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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2)

당시삼백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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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陵의 鳳凰臺에 올라〉
李白
이백
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더니
鳳去臺空江自流
봉황은 가고 대는 비고 강물만이 흐르네
花草埋幽徑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후미진 길가로 묻혀지고
成古丘
진대의 衣冠들은 古塚을 이루었네
半落靑天外
三山은 푸른 하늘 밖에 아득하고
두 강줄기는 백로주로 나뉘었다
온통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렸으니
長安不見使人愁
장안이 보이지 않아 시름겹게 하는구나
[通釋] 옛적 봉황이 노닐던 봉황대, 봉황은 다 날아가고 봉황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대 아래 강물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옛날 이곳에 터를 잡았던 오나라 궁궐의 화려한 꽃과 풀들은 이미 후미진 길가에 묻혔고, 晉나라의 권신귀족은 古墳으로 남아 있다.
지금의 금릉은 삼산의 세 봉우리가 하늘 밖에 아득하고, 강물은 그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백로주 때문에 두 줄기로 나뉘어 흐른다. 뜬구름이 온통 밝은 해를 가려 임금 계신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 아, 바라보고 바라봐도 보이질 않으니, 이 시름 어찌 풀 것인가.
[解題] 격률에 얽매이기 싫어했던 李白의 작품은 칠언율시의 비중이 높지 않은데, 이 시는 그의 칠언율시 중 가장 많이 회자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저작시기가 정확하지 않으나,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上元 2년, 761)에 지은 것이라는 설과 天寶 年間 揚州 일대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내용상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이 시는 육조시대 王城의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있다. 전반부는 시인이 봉황대에서 내려다본 정경을 통해 상전벽해의 감회를 이끌어내고 있는데, 이는 제3‧4구의 황폐해진 吳나라의 궁궐터와 東晉 때 권신들의 무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제5구부터는 현재의 경치를 읊으면서 장안이 보이지 않음을 탄식하고 있는데, 제7구의 ‘뜬구름에 가리운 해’는 李林甫, 楊國忠 등 간신들이 전횡하는 조정을 비유한 것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걱정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칠언율시의 절창으로 손꼽히는 崔顥의 〈黃鶴樓〉와 많이 견주어지는데, 최호가 담담하게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 것에 비해, 李白의 이 시는 당시 정치 현실에 대한 분개와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集評]○ 金陵鳳凰臺在城之東南 四顧江山 下窺井邑 古題詠惟謫仙爲絶唱 - 宋 張表臣, 《珊瑚鈎詩話》 卷1
[集評]○ 금릉의 봉황대는 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사방은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아래로는 농토와 도읍이 있다. 옛 題詠詩 중에 오직 謫仙(李白)의 것이 절창이다.
○ 古人服善
○ 고인들은 다른 사람의 장점에 佩服한다.
太白過黃鶴樓 有眼前有景道不得 崔顥題詩在上頭之句 至金陵 遂爲鳳凰臺詩以拟之 今觀二詩 眞敵手棋也
李白이 황학루를 지나면서 “눈앞의 경치를 말로 할 수 없는데, 최호가 쓴 시가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을 짓고 금릉에 이르러 드디어 〈봉황대〉 시를 지어서 〈황학루〉 시에 견주었는데, 지금 이 두 시를 보니, 참으로 맞수의 대국이다.
若他人 必次顥韻 或于詩板之傍別着語矣 - 宋 劉克莊, 《後村詩话》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최호의 운에 차운하거나 혹은 시가 적혀 있는 현판 옆에 다른 말을 붙였을 것이다.
○ 太白此詩與崔顥黃鶴樓相似 格律氣勢未易甲乙
○ 太白(李白)의 이 시와 최호의 〈황학루〉는 서로 비슷한데, 격률과 기세가 우열을 따지기 쉽지 않다.
此詩以鳳凰臺爲名 而詠鳳凰臺不過起語兩句已盡之矣
이 시는 ‘봉황대’로 제목을 삼았지만, 봉황대를 읊은 것은 앞의 2구에 불과한데 두 구로 다 표현하였다.
下六句乃登臺而觀望之景也
아래의 6구는 곧 대에 올라 바라본 경치이다.
三四懷古人之不見也 五六七八詠今日之景 而慨帝都之不可見也 登臺而望 所感深矣
3‧4구는 고인이 보이지 않음을 가슴 아파하고 5‧6‧7‧8구는 지금의 경치를 읊으면서 황제의 수도가 보이지 않음을 개탄하였으니, 대에 올라 바라보면서 느낀 바가 깊다.
金陵建都自吳始 三山二水白鷺洲 皆金陵山水名
금릉에 도읍을 세운 것은 吳나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三山‧二水‧白鷺洲는 모두 금릉의 산과 물의 이름이다.
金陵可以北望中原 唐都長安 故太白以浮雲蔽日不見長安爲愁焉 - 元 方回, 《瀛奎律髓》 卷一登覽類
금릉에서는 북쪽으로 중원을 바라볼 수 있는데, 당나라는 장안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태백이 뜬구름이 해를 가려 장안을 볼 수 없다고 근심하였던 것이다.
○ 崔顥黃鶴樓 便肆意爲之 白於金陵鳳凰臺效之 最劣 - 淸 毛奇齡, 《唐七律選》
○ 최호의 황학루는 곧 마음 가는대로 지은 것이다. 李白이 〈금릉봉황대〉에서 그것을 본떴으나, 가장 뒤떨어졌다.
○ 從心所造 偶然相似 必謂摹仿司勛 恐屬未然 - 淸 沈德潜, 《唐詩別裁》 卷13
○ 마음 가는대로 지은 것인데 우연히 서로 비슷하다면, 반드시 司勛(최호)을 모방했다고 하겠지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 浮雲蔽日 長安不見 借晉明帝語
○ 뜬구름이 해를 가려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晉 明帝의 말을 빌린 것이다.
影出浮雲 以悲江左無人 中原淪陷
그림자가 뜬구름에서 나옴은 에 사람이 없고 중원이 쇠퇴함을 슬퍼한 것이다.
使人愁三字 總結幽徑古丘之感 與崔顥黃鶴樓落句 語同意別
‘使人愁’ 석 자는 ‘幽徑’과 ‘古丘’의 느낌을 총결하였는데, 최호가 지은 〈황학루〉의 마지막 구와 시어는 같으나 뜻은 다르다.
宋人不解此 乃以疵其不及顥作 覿面不識 而强加长短 何有哉
송나라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백의 시가 최호의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고 흠잡았는데, 이는 얼굴만 알고 마음은 알지 못하면서 억지로 우열을 따진 것이니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太白詩是通首混收 顥詩是扣尾掉收
이태백의 시는 시 전체를 혼연하게 거두어들였지만 최호의 시는 끝을 마무리하며 거두어들였다.
太白詩自十九首來 顥詩則純爲唐音矣 - 淸 王夫之, 《唐詩評選》
이태백의 시는 〈〉에서 유래하였지만, 최호의 시는 순전히 당음이다.
역주
역주1 金陵 :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이다. 六朝時代의 晉‧宋‧齊‧梁‧陳 등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역주2 鳳凰臺 : 臺의 이름이다. 《宋書》 〈符瑞志〉와 《太平寰宇記》의 기록에 의거하면, 南朝 宋나라 元嘉 年間에 공작과 비슷하고 오색 빛이 나며 음성이 부드러운 기이한 새들이 날아와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이 새를 봉황이라고 여겨 산 위에 대를 쌓고 ‘봉황대’로 불렀다고 한다. 옛터는 지금의 남경시 봉황산에 있다
역주3 吳宮 : 삼국시대 孫權이 금릉에 도읍하고 지은 宮室이다.
역주4 晉代衣冠 : 東晉의 권문세족을 의미한다.
역주5 三山 : 산 이름이다. 지금의 남경시 서남쪽 長江 가에 세 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어 ‘三山’이라 불린다.
역주6 二水中分白鷺洲 : ‘二水中分’은 秦淮江이 금릉의 동남쪽에서 성 안으로 흘러들어가 금릉을 관통한 뒤, 서쪽에서 장강으로 유입된다. 백로주는 그 사이에 있고, 그곳에서 강물이 두 줄기로 나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白鷺洲’는 백로가 많이 모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역주7 總爲浮雲能蔽日 : ‘總爲’는 모두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浮雲能蔽日’은 임금이 소인배들에게 가려졌음을 의미하는데, ‘浮雲’은 조정의 권신과 간신을, ‘해’는 당 현종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8 江左 : 六朝時代의 晉‧宋‧齊‧梁‧陳은 모두 江左에 도읍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통치 지역을 ‘강좌’라고 불었다. 이 지역은 양자강 하류에 위치하기에 ‘江左’라 부른 것이다.
역주9 十九首 : 《文選》 권29 〈雜詩部〉에 수록된 작자미상의 五言古詩 19수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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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5 등금릉봉황대 152

당시삼백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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