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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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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甫(712~770)
詩聖으로 불리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李白과 병칭하여 李杜라고 일컫는다. 또 ‘시로 쓴 역사’라는 뜻으로 ‘詩史’라 불리기도 하는데, 開元 연간의 盛世와 수많은 전란을 모두 겪었던 만큼 급변하는 사회현실, 불안정한 정세, 백성들의 고통 등이 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두보의 자는 子美이며, 본적은 湖北省 襄陽이지만, 河南省 鞏縣에서 태어났다. 35세 이전까지는 吳越 지방과 齐赵 지방 등을 유람하며 이백 등과 교유하였다. 35세 되던 해인 天寶 5년(746) 장안으로 돌아와, 수년 동안 벼슬을 구하며 장안 부근의 少陵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천보 10년(751) 40세에 바친 〈三大禮賦〉가 玄宗의 눈에 띄어 集賢殿待制를 명받았지만 등용되지는 못했고, 천보 14년(755) 雲南 河西縣尉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여 右衛率府의 兵曹參軍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가족을 鄜州에 옮겨 놓고 숙종을 호종하러 가던 중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肅宗의 行在所로 나아가 배알한 공으로 左拾遺가 되었다. 그러나 宰相 房琯의 무죄를 상소하다 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되었다. 乾元 2년(759) 48세 때 關中과 三輔 지역에 대기근이 들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秦州로 향하였다. 成都에 정착하여 浣花溪에 草堂을 짓고 한동안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 후 段子璋과 徐知道의 반란, 토번의 침입 등으로 蜀 지방이 시끄러워지자 劍南東川節度使 嚴武의 參謀와 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다. 이 때문에 ‘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永泰 元年(765) 嚴武가 세상을 떠나자 성도를 떠나 雲安에 잠시 머물다 다음해 夔州로 옮겨간다. 大曆 3년(768) 협곡을 나와 長江일대를 배로 떠돌다가, 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病死하였다.
《杜工部集》 《草堂詩箋》 등의 시집이 있으며, 3천 수에 가까운 시 중 1,400여 수가 전하고 있다. 《당시삼백수》에 수록된 작품으로 〈望岳〉 〈贈衛八處士〉 〈佳人〉 〈夢李白 一‧二〉 〈韋諷錄事宅觀曹將軍畫馬圖〉 〈丹靑引贈曹覇將軍〉 〈寄韓諫議〉 〈古柏行〉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幷序〉 〈兵車行〉 〈麗人行〉 〈哀江頭〉 〈哀王孫〉 〈月夜〉 〈春望〉 〈春宿左省〉 〈至德二載 甫自京金光門出 問道歸鳳翔 乾元初 從左拾遺移華州掾 與親故別 因出此門 有悲往事〉 〈月夜憶舍弟〉 〈天末懷李白〉 〈奉濟驛重送嚴公四韻〉 〈別房太尉墓〉 〈旅夜書懷〉 〈登岳陽樓〉 〈蜀相〉 〈客至〉 〈野望〉 〈聞官軍收河南河北〉 〈登高〉 〈登樓〉 〈宿府〉 〈閣夜〉 〈詠懷古跡 一‧二‧三‧四‧五〉 〈八陣圖〉 〈江南逢李龜年〉 등 총 39수가 있다.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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