極力摹寫蜀之險之不測하야 以形出人情喜幸之至此하니 文字布置斡旋之法이라
하야 以險爲虞
하고 以富自足
하야 舟車之迹
이 不通乎中國者
가 五十有九年
이라
太祖改元之三年
에 始平蜀
하니 然後蜀之絲枲織文之富
가 衣被於天下
하야 而貢輸商旅之往來者
가 하야 不絶于萬里之外
라
岷江之來에 合蜀衆水하야 出三峽爲荊江하야 傾折回直하고 捍怒鬪激하야 束之爲湍이요 觸之爲旋이라
順流之舟가 頃刻數百里라가 不及顧視하야 一失毫釐하야 與崖石遇면 則糜潰漂沒하야 不見蹤迹이라
故凡蜀之可以充內府供京師而移用乎諸州者는 皆陸出이요 而其羡餘不急之物은 乃下于江을 若棄之然하니 其爲險且不測이 如此라
尙書虞部郞中朱公이 再治是州之三月에 作至喜亭于江津하야 以爲舟者之停留也하고 且誌夫天下之大險이 至此而始平夷하야 以爲行人之喜幸이러라
廩與俸皆薄하고 而僻且遠하니 雖有善政이라도 不足爲名譽以資進取어늘
朱公
은 能不以陋而安之
하고 其心又喜夫人之去憂患而就樂易
하니 로다
自公之來로 歲數大豐일새 因民之餘하야 然後有作하야 惠于往來하야 以館以勞하되 動不違時하고 而人有賴하니 是皆宜書라
촉蜀 땅의 헤아리기 어려운 험고함을 힘을 다해 모사摹寫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함을 드러낸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문장을 배치하고 주선하는 법이다.
촉蜀은 오대五代 때에 참국僭國이 되어 지형이 험고한 것으로 방비를 삼고 물산이 풍부한 것으로 자족하여, 배와 수레의 자취가 중국에 통하지 못한 것이 59년 세월이다.
송宋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해내海內를 통일함에 사방四方이 차례로 평정되었다.
태조太祖께서 개원改元한 지 3년에 비로소 촉이 평정되니, 연후에 촉 땅의 풍부한 생사生絲와 마麻로 짠 문양 있는 직물 같은 물산의 혜택이 천하에 두루 미쳐서, 공물을 운반하는 수레와 상인들의 왕래가 육로 운송은 진봉로秦鳳路를 통하고 뱃길은 민강岷江을 통하여 만 리 밖까지 끊이지 않았다.
민강岷江이 흘러옴에 촉의 뭇 물길과 합쳐져 삼협三峽으로 나와 형강荊江이 되어, 물줄기가 기울어져 꺾이고 돌기도 하고 곧게 가기도 하면서 성난 듯 싸우는 듯 거칠고 격렬하여, 〈흐름이 좁을 길을 통과하느라〉 묶이게 되면 급류가 되고 〈바위나 암벽 같은 곳에〉 부딪히면 굽이쳐 흐른다.
물길을 따라가던 배가 순식간에 수백 리를 가다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서 한번 털끝만큼이라도 실수하여 바위와 부딪히게 되면, 배가 산산조각이 나 파편은 뜨고 선체며 사람은 가라앉아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무릇 촉에서 내부內府를 채우고 경사京師에 공급하여 여러 주州에 옮겨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육로로 운반해내고, 그 나머지 급하지 않은 물건들은 이에 강을 통해 내려보내기를 마치 버리는 물건인 것처럼 하니, 그 험난하고 헤아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이릉夷陵이라는 고을은 삼협三峽의 입구에 있으니, 강이 삼협三峽을 나와 비로소 완만해져 평탄한 물줄기가 된다.
그러므로 이곳에 당도한 뱃사람들은 반드시 술을 뿌리며 재배하고 서로 축하하면서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상서우부낭중尙書虞部郞中 주공朱公이 이 협주峽州를 다시 다스리게 된 지 석 달째에 강나루에 지희정至喜亭을 지어 뱃사람들이 머무르는 장소로 삼고, 또 대저 천하의 큰 험고함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평탄해져 행인行人들이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김을 기록하였다.
관름官廩과 봉록俸祿이 모두 박하고 지역도 외지고 머니, 비록 선정善政을 펼치더라도 명예로워서 승진의 밑천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런데도 주공朱公은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서 편안히 하고, 그 마음이 또 사람들이 우환을 떠나 즐겁고 편안한 데로 나아오는 것을 기쁘게 여겼으니, 《시경詩經》의 이른바 개제군자愷悌君子라는 것이다.
공公이 이곳에 온 이래로 해마다 자주 큰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여유로움을 말미암은 연후에, 정자를 지어 왕래하는 사람에게 은택을 끼쳐 머물게 하고 위로하되 민력을 동원함에 농번기를 피하였고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했으니 이는 모두 기록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무릇 공을 보좌하는 관원들이 이로 인하여 서로 상의해서 나에게 글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