旛翰
棨戟奕
石鼓詩 韓蘇二公 先後歌詠 所以發揮揚扢之者備矣 固無竢後人容喙 且其文字精輝 有萬丈之焰 足爲岐鼓後乘
但考其時世史傳 參之事情 詩之作似當在周成五年 會諸侯蒐岐之日 而乃其碣之籒之以無忘先王之蹟 則在宣王之世耳
閑居無事 輒爲之步韓韻 而掇以成宣之事 以存古實 所以效嚬於前人云 - 朝鮮 尹鑴, 《白湖全書》 卷2, 〈步韓文公石鼓歌〉
○ 石鼓 大成門內廊閣 設紅柵而安石鼓 鼓凡十枚 而左右各五
鼓之大 高可一尺 圍一抱餘 其形中脹 而兩端微殺 頂圓如鼖鼓 色淡黑而剝落屭贔
大德[觀]二年 自京兆徙汴京 初置辟雍 後移保和殿 以金塡字
靖康二年 金人取歸燕 剝其金 置汪宣武第 後徙大興府學
元大德十一年 虞集爲大都敎授 得之泥土中皇慶初 移置于此
鼓以十干次第爲標 鼓文共六百五十四字 而皆泐缺 其可辨者 爲二十五字 或有全鼓無一字者
其甲鼓初句曰 我車旣攻 我馬旣同 乙鼓曰 汧繄泛泛 烝波溯淵
丙鼓曰 田車孔安 鍪勒駻駻 丁鼓曰 帥彼鑾車 勿速頃如
戊鼓曰 我來自東 靈雨奔流 己鼓曰 宣猷作原 作周導遄
庚鼓曰 徒御嘽嘽 然而師旅 辛鼓曰 徒走䮺䮺 馬麃晢晢
壬鼓曰 我水旣淨 我道旣平 癸鼓曰 虞人怜亟 朝夕敬惕
旁立協山潘迪石鼓音訓碑 左右各列十二戟 以視衛護之意
門外兩廊 又置乾隆新製石鼓十坐 其制一依舊石鼓 而集其可辨字 別成十章 刻籒文而頌功德
門右有碑 以張照筆 刻昌黎石鼓詩 上面刻乾隆御製詩
又門左有重刻石鼓文碑 - 朝鮮 李海應, 《薊山紀程》 卷3, 〈留館〉 中 ‘石鼓’
○ 一段來歷 一段寫字 一段敍初年已事 抵一篇傳記
夾敍夾議 容易解 但其字句老練 不易及耳 - 淸 方東樹, 《昭昧詹言》
기산 남쪽에서 사냥하여 영웅과 준걸들 달리게 하니
만리의 금수들 모두 길을 막아 그물로 잡았도다
돌 깎아 북 모양 만드느라 높은 산 무너뜨렸네
文辭는 엄정하고 뜻은 정밀하여 읽어도 깨닫기 어렵고
예리한 칼로 살아있는 교룡과 악어 잘라 놓은 듯
난새와 봉황이 날아오르고 신선들이 내려오는 듯
옛 솥이 물에서 뛰듯, 용이 북으로 변해 날아가듯
고루한 선비들이 시를 엮을 때 수록하지 않았으니
〈大雅〉와 〈小雅〉는 편협하고 궁박하여 여유가 없네
공자는 서쪽에 갔지만 진나라에 이르지 않았으니
“이처럼 지극한 보물이 남아있는 것 어찌 많으리오
담요로 싸고 자리로 말면 즉시 가져올 수 있으니
열 개의 石鼓는 몇 마리 낙타면 실어 올 수 있습니다
제생들은 강구하고 해석하여 학문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차 온나라에서 물밀듯이 몰려드는 것 볼 것입니다
이끼를 깎아내고 도려내어 마디와 모서리 드러내고
편안히 두고 평평히 하여 기울어지지 않게 하여
세월이 오래도록 지나도 별 탈 없을 것입니다.”
왕희지의 속된 글씨 아름다운 모습에만 내달렸어도
몇 장의 종이 오히려 흰 거위와 바꿀 수 있었는데
[集評] 한문공의 석고가 본을 떠서[步韓文公石鼓歌]岐山之陽石鼓文 기산의 양지쪽 석고문에 대해서
我今賡歌千載後 내 지금 천년 뒤에 그 화답을 하려는데
思凡筆弱吁奈何 생각 필력 다 부족해 이 일을 어찌 할까
在周文孫武子王 주나라 문왕 손자 무왕 아들이 왕일 때는
四海一家弭干戈 사해가 일가여서 무력 싸움 없더니만
小腆遺孽干天紀 볼품없는 유얼이 하늘의 법을 범해
仁風義威從盪磨 사랑도 위엄도 범벅타령 되었기에
大會群神揖明庭 뭇귀신을 왕의 뜰에 모두 모이게 했었는데
陸讋水慄歸網羅 온 사방이 겁에 질려 너도 나도 굴복했다네
攻車同馬何所向 공격 위한 수레와 말 어딜 향해 갔다던가
沔沔汧水岍山峩 넘실넘실한 견수와 높은 견산 향해 갔지
有邁天王六師隨 천자가 가게 되면 육사가 따르는 법
麾幢劍珮山之阿 산언덕엔 지휘기와 칼 찬 사람 줄을 서고
嘽嘽徒御鼓塡塡 그 많은 따름새에 북소리도 두리둥둥
幽靈奔走鬼叱訶 유령들도 바삐 날뛰고 귀신이 길을 트네
旛翰
棨戟奕 기폭은 펄렁펄렁 칼과 창은 번득번득
宣猷大田平南訛 중지를 모아서 남쪽 평정 나섰다네
從臣何人勒爲辭 신하 중에 어느 누가 이 문장을 새겼는지
文字威迤駕蒼蝌 창힐의 과두문처럼 글자마다 구불구불
高山大林生豹禽 높은 산 깊은 숲에 살아 있는 표범인가
積水古沈盤靇鼉 물 고인 옛 호수에 사리고 있는 자라일까
流傳幾代久乃發 몇 세대를 전해오다 오랜만에 발견된 것
忽若鳴鳳峙瓊柯 어느새 가지 높이 앉아 우는 봉이 됐네
至寶由來帝弗秘 알짜 보물은 하느님도 숨겨둘 수가 없는 것
雲錦煥爛天孫梭 찬란한 구름 비단 직녀 솜씨 아니던가
愧不從雄問奇字 차라리 양웅에게 어려운 글자 물었다가
鉤章棘句搜委蛇 이해 못할 뜻들을 샅샅이 못 찾아 부끄럽고
亦訝仲尼聞見少 또 하나는 공자도 문견이 부족해서
任受嘲得捐羲娥 해와 달을 버렸다는 조롱 들은 게 이상하다네
淸廟生民映簡策 청묘와 생민이 책 속에 빛나고 있어
倬見大化流滂沱 위대한 교화가 전래했음을 볼 수 있지
當時若無此記載 만약에 그 당시 이 기록이 없었던들
孰知類夏函天和 누가 알리 하나라가 천지 화기에 싸였던 것을
更驚贔𠫍虯豿勢 또 하나 놀란 것은 거북 같고 규룡 같아
不落大小蟲鳥科 크고 작은 벌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네
我聞西都九葉宣 내 듣기에 서도의 선왕이라는 임금이
撥亂奮起功最多 난리 평정 공로가 제일로 많았는데
天降申樊吉方武 하늘이 또 신과 번, 길과 방 같은 인물 내려
比如冀野産騠駝 기주에서 용마가 난 것과 같았으며
又有史籀生王國 거기에 또 사주가 왕국에 태어나서
軒臣沮頡不是過 황제 신하 저힐보다 못지 않았다네
南征北伐若雷霆 천둥처럼 번개처럼 남쪽 치고 북쪽 치고
祖文憲武如琢磋 옥돌 갈고 다듬듯이 문무의 법 따랐으며
指顧萬邦復西趨 만방을 돌아보고 서로 다시 갈 때
天無烈風海不波 하늘에 열풍 없어 파도도 일지 않았다네
穆穆閎門通四目 사대문 활짝 열고 사방 두루 다 살피고
平平皇道無偏頗 왕조가 공평하여 편파라곤 없었기에
千乘萬騎于岐陽 천승만기 모두모두 기산으로 모여들고
文孫文子來非佗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문손문자 다 왔다네
之子之探允無聲 정탐 맡은 그 사람 감쪽같이 소리 없고
熊旂鳥旟何娜婀 펄럭이는 깃발들은 그리도 고왔다네
㓸巉思帥豈考擊 바위 깎아 만든 석고 치려고 한 것인가
礱頑命史非挼挲 돌을 갈아 비 새긴 것 만지기 위함 아니라네
繩前光後垂永久 조상의 법을 따라 자손만대 물려주는
車攻常武殆摹哦 거공과 상무라면 본을 뜨고 읊을 만하지
鐵幹金筯絶穗薤 철몸통에 금젓가락 부추에다 댈 것인가
丹鳳崑鶴超鶤鵝 단산의 봉 곤산 학은 닭 거위완 비교 안되지
唐愈宋軾迭舂撞 당의 한유 송의 소식이 앞뒤에서 부딪쳤고
商鼗周應同猗那 상나라 북 주나라 북은 똑같이 아름다워
方今寰宇入凋騷 지금은 온 세상이 시들하고 시끄럽고
人把蜩藻背輿軻 사람들도 입만 살았지 도덕을 모른다네
豈有詰戎追前軌 그 전처럼 오랑캐를 몰아낼 자 뉘 있으며
安得猛士挽天河 은하수 끌어당길 용사인들 있을건가
石鼓之歌歌益哀 석고를 노래한 그 노래가 더욱 슬퍼
嗚呼吾道終蹉跎 아아, 우리 갈 길 끝내 못 찾고 말 것인가
石鼓詩에 대해 韓愈와 蘇軾 두 공이 앞뒤에서 노래하면서 그 숨은 뜻을 캐내 세상에 알릴만큼 알렸으므로 후인으로서는 그에 대해 입을 놀릴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문장력이야말로 만장의 불꽃과도 같이 휘황찬란하여 주나라 석고시를 뒷받침하는 역사가 되고도 남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시대적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작해 볼 때 그 시를 지은 연대는 주나라 成王 5년 제후들이 기산에 모여 사냥할 때인 것 같고, 그리고 그 先王의 유적을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을 빗돌에다 새기고 大篆을 쓴 것은 宣王시대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 두 공은 모두 선왕 때의 것으로 말하고 있어 그들이 혹시 잘못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한가히 있으면서 다른 일이 없기에 곧 한유의 시를 본떠서 그 운에 맞춰 지으면서 내 나름대로 성왕‧선왕 때의 일들을 섞어 엮어서 되도록 사실에 맞는 기록이 되기를 기해본 것이지만 사실은 전인들이 했던 일을 흉내 낸 꼴이 되고 말았다.
石鼓:大成門 안 廊閣에다 紅柵을 설립하고 석고를 안치하였는데, 석고는 모두 10枚로 좌우에 각각 다섯씩이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주 선왕의 獵碣이라 하는데, 文辭는 風雅와 유사하고 자획은 모두 籀文(大篆)이었다.
석고의 크기는 높이 한 자쯤에 둘레는 한 아름 남짓하고, 그 모양은 가운데는 불룩하고 양 끝은 약간 줄어들었으며, 꼭대기는 둥그스름해서 마치 북처럼 생기고, 빛깔은 담흑색인데, 긁히고 깎였지만 여전히 힘찬 기운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陳倉(지명)의 들 가운데 있었더니, 당나라 鄭餘慶이 鳳翔縣에 있는 공자의 사당으로 옮겨 두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
그러다가 宋나라 皇祐 4년(1052)에 向傳師가 민간에서 그것을 찾아 10개의 북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大觀 2년(1108)에 京兆에서 汴京으로 옮겨 처음에는 태학에 두었다가 나중에 保和殿으로 옮기고 금으로 글자를 입혔다.
靖康 2년(1127)에 金나라 사람이 그것을 연경으로 가져다가 그 금을 벗겨 汪宣武의 집에 두었고, 후에 大興府學으로 옮겼다.
원나라 대덕 11년(1307)에 虞集이 大都敎授로 있으면서 이것을 진흙 속에서 발견해서 皇慶 초년에 여기로 옮겨 두었던 것이다.
석고는 十干을 가지고 차례를 표시하였으며, 석고의 글은 도합 654자인데, 모두 파손되고 그중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겨우 25자로, 혹은 한 글자도 없는 석고도 있었다.
그 甲鼓의 첫 구에는, “우리 수레 이미 견고하며, 우리 말도 그러하네.[我車旣攻 我馬旣同]” 했고, 乙鼓에는, “못물은 넘실넘실, 숱한 물결이 못에 거슬러 흐른다.[汧繄泛泛 烝波溯淵]” 했으며,
丙鼓에는, “사냥 수레 매우 안전한데, 투구 고삐 튼튼하다.[田車孔安 鍪勒駻駻]” 했고, 丁鼓에는, “저 방울 달린 수레 거느리고, 속히 몰지 말고 서서히 할지어다.[帥彼鑾車 勿速頃如]” 했으며,
戊鼓에는, “내 동쪽으로부터 오느라니, 신령스러운 비 흘러내린다.[我來自東 靈雨奔流]” 했고, 己鼓에는, “계책을 펴서 평원을 만들고 큰길을 내서 빠른 걸음 인도한다.[宣猷作原 作周導遄]” 했으며,
庚鼓에는, “따르는 부하들 많기도 하고 군사들 또한 용맹스럽다.[徒御嘽嘽 然而師旅]” 했고, 辛鼓에는, “달리는 군사들 오락가락하고, 말의 빛깔 번쩍번쩍하도다.[徒走䮺䮺 馬麃晢晢]” 했으며,
壬鼓에는, “우리의 물은 이미 깨끗하고, 우리의 길은 이미 편편하도다.[我水旣淨 我道旣平]” 했고, 癸鼓에는, “사냥꾼들 모두 영리하고 날래며, 조석으로 공경하고 조심한다.[虞人怜亟 朝夕敬愓]”라 했다.
글자는 大篆과 조금 다르니, 이른바 籀文이란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다섯 번째 석고는 그 복판이 패여서 절구처럼 되었는데, 아마 민간에 있을 때 패인 듯하다.
곁에는 協山 潘迪의 石鼓音訓碑를 세웠고, 좌우에는 열두 개의 창을 주욱 세워 위호하는 뜻을 보였다.
문밖의 두 翼廊에는 또 건륭이 새로 만든 석고 10坐를 두었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이 옛 석고에 의거했고, 그중에서 알아볼 수 있는 글자를 모아 가지고 별도로 10章을 이룬 다음, 주문을 새겨서 功德을 칭송하였다.
문 오른쪽에 있는 비석은 張照의 글씨로 韓昌黎의 石鼓詩를 새기고 상면에는 건륭의 어제시를 새겼다.
또 문 왼쪽에는 석고문을 중각한 비석이 있었다.
勒成豐烈辭嚴密 풍성한 공렬을 새겨 이뤄서 사연이 엄밀하니
太平蒐獵完今睹 태평 시대에 사냥하던 일을 완연히 지금 보겠네
仲尼摭星遺羲娥 중니는 별만을 줍고 희아는 빠뜨렸으며
韓愈按歌嗟李杜 한유는 노래를 지을 제 이두를 슬퍼했네
日消月鑠神鬼秘 날과 달로 消鑠하매 신귀가 비장되고
埋沒村臼委泥土 민가 절구로 매몰되어 진흙에 버려졌네
剔魿太半蒼籀缺 분명치 않은 자획이 태반이고 전자 또한 파손되었는데
潘君短碣稽遺譜 반군의 단갈은 끼친 글을 상고케 하네
絶笑胡皇紀何績 우습구나 호황은 무슨 공적을 기록할 게 있을까
十章新鼓峙廊廡 십장의 새로 만든 석고가 낭무에 우뚝 섰네
한 단락은 내력을, 한 단락은 글자에 대해 썼으며, 한 단락은 初年의 일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니 대저 한 편의 전기이다.
서술과 의론이 사이사이 끼어 있어 이해하기 쉬우나, 다만 그 字句가 老練하여 쉽게 미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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