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建瑭
은 鴈門人也
라 晉王爲鴈門節度使
에 其父
爲九府都督
하야 從晉王入關
하야 破黃巢
하야 復京師
하고
擊秦宗權于陳州할새 常將騎兵爲先鋒하다 晉王東追黃巢于寃胊라가 還過梁할새 軍其城北하다
이어늘 獨敬思與薛鐵山賀回鶻等十餘人侍
라 晉王醉
하야 留宿梁驛
하니 梁兵夜圍而攻之
라
敬思登驛樓하야 射殺梁兵十餘人이라 會天大雨하니 晉王得與從者俱去하야 縋尉氏門以出하고 而敬思爲梁追兵所得하야 見殺이라
建瑭少事軍中爲裨校러니 自晉降丁會로 與梁相距於潞州에 建瑭已爲晉兵先鋒하니 梁兵數爲建瑭所殺하야 相戒常避史先鋒하다
梁遣王景仁攻趙에 晉軍救趙하니 建瑭以先鋒兵出井陘하야 戰于柏鄕이라
梁軍爲方陣하야 分其兵爲二하야 汴宋之軍居左하고 魏滑之軍居右어늘
周德威擊其左하고 建瑭擊其右하니 梁軍皆走라 遂大敗之라 以功加檢校左僕射하다
에 晉攻燕
한대 燕王劉守光乞師于梁
하니 梁太祖自將擊趙
하야 圍棗彊蓨縣
이라
是時에 晉精兵皆北攻燕이요 獨符存審與建瑭이 以三千騎屯趙州라 梁軍已破棗彊한대 存審扼下博橋하다
建瑭分其麾下五百騎爲五隊하야 一之衡水하고 一之南宮하며 一之信都하고 一之阜城하며
하야 約各取梁芻牧者十人會下博
하다 至暮
에 擒梁兵數十
하야 皆殺之
하고 各留其一人
하야 縱使逸去
하야
告之曰 晉王軍且大至라하다 明日에 建瑭率百騎하야 爲梁旗幟하고 雜其芻牧者하야 暮叩梁營하야 殺其守門卒하고 縱火大呼하야 斬擊數十百人하다
而梁芻牧者所出은 各遇晉兵이라가 有所亡失하고 其縱而不殺者는 歸而皆言晉軍且至라하다
梁太祖夜拔營去한대 蓨縣人追擊之하니 梁軍棄其輜重鎧甲이 不可勝計라 梁太祖方病이러니 由是增劇하다
而晉軍以故得幷力以收燕者는 二人之力也라 後從莊宗入魏博하야 敗劉鄩於故元城하니 累以功歷貝相二州刺史하다
에 晉軍討張文禮於鎭州
할새 建瑭以先鋒兵下趙州
하야 執其刺史王鋋
하다
兵傅鎭州
에 建瑭攻其城門
이라가 中流矢卒
하니 年四十
라
建瑭分五百騎爲五隊하야 散入五縣하야 於以各獲梁之芻牧人者하야 什殺其九하고 而各縱其一以歸하야 而亂梁之軍하니 於以拔梁之營而追擊之라
吾不意五代時
에 有戰將若此
요 而歐陽公所當叙事處
도 亦不下
하니 可愛可愛
로다
史建瑭은 鴈門 사람이다. 晉王(李克用)이 鴈門節度使로 있을 때 그 부친 史敬思가 九府都督이 되어 진왕을 따라 潼關에 들어가 黃巢를 격파하여 京師를 수복하였고,
陳州에서 秦宗權을 공격할 때 언제나 騎兵을 거느리고 先鋒이 되었다. 진왕이 동쪽으로 황소를 추격하여 寃胊에 이르렀다가 회군하여 梁나라를 지나갈 적에 그 성 북쪽에 주둔하였다.
梁王(朱溫)이 上源驛에 酒筵을 마련하였는데 사경사와 薛鐵山‧賀回鶻 등 10여 인만 모시고 있었다. 진왕이 취하여 梁의 상원역에서 留宿하니 梁나라 군대가 밤에 포위하고서 공격하였다.
사경사가 驛樓에 올라 梁나라 군사 10여 명을 射殺하였다. 마침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니 진왕은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 다 도주하여 尉氏門에 줄을 늘어뜨려 타고 나갔고, 사경사는 梁나라의 추격병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史建瑭은 젊은 시절 軍中에서 복무하여 裨校가 되었는데 晉나라가 丁會를 항복시키고 나서 梁나라와 潞州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사건당이 이미 晉나라 군대의 先鋒이 되니 梁나라 군대가 자주 사건당에게 죽임을 당하여 서로 경계하며 늘 史先鋒을 피해 다녔다.
梁나라가 王景仁을 보내 趙州를 공격할 때 晉나라 군대가 조주를 구원하니 사건당이 선봉에 선 군사들을 이끌고 井陘을 지나서 柏鄕에서 전투하였다.
梁나라 군대가 方陣을 펼쳐 그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 汴州‧宋州의 군대는 왼쪽에 자리잡고, 魏州‧滑州의 군대는 오른쪽에 자리잡았다.
周德威가 그 왼쪽 군대를 공격하고 사건당이 그 오른쪽 군대를 공격하니 梁나라 군대가 모두 달아난지라 마침내 크게 패배시켰다. 이 戰功으로 檢校左僕射의 직함을 더하였다.
天祐 9년(912)에 晉나라가 燕나라를 공격하자 燕王 劉守光이 梁나라에 援兵을 청하니 梁 太祖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趙州를 공격하여 棗彊‧蓨縣을 포위하였다.
이때에 晉나라의 정예병이 모두 북쪽으로 燕나라를 공격하고 있었고, 符存審과 史建瑭이 3천의 기병으로 조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梁나라 군대가 이미 조강을 격파하자 부존심은 下博橋를 지켰다.
사건당이 자신의 麾下에 있는 5백의 기병을 나누어 다섯 부대로 편성하여 한 부대는 衡水로 가게 하고, 한 부대는 南宮으로 가게 하며, 한 부대는 信都로 가게 하고, 한 부대는 阜城으로 가게 하고는,
직접 나머지 한 부대를 이끌고서 각자 梁나라 군대의 꼴 베고 放牧하는 자들 열 명을 잡아서 下博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저녁에 이르러 梁나라 군사 수십 명을 포획하여 모두 죽이고 각 부대마다 그중에 한 사람씩 남겨 풀어주어 도망가게 하면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晉王의 군대가 대규모로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튿날이 되어 사건당이 기병 백 명을 거느리고서 梁나라의 깃발을 들고 그 꼴 베고 방목하던 자들을 섞어서 저녁에 梁나라 營門에 이르러 그 문을 지키던 병졸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크게 외치면서 수십 수백의 사람을 베어 죽였다.
梁나라에서 내보냈던 꼴 베고 방목하던 자들은 각자 晉나라 군대를 만났다가 이미 도망쳐 놓친 자들도 있고, 사건당이 풀어주고 죽이지 않은 자들은 돌아가 모두 晉나라 군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梁 太祖가 밤에 營寨를 뽑아 떠나자 蓨縣 사람들이 그를 추격하니 梁나라 군대가 輜重과 갑옷을 버리고 간 것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양 태조가 이때 病中이었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병세가 더 심해졌다.
晉나라 군대가 이로 인해 힘을 합해 燕나라를 수복한 것은 〈사건당과 부존심〉 두 사람의 힘이었다. 뒤에 사건당이 唐 莊宗을 따라 魏博에 들어가 옛 元城에서 劉鄩을 패배시키니,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워 貝州‧相州 두 州의 刺史를 역임하였다.
天祐 18년(921)에 晉나라 군대가 鎭州에서 張文禮를 토벌할 때 史建瑭이 先鋒兵을 거느리고 趙州를 함락하여 그 刺史 王鋋을 잡았다.
군대가 鎭州에 도착하였을 때 사건당이 진주의 城門을 공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 졸하니 향년 42세였다.
史建瑭이 5백의 騎兵을 나누어 다섯 부대로 편성하여 다섯 縣에 흩어져 들어가, 이에 각각 梁나라의 꼴 베고 방목하는 사람들을 포획하여 열에 아홉을 죽이고 각각 그중에 한 명을 풀어줘 돌아가게 하여 梁나라 군대를 교란시키니, 이에 梁 太祖가 營寨를 뽑아 도망가거늘 추격하였다.
내가 五代 시대에 이와 같은 장군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歐陽公이 이 일을 서술한 부분 역시 太史公이 〈李廣傳〉을 서술한 것에 손색이 없으니, 이 글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