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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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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風韻跌宕이라
하고 而蜀亦恃險爲阻하야 하니하야 不敢西窺以爭러니
及太祖受天命하야 用兵不過萬人이로되 擧兩國如一郡縣吏하니 何其偉歟
當此時하야 從諸將西平成都及南攻하야 功最多
於時 語名將者稱田氏하니 田氏功書史官하고 祿世于家하야 至今而不絶이라
及天下已定하얀 將率無所用其武하고 士君子爭以文儒進이라
故文初將家子 反衣하야 從鄕進士하야 擧於有司하니 彼此一時
亦各遭其勢而然也니라
文初辭業通敏하고 爲人敦潔可喜
歲之仲春 自荊南西拜其親於萬州할새 이어늘
予與之登高以遠望하고 遂遊하야 窺綠蘿溪하고 坐盤石한대 文初愛之하야 留數日乃去하다
夷陵者 其地志云 北有夷山以爲名이라하고 或曰巴峽之險 至此地始平夷라하니 蓋今文初所見 尙未爲山川之勝者
由此而上泝江湍하고하면 險怪奇絶 乃可愛也
當王師伐蜀時하야 兵出兩道하되 一自以入하고 一自歸州以取忠萬以西하니 今之所經 皆王師嚮所用武處
覽其山川 可以慨然而賦矣리라


11. 만주萬州로 어버이를 뵈러 가는 수재秀才 전화田畫를 보내는 서문
운치가 질탕하다.
오대五代의 초엽에 천하가 열서넛의 나라로 쪼개졌었는데 건륭建隆 연간(960~963)에 미쳐서 어떤 나라는 멸망하기도 하고 어떤 나라는 미약해졌지만 남아 있는 나라가 그래도 일곱이 되었고 강남江南이 그 영토가 가장 컸다.
웅대雄大한 영토를 차지했던 후주後周세종世宗도 세 번이나 회수淮水 가에 이르렀지만 이씨李氏를 점령하지 못하였고, 또한 험고險固함을 믿고 요새를 만들어 진롱秦隴산남山南이 모두 침탈을 당하니 지방 백성들이 귀주歸州협주峽州에서 손을 움츠리고 감히 서쪽을 엿보며 옛 땅을 다투지 못했다.
그러다가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을 받음에 미쳐서 군대가 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되 마치 한 군현郡縣의 아전을 바꾸는 것처럼 두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위대한가.
이때가 되어 문초文初의 조부가 여러 장수를 따라 서쪽으로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금릉金陵을 공격하여 공훈이 가장 많았다.
이때에 명장名將을 말하는 자들은 전씨田氏를 일컬었으니 전씨는 그 공로가 사서史書에 기록되었고 녹봉이 가문에 세습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서는 장수將帥들이 그 무략武略을 쓸 곳이 없었고 사군자士君子들이 다투어 문유文儒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래서 문초文初가 장수 가문의 후손으로 도리어 백의白衣를 입고서 향진사鄕進士를 통해 유사有司에게 천거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시세時勢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각기 그런 시세時勢를 만나 그렇게 된 것이다.
문초文初는 문장을 공부하고 식견이 통민通敏하며 사람됨이 돈후敦厚하고 개결介潔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올해 2월에 형남荊南에서 서쪽으로 만주萬州에 계신 그 어버이를 뵈러 가면서 이릉夷陵에 배를 정박하였다.
내가 그와 함께 높은 곳에 올라 조망眺望하고 마침내 동산東山을 노닐어 녹나계綠蘿溪를 엿보고 반석盤石에 앉았는데 문초가 이곳을 사랑하여 며칠 머물다 떠나갔다.
이릉夷陵이라는 곳은 그 《지지地志》에 “북쪽에 이산夷山이 있어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파협巴峽의 험고함이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평탄해진다.”라고 하니, 대체로 지금 문초文初가 본 것은 아직 빼어난 산천은 못 된다.
이곳으로부터 위로 의 급류를 거슬러 오르고 삼협三峽에 들어가면 험괴險怪하고 기절奇絶한 곳들이 바로 사랑할 만하다.
황제의 군대가 후촉後蜀을 정벌할 적에 군대가 두 길로 나가되 하나는 봉주鳳州로부터 들어가고 하나는 귀주歸州로부터 충주忠州만주萬州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들어갔으니, 지금 〈문초가〉 지나는 길이 다 황제의 군대가 지난날 정벌을 하던 곳이다.
그 산천을 바라봄에 개연히 시를 읊조릴 만할 것이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景祐 4년(1037)에 지은 것이다. 田畫는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宋나라 때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를 모두 秀才라고 불렀다. 寧親은 부모를 찾아가는 것이다. 萬州는 지금의 四川省 萬縣인데 송나라 때는 夔州路에 속하였다.
역주2 五代之初 天下分爲十三四 : 907년 朱溫이 唐나라를 멸망시키고 稱帝하면서 국호를 梁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중국은 五代十國시대로 들어갔다. 五代는 後梁, 後唐, 後晉, 後漢, 後周 다섯 朝代를 가리킨다. 後梁이 건립된 뒤에 천하에는 아직도 吳, 吳越, 楚, 閩, 南漢, 前蜀, 荊南 등이 있었다. 또 李茂貞은 鳳翔府에 할거하여 岐王이 되었고, 劉守光은 幽州에 할거하여 燕王이 되었으며, 李克用이 아직 後梁을 멸망시키기 전에는 河東에 할거하여 晉王이 되었고, 成德郡에 자리한 王鎔 등의 할거 세력들이 존재하였다.
역주3 及建隆之際……而蜀與江南地最大 : 建隆은 宋 太祖 趙匡胤이 즉위하였을 때의 年號이다. 宋나라 초엽에 천하에는 아직도 南唐, 南漢, 北漢, 蜀, 吳越의 五國과 荊南, 湖南, 漳泉의 三鎭이 있었다.
蜀은 바로 後蜀으로, 後唐이 前蜀을 멸망시키고 孟知祥을 西川節度使로 삼았는데 뒤에 반란을 일으켜 東川을 점령하고 蜀 지방 전체에서 할거하다가 오래지 않아 稱帝하고 아들 孟昶에게 물려준 나라인데, 뒤에 송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江南은 바로 南唐으로, 937년 李昪이 吳나라를 대신하여 稱帝하고 金陵에 도읍하였는데, 뒤에 璟‧煜에게 나라를 전하고서 閩과 楚를 멸망시키는 등 가장 세력을 떨쳤을 때에는 江南의 대부분 영토를 점령하였으므로 강남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4 以周世宗之雄……不能擧李氏 : 周 世宗은 바로 柴榮으로, 본래 柴守禮의 아들인데 後周의 太祖 郭威가 양자로 삼았다. 皇位를 이은 지 6년 만에 죽고 아들 恭帝에게 전하였는데 공제는 宋 太祖에게 禪位하였다.
顯德 3년(956)에 周 世宗은 淮南을 親征하였고, 다음 해에 또 水軍을 거느리고 회남에 들어갔으며, 11월에 다시 친히 南唐을 정벌하여 濠泗州를 공격하자 남당에서 사신을 보내 江北 지역의 땅을 바치니 그제야 회군하였다. 李氏는 南唐을 가리킨다.
역주5 秦隴山南 皆被侵奪 : 秦隴과 山南은 지금의 陝西省 남쪽 지방으로 唐나라 때는 山南道였다. 後漢 때에 晉昌節度使 趙匡贊과 鳳翔節度使 侯益이 함께 蜀에 항복하자, 후한에서 王景崇을 보내 關中을 공략하게 하니 왕경숭 역시 반란하여 蜀에 항복하였다. 그러자 蜀은 鳳翔府를 岐陽軍으로 바꾸었다.
역주6 荊人縮手歸峽 : 荊人은 荊南國을 가리킨다. 歸는 歸州로 지금의 湖北省 秭歸縣 일대이고 峽은 峽州로 지금의 湖北省 宜昌市이다.
역주7 故地 : 이전에 荊南에 속했다가 蜀에 점령당한 忠州, 萬州, 夔州, 施州 등을 가리킨다.
역주8 文初之祖 : 文初는 田畫의 字이다. 《宋史》 권274 〈田欽祚傳〉에 “田欽祚는 潁州 汝陰 사람으로, 後蜀을 토벌할 때 北路先鋒都監이 되었고 뒤에 江南을 토벌할 때에는 군대를 거느리고 溧水에서 吳軍을 패퇴시켜 金陵에 들어가 포위하여 평정하였다. 銀夏綏宥巡檢使가 된 뒤 졸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문초의 조부인 듯하다.
역주9 金陵 : 지금의 江蘇省 南京으로, 五代 때에는 南唐의 도읍이었다.
역주10 白衣 : 古代에 벼슬길에 아직 오르지 않은 선비가 입던 복장이다.
역주11 維舟夷陵 : 夷陵은 지금의 湖北省 宜昌市이다. 歐陽脩는 景祐 3년(1036) 상소를 올려 高若訥을 심하게 비판한 일로 峽州 夷陵縣令으로 貶謫되었다.
역주12 東山 : 湖北省 荊門縣 東一里에 東保山이라고 부르는 東山이 있는데 산 정상에 楚望亭이 있고 이곳에 여러 사람이 題詠을 남겼다. 荊門은 夷陵과 이웃해 있으므로 이 東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역주13 三峽 : 長江이 四川省과 湖北省의 경계를 뚫고 지나가는 지점에 있는 瞿塘峽, 巫峽, 西陵峽을 가리킨다.
역주14 鳳州 : 지금의 陝西省 鳳縣으로, 그 治所는 지금 鳳縣城 東北쪽에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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