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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1)

당시삼백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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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
韓愈
勸我試作石鼓歌
才薄將奈石鼓何
宣王憤起
大開受朝賀
於岐陽騁雄俊
萬里禽獸皆
告萬世
鑿石作鼓隳嵯峨
從臣才藝咸第一
揀選撰刻留
雨淋野火燒
鬼物守護煩
公從何處得紙本
毫髮盡備無差訛
辭嚴義密讀難曉
字體不類
年深豈免有缺畫
鸞翔鳳翥衆仙下
珊瑚碧樹交枝柯
陋儒編詩不收入
二雅
孔子西行不到
掎摭星宿遺
嗟余好古生苦晚
對此涕淚雙滂沱
憶昔初蒙博士徵
始改稱元和
故人從軍在
爲我量度掘
濯冠沐浴告
如此至寶存豈多
氈包席裹可立致
十鼓祇載數駱駝
薦諸
光價豈止百倍過
聖恩若許留太學
諸生講解得切磋
觀經尙填咽
坐見舉國來奔波
剜苔剔蘚露節角
安置妥帖平不頗
大廈深簷與蓋覆
經歷久遠期無他
中朝大官老於事
詎肯感激徒媕婀
牧童牛礪角
誰復著手爲摩挲
日銷月鑠就埋沒
六年西顧空吟哦
羲之趁姿媚
數紙尙可
繼周八代爭戰罷
無人收拾理則那
方今太平日無事
儒術崇丘軻
安能以此上論列
願借辯口如
石鼓之歌止於此
嗚呼吾意其蹉跎
[集評] ○ 岐山之陽石鼓文
昌黎退之爲之歌
我今賡歌千載後
思凡筆弱吁奈何
在周文孫武子王
四海一家弭干戈
小腆遺孽干天紀
仁風義威從盪磨
大會群神揖明庭
陸讋水慄歸網羅
攻車同馬何所向
沔沔汧水岍山峩
有邁天王六師隨
麾幢劍珮山之阿
嘽嘽徒御鼓塡塡
幽靈奔走鬼叱訶
旛翰棨戟奕
宣猷大田平南訛
從臣何人勒爲辭
文字威迤駕蒼蝌
高山大林生豹禽
積水古沈盤靇鼉
流傳幾代久乃發
忽若鳴鳳峙瓊柯
至寶由來帝弗秘
雲錦煥爛天孫梭
愧不從雄問奇字
鉤章棘句搜委蛇
亦訝仲尼聞見少
任受嘲得捐羲娥
淸廟生民映簡策
倬見大化流滂沱
當時若無此記載
孰知類夏函天和
更驚贔𠫍虬豿勢
不落大小蟲鳥科
我聞西都九葉宣
撥亂奮起功最多
天降申樊吉方武
比如冀野産騠駝
又有史籀生王國
軒臣沮頡不是過
南征北伐若雷霆
祖文憲武如琢磋
指顧萬邦復西趨
天無烈風海不波
穆穆閎門通四目
平平皇道無偏頗
千乘萬騎于岐陽
文孫文子來非佗
之子之探允無聲
熊旂鳥旟何娜婀
㓸巉思帥豈考擊
礱頑命史非挼挲
繩前光後垂永久
車攻常武殆摹哦
鐵幹金筯絶穗薤
丹鳳崑鶴超鶤鵝
唐愈宋軾迭舂撞
商鼗周應同猗那
方今寰宇入凋騷
人把蜩藻背輿軻
豈有詰戎追前軌
安得猛士挽天河
石鼓之歌歌益哀
嗚呼吾道終蹉跎
石鼓詩 韓蘇二公 先後歌詠 所以發揮揚扢之者備矣 固無竢後人容喙 且其文字精輝 有萬丈之焰 足爲岐鼓後乘
但考其時世史傳 參之事情 詩之作似當在周成五年 會諸侯蒐岐之日 而乃其碣之籒之以無忘先王之蹟 則在宣王之世耳
今二公 皆以宣王爲言 恐不無遺見
閑居無事 輒爲之步韓韻 而掇以成宣之事 以存古實 所以效嚬於前人云 - 朝鮮 尹鑴, 《白湖全書》 卷2, 〈步韓文公石鼓歌〉
○ 石鼓 大成門內廊閣 設紅柵而安石鼓 鼓凡十枚 而左右各五
世傳周宣王之獵碣 辭類風雅 字畫皆籀文
鼓之大 高可一尺 圍一抱餘 其形中脹 而兩端微殺 頂圓如鼖鼓 色淡黑而剝落屭贔
初在陳倉野中 唐鄭餘慶遷置鳳翔縣夫子廟 而亡其一
宋皇祐四年 向傳師得之於民間 十鼓乃定
大德[觀]二年 自京兆徙汴京 初置辟雍 後移保和殿 以金塡字
靖康二年 金人取歸燕 剝其金 置汪宣武第 後徙大興府學
元大德十一年 虞集爲大都敎授 得之泥土中皇慶初 移置于此
鼓以十干次第爲標 鼓文共六百五十四字 而皆泐缺 其可辨者 爲二十五字 或有全鼓無一字者
其甲鼓初句曰 我車旣攻 我馬旣同 乙鼓曰 汧繄泛泛 烝波溯淵
丙鼓曰 田車孔安 鍪勒駻駻 丁鼓曰 帥彼鑾車 勿速頃如
戊鼓曰 我來自東 靈雨奔流 己鼓曰 宣猷作原 作周導遄
庚鼓曰 徒御嘽嘽 然而師旅 辛鼓曰 徒走䮺䮺 馬麃晢晢
壬鼓曰 我水旣淨 我道旣平 癸鼓曰 虞人怜亟 朝夕敬惕
字與大篆少異 所謂籀文也
右邊第五鼓 陷其中爲臼 蓋在民間時所鑿
臼中尙有糠粃跡
旁立協山潘迪石鼓音訓碑 左右各列十二戟 以視衛護之意
門外兩廊 又置乾隆新製石鼓十坐 其制一依舊石鼓 而集其可辨字 別成十章 刻籒文而頌功德
門右有碑 以張照筆 刻昌黎石鼓詩 上面刻乾隆御製詩
又門左有重刻石鼓文碑 - 朝鮮 李海應, 《薊山紀程》 卷3, 〈留館〉 中 ‘石鼓’
石鼓石鼓周王鼓
屭贔節角傳千古
勒成豐烈辭嚴密
太平蒐獵宛今睹
仲尼摭星遺羲娥
韓愈按歌嗟李杜
上都鸞鳳無消息
珊瑚老柯啼腥雨
日消月鑠神鬼祕
埋沒村臼委泥土
終然寶鼎汾河出
完如石經鴻都叟
剔魿太半蒼籀缺
潘君短碣稽遺譜
絶笑胡皇紀何績
十章新鼓峙廊廡
○ 一段來歷 一段寫字 一段敍初年已事 抵一篇傳記
夾敍夾議 容易解 但其字句老練 不易及耳 - 淸 方東樹, 《昭昧詹言》


〈석고의 노래〉
한유
장생이 손에 석고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 번 석고가 지으라고 권하네
소릉엔 사람 없고, 적선도 죽었으니
재주 얕은 내가 장치 어찌 석고가를 짓겠는가
주나라 기강이 무너져 사해가 들끓으니
선왕이 분발하여 하늘의 창 휘둘렀네
크게 명당 열고 조하를 받으니
제후들의 칼과 패옥 서로 부딪쳐 울렸다오
기산 남쪽에서 사냥하여 영웅과 준걸들 달리게 하니
만리의 금수들 모두 길을 막아 그물로 잡았도다
공을 새기고 성과를 기록하여 만세에 알리려
돌 깎아 북 모양 만드느라 높은 산 무너뜨렸네
따르는 신하들 재예가 모두 제일인데
선발하여 글 지어 새겨 산아에 남겼도다
비에 젖고 햇볕 쬐고 들불에 타도
鬼物이 수호하고 애써 물리쳐 꾸짖었네
공께선 어디에서 탁본을 얻었는가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이 모두 갖추었구나
文辭는 엄정하고 뜻은 정밀하여 읽어도 깨닫기 어렵고
자체는 예서도, 과두문자도 닮지 않았네
세월이 깊었으니 빠진 획을 어찌 면할까만
예리한 칼로 살아있는 교룡과 악어 잘라 놓은 듯
난새와 봉황이 날아오르고 신선들이 내려오는 듯
珊瑚와 碧樹 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듯
금줄과 쇠사슬이 서로 얽혀 힘차고
옛 솥이 물에서 뛰듯, 용이 북으로 변해 날아가듯
고루한 선비들이 시를 엮을 때 수록하지 않았으니
〈大雅〉와 〈小雅〉는 편협하고 궁박하여 여유가 없네
공자는 서쪽에 갔지만 진나라에 이르지 않았으니
별은 주워 모았으나 羲娥는 버려둔 셈이네
나, 옛것을 좋아하지만 늦게 태어나
이것을 마주하여 두 줄기 눈물이 쏟아지는구나
생각건대 처음으로 박사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해 처음으로 원화라 개칭했네
친구가 從軍하며 右輔에 있으면서
나를 위해 헤아려 구멍을 파두었네
冠 씻고 목욕하여 祭酒에게 아뢰기를
“이처럼 지극한 보물이 남아있는 것 어찌 많으리오
담요로 싸고 자리로 말면 즉시 가져올 수 있으니
열 개의 石鼓는 몇 마리 낙타면 실어 올 수 있습니다
태묘에 올려 郜鼎과 나란히 놓는다면
광채와 가치가 어찌 백배에 그치리오
聖恩으로 만약 태학에 보관하길 허락하신다면
제생들은 강구하고 해석하여 학문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입니다
石經을 관람하느라 홍도문도 메웠는데
장차 온나라에서 물밀듯이 몰려드는 것 볼 것입니다
이끼를 깎아내고 도려내어 마디와 모서리 드러내고
편안히 두고 평평히 하여 기울어지지 않게 하여
큰 집에 깊은 처마로 덮고 가려준다면
세월이 오래도록 지나도 별 탈 없을 것입니다.”
조정의 대관들은 모든 일에 익숙할 터
어찌 감격만하고 우물쭈물 하는가
목동들 부싯돌로 삼고 소는 뿔로 비벼대니
누가 다시 손대어 어루만질까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삭아 매몰되어가니
육년 동안 서쪽을 바라보며 공연히 한숨 짓네
왕희지의 속된 글씨 아름다운 모습에만 내달렸어도
몇 장의 종이 오히려 흰 거위와 바꿀 수 있었는데
주나라 이은 팔대에 전쟁이 끝났으나
석고 돌보는 이 없으니 어이된 일인가
지금은 태평시대라 아무일이 없으니
儒學을 높여 쓰고 孔孟을 숭상하는 이때
어찌하면 이것을 논의에 부칠까
원하노니, 현하와 같은 口辯을 빌었으면
석고의 노래 여기서 그치니
안타깝다 나의 뜻은 이뤄지지 않음이
[集評] 한문공의 석고가 본을 떠서[步韓文公石鼓歌]岐山之陽石鼓文 기산의 양지쪽 석고문에 대해서
昌黎退之爲之歌 한창려 퇴지가 노래를 지었기에
我今賡歌千載後 내 지금 천년 뒤에 그 화답을 하려는데
思凡筆弱吁奈何 생각 필력 다 부족해 이 일을 어찌 할까
在周文孫武子王 주나라 문왕 손자 무왕 아들이 왕일 때는
四海一家弭干戈 사해가 일가여서 무력 싸움 없더니만
小腆遺孽干天紀 볼품없는 유얼이 하늘의 법을 범해
仁風義威從盪磨 사랑도 위엄도 범벅타령 되었기에
大會群神揖明庭 뭇귀신을 왕의 뜰에 모두 모이게 했었는데
陸讋水慄歸網羅 온 사방이 겁에 질려 너도 나도 굴복했다네
攻車同馬何所向 공격 위한 수레와 말 어딜 향해 갔다던가
沔沔汧水岍山峩 넘실넘실한 견수와 높은 견산 향해 갔지
有邁天王六師隨 천자가 가게 되면 육사가 따르는 법
麾幢劍珮山之阿 산언덕엔 지휘기와 칼 찬 사람 줄을 서고
嘽嘽徒御鼓塡塡 그 많은 따름새에 북소리도 두리둥둥
幽靈奔走鬼叱訶 유령들도 바삐 날뛰고 귀신이 길을 트네
旛翰棨戟奕 기폭은 펄렁펄렁 칼과 창은 번득번득
宣猷大田平南訛 중지를 모아서 남쪽 평정 나섰다네
從臣何人勒爲辭 신하 중에 어느 누가 이 문장을 새겼는지
文字威迤駕蒼蝌 창힐의 과두문처럼 글자마다 구불구불
高山大林生豹禽 높은 산 깊은 숲에 살아 있는 표범인가
積水古沈盤靇鼉 물 고인 옛 호수에 사리고 있는 자라일까
流傳幾代久乃發 몇 세대를 전해오다 오랜만에 발견된 것
忽若鳴鳳峙瓊柯 어느새 가지 높이 앉아 우는 봉이 됐네
至寶由來帝弗秘 알짜 보물은 하느님도 숨겨둘 수가 없는 것
雲錦煥爛天孫梭 찬란한 구름 비단 직녀 솜씨 아니던가
愧不從雄問奇字 차라리 양웅에게 어려운 글자 물었다가
鉤章棘句搜委蛇 이해 못할 뜻들을 샅샅이 못 찾아 부끄럽고
亦訝仲尼聞見少 또 하나는 공자도 문견이 부족해서
任受嘲得捐羲娥 해와 달을 버렸다는 조롱 들은 게 이상하다네
淸廟生民映簡策 청묘와 생민이 책 속에 빛나고 있어
倬見大化流滂沱 위대한 교화가 전래했음을 볼 수 있지
當時若無此記載 만약에 그 당시 이 기록이 없었던들
孰知類夏函天和 누가 알리 하나라가 천지 화기에 싸였던 것을
更驚贔𠫍虯豿勢 또 하나 놀란 것은 거북 같고 규룡 같아
不落大小蟲鳥科 크고 작은 벌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네
我聞西都九葉宣 내 듣기에 서도의 선왕이라는 임금이
撥亂奮起功最多 난리 평정 공로가 제일로 많았는데
天降申樊吉方武 하늘이 또 신과 번, 길과 방 같은 인물 내려
比如冀野産騠駝 기주에서 용마가 난 것과 같았으며
又有史籀生王國 거기에 또 사주가 왕국에 태어나서
軒臣沮頡不是過 황제 신하 저힐보다 못지 않았다네
南征北伐若雷霆 천둥처럼 번개처럼 남쪽 치고 북쪽 치고
祖文憲武如琢磋 옥돌 갈고 다듬듯이 문무의 법 따랐으며
指顧萬邦復西趨 만방을 돌아보고 서로 다시 갈 때
天無烈風海不波 하늘에 열풍 없어 파도도 일지 않았다네
穆穆閎門通四目 사대문 활짝 열고 사방 두루 다 살피고
平平皇道無偏頗 왕조가 공평하여 편파라곤 없었기에
千乘萬騎于岐陽 천승만기 모두모두 기산으로 모여들고
文孫文子來非佗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문손문자 다 왔다네
之子之探允無聲 정탐 맡은 그 사람 감쪽같이 소리 없고
熊旂鳥旟何娜婀 펄럭이는 깃발들은 그리도 고왔다네
㓸巉思帥豈考擊 바위 깎아 만든 석고 치려고 한 것인가
礱頑命史非挼挲 돌을 갈아 비 새긴 것 만지기 위함 아니라네
繩前光後垂永久 조상의 법을 따라 자손만대 물려주는
車攻常武殆摹哦 거공과 상무라면 본을 뜨고 읊을 만하지
鐵幹金筯絶穗薤 철몸통에 금젓가락 부추에다 댈 것인가
丹鳳崑鶴超鶤鵝 단산의 봉 곤산 학은 닭 거위완 비교 안되지
唐愈宋軾迭舂撞 당의 한유 송의 소식이 앞뒤에서 부딪쳤고
商鼗周應同猗那 상나라 북 주나라 북은 똑같이 아름다워
方今寰宇入凋騷 지금은 온 세상이 시들하고 시끄럽고
人把蜩藻背輿軻 사람들도 입만 살았지 도덕을 모른다네
豈有詰戎追前軌 그 전처럼 오랑캐를 몰아낼 자 뉘 있으며
安得猛士挽天河 은하수 끌어당길 용사인들 있을건가
石鼓之歌歌益哀 석고를 노래한 그 노래가 더욱 슬퍼
嗚呼吾道終蹉跎 아아, 우리 갈 길 끝내 못 찾고 말 것인가
石鼓詩에 대해 韓愈와 蘇軾 두 공이 앞뒤에서 노래하면서 그 숨은 뜻을 캐내 세상에 알릴만큼 알렸으므로 후인으로서는 그에 대해 입을 놀릴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문장력이야말로 만장의 불꽃과도 같이 휘황찬란하여 주나라 석고시를 뒷받침하는 역사가 되고도 남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시대적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작해 볼 때 그 시를 지은 연대는 주나라 成王 5년 제후들이 기산에 모여 사냥할 때인 것 같고, 그리고 그 先王의 유적을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을 빗돌에다 새기고 大篆을 쓴 것은 宣王시대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 두 공은 모두 선왕 때의 것으로 말하고 있어 그들이 혹시 잘못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한가히 있으면서 다른 일이 없기에 곧 한유의 시를 본떠서 그 운에 맞춰 지으면서 내 나름대로 성왕‧선왕 때의 일들을 섞어 엮어서 되도록 사실에 맞는 기록이 되기를 기해본 것이지만 사실은 전인들이 했던 일을 흉내 낸 꼴이 되고 말았다.
石鼓:大成門 안 廊閣에다 紅柵을 설립하고 석고를 안치하였는데, 석고는 모두 10枚로 좌우에 각각 다섯씩이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주 선왕의 獵碣이라 하는데, 文辭는 風雅와 유사하고 자획은 모두 籀文(大篆)이었다.
석고의 크기는 높이 한 자쯤에 둘레는 한 아름 남짓하고, 그 모양은 가운데는 불룩하고 양 끝은 약간 줄어들었으며, 꼭대기는 둥그스름해서 마치 북처럼 생기고, 빛깔은 담흑색인데, 긁히고 깎였지만 여전히 힘찬 기운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陳倉(지명)의 들 가운데 있었더니, 당나라 鄭餘慶이 鳳翔縣에 있는 공자의 사당으로 옮겨 두었는데 그중 하나를 잃었다.
그러다가 宋나라 皇祐 4년(1052)에 向傳師가 민간에서 그것을 찾아 10개의 북이 비로소 갖추어졌다.
大觀 2년(1108)에 京兆에서 汴京으로 옮겨 처음에는 태학에 두었다가 나중에 保和殿으로 옮기고 금으로 글자를 입혔다.
靖康 2년(1127)에 金나라 사람이 그것을 연경으로 가져다가 그 금을 벗겨 汪宣武의 집에 두었고, 후에 大興府學으로 옮겼다.
원나라 대덕 11년(1307)에 虞集이 大都敎授로 있으면서 이것을 진흙 속에서 발견해서 皇慶 초년에 여기로 옮겨 두었던 것이다.

석고는 十干을 가지고 차례를 표시하였으며, 석고의 글은 도합 654자인데, 모두 파손되고 그중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겨우 25자로, 혹은 한 글자도 없는 석고도 있었다.
그 甲鼓의 첫 구에는, “우리 수레 이미 견고하며, 우리 말도 그러하네.[我車旣攻 我馬旣同]” 했고, 乙鼓에는, “못물은 넘실넘실, 숱한 물결이 못에 거슬러 흐른다.[汧繄泛泛 烝波溯淵]” 했으며,
丙鼓에는, “사냥 수레 매우 안전한데, 투구 고삐 튼튼하다.[田車孔安 鍪勒駻駻]” 했고, 丁鼓에는, “저 방울 달린 수레 거느리고, 속히 몰지 말고 서서히 할지어다.[帥彼鑾車 勿速頃如]” 했으며,
戊鼓에는, “내 동쪽으로부터 오느라니, 신령스러운 비 흘러내린다.[我來自東 靈雨奔流]” 했고, 己鼓에는, “계책을 펴서 평원을 만들고 큰길을 내서 빠른 걸음 인도한다.[宣猷作原 作周導遄]” 했으며,
庚鼓에는, “따르는 부하들 많기도 하고 군사들 또한 용맹스럽다.[徒御嘽嘽 然而師旅]” 했고, 辛鼓에는, “달리는 군사들 오락가락하고, 말의 빛깔 번쩍번쩍하도다.[徒走䮺䮺 馬麃晢晢]” 했으며,
壬鼓에는, “우리의 물은 이미 깨끗하고, 우리의 길은 이미 편편하도다.[我水旣淨 我道旣平]” 했고, 癸鼓에는, “사냥꾼들 모두 영리하고 날래며, 조석으로 공경하고 조심한다.[虞人怜亟 朝夕敬愓]”라 했다.
글자는 大篆과 조금 다르니, 이른바 籀文이란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다섯 번째 석고는 그 복판이 패여서 절구처럼 되었는데, 아마 민간에 있을 때 패인 듯하다.
절구 속에는 아직도 곡식의 흔적이 있다.
곁에는 協山 潘迪의 石鼓音訓碑를 세웠고, 좌우에는 열두 개의 창을 주욱 세워 위호하는 뜻을 보였다.
문밖의 두 翼廊에는 또 건륭이 새로 만든 석고 10坐를 두었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이 옛 석고에 의거했고, 그중에서 알아볼 수 있는 글자를 모아 가지고 별도로 10章을 이룬 다음, 주문을 새겨서 功德을 칭송하였다.
문 오른쪽에 있는 비석은 張照의 글씨로 韓昌黎의 石鼓詩를 새기고 상면에는 건륭의 어제시를 새겼다.
또 문 왼쪽에는 석고문을 중각한 비석이 있었다.
石鼓石鼓周王鼓 석고 석고 周 宣王의 석고여
屭贔節角傳千古 힘찬 절각이 천고에 전하네
勒成豐烈辭嚴密 풍성한 공렬을 새겨 이뤄서 사연이 엄밀하니
太平蒐獵完今睹 태평 시대에 사냥하던 일을 완연히 지금 보겠네
仲尼摭星遺羲娥 중니는 별만을 줍고 희아는 빠뜨렸으며
韓愈按歌嗟李杜 한유는 노래를 지을 제 이두를 슬퍼했네
上都鸞鳳無消息 상도의 난봉은 소식이 없고
珊瑚老柯啼腥雨 산호의 노가는 성우에 우네
日消月鑠神鬼秘 날과 달로 消鑠하매 신귀가 비장되고
埋沒村臼委泥土 민가 절구로 매몰되어 진흙에 버려졌네
終然寶鼎汾河出 마침내 보정이 분하에서 나오니
完如石經鴻都叟 석경 홍도수와 완연히 같네
剔魿太半蒼籀缺 분명치 않은 자획이 태반이고 전자 또한 파손되었는데
潘君短碣稽遺譜 반군의 단갈은 끼친 글을 상고케 하네
絶笑胡皇紀何績 우습구나 호황은 무슨 공적을 기록할 게 있을까
十章新鼓峙廊廡 십장의 새로 만든 석고가 낭무에 우뚝 섰네
한 단락은 내력을, 한 단락은 글자에 대해 썼으며, 한 단락은 初年의 일에 대해서 서술하였으니 대저 한 편의 전기이다.
서술과 의론이 사이사이 끼어 있어 이해하기 쉬우나, 다만 그 字句가 老練하여 쉽게 미치지 못할 뿐이다.


역주
역주1 石鼓 : 中國의 현존하는 石刻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모양이 북을 닮았다 해서 石鼓라 칭한다. 唐나라 초기에 陝西省 鳳翔 지역에서 출토된 것이 10개인데, 韋應物과 韓愈는 이를 두고 周 宣王이 岐陽에서 수렵할 때 새겨 놓은 것이라 하였다. 근자에 秦나라의 유물이라 고증되었는데, 춘추말년에서 전국시대에 이르는 시기로 추정된다.
역주2 張生 : 예전에는 張籍이라 하였으나, 근래에 한유의 문하생이었던 張徹로 고증되었다.
역주3 石鼓文 : 石鼓에서 拓本한 문자이다.
역주4 少陵‧謫仙 : 소릉은 杜甫가 살던 곳이며, 적선은 李白이다.
역주5 周綱 : 주나라의 기강과 법도, 정치질서를 말한다.
역주6 凌遲 : 衰落, 衰敗한다는 뜻이다.
역주7 四海沸 : 천하가 들끓어서 불안한 것이다.
역주8 揮天戈 : 하늘을 대신하여 창을 휘두르는 것이다.
역주9 明堂 : 천자가 政敎를 반포하고 제후의 朝會를 받으며 제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역주10 諸侯劍佩鳴相磨 : 天子의 明堂으로 朝貢 온 제후들이 많아, 서로 刀劍이 부딪치며 소리가 난다는 의미이다.
역주11 : 봄에 狩獵하는 것이다. 여름 사냥은 苗, 가을 사냥은 獮, 겨울 사냥은 狩라고 한다.
역주12 遮羅 : 막아서 포획한다는 뜻이다.
역주13 鐫功勒成 : 功業을 석고에 새긴다는 의미이다. ‘鐫’과 ‘勒’은 모두 ‘새기다’[刻]의 뜻이고, 成은 成就의 뜻으로 功과 같다.
역주14 山阿 : 산과 큰 언덕이다.
역주15 日炙 : 햇볕에 타는 것이다.
역주16 撝訶 : ‘撝’는 손가락질 하는 것이고 ‘訶’는 꾸짖는 것이다. 석고를 해치려는 자가 있으면 鬼物이 쫓아버렸다는 뜻이다.
역주17 隷與蝌 : 隷書와 蝌蚪文字이다. 隷書는 秦나라 때 程邈이 만들었다는 문자이고, 蝌蚪는 黃帝때 蒼頡이 새 발자국에서 암시를 얻어 만들었다는 문자로 모양이 올챙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蝌蚪는 올챙이이다.
역주18 快劍砍斷生蛟鼉 : 石鼓에 새겨져 있는 글씨의 획이 마치 예리한 칼로 살아 있는 교룡과 악어를 베어 놓은 것처럼 氣勢가 생동감 있다는 의미이다.
역주19 金繩鐵索鎖紐壯 : 석고문의 필봉이 금줄과 쇠사슬로 엮어 놓은 듯이 기이하고 굳세며, 글자의 結體가 고리가 이어진 듯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역주20 古鼎躍水龍騰梭 : 전하기를, 주 현왕 42년 九鼎이 泗水에 잠겼는데, 진시황이 당시 사람을 보내어 물속에 들어가 찾게 하였으나 구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龍騰梭’는 《晉書》 〈陶侃傳〉에, “侃이 어릴 적, 뇌택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그물에 북[織梭]이 걸려들었다. 이를 벽에다 걸어 놓았는데, 얼마 후 천둥치며 비가 쏟아지자 그 북이 절로 용이 되어 날아갔다.[侃少時 漁于雷澤 網得一織梭 以掛于壁 有頃雷雨 自化爲龍而去]”라는 고사에 보인다. 이 구절은 석고문의 字體가 변화무쌍하여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역주21 褊迫 : 편협하고 局促한 것이다.
역주22 委蛇 : 관대하고 종용한 모양이다.
역주23 : 지금의 섬서성 일대로, 석고가 발견된 곳이다.
역주24 羲娥 : 羲和와 嫦娥이다. 羲和는 본래 해 수레를 모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해를 의미한다. 嫦娥는 달을 의미한다. 여기서 星宿는 《詩經》의 시들을 가리키고 羲娥는 石鼓文을 가리킨다.
역주25 其年 : 이 해는 한유가 강릉의 法曹 參軍으로 있다가 國子監博士로 임명되어 장안으로 불려갔던 해로써, 元和 원년(806)이다.
역주26 右輔 : 《三輔黃圖》에, “태초 원년(공원전 104)에 渭城 서쪽은 右扶風에, 長安 동쪽은 京兆尹에, 長陵 북쪽은 左馮翊에 귀속시켰으니, 이를 일러 ‘三輔’라 했다.”라 하였다. 우보는 우부풍이며 鳳翔府가 된다. 한유의 친구가 鳳翔節度府에 종사하였으므로 ‘從軍在右輔’라 이른 것이다.
역주27 臼科 : 石鼓를 안전하게 둘 곳을 일컫는다.
역주28 祭酒(좨주) : 大學의 長老를 가리킨다.
역주29 太廟 : 天子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다.
역주30 郜鼎 : 郜國에서 만든 솥이다. 郜國은 지금의 山東省 城武縣이다. 《春秋左傳》 桓公 2년에, “여름 4월에 郜 땅의 큰 솥을 宋나라에서 취하여 戊申日에 太廟에 바쳤다.[夏四月 取郜大鼎于宋 戊申納太廟]”는 기록이 있다.
역주31 鴻都 : 홍도는 漢代에 서책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後漢書》 〈蔡邕傳〉에 의하면, 漢 靈帝 熹平 4年(175)에 蔡邕이 六經文字를 정정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황제가 허락하자 채옹이 스스로 비에 글씨를 쓰고 석공들에게 새기게 하여 태학문 밖에 세웠다. 이로부터 매일 석비를 관람하고 摹寫하려는 사람들로 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역주32 敲火 : 목동들이 무지하여 石鼓를 부싯돌 대용으로 쓴다는 뜻이다.
역주33 俗書 : 심덕잠의 《唐詩別栽集》에, “예서가 세간에서 유행했는데, 고전과는 구별되었으므로 속서라 이른 것이다. 왕우군을 폄하하려는 뜻은 없다.[隷書風俗通行 別于古篆 故云俗書 無貶右軍意]”라 하였다. 俗書는 古書에 대칭되는 말로서, 여기의 ‘俗’은 時俗의 ‘俗’이지 俚俗의 ‘俗’이 아니므로 貶意가 아니다.
역주34 博白鵝 : 白鵝와 바꾼다는 뜻이다. 《晉書》 〈王羲之傳〉에 의하면, 왕희지는 거위를 좋아하여 직접 《道德經》을 써주고 山陰道士의 거위와 맞바꾸었다고 한다.
역주35 : ‘任’으로 되어 있는 本도 있다.
역주36 懸河 : 구변에 재주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晉書》 〈郭象傳〉에, “太尉 王衍이 매번 이르기를, ‘곽상이 말하는 것은 현하의 물이 쏟아져 마르지 않는 것과 같다.’ 했다.[王衍每云 聽象注而不竭]”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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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69 석고가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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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69 석고가 624

당시삼백수(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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