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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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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借婦人女子하야 以感慨當世儒生하니이라
管生之能言也
禮義 治人之大法이요 廉恥 立人之大節이니 蓋不廉則無所不取 不恥則無所不爲
人而如此 則禍亂敗亡 亦無所不至어든 況爲大臣而無所不取하고 無所不爲 則天下其有不亂이며 國家其有不亡者乎
予讀馮道하야 見其自述以爲榮하니 其可謂無廉恥者矣
則天下國家可從而知也로다
予於五代 하니
而怪士之被服儒者 以學古自名하고 而享人之祿하며 任人之國者 多矣 然使忠義之節 獨出於武夫戰卒하니 豈於儒者 果無其人哉
豈非高節之士 惡時之亂하야 薄其世而不肯出歟
抑君天下者 不足顧而莫能致之歟
이라하니 豈虛言也哉
予嘗得五代時小說一篇 載王凝妻李氏事하니
以一婦人으로도 猶能如此하니 則知世固常有其人而不得見也
凝家靑徐之間하야이라가 以疾卒于官하니 凝家素貧하야 一子尙幼
李氏携其子하고 負其遺骸以歸할새 東過開封하야 止旅舍러니 旅舍主人 見其婦人獨携一子而疑之하야 不許其宿한데
李氏顧天已暮하야 不肯去어늘 主人牽其臂而出之하니
李氏仰天長慟曰 我爲婦人이어늘 不能守節하야 而此手爲人執邪
不可以一手幷汚吾身이라하고 卽引斧自斷其臂하니 路人見者 環聚而嗟之하야 或爲之하고 或爲之泣下
開封尹聞之하고 白其事于朝하니 官爲賜藥封瘡하며 厚恤李氏하고 而笞其主人者하다
嗚呼
士不自愛其身而忍恥以偸生者 聞李氏之風이면 宜少知愧哉인저


07. 《오대사五代史》 〈풍도전馮道傳〉에 대한
부인과 여자를 빌려서 당세의 유생儒生들을 개탄하였으니, 삼탄三歎유음遺音이 있다.
옛글에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국가의 사유四維이니 사유가 신장되지 못하면 국가가 이에 멸망한다.”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관생管生이 말을 잘함이여.
는 사람을 다스리는 대법大法이고 는 사람을 세우는 대절大節이니, 청렴하지 않으면 취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사람이고서 이와 같으면 화란禍亂패망敗亡이 또한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데, 하물며 대신大臣이 되어서 취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면, 천하가 혼란하지 않을 리 있겠으며 국가가 망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내가 풍도馮道의 〈장락로자서長樂老自序〉를 읽고서 풍도가 스스로 자신의 사실을 서술하여 영광이라 한 것을 보았으니, 염치廉恥가 없다고 할 만하다.
따라서 당시의 천하와 국가는 이를 통해 알 만하다.
내가 오대五代에 있어서 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세 사람과 국사國事에 목숨을 바친 신하 열다섯 사람을 얻었다.
선비로서 유자儒者의 옷을 입은 이들이 고도古道를 배워서 스스로 이름이 나고 남의 녹봉을 먹고 남의 나라를 맡은 사람이 많은데도, 충의忠義로운 절개는 유독 무부武夫와 병졸에게서 나오게 한 것이 괴이하니, 어찌 유자儒者 중에서 과연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리오.
어쩌면 높은 절개를 가진 선비가 혼란한 시대를 싫어하여 당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세상에 나오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천하의 군주가 된 이가 그들을 돌아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 그들을 불러들이지 못한 것인가?
공자孔子는 “열 가구쯤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은 반드시 있다.”라고 하셨으니, 어찌 빈말이겠는가.
내가 일찍이 오대五代 때의 짧은 잡기雜記 한 편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왕응王凝의 아내 이씨李氏의 사적이 실려 있었다.
일개 부인婦人으로서도 능히 이와 같음을 보면 세상에는 진실로 늘 그러한 사람이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응이 청주靑州서주徐州 일대에 살면서 괵주虢州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있다가 임지에서 죽으니, 왕응의 집은 본디 가난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렸다.
이씨李氏는 그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유해遺骸를 지고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동쪽으로 개봉開封을 지나가다가 여사旅舍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여사 주인이 부인이 홀로 아들 하나만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수상쩍게 여겨 유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씨가 돌아보니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떠나려 하지 않자 여사 주인이 이씨의 팔을 잡고 끌어서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씨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통곡하고 말하기를 “나는 부인婦人인데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손이 남에게 잡혔단 말인가.
이 한 손 때문에 내 몸을 모두 더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고, 곧바로 도끼를 가져와서 스스로 자기 팔뚝을 끊으니, 길 가던 사람들이 보고서 둘러 모여 탄식하면서, 어떤 사람은 손가락을 퉁기며 격분하였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
개봉부윤開封府尹이 듣고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관가에서 약을 하사하여 이씨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이씨를 후하게 보살펴주었으며, 그 여사 주인에게는 태형笞刑을 가하였다.
아아!
선비로서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지 못하고 수치를 참으면서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는 자가 이씨의 절조節操를 들으면 의당 조금은 부끄러움을 알 것이다.


역주
역주1 五代史馮道傳論 : 이 글은 《新五代史》 〈馮道傳〉 앞에 붙어 있는 서문이다. 馮道는 자가 可道인데, 唐‧後晉‧遼‧北漢‧後周 다섯 왕조를 거치면서 벼슬하여 11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재상만 20년을 하였다. 그는 노년에 스스로 자신의 호를 長樂老라 하고 매우 영화롭게 여겼는데, 歐陽脩는 《新五代史》를 편찬하면서 풍도의 傳을 雜傳 속에 넣고 염치없는 자라고 평하였다.
역주2 三歎遺音 : 三歎은 一倡三歎의 준말로 《禮記》 〈樂記〉에 “淸廟의 瑟은 붉은 絃으로 되어 있고 소리가 느릿하여서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여 餘音이 있다.[淸廟之瑟 朱絃而疏越 壹倡而三嘆 有遺音者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일반적으로 詩文이 뛰어남을 형용할 때 사용한다.
역주3 傳曰……國乃滅亡 : 《管子》 〈牧民〉 四維에 “나라에 四維가 있으니 한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하고, 세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전복되고, 네 維가 끊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나라가 기울어진 것은 바로잡을 수 있고, 나라가 위태한 것은 편안하게 할 수 있고, 나라가 전복된 것은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나라가 멸망한 것은 다시 만들어둘 수 없다. 무엇을 사유라 하는가? 첫째는 禮이고, 둘째는 義이고, 셋째는 廉이고, 넷째는 恥이다.[國有四維 一維絶則傾 二維絶則危 三維絶則覆 四維絶則滅 傾可正也 危可安也 覆可起也 滅不可復錯也 何謂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라고 한 것을 작자가 요약 정리하여 인용하였다. 維는 동아줄이니, 四維는 나라를 지탱하는 네 개의 동아줄이란 뜻이다. 《管子》는 춘추시대 齊 桓公의 재상 管仲의 저술이라 한다.
역주4 長樂老敍 : 馮道가 스스로 자신의 평생 행적을 서술한 〈長樂老自序〉를 가리킨다. 이 글은 北漢 隱帝 때 쓴 것으로 《舊五代史》 〈馮道傳〉에 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5 全節之士三 : 《新五代史》 〈死節傳〉에 실려 있는, 國事를 위해 충절을 지키다 죽은 王彦章‧裵約‧劉仁贍 세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6 死事之臣十有五 : 국사를 위해 죽은 신하들이다. 張源德‧夏魯奇‧姚洪‧王思同‧張敬述‧翟進宗‧沈斌‧王淸‧史彦超‧孫晟‧馬彦超‧宋令詢‧李遐‧張彦卿‧鄭昭 등 15명이다. 이 중 장원덕‧하로기‧요홍‧왕사동‧장경술‧적진종‧심빈‧왕청‧사언초‧손성 등 10명은 《新五代史》 〈死事傳〉에 보이고, 마언초는 《新五代史》 〈朱守殷傳〉에 그 사적이 서술되어 있다. 나머지 4명은 本紀 중에 그 사적이 섞여 있다.
역주7 孔子以謂十室之邑 必有忠信 : 孔子가 “열 가구쯤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처럼 忠信한 사람은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學問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다. 《論語 公冶長》
역주8 虢(괵)州司戶參軍 : 虢州는 唐나라 때 治所가 弘農에 있었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河南 서쪽에 해당한다. 司戶參軍은 州 수령의 僚屬으로 戶籍‧賦稅‧倉庫를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
역주9 彈指 : 감정이 복받쳐 격분할 때 하는 동작이다. 《新唐書》 권120 〈敬暉傳〉에 “경휘가 매양 앉은 자리를 치고 손가락을 퉁기며 피눈물을 흘렸다.[暉每椎坐悵恨 彈指流血]”라고 하였고, 宋나라 文天祥의 〈與湖南大帥江丞相論秦寇事宜札子〉에 “무릇 忠憤을 품은 사람은 손가락을 퉁기지 않는 이가 없다.[凡懷忠憤 無不彈指]”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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