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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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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內朱瑾行事 甚倔强狙狡하야 可鄙하고 而歐公語次 風神可掬이라
朱宣 宋州 下邑人也 少從其父하야 以販鹽爲盜라가 父抵法死 宣乃去하야 事靑州節度使王敬武하야 爲軍校어늘 敬武以隷其將曹全晟하다
中和二年 敬武遣全晟入關하야 與破黃巢하고 還過鄆州할새 鄆州節度使薛崇卒 其將崔君預自稱留後어늘 全晟攻殺君預하야 遂據鄆州하다
宣以戰功爲鄆州馬步軍都指揮使하다 已而 全晟死 軍中推宣爲留後러니 唐僖宗卽拜宣天平軍節度使하다
梁太祖鎭宣武할새 以兄事宣이라 太祖新就鎭하야 兵力尙少하야 數爲秦宗權所困하니 太祖乞兵于宣하다
宣與其弟瑾以兗鄆之兵救汴하야 大破蔡兵하야 走宗權하다
是時 太祖已襲取滑州하야 稍欲幷吞諸鎭이라 以東이라하고 乃發兵收亡卒하야 因攻之하야 遂爲敵國하야 苦戰曹濮間하다
是時 梁又東攻徐州하고 西有蔡賊하고 而北敵彊晉이라 宣瑾兄弟自相首尾 然卒爲梁所滅하다
乾寧四年 宣敗하야 走中都하야 爲葛從周所執하야 斬于汴橋下하다
宣從父弟也 從宣居鄆州하야 補軍校하다 少倜儻有大志러니 兗州節度使齊克讓愛其爲人하야 以女妻之하다
瑾行親迎 乃選壯士爲輿夫하고 伏兵器輿中하야 夜至兗州하야 兵發하야 遂虜克讓하고 自稱留後하니 僖宗卽拜瑾泰寧軍節度使하다
瑾與宣已破秦宗權於汴州어늘 梁太祖責瑾誘宣武軍卒以歸하야 遣朱珍攻瑾하야 取曹州하고 又攻濮州하고 而太祖自攻鄆하다
瑾兄弟往來相救凡十餘年 大小數十戰하야 與太祖屢相勝敗하다
太祖得宣將賀瓌何懷寶及瑾兄瓊하고 乃將瓊等至兗城下하야 告瑾曰 汝兄敗矣 今瓊等已降하니 不如早自歸라하니
瑾僞曰諾이라하고 乃遣牙將胡規持書幣詣軍門하야 請降이어늘
太祖大喜하야 至延壽門하야 與瑾交語한대 瑾曰 願得瓊來 送符印이라하니 太祖信之하야 遣客將劉捍送瓊往하다
瑾伏壯士橋下하고 單騎迎瓊하야 揮手語捍曰 請瓊獨來라하니 瓊前이어늘 壯士擒之하야 遂閉門하고 責瓊先降하야 斬之하야 擲其首城外하다
太祖度不可下하고 乃留兵圍之而去하다
瑾嬰城自守어늘 而宣亦敗於鄆州 乃乞兵於晉하니 晉遣李承嗣史儼等하야 以騎兵五千救之하다
太祖已破宣하고 乃急趨兗하니 瑾城中食盡하야 與承嗣等掠食豐沛間이어늘 梁兵奄至하니 瑾將康懷英等以城降梁하다
瑾等將麾下兵하야 走沂州어늘 沂州刺史尹處賓不納하고 又走海州어늘 梁兵急追之 乃奔于淮南하다
楊行密聞瑾來하고 大喜하야 解其玉帶贈之하고 表瑾領武寧軍節度使하야 以爲行軍副使하다
其後 梁遣龐師古葛從周等하야 攻淮南하니 行密用瑾하야 大破梁兵於淸口하야 斬師古하다
行密累表瑾東南諸道行營副都統 領平盧軍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行密死 渥及隆演相繼立하니 皆年少 徐溫與其子知訓專政이러니 畏瑾하야 欲除之어늘
瑾乃謀殺知訓하야 嘗以月旦遣愛妾候知訓家러니 知訓强通之어늘 妾自歸訴하니 瑾益不平하야
屢勸隆演하야 誅徐氏以去國患이어늘 隆演不能爲하다 旣而 知訓以泗州 建靜淮軍하야 出瑾爲節度使러니 將行 召之夜飮하다
明日 知訓過瑾謝하니 延之升堂하고 出其妻陶氏 知訓方拜 瑾以笏擊踣之하니 伏兵自戶突出하야 殺之하다
瑾以二惡馬繫庭中이라가 知訓入而釋馬하야 使相踶鳴이라 故外人莫聞其變하다
瑾擕其首하야 馳示隆演하고 曰 今日爲吳除患矣라하니 隆演曰 此事非吾敢知라하고 遽起入內
瑾忿然以首擊柱하고 提劍而出하니 府門已闔이라 因踰垣이라가 折其足하다
瑾顧路窮하고 大呼曰 吾爲萬人去害로되 而一身死之라하고 遂自刎하다
潤州徐知誥聞亂하고 以兵趨廣陵하야 族瑾家하다
瑾妻陶氏臨刑而泣하니 其妾曰 何爲泣乎 今行見公矣라하니 陶氏收淚하고 欣然就戮이라 聞者哀之하다
瑾名重江淮하야 人畏之 其死也 尸之廣陵北門하니 路人私共瘞之하다
是時 民多病瘧이어늘 皆取其墓上土하야 以水服之하고 云病輒愈라하야 更益新土하야 漸成高墳하다
徐溫等惡之하야 發其尸하야 投於雷公塘하다 後溫病 夢瑾挽弓射之어늘 溫懼하야 網其骨하야 葬塘側하고 立祠其上하다
瑾嘗病疽 醫者視之하고 色懼어늘 瑾曰 但理之하라 吾非以病死者라하더니 於是果然이라 卒年五十二


03. 주선朱宣전기傳記
이 글 안에 주근朱瑾행사行事는 몹시 완고하고 교활하여 매우 비루하게 여길 만하고 구양공歐陽公이 서술한 것은 주근의 풍신風神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주선朱宣송주宋州 하읍下邑 사람이다. 어려서 그 아버지를 따라 소금을 밀매하는 일로 도적이 되었다가 아버지가 법망에 걸려 죽자 주선은 떠나 청주절도사靑州節度使 왕경무王敬武를 섬겨 군교軍校가 되었는데 왕경무가 자신의 장수 조전성曹全晟에게 소속시켰다.
중화中和 2년(881)에 왕경무가 조전성을 보내 동관潼關으로 들어가 함께 황소黃巢를 격파하고 돌아오다 운주鄆州를 지날 때에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설숭薛崇이 죽자 그 장수 최군예崔君預유후留後자칭自稱하거늘 조전성이 공격하여 최군예를 죽이고서 마침내 운주를 점거하였다.
주선은 전공戰功으로 운주마보군도지휘사鄆州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이윽고 조전성이 죽자 군중이 주선을 추대하여 유후로 삼았는데, 희종僖宗이 즉시 주선을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태조太祖선무宣武진수鎭守할 때에 주선朱宣을 형으로 섬겼다. 태조가 막 으로 부임하였을 때에 병력兵力이 아직도 적어서 여러 번 진종권秦宗權에게 곤욕을 당하였는데, 태조가 주선에게 병력을 요청하였다.
주선이 그 아우 주근朱瑾과 함께 연주兗州운주鄆州의 병사를 거느리고 변주汴州를 구원하러 가서 채주蔡州의 병사를 크게 격파하여 진종권秦宗權을 내쫓았다.
이때에 태조가 이미 활주滑州를 습격하여 취하고 조금씩 여러 을 병탄하고자 하였다. 주선과 주근이 이미 돌아오자 태조가 이에 연주와 운주로 급히 격문을 보내 ‘주선과 주근이 선무군宣武軍 중 도망간 군졸軍卒을 많이 회유하여 동쪽으로 갔다’라고 하고 이에 병사를 내어 도망간 군사를 수습하고 인하여 공격하여 마침내 적국敵國이 되어 조주曹州복주濮州 사이에서 고전苦戰하였다.
이때에 나라가 또 동쪽으로 서주徐州를 공격하였고 서쪽으로 채주蔡州라는 이 있었고 북쪽으로 강성强盛나라를 적대하고 있었다. 주선과 주근 형제가 스스로 서로 수미首尾가 되어 막았지만 끝내 양나라에 멸망하였다.
건녕乾寧 4년(897)에 주선이 패하여 중도中都로 달아났다가 갈종주葛從周에게 잡혀 변교汴橋 아래에서 참수되었다.
주근朱瑾주선朱宣종제從弟이다. 주선을 따라 운주鄆州에 거하면서 군교軍校가 되었다. 어려서 대범하여 큰 뜻이 있었는데, 연주절도사兗州節度使 제극양齊克讓이 그 사람됨을 아껴 딸을 시집보냈다.
주근이 친영親迎을 할 때에 장사壯士를 선별하여 수레꾼으로 위장하고 수레 안에 병장기를 숨겨두어 밤에 연주兗州에 이르러 복병이 나와서 마침내 제극양齊克讓을 사로잡고 유후留後자칭自稱하니, 희종僖宗이 즉시 주근을 태령군절도사泰寧軍節度使로 삼았다.
주근이 주선과 이미 변주汴州에서 진종권秦宗權을 격파하였는데, 태조太祖가 주근이 선무군宣武軍군졸軍卒을 회유하여 데리고 돌아간 것을 꾸짖어 주진朱珍을 보내 주근을 공격하여 조주曹州를 취하고 또 복주濮州를 공격하였고 태조太祖는 스스로 운주鄆州를 공격하였다.
주근 형제가 오가며 서로 구원한 지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 번 치러 태조와 수차례 승패勝敗를 주고받았다.
태조太祖주선朱宣의 장수 하괴賀瓌, 하회보何懷寶주근朱瑾의 형 주경朱瓊을 잡고 이에 주경 등을 데리고 가 연주兗州의 성 아래에 이르러 주근에게 말하기를 “너의 형은 패하였다. 지금 주경 등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빨리 스스로 귀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니,
주근이 거짓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이에 아장牙將 호규胡規를 보내 항복문서와 폐물을 가지고 군문에 이르러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연수문延壽門에 이르러 주근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근이 말하기를 “원컨대 주경을 보내주시면 부인符印을 보내겠습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이 말을 믿고 객장客將 유한劉捍을 보내 주경을 송환하게 하였다.
주근이 장사壯士를 다리 아래에 매복시키고 단기單騎로 주경을 맞이하여 손을 내저으며 유한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주경을 혼자 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주경이 앞으로 나아오자 장사가 그를 사로잡아 마침내 성문을 닫고 주경이 먼저 항복한 것을 꾸짖어 참수하고서 그 머리를 성 밖으로 던졌다.
태조太祖가 함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에 병사를 남겨 성을 포위한 다음 떠났다.
주근朱瑾이 성을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고 주선朱宣도 역시 운주鄆州에서 패하였으므로 주근이 이에 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는데, 나라가 이승사李承嗣사엄史儼 등을 보내 5천 명의 기병으로 구원하였다.
태조太祖가 이미 주선을 격파하고 이에 연주兗州로 급히 달려가니 주근이 성 안에 식량이 다하여 이승사李承嗣 등과 풍주豐州패주沛州 사이에서 식량을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나라 병사가 갑자기 이르자 주근의 장수 강회영康懷英 등이 성을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주근 등이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기주沂州로 달아났는데 기주자사沂州刺史 윤처빈尹處賓이 받아주지 않았고 다시 해주海州로 달아났는데 양나라 병사가 급히 추격하기에 이에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양행밀楊行密이 주근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옥대玉帶를 풀어 내려주고 표주表奏하여 주근을 영무녕군절도사領武寧軍節度使를 삼고서 행군부사行軍副使로 삼았다.
그 후에 양나라가 방사고龎師古갈종주葛從周 등을 보내 회남을 공격하니 양행밀이 주근을 임용하여 청구淸口에서 양병梁兵을 대파하고 방사고를 참수하였다.
양행밀이 누차 표주하여 주근을 동남제도행영부도통東南諸道行營副都統 영평로군절도사領平盧軍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
양행밀楊行密이 죽자 양악楊渥양융연楊隆演이 서로 뒤이어 절도사節度使의 자리에 올랐는데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러므로 서온徐溫과 그의 아들 서지훈徐知訓전정專政하였는데 이들이 주근朱瑾을 두려워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주근이 이에 서지훈을 죽이고자 하여 일찍이 매월 초 1일에 애첩愛妾을 보내 서지훈의 집에 문후하였는데, 서지훈이 강제로 사통하자 애첩愛妾이 스스로 돌아와 하소연 하니 주근이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차 양융연에게 권하여 서씨徐氏를 주살하여 나라의 근심거리를 제거하자고 하였는데 양융연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윽고 서지훈이 사주泗州를 가지고 정회군靜淮軍을 세워 주근을 내보내 절도사로 삼았는데, 주근이 떠나려 할 때에 서지훈을 불러 밤에 술을 마셨다.
이튿날 서지훈이 주근의 집에 들러 사례하니, 그를 맞이하여 에 오르고 아내 도씨陶氏를 나오게 하였다. 서지훈이 막 절할 때에 주근이 을 가지고 쳐서 넘어뜨리자 복병伏兵이 문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서지훈을 죽였다.
당초에 주근朱瑾이 사나운 두 마리 말을 뜰 가운데 묶어 두었다가 서지훈徐知訓이 들어오자 말을 풀어놓아 서로 발길질 하고 울게 하였다. 그러므로 외인들이 그 변란을 듣지 못하였다.
주근이 서지훈의 머리를 가지고 급히 양융연楊隆演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금일 를 위해 환란을 제거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양융연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 황급히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주근이 분노하여 머리로 기둥을 치고는 검을 들고 나오니, 의 문이 이미 닫혀 있는지라 담을 넘다가 그 다리가 부러졌다.
주근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벗어날 길이 없자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나는 만 명의 백성을 위해 해악을 제거하였으나 이 한 몸은 죽는다.”라고 하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윤주潤州서지고徐知誥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거느리고 광릉廣陵으로 달려가 주근의 집안을 멸족하였다.
주근의 도씨陶氏가 형벌을 받을 때에 눈물을 흘리니 주근의 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십니까. 이제 장차 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도씨가 눈물을 거두고 기쁜 안색으로 형장에 나아갔다.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불쌍하게 여겼다.
주근朱瑾강회江淮에 명망이 무거워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그가 죽자 광릉廣陵의 북문에 시신을 버려두었는데, 행인들이 함께 묻어주었다.
이때에 백성들이 많이들 학질을 앓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묘소 위의 흙을 가져다 물과 함께 복용하고는 병이 대번에 나았다고 하면서 다시 새로운 흙을 더 덮어주어 점차 큰 봉분이 되었다.
서온徐溫 등이 이를 미워하여 그의 시신을 꺼내 뇌공당雷公塘에 던졌다. 후에 서온이 병들었는데 꿈에 주근이 활을 당겨 쏘거늘 서온이 두려워 그의 유골을 그물로 건져내어 뇌공당 곁에 매장하고 그 옆에 사당을 세웠다.
당초에 주근이 일찍이 등창을 앓았는데 의원이 이를 보고 두려운 기색을 띠자 주근이 말하기를 “그냥 치료만 하라. 나는 병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이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죽었을 때 나이는 52세였다.


역주
역주1 朱宣傳 : 朱宣(?~897)은 宋州 下邑 사람이다. 주선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13 〈梁書 第13 列傳 第3〉, ≪新五代史≫ 卷42 〈雜傳 第30〉에 각각 실려 있다.
이 열전은 朱宣과 그의 從弟 朱瑾에 대한 사적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주선이 자신을 배신한 梁나라에 대항하여 싸우는 과정에서 주근이 그와 首尾가 되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주선은 소금을 밀매하는 일을 하다 曹全晟을 섬겨 軍校가 되었고 후에 조전성이 죽자 軍中이 추대하여 留侯가 되었는데 唐 僖宗이 天平軍節度使를 제수하였다. 梁 太祖가 宣武를 鎭守할 때에 秦宗權에게 곤욕을 당해 朱宣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주선은 從弟인 주근과 함께 진종권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태조가 鎭을 병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들이 도망병을 유인하였다고 무고하고는 이들을 공격하였는데 이때에 주선은 葛從周에게 잡혀 처형당하였다.
주근(867~918)은 주선을 따라 鄆州에 거하면서 軍校가 되었는데 兗州節度使 齊克讓이 그를 아껴 사위로 삼았지만 親迎할 때에 제극양을 사로잡아 兗州를 차지하였다. 후에 梁 太祖가 運州를 공격할 때에 형인 주선과 함께 수미가 되어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 태조와 승패를 주고받았는데, 양나라에 패하자 楊行密의 수하가 되었다. 양행밀이 죽자 楊渥과 楊隆演이 서로 뒤이어 節度使의 자리에 올랐는데 모두 나이가 어렸으므로 徐溫과 그의 아들 徐知訓이 專政하였다. 주근이 양륭연에게 서지훈을 죽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자고 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자 자신의 집에 찾아온 서지훈을 주살하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양 태조가 자신을 도운 주선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史書에 따라 원인 제공자를 다르게 보고 있는데,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구오대사≫ 〈梁書 卷1 太祖本紀〉에는 “진종권이 이미 패한 뒤에 황제는 주선과 주근이 자신에게 힘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후하게 예우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주선과 주근이 황제의 군사가 용맹하고 굳세다는 이유로 사적으로 이들을 아껴 몰래 曹州와 濮州의 경계에서 금과 비단을 걸고 이들을 유인하였다. 그러자 황제의 군사들이 재물을 탐하여 달려오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황제가 격문을 보내 주선과 주근을 꾸짖었다. 그러자 주선이 사신을 보냈지만 이 사신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朱珍에게 명하여 조주와 복주를 정벌하여 간사한 이를 징계하였다.”라고 하여 양나라가 주선을 공격한 이유를 주선의 잘못으로 보았다.
하지만 ≪신오대사≫ 卷1 〈梁本紀 太祖紀上〉에는 “주선과 주근이 汴州에서 황제를 도와 이미 진종권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는데, 왕이 兗州와 鄆州로 격문을 보내 ‘주선과 주근이 汴州에서 도망간 軍卒을 회유하여 동쪽으로 갔다’라고 하고 이에 병사를 내어 공격하여 조주와 복주를 취하였다.”라고 서술하여 ≪구오대사≫의 내용과 상반되게 서술하였다.
또한 ≪通鑑考異≫와 ≪五代史補≫에서는 “朱溫(양 태조)이 늘 병력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였는데 敬翔이 휘하의 군사들을 거짓으로 배반해 도망가게 하고서 唐나라 황제에게 상주하고 아울러 격문을 보내 배반한 자들을 추격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면 땅을 넓히고 군사들을 모을 수 있다고 설득하자 주온이 이 의견을 따랐다고 하였으니, 양 태조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주선을 배반한 것으로 보았다.
≪신오대사≫에는 史評을 두지 않았지만 ≪구오대사≫에는 “대저 구름과 우레가 운집하여 용과 뱀이 땅에서 일어나 세력이 비슷한 자들은 서로 다투다 힘으로 패배한 자는 먼저 망하였다. 그러므로 朱宣, 朱瑾, 時溥의 무리들이 모두 양나라에 병탄되었으니 이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다만 주근은 처음에는 은밀한 擧事로 땅을 소유하였고 결국에는 은밀한 거사로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2 宣瑾旣還……言宣瑾多誘宣武軍(卒亡)[亡卒]以東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梁나라 本紀를 살펴보건대 ‘朱宣과 朱瑾의 병사가 汴州를 도와 秦宗權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王이 兗州와 鄆州에 격문을 보내 汴州의 도망간 군졸을 회유하여 동쪽으로 갔다고 무함하고 이에 병사를 출동시켜 공격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朱宣傳〉에 이른바 ‘卒亡以東’은 바로 잘못된 것이니, 응당 ‘亡卒以東’이 되어야 한다.[今按梁本紀云 朱宣朱瑾兵助汴 以破宗權東歸 王移檄兗鄆 誣其誘汴亡卒以東 乃發兵攻之 然則宣傳所謂卒亡以東 乃誤也 當爲亡卒以東]”라고 하였다.
역주3 (卒亡)[亡卒] : 저본에는 ‘卒亡’으로 되어 있으나, ≪五代史纂誤≫에 의거하여 ‘亡卒’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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