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君臣行事之始終
과 所以治亂興衰之迹
과 與其典章制度之
가 宜其粲然著在簡冊
이로되 而紀次無法
하며 詳略失中
하고 文采不明
하며 事實零落
이라
蓋百有五十年然後에 得以發揮幽昧하고 補緝闕亡하고 黜正僞謬하야 克備一家之史하야 以爲萬代之傳하니 成之至難이 理若有待라
伏惟
皇帝陛下
하고 躬大禹之聖而
하야 天下平和
하며 民物安樂
이어늘
而猶垂心積精하야 以求治要하야 日與鴻生舊學으로 講論六經하고 考覽前古하야 以謂商周以來로 爲國長久가 惟漢與唐이로되
不幸接乎五代衰世之士하야 氣力卑弱하야 言淺意陋하야 不足以起其文하야
而使明君賢臣의 雋功偉烈과 與夫昏虐賊亂禍根罪首로 皆不足暴其善惡하야 以動人耳目이라
於是
에 刊修官翰林學士臣歐陽脩
와 端明殿學士臣
와 與編修官知制誥臣
臣
와 集賢校理臣
와 秘書丞臣
과 著作佐郞臣
等
이 竝膺儒學之選
이라
悉發秘府之藏하야 俾之討論하고 共加刪定하야 凡十有七年에 成二百二十五卷하니 其事則增於前이며 其文則省於舊요
至於名篇著目의 有革有因과 立傳紀實의 或增或損하얀 義類凡例가 皆有據依하고 纖悉綱條가 具載別錄이라
臣公亮典司事領하야 徒費日月이요 誠不足以成大典稱明詔하니 無任慙懼戰汗屛營之至라
06. 새로 찬수撰修한 《당서唐書》를 올리는 표表
삼가 생각건대 당唐이 천하를 소유한 것이 거의 300년이었습니다.
그 군신君臣이 한 일의 시종始終, 치란治亂, 흥쇠興衰 자취와 그 전장典章 제도의 아름다움이 의당 찬연히 서책에 드러나 있어야 할 터인데, 서술 순서에 법도가 없고 내용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적당하지 않으며 문장이 분명하지 못하고 사실이 소략합니다.
대개 150년이나 지난 뒤에야 숨겨진 사실을 드러내고 빠진 부분들을 보완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일가一家의 역사를 갖추어서 만대에 전할 수 있도록 했으니, 이 책을 완성함이 지극히 어려웠던 것은 이치상 마치 때를 기다림이 있었던 듯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존호尊號 황제 폐하께서는 순舜임금과 같은 지혜가 있어 묻기를 좋아하시고, 우虞임금과 같은 성스러움을 몸소 실천하여 능히 근면하시어 천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안락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관심을 두고 정력을 기울여 정치의 요체를 찾으려 날마다 훌륭한 석학들과 육경六經을 강론하고 고대의 치적治績을 고찰하시고서, “상商나라 주周나라 이래로 국가가 오래 유지된 것은 오직 한漢과 당唐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쇠미한 시대인 오대五代의 선비들이 뒤를 이었기에 기력이 낮고 약하여 말은 천근하고 뜻은 비루하여 문장을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밝은 임금들과 어진 신하들의 탁월한 공렬功烈과, 혼암하고 포학하며 역란逆亂을 일으키고 화근이 된 범죄자 우두머리들의 선악善惡을 세상에 드러내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움직이게 하기에 부족하다.
그리하여 참으로 구원久遠한 후세에까지 권계勸戒를 드리울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근신이 아뢴 말이 마침 상上의 마음에 걱정하는 바에 맞았습니다.
이에 간수관刊修官 한림학사翰林學士 신臣 구양수歐陽脩,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신臣 송기宋祁와 편수관編修官 지제고知制誥 신臣 범진范鎭, 신臣 왕주王疇, 집현교리集賢校理 신臣 송민구宋敏求, 비서승秘書丞 신臣 여하경呂夏卿, 저작좌랑著作佐郞 신臣 유희수劉羲叟 등이 모두 유학儒學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이에 비부秘府에 소장된 기록들을 다 꺼내어 이들로 하여금 토론하고 함께 산정刪定하게 한 지 17년 만에 225권을 완성하니, 그 사적은 예전보다 더 보태고 그 문장은 예전보다 더 줄였습니다.
그리고 편명과 목차를 고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한 것과, 입전立傳과 기실紀實을 혹 보태기도 하고 혹 줄이기도 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의류義類의 범례凡例가 모두 근거가 있고 상세한 조강條鋼이 별록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공량公亮은 이 일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아서 한갓 세월만 허비했을 뿐이고 이 중대한 전적을 제대로 완성하여 밝은 조칙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너무도 송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