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은 在愼縣南三十五里
하니 或曰浮闍山
이라하고 或曰浮巢二山
이라하니
然以茶經考之컨대 皆不合이요 又新은 妄狂險譎之士니 其言難信이라
頗疑非羽之說이러니 及得浮槎山水하고 然後益以羽爲知水者러라
浮槎與
은 皆在廬州界中
하되 較其水味
컨댄 不及浮槎遠甚
이어늘
而又新所記에 以龍池爲第十하고 浮槎之水는 棄而不錄하니 以此知其所失多矣라
羽則不然하야 其論曰 山水上이요 江次之요 井爲下라
山水는 乳泉石池漫流者上이라하니 其言雖簡이나 而於論水에 盡矣라
嘉祐二年
에 李侯以鎭東軍
로 出守廬州
하야 因遊金陵
하고 登
하야 飮其水
하고
旣又登浮槎하야 至其山上에 有石池涓涓可愛하니 蓋羽所謂乳泉漫流者也라
飮之而甘일새 乃考圖記하고 問於故老하야 得其事迹하고 因以其水遺予於京師어늘 予報之曰
夫窮天下之物하야 無不得其欲者는 富貴者之樂也이요
至於蔭長松하며 藉豐草하야 聽山溜之潺湲하며 飮石泉之滴瀝은 此山林者之樂也라
而山林之士가 視天下之樂에 不一動其心하고 或有欲於心이라도 顧力不可得而止者라야 乃能退而獲樂於斯하니 彼富貴者之能致物矣로되 而其不可兼者는 惟山林之樂爾라
惟富貴者而不得兼然後
에 하니 其不能兩得
은 亦其理與勢之然歟
인저
今李侯는 生長富貴하야 厭於耳目이어늘 又知山林之爲樂하야 至於攀緣上下하야 幽隱窮絶人所不及者를 皆能得之하니 其兼取於於物者가 可謂多矣라
李侯折節好學하야 喜交賢士하고 敏於爲政하야 所至에 有能名이라
凡物不能自見而待人以彰者有矣요 其物未必可貴而因人以重者亦有矣라
故予爲志其事하야 俾世知斯泉發이 自李侯始也하노라
부사산浮槎山은 신현愼縣 남쪽 35리에 있으니 부도산浮闍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부소이산浮巢二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사浮槎에 관한 일은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들이 하는 황당하고 기괴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부사산浮槎山 위에 샘이 있으니 전세前世로부터 물을 논한 사람들은 모두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일찍이 《다경茶經》을 읽고서 육우陸羽가 물에 대해 잘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후에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煎茶水記》를 얻어봄에 유백추劉伯芻와 이계경李季卿이 나열한 물의 차례를 수록해놓고서 육우陸羽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경茶經》을 상고해보건대 모두 합치되지 않고, 장우신張又新은 경망輕妄하고 음험陰險한 선비이니 그의 말은 믿기 어렵다.
자못 육우陸羽의 설이 아닐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는데, 부사산浮槎山의 물을 얻고 난 뒤에 더욱 육우陸羽가 물을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부사산浮槎山과 용지산龍池山은 모두 여주廬州 지역에 있는데도 물맛을 비교해보면 부사산浮槎山의 물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장우신張又新이 기록한 바에는 용지龍池를 10등이라 하였고 부사산浮槎山의 물은 버리고 기록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잘못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육우陸羽는 그렇지 않아 논하기를 “산수山水가 으뜸이고 강수江水가 다음이고 우물물이 하등이 된다.
산수山水는 유천乳泉과 석지石池가 넘쳐흐르는 것이 으뜸이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말은 비록 간략하지만 물을 논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다.
부사산浮槎山의 물은 이후李侯가 처음 발견하였다.
가우嘉祐 2년(1057)에 이후李侯가 진동군류후鎭東軍留後로 외직으로 나와 여주廬州의 수령이 되어 금릉金陵을 유람하고 장산蔣山에 올라 그 물을 마셔보았다.
이윽고 또 부사산浮槎山에 올라 산 위에 이르자 석지石池가 졸졸 흐르는 모습이 좋았으니 대개 육우陸羽가 이른바 “유천乳泉이 흘러나온다.”라는 것이었다.
물을 마셔봄에 맛이 좋은지라 이에 도기圖記를 고찰하고 그곳의 노인들에게 물어서 사적事迹을 찾고, 인하여 그 물을 서울에 있는 나에게 보내왔거늘 내가 그에게 이렇게 답하였다.
천하의 사물을 다 찾아서 원하는 사물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은 부귀한 사람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우거진 장송長松 아래에 이르러 무성한 풀을 깔고 앉아서 산골물의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흐르는 석천石泉의 물을 마시는 것은 바로 산림에 있는 자의 즐거움이다.
산림의 선비가 천하의 즐거움을 보았을 때에 한 번도 마음이 동하지 않고, 혹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만 자신의 힘으로 얻지 못해 그만둔 사람이라야 비로소 물러나 이곳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 저 부귀한 자가 사물을 죄다 구할 수는 있지만 겸유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산림의 즐거움뿐이다.
오직 부귀한 사람이 겸유할 수 없어야 그런 뒤에 빈천貧賤한 선비가 스스로 만족하여 세속을 굽어볼 수 있으니, 두 가지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이치와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 것이다.
지금 이후李侯는 부귀한 집안에서 생장하여 성색聲色의 즐거움을 실컷 누렸거늘, 또 산림의 즐거움을 알아서 이 산을 힘써 오르내리면서 사람들이 이르지 못했던 으슥하고 궁벽한 곳을 모두 찾아냈으니, 사물에게서 겸하여 얻은 것이 많다고 이를 만하다.
이후李侯는 자신을 낮출 줄 알고 학문을 좋아하여 어진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펼치는 데에 민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무릇 사물은 스스로 드러나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려 드러나는 것이 있고, 그 사물이 반드시 귀중하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닌데 사람으로 인하여 귀중하게 되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기록하여 세상에 이 샘이 발견된 것이 이후李侯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