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而蜀亦恃險爲阻
하야 하니 而
하야 不敢西窺以爭
러니
及太祖受天命하야 用兵不過萬人이로되 擧兩國如一郡縣吏하니 何其偉歟아
當此時
하야 가 從諸將西平成都及南攻
하야 功最多
라
於時에 語名將者稱田氏하니 田氏功書史官하고 祿世于家하야 至今而不絶이라
及天下已定하얀 將率無所用其武하고 士君子爭以文儒進이라
故文初將家子
로 反衣
하야 從鄕進士
하야 擧於有司
하니 彼此一時
라
予與之登高以遠望
하고 遂遊
하야 窺綠蘿溪
하고 坐盤石
한대 文初愛之
하야 留數日乃去
하다
夷陵者는 其地志云 北有夷山以爲名이라하고 或曰巴峽之險이 至此地始平夷라하니 蓋今文初所見이 尙未爲山川之勝者니
由此而上泝江湍
하고 入
하면 險怪奇絶
이 乃可愛也
라
當王師伐蜀時
하야 兵出兩道
하되 一自
以入
하고 一自歸州以取忠萬以西
하니 今之所經
이 皆王師嚮所用武處
라
11. 만주萬州로 어버이를 뵈러 가는 수재秀才 전화田畫를 보내는 서문
오대五代의 초엽에 천하가 열서넛의 나라로 쪼개졌었는데 건륭建隆 연간(960~963)에 미쳐서 어떤 나라는 멸망하기도 하고 어떤 나라는 미약해졌지만 남아 있는 나라가 그래도 일곱이 되었고 촉蜀과 강남江南이 그 영토가 가장 컸다.
웅대雄大한 영토를 차지했던 후주後周의 세종世宗도 세 번이나 회수淮水 가에 이르렀지만 이씨李氏를 점령하지 못하였고, 촉蜀 또한 험고險固함을 믿고 요새를 만들어 진롱秦隴과 산남山南이 모두 침탈을 당하니 형荊 지방 백성들이 귀주歸州와 협주峽州에서 손을 움츠리고 감히 서쪽을 엿보며 옛 땅을 다투지 못했다.
그러다가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을 받음에 미쳐서 군대가 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되 마치 한 군현郡縣의 아전을 바꾸는 것처럼 두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위대한가.
이때가 되어 문초文初의 조부가 여러 장수를 따라 서쪽으로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금릉金陵을 공격하여 공훈이 가장 많았다.
이때에 명장名將을 말하는 자들은 전씨田氏를 일컬었으니 전씨는 그 공로가 사서史書에 기록되었고 녹봉이 가문에 세습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서는 장수將帥들이 그 무략武略을 쓸 곳이 없었고 사군자士君子들이 다투어 문유文儒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래서 문초文初가 장수 가문의 후손으로 도리어 백의白衣를 입고서 향진사鄕進士를 통해 유사有司에게 천거되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시세時勢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각기 그런 시세時勢를 만나 그렇게 된 것이다.
문초文初는 문장을 공부하고 식견이 통민通敏하며 사람됨이 돈후敦厚하고 개결介潔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올해 2월에 형남荊南에서 서쪽으로 만주萬州에 계신 그 어버이를 뵈러 가면서 이릉夷陵에 배를 정박하였다.
내가 그와 함께 높은 곳에 올라 조망眺望하고 마침내 동산東山을 노닐어 녹나계綠蘿溪를 엿보고 반석盤石에 앉았는데 문초가 이곳을 사랑하여 며칠 머물다 떠나갔다.
이릉夷陵이라는 곳은 그 《지지地志》에 “북쪽에 이산夷山이 있어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파협巴峽의 험고함이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평탄해진다.”라고 하니, 대체로 지금 문초文初가 본 것은 아직 빼어난 산천은 못 된다.
이곳으로부터 위로 강江의 급류를 거슬러 오르고 삼협三峽에 들어가면 험괴險怪하고 기절奇絶한 곳들이 바로 사랑할 만하다.
황제의 군대가 후촉後蜀을 정벌할 적에 군대가 두 길로 나가되 하나는 봉주鳳州로부터 들어가고 하나는 귀주歸州로부터 충주忠州와 만주萬州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들어갔으니, 지금 〈문초가〉 지나는 길이 다 황제의 군대가 지난날 정벌을 하던 곳이다.
그 산천을 바라봄에 개연히 시를 읊조릴 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