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少陵有云 水流心不競 雲在意俱遲 知詩者 於此不可以無語
公曰 此所謂
者矣 - 宋 蔡正孫, 《詩林廣記》 前集 卷5
○ 後湖集云 中歲頗好道 晩家南山垂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值林叟 談笑無回期
未嘗不讀王摩詰詩 固知此老胷次 定有泉石膏肓之疾 - 宋 胡仔, 《苕溪漁隱叢話前集》 卷15
○ 行所無事 一片化機 - 淸 沈德潛, 《唐詩別裁集》 卷9
○ 此種皆熔煉之至 渣滓俱融 涵養之熟 矜躁盡化 而後天機所到 自在流出 非可以摹似而得者
無其熔煉涵養之功 而以貌襲之 卽爲窠臼之陳言 敷衍之空調
此亦如禪家者流 有眞空頑空之別 論詩者不可不辨 - 淸 紀昀, 《瀛奎律髓彙評》
五言如孟浩然過故人莊 王維終南別業 又喜祖三至留宿 李白送友人 又牛渚懷古 常建題破山寺後禪院 宋之問陸深山莊
此皆不事工巧極自然者也 - 淸 冒春荣, 《葚原詩說》 卷1
[集評]○ 趙章泉의 《詩法》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王摩詰(왕유)의 ‘가다가 물 다하는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 이는 것 바라본다.[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와
杜少陵(杜甫)의 ‘물은 흘러도 마음은 다투지 않고, 구름 머무니 뜻도 더불어 느긋하다.[水流心不競 雲在意俱遲]’(〈江亭〉)는 시를 아는 자라면 이에 대해 말이 없을 수 없다.
혹자가 小詩로 답하기를 ‘물이 다하고 구름이 읾은 애초에 의도가 없었고, 구름이 머물고 물이 흐름은 끝내 마음이 있음이라.
만약 있고 없고로 판별치 않는다면, 혼연히 누가 백아의 琴을 알리오.[水窮雲起初無意 雲在水流終有心 倘若不將無有判 渾然誰會伯牙琴]’라고 하니,
공이 ‘이는 이른바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後湖集》에 “中歲頗好道 晩家南山垂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值林叟 談笑無回期”라고 하였는데,
이 시의 意境을 만든 오묘함은 조물주와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될 정도이니, 어찌 다만 詩中有畫일 뿐이겠는가?
그 시를 보면 매미가 塵埃 속에서 허물을 벗고 萬物의 바깥에서 노니는 것임을 알겠다.
山谷老人(黃庭堅)이 말하기를 “내가 근래에 산에 오르고 물가에 가기도 하였다.
일찍이 왕마힐의 시를 읽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참으로 이 노인의 흉중에
이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 가는 곳마다 일삼는 바가 없으니, 한 편의 조화의 機微이다.
○ 이러한 종류는 모두 정련함이 지극하여 찌꺼기가 모두 녹고, 함양함이 무르익어 오만과 성급함이 다 순화된 후 天機가 이르러 절로 흘러나온 작품이니, 모방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련하고 함양하는 공이 없이 모양으로만 그것을 본뜬다면, 舊套의 진부한 말이 되고 부연하는 헛된 음조가 된다.
거짓으로 盛唐을 칭탁하던 자들이 이 병폐를 많이 범했다.
이는 또한 禪家의 무리에게
의 구별이 있는 것과 같으니, 시를 논하는 자들은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 시는 자연스러움을 최상으로 삼고 공교로움이 그 다음이다.
공교로움이 지극하면 비로소 자연스러운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나 자연스러움의 묘가 반드시 공교로운 것은 아니다.
高廷禮(高棅)가 老杜(杜甫)를 大家의 반열에 놓고
의 항목에 놓지 않지 않은 것은 미묘한 뜻이다.
오언시에 있어 孟浩然의 〈過故人莊〉, 王維의 〈終南別業〉과 〈喜祖三至留宿〉, 李白의 〈送友人〉과 〈牛渚懷古〉, 常建의 〈題破山寺後禪院〉, 宋之問의 〈陸深山莊〉은
모두 공교로움을 일삼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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