공해하면서 대답하기를 “부락 사람들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원컨대 돌아가 괴수魁首를 잡아다가 바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즉시 다섯 사람을 형틀을 채워 흠주欽州로 보내 경계境界에서 참수하였다.
공이 돌아갈 적에 옹주 사람들이 길을 막고서 유임해달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 해에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광주지사廣州知事가 되었고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공부상서工部尙書에 배수되었다.
대환代還할 적에 길에서 병이 들어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공이 오관五管경리절제經理節制로 있은 것이 전후로 10년 세월이다.
무릇 여섯 를 다스리면서 부임하는 곳마다 은택과 자애를 베풀었고 비록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집文集 20권과 주의奏議 5권과 《삼사간오三史刊誤》 40권이 있다.
임씨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임씨는 노군부인魯郡夫人에 봉해졌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맏이 전중승殿中丞을 역임하였고 요절하였다.
둘째 은 지금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으로 있고, 막내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으로 있다.
딸 여섯 사람은 모두 사족士族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네 사람, 손녀는 다섯 사람이다.
은 다음과 같다.
여씨余氏곡강曲江으로 옮겨와
여러 세대 동안 드러나지 않더니
양공襄公 때부터 떨쳐 일어나
그 명성 크게 퍼졌네
시흥始興개국開國하여
전현前賢의 아름다운 덕 계승하니
두 현인간에
300년 세월이어라
위대하다 양공이여
나라의 곧은 신하이니
처음 조정에 올라
언관의 직책 맡았도다
황제 측근에서 간언함에
간신들 숨죽이니
경력慶曆치세治世
보익補益함이 실로 많았도다
국가에 일이 있는 때를 만나
분주히 남북 오가니
사관들이 공적 기록하고
이적夷狄들에게 이름 알려졌네
내외직을 드나들며 부지런히 애써
그 지조 한결같았건만
소인小人의 참소 만나
공이 향리에 유폐되었네
변경에서 경보 들려옴에
공이 집에서 일어서니
위엄 펼치고 신의 맺음이
머나먼 영해嶺海까지 미쳤네
공이 살아 있을 적에
황제께서 남쪽 걱정 않으셨는데
어찌하여 소명을 받고 돌아오다가
중도에 세상 떠났는가
반구返柩하여 고향으로 돌아옴에
소주韶州 사람들이 장사葬事 일을 맡았네
돌을 다듬어 명문銘文 새겨
묘 앞에 세우노니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요
소주韶州 사람들만 알고 말지는 않으리라


역주
역주1 : 余襄公은 余靖으로 襄은 그의 시호이다. 이 神道碑銘에 근거할 때, 여정은 治平 元年(1064) 6월에 죽었고, 그 다음 해 7월에 曲江에 장사 지냈으며, 장사 지낸 다음 해에 그의 아들이 와서 신도비명을 청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신도비명은 치평 3년(1066)에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 내용에 여정의 아들이 亳으로 와서 신도비명을 청했다고 되어 있는데, 《宋史》의 〈歐陽脩傳〉 및 그의 〈年譜〉에 의거하면 구양수는 치평 4년(1067) 3월에 亳州知州가 되었고, 5월에 임소에 당도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는 靑州知州로 改差되었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하면 이 신도비명은 치평 4년 하반기에 지은 것이다.
역주2 始興 : 宋나라 때 廣南東路 韶州의 始興郡으로 治所가 曲江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廣東省 韶關市이다.
역주3 : 亳州이다. 宋나라 때 淮南路에 속하였으며, 治所가 지금의 安徽省 亳縣에 있었다.
역주4 嘉遁 : 은거를 뜻하는 말이다. 《周易》 遯卦에 “嘉遯貞吉”이라 하였고, 이에 대한 주석에서 “九五는 中正이니, 은둔하기를 아름답게 한 자이다. 처함이 中正의 道를 얻어서 때에 맞게 멈추고 행함이 이른바 아름다움이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5 博士府君 : 余靖의 부친이다. 그가 太常博士를 지냈기 때문에 박사부군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6 嶺表 : 五嶺인 大庾, 始安, 臨賀, 桂陽, 揭陽嶺의 바깥 땅을 지적하는 것으로, 嶺南을 가리킨다.
역주7 張文獻公 : 張九齡(673~740)이다. 文獻은 그의 시호이다. 唐나라 韶州 曲江 사람으로 자는 子壽이다. 左拾遺, 中書舍人, 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賢相이라는 평이 있었다. 李林甫의 모함으로 재상직에서 물러나 荊州 長史가 되었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저서에 《曲江集》이 있다.
역주8 正秩三品 : 余靖이 맡았던 權工部尙書가 정3품에 해당한다.
역주9 遂有爵土 開國鄉州 : 鄉州는 자신의 고향이 있는 州를 말한다. 鄉州에 開國하였다는 것은 余靖이 봉작을 받아 始興郡 開國公이 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0 褒恤 : 褒는 褒獎의 의미로 그 사람을 기리는 것이고, 恤은 撫恤의 의미로 그 사람에게 실제적인 물품을 하사하여 돌보는 것이다.
역주11 : 告身으로 職牒을 가리킨다.
역주12 螭首龜趺 : 神道碑 등을 세울 때 碑石의 상부에 뿔 없는 용의 머리 형상을 아로 새긴 부분을 螭首라 하고, 거북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을 龜趺라 한다. 비석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역주13 贛縣尉 : 贛縣은 江南東路 虔州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는 지금의 江西省 贛州市에 있었다.
역주14 書判拔萃 : 宋 仁宗 때 증설된 천자가 친히 시험을 보이던 과거 가운데 하나로, 書判에 뛰어난 자를 선별하여 뽑았다.
역주15 改將作監丞知新建縣 : 將作監은 건축 및 토목공사와 관련된 일을 관장하던 곳이다. 新建은 江南西路 洪州에 속했던 지역으로 지금의 江西省 新建縣이다.
역주16 以言事觸宰相得罪 : 景祐 3년(1036)에 范仲淹이 재상 呂夷簡의 처사에 대해 간언한 일을 가리킨다. 당시 呂夷簡이 자기 사람으로 관직을 채우자, 범중엄이 〈百官升遷次序圖〉를 지어 올려 적재적소에 알맞은 인재를 배치해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이 일로 인해 황제 앞에서 여이간과 범중엄이 서로 변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결국 범중엄이 죄를 얻어 饒州知州로 貶謫되었다.
역주17 諫官御史 : 모두 言官의 직책이지만 諫官은 諫言을, 御史는 監察의 역할을 주로 맡아 그 임무가 조금 달랐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諫官御史의 직임이 모두 붙기도 하였으므로 연용하여 쓰는 경우도 있다.
역주18 監筠川酒稅 : 筠川은 지명으로 江南西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지금의 江西省 高安縣에 있었다.
역주19 泰州 : 淮南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海陵에 있었으니, 지금의 江蘇省 泰州이다.
역주20 英州 : 廣南東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眞陽에 있었으니, 지금의 廣東省 英德縣이다.
역주21 同判太常禮院 : 太常禮院은 禮制를 논의하던 기구로 判院, 同知院 등의 관원이 관장하였다.
역주22 景祐慶曆之間 : 景祐와 慶曆은 모두 宋 仁宗의 연호이다. 景祐는 1034년에서 1037년까지, 慶曆은 1041년에서 1048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23 趙元昊以夏叛 : 仁宗 寶元 원년(1038)에 西夏의 趙元昊가 스스로를 大夏皇帝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실이 있다.
역주24 更用二三大臣 : 范仲淹, 富弼, 韓琦 등을 기용한 것을 말한다.
역주25 居庸關 : 北京 昌平縣 서북쪽 居庸山에 있다.
역주26 九十九泉 : 거란 境內에 있던 지명 이름이다. 대략 지금의 內蒙古 士黙特 左旗 부근이다.
역주27 又以公往報……出知吉州 : 《宋史》 권320 〈余靖列傳〉에 “여정이 세 차례 거란으로 사신을 갔다 오면서 또한 외국의 말을 배워 일찍이 오랑캐 말로 시를 지었는데, 禦史 王平 등이 使臣의 체모를 잃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폄적되어 吉州知州로 나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吉州는 江南西路에 속했던 곳으로 治所가 廬陵에 있었으니, 지금의 江西省 吉安縣이다.
역주28 怨家因之……分司南京 : 《宋史》 권320 〈余靖列傳〉에 “여정이 諫官이 되었을 때 일찍이 太常博士 茹孝標가 불효하여 모친상을 숨겼다고 탄핵하여 여효표가 파직되었다. 여정이 세력을 잃게 되자 여효표가 궐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정이 어렸을 때 廣州에서 놀다가 범법하여 매를 맞았다.’라고 하였다. 여정이 이를 듣고서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어서 어버이를 모시고 봉양하기를 구하면서 조정을 떠났다. 이에 將作少監으로 南京의 分司로 改差되어 曲江에 거하였다.”라고 하였다.
分司란 중앙의 관청 직무를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分官하여 일을 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宋나라 때에는 대체로 御史의 分司를 제외하고는 實職이 아니라 물러난 관리를 우대하는 직책이 되었다.
역주29 覃恩 : 널리 은택을 베푼다는 뜻으로, 임금이 臣民들에게 봉작과 상을 내리거나 사면하는 등의 일을 가리킨다.
역주30 虔州 : 江南西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贛縣에 있었다.
역주31 儂智高 : 1026~1055?. 당시 베트남의 李王朝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중국 남부의 廣州를 침공했던 베트남의 토호 세력이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 儂存福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어머니와 함께 산속으로 도피하였다가 1041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하였고 1048년에 다시 거병하여 다음 해에 南天國을 세우고 연호를 景端이라 하였다. 이후 1052년 宋나라를 침입하여 邕州를 함락시키고 大南國을 세우고 스스로를 仁惠皇帝라고 불렀으며 연호를 고쳐 啓曆이라 하였다. 그 세력이 廣州까지 위협하였으나 邕州에서 宋軍에 대패하고 大理로 도주하였다가 죽었다.
역주32 邕州 : 廣南西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宣化에 있었으니, 지금의 廣西省 南寧市 남쪽이다.
역주33 祕書監知潭州 : 祕書監은 祕書省의 장관으로 고금의 도서와 經籍 등을 관장하였다. 潭州는 荊湖南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지금의 湖南省 長沙市에 있었다.
역주34 桂州 : 廣南西路에 속했던 지역으로 治所가 지금의 廣西省 桂林市에 있었다.
역주35 交趾 : 당시 越南을 부르던 칭호이다.
역주36 儂黃諸姓酋豪 : 《宋史》에 근거하면 儂氏, 黃氏, 韋氏, 周氏는 모두 중국 남방의 廣源州 소수부족의 토호 세력이었다.
역주37 狄靑 : 1008~1057. 汾州 西河 사람으로 자는 漢臣, 시호는 武襄이다. 군졸 출신으로 활쏘기 등에 능하였으며 仁宗 寶元 초에 延州指使로 西夏와 싸울 때 선봉에 서서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范仲淹에게 《春秋左氏傳》을 배우고 독서에 뜻을 두어 兵法에 정통하게 되었다. 皇祐 4년(1052) 樞密副使로 있을 때 儂智高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宣撫使가 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관직이 樞密使에까지 올랐으나, 말년에 모략을 받아 陳州로 쫓겨 갔다.
역주38 歸仁 : 歸仁鋪이다. 지금의 廣西省 南廣市 동북쪽 崑崙山 崑崙關 부근이다.
역주39 特磨 : 지금의 雲南省 廣南縣 지역으로 特磨道라고 불렸다.
역주40 襲取智高母及其弟一人 : 《宋史》 권320 〈余靖列傳〉에는 “어미와 자제 세 사람[母子弟三人]”으로 되어 있으며, 《宋史》 권495 〈蠻夷傳〉에는 “어미 阿儂과 농지고의 아우 智光과 아들 繼宗‧繼封을 잡았다.[獲阿儂及智高弟智光 子繼宗繼封]”라고 되어 있다.
역주41 公至則移檄交趾……斬于界上 : 《宋史》 권320 〈余靖列傳〉에는 “여정이 믿고서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주었는데 嘉祐가 드디어 돌아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靖信之 厚謝遣去 嘉祐遂歸 不復出]”라고 하여 이 글의 기록과 다르다.
역주42 代還 : 朝臣이 외직을 맡아 나간 자가 다시 새로 내직을 맡아 조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역주43 五管 : 嶺南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唐나라 때에 廣州, 桂州, 容州, 邕州, 安南 五府를 嶺南五管이라 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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