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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2)

당시삼백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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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禹錫
王氣黯然收
沈江底
一片
人世幾回傷
山形依舊枕寒流
蕭蕭蘆荻秋
[集評]○ 劉賓客金陵懷古云 潮滿冶城渚 日斜征虜亭 蔡州新草綠 幕府舊煙靑 興廢由人事 山川空地形 後庭花一曲 哀怨不堪聽
此所謂四人探驪夢得得珠者耶
[詩話 以王濬樓船下益州一篇 爲夢得得珠者] - 朝鮮 李齊賢, 《櫟翁稗說》 後集一
○ 長慶中 元微之夢得韋楚客同會樂天舍 論南朝興廢 各賦金陵懷古詩
劉滿引一盃 飮已卽成曰
王濬樓舡下益州 金陵王氣黯然收 千尋鐵鎖沈江底 一片降幡出石頭 人世幾回傷往事 山形依舊枕江流 從今四海爲家日 故壘蕭蕭蘆荻秋
白公覽詩曰 四人探驪龍 子先獲珠 所餘鱗爪 何用耶 於是罷唱 - 宋 計有功, 《唐詩紀事》 卷39
○ 前解先寫金陵古 後解獨寫懷
前解:王濬下益州 只加樓船二字 便覺聲勢之甚
所以寫王濬必要聲勢之甚者 政文欲反襯金陵慘阻之甚也
從來甲子興亡 必有如此相形 正是眼看不得
黯然收 收字妙 更不多費筆墨 而當時面縛出降 更無半策氣色如畵
三四 鐵鎖沈江底 降旗出石頭 此卽詳寫黯然收三字也
看他又加千尋字 一片字 寫前日鎖江鎖得盡情 此日降晉又降得盡情 以爲一笑也

後解:看他如此轉筆 于律詩中眞爲象王回身 非驢所擬
而又隨手揷得幾回二字 便見此後興亡 亦不止孫皓一番 直將六朝紛紛 曾不足當其一歎也
結用無數衰颯字 如故壘 如蕭蕭 如蘆荻 如秋 寫當今四海爲家 此又一奇也 - 淸 金聖嘆, 《金聖歎選批唐才子詩》 卷5下
○ 專擧吳亡一事 而南渡五代以第五句含蓄之 見解旣高 格局亦開展動宕 - 淸 査愼行, 《瀛奎律髓》 卷3에서 인용
○ 第四句但說得吳 第五句七字括過六朝 是爲簡練 第六句一筆折到西塞山 是爲圓熟 - 淸 紀昀, 《瀛奎律髓刊誤》
○ 劉賓客西塞山懷古 似議非議 有論無論 筆著紙上 神來天際 氣魄法律 無不精到 洵是此老一生傑作 自然壓倒元白 - 淸 薛雪, 《一瓢詩話》
○ 七律章法 宜田尤善言之
只就一首 如劉夢得西塞山懷古白香山所讓能 其妙安在
宜田云 前半專敍孫吳 五句以七字總括東晉宋齊梁陳五代 局陣開拓 乃不緊迫
六句始落到西塞山 依舊二字有高峰墮石之捷速
七句落到懷古 今逢二字有居安思危之遙深
八句蘆荻是卽時景 仍用故壘 終不脫題
此摶結一片之法也
至于前半一氣呵成 具有山川形勢 制勝謨略
因前驗後 興廢皆然
不只以幾回二字輕輕兜滿 何其神妙 - 淸 方世擧, 《蘭從詩話》
○ 劉禹錫西塞山懷古
王濬樓船下益州 金陵王氣黯然收 興衰之感宛然
千尋鐵鎖沈江底 山形依舊枕寒流 那管人間爭鬪
今逢四海爲家日 故壘蕭蕭蘆荻秋 太平旣久 向之霸業雄心消磨已淨
此方是懷古勝場
七律如此做自好 且看他不費氣力處 - 淸 張謙宜, 《繭齋詩談》 卷8
○ 劉賓客西塞山懷古之作 極爲白公所賞 至於爲之罷唱
起四句 洵是傑作 後四則不振矣
此中唐以後 所以氣力衰颯也
固無八句皆緊之理 然必鬆處 正是緊處方有意味
如此作結 毋乃飮滿時思滑之過耶
荊州道懷古一詩 實勝此作 - 淸 翁方綱, 《石洲詩話》 卷2
○ 夢得與元微之韋楚客白樂天同賦此題
夢得詩先成 樂天覽之曰 四人共探驪龍 君已得珠 余皆鱗爪矣 遂罷唱
此詩乍觀之 前半首不過言平吳事 後半首不過撫今追昔之意
詩誠佳矣 何以元白高才 皆斂手回席
夢得必有過人之處
評此詩者 謂其起二句如黃鵠高擧 見天地方圓 三四句見長江地利之不足恃
所評誠是 然此詩所以推爲絶唱 未有發明之者
余謂劉詩與崔顥黃鶴樓詩異曲同工
崔詩從黃鶴仙人着想 前四句皆言仙人乘鶴事 一氣貫注 劉詩從西塞山鐵鎖橫江着想 前四句皆言王濬平吳事 亦一氣貫注
非但切定本題 且七律能四句專詠一事 而勁氣直達者 在盛唐時 沈佺期龍池篇 李太白鸚鵡篇外 罕有能手 夢得獨能方美前賢
故樂天有驪珠之嘆也
五六句之用意 崔以題爲黃鶴樓 故實寫樓中所見 劉以題爲西塞山懷古 故表明懷古之意
藻不妄抒 劉與崔亦同
此二句韻致殊雋 與孟浩然登峴首山詩同工
且六句用一枕字 以東西梁山 夾江對鎖 山形平臥而非突兀 枕字頗能有之
其末句用意 崔則言登望而思鄕國 劉則言承平不用防江 皆別出一意 以收束全篇
余故謂崔劉二詩其佳處同 其格調亦同 所以推爲絶唱也 - 現代 兪陛雲, 《詩境淺說》


〈西塞山에서 회고하다〉
유우석
王濬의 樓船이 익주에서 내려오니
금릉의 왕기는 빛을 잃고 거두어지네
천길 쇠사슬 물밑에 잠기니
한 조각 항복 깃발 석두성에서 나온다
인간 세상 지난 일을 얼마나 많이 아파했는데
산세는 예전 그대로 찬 강물을 베고 있네
이제는 온 사방이 한집이 된 때
옛 보루만 가을 억새 속에 쓸쓸하다
[集評]○ 유빈객(劉禹錫)의 〈金陵懷古〉 시에 “冶城의 물가엔 潮水가 찼고, 征虜亭에는 햇살이 비꼈네. 채주엔 풀빛이 새롭고, 막부엔 예전처럼 푸른 연기 이네. 흥폐는 인사에 말미암는 것인데, 산천은 덧없이 예대로구나. 후정화 한 곡조가, 애절하여 들을 수 없네.[潮滿冶城渚 日斜征虜亭 蔡州新草綠 幕府舊煙靑 興廢由人事 山川空地形 後庭花一曲 哀怨不堪聽]”라고 하였는데,
[《詩話》에 “‘왕준의 누선이 익주에서 내려오니[王濬樓船下益州]’ 한 편은 夢得이 얻은 여의주이다.”라고 하였다.]
○ 長慶 年間에 元微之(元稹)‧夢得(유우석)‧韋楚客이 樂天(白居易)의 집에서 함께 모여 南朝의 흥망을 논하며 각각 〈금릉회고〉 시를 지었다.
유우석이 한 잔을 가득 따라 마셨는데, 다 마시자
‘王濬樓舡下益州 金陵王氣黯然收 千尋鐵鎖沈江底 一片降幡出石頭 人世幾回傷往事 山形依舊枕江流 從今四海爲家日 故壘蕭蕭蘆荻秋’라는 시를 지었다.
白公(白居易)이 시를 보고는 “네 사람이 驪龍을 탐색하는데, 그대가 먼저 여의주를 얻었으니 나머지 비늘과 손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시 짓는 것을 그만두었다.
○ 전반부 4구의 풀이에서는 금릉의 ‘옛날[古]’을 먼저 묘사했고, 후반부 4구의 풀이에서는 ‘생각[懷]’만을 묘사했다.
전반부 4구의 풀이:‘王濬下益州’에 단지 ‘樓船’ 두 자를 더했을 뿐인데, 기세가 성대함을 알 수 있다.
왕준에게 반드시 굉장한 기세가 필요하다고 묘사한 까닭은 바로 금릉 지역이 대단히 험고하다는 것을 역으로 부각시키고자 해서이다.
예전에는 세월에 따른 흥망을 말할 때 이와 같은 형상이 반드시 있어야 했는데, 바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黯然收’의 ‘收’자가 묘하니, 더 이상 필묵을 허비하지 않고도, 당시 스스로를 묶고 항복하러 나오려 할 때에 궁여지책조차 없었던 모습이 그림과 같다.
3‧4구의 ‘鐵鎖沈江底 降旗出石頭’는 ‘黯然收’ 석 자를 자세하게 묘사한 것이다.
거기에 또 ‘千尋’자와 ‘一片’자를 더한 것을 보면, 전날에는 ‘강을 봉쇄한다.[鎖江]’고 ‘봉쇄[鎖]’에 전심전력하더니, 이날에는 ‘진에 항복한다.[降晉]’고 또 ‘항복[降]’에 온 마음을 다 쏟았음을 표현했으니, 한 번 웃을 일로 여긴 것이다.

후반부 4구의 풀이:그가 이처럼 붓을 휘두르는 것을 보니, 율시 가운데 부처[象王]가 변신하는 것처럼 자유자재라 노새[驢騾]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또 손 가는대로 ‘幾回’ 두 자를 끼워넣어 이후의 흥망을 드러내었는데, 역시 孫皓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곧 이어진 六朝 역시 분분하였으니 한번 탄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結句에서 ‘故壘’, ‘蕭蕭’, ‘蘆荻’, ‘秋’와 같은 쇠락하고 스산한 글자를 여러 번 사용하여, 지금 사해가 한집안이 되었음을 묘사하였으니 이 또한 한 가지 기이함이다.
○ 오로지 吳나라가 망한 한 가지 일만 들었는데 가 제5구에 함축되어 있다. 식견이 높고, 구성과 격식도 탁 트이고 대범하다.
○ 제4구는 오나라 일만 말하였다. 제5구 일곱 자는 六朝를 포괄하였으니 이는 簡練함이 되고, 제6구는 붓을 꺾어 서새산에 이르렀으니 이는 圓熟함이 된다.
○ 劉賓客(유우석)의 〈서새산회고〉는 議인 듯하나 議가 아니고, 論이 있는 듯하면서도 論이 없다. 붓으로 종이 위에 쓴 것이지만 정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기백과 격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니, 참으로 이 노인 일생의 걸작으로 자연스레 元稹과 白居易를 압도한다.
○ 칠언율시의 章法은 宜田(方觀承)이 더욱 그것을 잘 말하였다.
단지 한 수를 들자면, 劉夢得(유우석)의 〈西塞山懷古〉에서 白香山(白居易)이 양보한 그 묘함은 어디에 있는가?
宜田은 “전반부에서는 오로지 孫氏의 오나라만 말하다가 5구에서 일곱 자로 東晉‧宋‧齊‧梁‧陳 五代를 포괄하였으니, 그 구성이 탁 트여 긴박하지 않다.
6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새산을 언급했는데, ‘依舊’ 두 자는 높은 봉우리에서 떨어진 돌처럼 날램이 있다.
7구는 ‘懷古’를 말하였는데, ‘今逢’ 두 자는 편안하게 거할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는 심원함이 있다.
8구의 ‘蘆荻’은 곧 계절인데, ‘故壘’를 사용하여 끝내 제목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일관되게 집중시키는 법이다.
시의 전반부는 기세가 창달해 산천의 형세와 승리를 이루는 모략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앞일을 통해 뒷일을 증험해보면 흥폐는 모두가 그러하다.
따라서 아래의 ‘幾回’ 두 자는 단지 가볍게 채워놓은 것이 아니니, 얼마나 신묘한가!”라고 하였다.
○ 유우석의 〈서새산회고〉에서
‘王濬樓船下益州 金陵王氣黯然收’는 흥망성쇠의 감정이 완연하고
‘千尋鐵鎖沈江底 山形依舊枕寒流’는 인간세상의 쟁투와 관련이 있고,
‘今逢四海爲家日 故壘蕭蕭蘆荻秋’는 태평시절이 이미 오래되어 패업을 이루려는 웅대한 마음이 깨끗이 다 없어졌으니,
여기가 바로 懷古하기에 좋은 곳이다.
칠언율시가 이처럼 훌륭하니, 또 그가 기력을 허비하지 않았음을 알겠다.
○ 劉賓客(유우석)의 〈서새산회고〉는 白公(白居易)에게 지극히 칭송을 받았으니, 白公은 이 때문에 시 짓기를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앞의 네 구는 참으로 걸작인데, 뒤의 네 구는 떨치지 못했다.
이는 중당 이후 기력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본디 여덟 구가 다 긴박할 이유는 없고 반드시 느슨한 곳이 있어야 바로 긴박한 곳도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이 끝을 맺은 것은 술을 많이 마셔서 생각이 부드러워진 탓이 아니겠는가?
그의 〈荊州道懷古〉가 참으로 이 작품보다 낫다.
○ 夢得(유우석)은 元微之(원진), 韋楚客, 白樂天(白居易)과 함께 이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몽득의 시가 먼저 이루어지자, 낙천이 이것을 보고는 “네 사람이 함께 驪龍을 탐색하는데, 그대가 이미 여의주를 얻었으니 우리들의 것은 모두 비늘과 손톱이다.”라고 하며 드디어 시 짓는 자리를 끝냈다.
이 시를 언뜻 보면 전반부는 오나라를 평정한 것에 불과하고, 후반부는 현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뜻에 불과하다.
시가 참으로 뛰어나지만, 어찌 높은 재주를 가진 원진과 白居易가 모두 공경을 표하며 자리를 양보했겠는가?
몽득에게는 분명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를 평하는 자들은 첫 두 구는 黃鵠이 높이 날아 천지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고, 3‧4구는 長江의 이점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평가는 참으로 옳지만, 그렇다고 이 시가 절창으로 추앙되는 이유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나는 유우석의 시가 최호의 〈황학루〉와 곡조는 다르지만 공교로움은 같다고 생각한다.
최호의 시는 黃鶴仙人에 착안하여 앞의 네 구가 모두 선인이 학을 탄 일을 말하였으니 한 기운으로 관통하고, 유우석의 시는 서새산의 쇠사슬을 강에 걸쳐둔 것에 착안하여 앞의 네 구가 모두 왕준이 오나라를 평정한 일을 말하였으니 또한 한 기운으로 관통한다.
본 제목에 딱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또 칠언율시 중에 네 구로 하나의 일만을 읊으면서 굳센 기운이 곧장 이른 것으로는 성당 때 沈佺期의 〈龍池篇〉과 李太白(李白)의 〈鸚鵡篇〉 외에는 능숙한 자가 드물었는데 몽득만이 전현들의 아름다움에 비견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몽득이 여의주를 얻었다고 낙천이 찬탄한 것이다.
5‧6구에서 뜻을 쓴 것은, 최호는 제목을 ‘黃鶴樓’라고 하였기에 누에서 본 것을 실제로 그렸고, 유우석은 제목을 ‘西塞山懷古’라고 하였기에 회고의 뜻을 나타내었다.
수사를 함부로 풀어내지 않은 것은 유우석의 것과 최호의 것이 또한 같다.
이 두 구의 운치는 자못 빼어나 맹호연의 〈登峴首山〉처럼 정교하다.
또 6구에서 ‘枕’ 한 자를 썼는데, 梁山을 동서로 하고 강을 끼고 쇠사슬을 대하였으니 산세가 평평하여 우뚝 솟은 것이 아니므로 ‘枕’자가 자못 잘 되었다.
마지막 구에서 최호는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함을 말하였는데, 유우석은 태평한 시절에 강을 방비하지 않았음을 말하였으니 모두 각자의 뜻을 드러내어 시 전체를 거두어 묶었다.
내가 이 때문에 최호와 유우석의 두 시는 장처가 같다고 말한 것인데, 그 격조 또한 같으니 이 때문에 절창으로 추앙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西塞山懷古 : 서새산은 지금의 湖北省 黃石市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데다가 강을 끼고 있어 삼국시대 吳나라의 서쪽 요새였다. 제목이 〈金陵懷古〉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2 王濬樓船下益州 : ‘王濬’은 晉나라의 益州刺史였는데, 晉이 吳를 칠 때에 龍驤將軍으로 戰艦을 만들어 수군을 이끌고 내려갔다. ‘樓船’은 왕준이 만든 전함을 가리킨다. 晉 武帝가 吳를 치려고 왕준에게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가 만든 배는 서로 연결하면 크기가 120步이고 수용인원이 2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나무로 성을 만들어 망루를 세웠으며, 그 위에서는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 《晉書》 〈王濬傳〉에 자세히 보인다. ‘益州’는 진나라의 治所로 지금의 四川省 成都市이다. 晉 太康 元年(280)에 성도를 출발하여 오나라를 쳤다.
역주3 金陵 :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로, 삼국시대 吳나라의 서울이었다.
역주4 千尋鐵鎖 : 오나라는 진나라 군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긴 쇠사슬로 강을 가로막았는데, 왕준은 화력을 이용해 이 쇠사슬을 부수고 강물에 빠뜨렸다. ‘尋’은 길이 단위로, 8척이다.
역주5 降幡 : 항복을 표시하는 깃발이다. 왕준의 수군이 금릉에 이르렀을 때, 吳王 孫皓가 항복하였고 吳나라는 망하였다.
역주6 石頭 : 石頭城으로 石首城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淸凉山에 있다. 여기서는 오나라의 수도를 뜻한다.
역주7 往事 : 吳와 東晉, 宋‧齊‧梁‧陳 등 금릉에 나라를 세웠던 왕조들의 흥망성쇠를 말한다.
역주8 從今 : ‘今逢’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9 四海爲家 : 사해가 한집안이 되었다는 것은 천하가 통일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주10 故壘 : 버려진 堡壘인데, 여기서는 서새산에 있는 오나라의 요새를 지칭한다.
역주11 네 사람이……얻었다는 것 : 劉禹錫‧元稹‧韋楚客‧白居易의 일화로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집평을 참조하기 바란다.
역주12 南渡 : 南遷과 같다. 晉 元帝와 宋 高宗이 모두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옮겨가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南渡’라 한다.
역주13 五代 : 東晉‧宋‧齊‧梁‧陳 5代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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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4 서새산회고 187

당시삼백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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