貶所僻遠하야 不與人通이러니 辱遣專人惠書甚勤하니 豈勝媿也리오
示及見託撰次碑文事는 脩於人事多故하야 不近文字가 久矣라 大懼不能稱述世德之萬一하야 以滿足下之意라
然近世士大夫於氏族
에 尤不明其遷徙世次
하야 多失其序
하고 至於
하야도 亦或不眞
이라
如足下所示
에 云
之曾孫樂
이 爲漢
侯
하고 至四世孫據
하야 遭王莽亂
하야 始去都鄕而家豫章
이라하되 考於史記
에 皆不合
이라
蓋曾元去漢이 近二百年이니 自元至樂은 似非曾孫이라
然亦當仕漢初니 則據遭莽世하야 失侯而徙가 蓋又二百年이니 疑亦非四世라
以
推之
컨대 雖大功德之侯
라도 亦未有終前漢而國不絶者
하며 亦無自高祖之世至平帝時侯纔四傳者
라
宣帝時에 分宗室趙頃王之子景하야 封爲都鄕侯하니 則據之去國은 亦不在莽世요 而都鄕已先別封宗室矣라
又樂據姓名은 皆不見於年表하니 蓋世次久遠而難詳如此라
若
는 蓋其支庶自別
하야 有爲曾氏者爾
요 非鄫子之後皆姓曾也
니 蓋今所謂鄫氏者是也
라
은 據國史所書
컨대 嘗以西京作坊使
로 爲江浙發運制置茶鹽使
하니 乃至道之間耳
어늘
11. 증공曾鞏에게 보내 씨족氏族에 대해 논한 편지
적소謫所가 외지고 멀어 사람들과 소식을 통할 수 없었는데,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보내주심이 매우 지성스러우니, 부끄러움을 어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편지에서 비문碑文을 찬술撰述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은, 제가 인사人事에 변고가 많아 글 짓는 일을 가까이하지 않은 지가 오래라 세덕世德의 만분의 일도 제대로 기술하여 족하의 마음에 들게 하지 못할까 크게 두렵습니다.
그러나 근세 사대부들이 씨족氏族에 있어서 그 천사遷徙와 세차世次를 잘 알지 못하여 보계譜系의 순서를 잘못 쓰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처음 봉지封地를 받아 성씨姓氏를 얻은 것조차도 혹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족하가 보여주신 글에 “증원曾元의 증손인 증악曾樂이 한漢나라 도향후都鄕侯가 되었고, 4세손世孫 증거曾據에 이르러 왕망王莽의 난세亂世를 만나 비로소 도향都鄕을 떠나 예장豫章에 가서 살았다.”라고 하였는데, 역사의 기록을 고증해보면 모두 사실에 맞지 않습니다.
증원이 살던 때는 한漢나라 때와 거의 200년에 가까운 기간이니, 증원으로부터 증락까지의 기간을 보면 아마도 증락이 증원의 증손은 아닐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증락은 응당 한漢나라 초기에 벼슬하였을 터인데, 왕망의 세상을 만나 도향후의 작위를 잃고 이사한 때와는 또 200년의 거리가 있으니, 역시 4세世는 아닐 듯합니다.
《사기史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로 추측해보건대 비록 큰 공덕을 세운 후侯일지라도 전한前漢시대가 끝날 때까지 봉국封國을 잃지 않은 경우는 없었으며, 또한 고조高祖 때로부터 평제平帝 때에 이르기까지 후侯의 작위가 겨우 4세世를 이어 전해진 경우도 없습니다.
선제宣帝 때에 종실宗室 조경왕趙頃王의 아들 유경劉景을 분봉分封하여 도향후都鄕侯를 삼았고 보면, 증거曾據가 도향都鄕을 떠난 것도 왕망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도향에는 이미 이보다 앞서 종실의 사람을 따로 봉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증락과 증거의 성명은 모두 〈십이제후연표〉에 보이지 않으니, 세차世次가 오래되어 자세히 알기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증鄫에서 나온 증씨曾氏의 경우는 지서支庶가 절로 나뉘어 증씨曾氏가 된 파派가 있는 것이지, 증자鄫子의 후손이 모두 증씨曾氏 성姓을 쓴 것은 아니니, 오늘날 증씨曾氏라 하는 성씨가 바로 이것입니다.
양윤공梁允恭은 국사國史에 쓰인 기록에 의거해보면, 일찍이 서경작방사西京作坊使로서 강절발운제치다염사江浙發運制置茶鹽使가 되었으니, 이는 지도至道(995~997) 연간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낙원사洛苑使라 한 것은 비록 우선 기록을 따른 것이긴 하지만 모두 다시 고증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산골 고을에 상고詳考할 서책이 없어 자세히 알려드리지 못하니, 양찰諒察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