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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2)

당시삼백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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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懷古跡 其三〉
杜甫
群山萬壑赴
生長尙有村
一去
獨留向黃昏
春風面
空歸
分明怨恨曲中論
[集評] ○因昭君村而悲其人
昭有國色 而入宮見妒
公亦國士 而入朝見嫉 正相似也 悲昭以自悲也
紫臺用江淹賦中語 猶云紫禁
連今作㜕締姻也
旣連朔漠 而冢留獨靑 知其雖死不忘故土也
至今畵圖 可識者乃其面耳 不識魂猶南歸 深夜月明 若聞環佩之聲焉
月夜當作夜月 不但對春風 而與夜月具來 意味逈別
千歲猶存琵琶 猶存胡中之語 蓋寫此怨恨于曲中 而人當自解也 -明 王嗣奭,《杜臆》卷8
○ 詠明妃 爲千古負才不偶者十分痛惜
前解 欲說荊門有明妃村
先看群山萬壑句 用形家尋龍向穴之法 大奇
盖聳起則爲山 跌下則爲壑 聳起則又爲山 無量劫來 天地如此浩浩也
于其間有楚 楚山楚水 起伏無數 遙遙直走千里萬里 而後有荊門 而後荊門有村 而後村中有明妃
然則此明妃 其爲天地間氣特鍾可知
今明妃往矣 村則尙有
尙有村者 言但有村而已矣
三四承上村字 言明妃當日雖生長此村 而後不復爲村有者 爲入漢宮也 乃至明妃旣入漢宮 幷不復爲漢宮有者 則爲去紫臺也
夫明妃而去紫臺 明妃之踪迹尙可問也
明妃去紫臺 遂連朔漠 明妃之踪迹則不可問也
嗚呼 其骨旣朽 其冢猶靑 絶代佳人 湮沒于此
視當年生長之難 辜負多少
後解 從上轉下 轉出從來棄才之主一面照膽鏡來
眞才貴于確知確見 原無按圖索駿之事
況元帝以漢天子擇美婦人 則後庭春風之面 何難一一盡見 一一盡識
而顧憑賤工之手以爲進退 可鄙也
探帝之意 不過爲後宮充斥 欲盡識其面 其數何啻千萬
姑且案圖召幸 貪一時省事而已
因此一省之故 乃至生奸生房闥而帝弗疑 迹混丹靑而帝不顧
美如明妃 抱恨絶域 雖以天子之勢 欲再識春風之面 卽亦豈能歸其環佩哉
故曰空歸月夜魂也
不但生不能歸 試聽其琵琶怨恨之曲 分明甘作胡語 雖千載而下永不願爲漢婦矣
豈非當日不識面之故致然歟
省作省事之省
若作實字解 何能與空歸對耶
此不可不辨 -明 金聖嘆,《杜詩解》卷3
○ 詠懷古跡五首 前庾信宋玉 後蜀主孔明 豈古跡竟無 詠懷絶少 而以明妃厠其中耶
蓋以明妃天地所鍾靈 至今傳頌 而漢帝止從畫圖一識面 終死胡中
貴妃何如人
竟致馬嵬之亂
可傷孰甚
此首全在言外見卓識 -淸 李調元,《雨村詩話》
○ 因村而詠明妃 憫怨思也
結語怨恨二字 乃一詩歸宿處
起筆珍重 著遺村說 另爲一截
中四 述事申哀 筆情繚繞 一去怨恨之始也 獨留怨恨所結也
畵圖識面 生前失寵之怨恨可知 環佩歸魂 死後無依之怨恨何極
末卽借出塞聲點明 -淸 浦起龍,《讀杜心解》卷4
○ 只敍明妃 始終無一語涉議論 而竟無不包
後來諸家總不能及 -淸 李子德,《杜詩鏡銓》卷13
○ 詠昭君詩 此爲絶唱
餘皆平平 至楊憑馬駝絃管向陰山 風斯下矣 -淸 沈德潛,《唐詩別裁集》卷14
○ 詠明妃詩多矣 沈歸愚推此詩爲絶唱
以能包擧其生平 而以蒼凉激楚出之也
首句詠荊門之地勢 用一赴字 沈着有力
次句謂如此山水名邦 而淸淑之氣 獨鍾于女子 至今江頭行客 猶說遺村
寰中艶迹 可與西子苧羅村千秋爭美矣
三四謂一去胡沙 愈行愈遠 而芳魂戀闕 墓門草色長靑 表明妃之志也
五六謂漢帝僅于畵中一見 悔莫能追 環佩空歸 安得更承恩澤 哀明妃之遇也
收句謂漢家宮闕 久已煙消 卽埋玉荒邱 亦長淪邊徼
其遺音感人者 幸有馬上琵琶 流傳舊樂 掩抑冰弦 如訴出絶塞飄零之苦 差足爲明妃寫怨矣 -現代 兪陛雲,《詩境淺說》


〈옛 자취를 읊으며 심회를 적다 세 번째 시〉
두보
뭇 산 온 골짝이 荊門으로 달려가는 곳에
明妃가 나서 자란 마을이 아직도 있다
紫臺를 한번 떠나 북녘 사막으로 갔었는데
푸른 무덤만이 남아 황혼을 향해 있다
그림으로는 봄바람 같은 얼굴 알 수가 없었기에
環珮만 달 아래 혼이 되어 허망하게 돌아왔다
천년 동안 비파에 담긴 오랑캐의 말
분명 그 곡조에는 원한을 이야기하고 있으리
[集評]○ 昭君村으로 인해 왕소군을 슬퍼하였다.
소군은 당대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궁에 들어가서 시기를 받았다.
공(杜甫) 역시 나라의 뛰어난 선비로 조정에 들어가서 질투를 받아 정말 서로 같은 처지였으니, 소군을 슬퍼하여 자신을 슬퍼한 것이다.
‘紫臺’는 江淹의 賦에 나오는 말을 쓴 것으로 ‘紫禁’과 같은 말이다.
‘連’은 오늘날 ‘㜕’이라고 쓰는데 혼사를 맺는다는 뜻이다.
북쪽의 사막으로 시집간 뒤에 무덤이 남아 홀로 푸르니, 그녀가 비록 죽어도 옛 고향 땅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림은 그녀의 얼굴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녀의 혼이 남쪽으로 오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이 시에서는 깊은 밤 달 밝을 때면 마치 그녀의 환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月夜’는 ‘夜月’이 되어야 하니, ‘春風’과 대구가 될 뿐만 아니라, 달은 밤과 함께 와야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천년 후에도 비파가 남아 있고 오랑캐 땅의 언어가 남아 있으니, 대개 그녀의 원망이 노래에 담겨 있음을 사람들은 스스로 이해할 것이다.
○ 明妃를 읊은 것은 천고에 재주를 품고 있으면서도 불우한 자를 위해 매우 애통해하며 안타까워한 것이다.
전반부에 대한 풀이:형문에 明妃村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群山萬壑赴荊門’의 구를 보면, 그 집을 묘사한 것이 큰 용이 굴을 향해 가는 법을 썼으니, 대단히 기이하다.
대개 위로 솟으면 산이 되고 아래로 내달리면 계곡이 되었다가 솟으면 다시 산이 되는데, 끝없이 이어지니 천지는 이와 같이 넓고 넓은 것이다.
그 사이에 초나라가 있고, 초나라의 산과 강이 수없이 기복을 일으키며 아득히 천리만리를 곧바로 달려 나가니, 그 뒤에 형문이 생겼고, 그 뒤에 형문의 마을이 생겼고, 그 뒤에 마을에서 명비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한즉 명비는 천지간의 기운이 특별히 모여 태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명비는 떠나갔지만, 그 마을은 아직 남아 있다.
‘尙有村’이라고 한 것은 다만 마을만 남아 있다는 뜻이다.
3‧4구는 ‘村’자를 이어, 명비가 당시에 비록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 후에 마을에 있지 못하고 한나라 궁실로 들어갔고, 명비가 한나라 궁실에 들어간 뒤에는 또 한나라 궁실에 있지 못하고 황궁을 떠났음을 말하였다.
무릇 명비로서 단순히 황궁을 떠나갔다면 그 자취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비가 황궁을 떠나 마침내 북녘의 사막으로 갔기 때문에, 그 종적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오호라, 그녀의 뼈는 이미 썩고 무덤만이 아직도 푸르니 절세가인이 여기서 사라졌다.
당년에 어렵게 생장한 것에 견주어보면 너무나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후반부에 대한 풀이:위 구절을 이어 아래 문장으로 전환한 시로, 종래 재주 있는 신하를 버린 군주의 일면을 로 묘사한 것이다.
진정한 才人은 확고한 식견으로 인하여 귀하게 되니, 그림을 보고 준마를 찾는 일 따위는 없다.
하물며 元帝가 한나라의 천자로서 아름다운 부인을 택할 때, 後庭의 봄바람 같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모두 보고 하나하나 알아보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런데도 미천한 화공의 손에 맡겨 선택하였으니, 비루하다 할 만하다.
원제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후궁을 충원하는 것에 불과하니, 그 얼굴을 모두 보고자 하였다면 그 수가 어찌 천만 명뿐이겠는가.
그런데도 그림을 보고 불러들여 은총을 내렸으니 임시방편을 탐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일을 줄임으로 인하여 간교함이 궁궐의 내전에서 생겨났는데도 원제가 의심하지 않았고, 그림이 잘못되어도 원제는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明妃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가 恨을 안고 먼 오지로 떠나갔으니, 비록 천자의 권세를 가지고 봄바람 같은 얼굴을 다시 보고자 하여도 어찌 능히 그녀가 찼던 환패를 돌아오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달 아래 혼이 되어 허망하게 돌아왔다.[空歸月下魂]’라고 한 것이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연주한 비파의 원한 맺힌 곡을 들어본다면 분명 오랑캐 말로 노래하였지만, 천년이 지난 뒤에도 영원히 한나라의 여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
어찌 그 당시 얼굴을 알아주지 않은 연유로 여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省’은 ‘省事’(수고를 덜다)의 ‘省’이다.
만약 實字로 해석한다면 어찌 ‘空歸’와 대구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詠懷古跡〉 五首는 앞에서 庾信과 宋玉을, 뒤에서 蜀主와 諸葛孔明을 읊었는데, 어찌 古跡이 끝내 다하고 감회를 노래할 것이 없어서 明妃를 그 사이에 끼워넣은 것이겠는가.
대개 명비는 천하의 영기가 모여서 생겨난 사람으로 지금까지도 칭송되는데, 漢나라 元帝가 그림으로만 한 번 보고 말아서 끝내 오랑캐 땅에서 죽고 말았다.
양귀비는 어떤 사람인가.
마침내 馬嵬의 亂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았는가.
두 사람 중 누구를 위해 더 傷心해야 하는가.
이 시 전체에 言外의 탁월한 식견이 담겨 있다.
○ 昭君村으로 인하여 명비를 노래했으니, 고향을 그리워한 원한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결구의 ‘怨恨’ 두 글자는 전체 시의 귀결처이다.
첫 시작을 진중하게 하여 마을이 남아 있다는 설을 드러내어 따로 한 구절을 만들었다.
가운데 네 구에서 사실을 기술하고 슬픔을 펴낼 때, 붓 끝에 담긴 정이 곡진하다, ‘一去’는 ‘怨恨’의 시작이고, ‘獨留’는 ‘원한’의 끝맺음이다.
‘畵圖識面’이라 했으니 생전에 임금의 은총을 얻지 못한 원한을 알 수 있고, ‘環佩歸魂’이라 했으니 죽은 뒤에 의지할 곳이 없는 원한이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구절은 변방의 노래를 빌려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 다만 명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의론과 관계된 말이 한마디도 없으나 함축되지 않은 것이 없다.
후대의 제가들이 모두 미칠 수 없는 점이다.
○ 소군을 노래한 시 중 이 작품이 절창이다.
나머지는 모두 비슷한 수준인데, 의 “말과 낙타, 현악기와 관악기가 을 향한다.”는 風格이 떨어진다.
○ 명비를 읊은 시는 많으나 沈歸愚(沈德潛)는 이 시를 절창으로 치켜세웠다.
그녀의 일생을 포괄하여 처량하고 비통하게 표출했기 때문이다.
첫 구에서 형문의 지세를 읊으며 ‘赴’ 한 글자를 사용한 것은 침착함에 공력이 들어가 있다.
다음 구에서 이와 같은 산수의 명승지에 淸淑한 기운이 오로지 이 여인에게 모였다고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강가를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남아 있는 이 마을에 대해 말한다.
천하의 강토에 남아 있는 미인의 자취로는 西施가 태어난 苧羅村과 천추의 아름다움을 다툴 만하다.
3‧4구에서는 오랑캐의 사막으로 한번 떠나간 뒤 가면 갈수록 멀어져 꽃다운 혼이 궁궐을 그리워하여, 묘지의 풀빛이 오래 푸르다고 하였으니 이는 명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5‧6구는 漢帝가 그림으로 한번 본 뒤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데, 환패만이 부질없이 돌아왔으니, 어찌 다시 은총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명비의 운명을 슬퍼하였다.
마지막 구에서 한나라 궁궐이 오래전에 연기처럼 사라져 명비가 묻힌 무덤도 오랜 세월 변방에 버려져 있는데,
그녀가 남긴 노래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다행히 말을 타고 가면서 타던 비파 소리가 옛 가락에 전해 내려와 그 침울한 소리가 마치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떠도는 고통을 하소연하는 듯하다고 하였으니, 명비를 위하여 그녀의 원한을 충분히 그려냈다 할 만하다.


역주
역주1 荊門 : 형문산을 지칭한다. 湖北省 宜都縣 서북쪽에 있다.
역주2 明妃 : 王昭君이라 칭해진 漢나라 궁녀로서, 이름은 嬙이며 昭君은 字이다. 晉나라 文帝 司馬昭의 이름을 諱하여 明君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明一統志》의 ‘昭君村’에 대한 注에 “貴州의 동북쪽 40리 지점에 있다.[在貴州東北四十里]”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湖北省 秭歸縣 지역이다. 한나라 竟寧 元年(B.C. 33), 匈奴王 呼韓邪에게 시집보낼 궁녀를 뽑을 때, 畵師 毛延壽가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을 추하게 그려 그녀가 뽑혔는데, 뒤에 元帝가 미인임을 알고 모연수를 참수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역주3 紫臺 : 제왕의 궁전으로, 紫宮이라고도 칭한다.
역주4 朔漠 : 북방의 사막지대를 뜻한다. 여기서는 왕소군이 시집가는 흉노족의 지역을 지칭한다.
역주5 靑塚 : 왕소군의 묘를 지칭한다. 현재 내몽고 자치구 呼和浩特市 남쪽 20리 지역에 있다. 《明一統志》 卷20에 “왕소군의 묘는 옛 豐州 서쪽 60리 지점에 있다. 흉노 땅은 흰색의 풀이 많은데, 이 무덤만이 푸르렀으므로 靑冢이라 하였다.[在古豐州西六十里 地多白草 此冢獨靑 故名靑冢]”라고 하였다. 《後漢書》 〈南匈奴傳〉에 “호한야선우가 죽자 소군이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상서하였으나, 성제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랐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소군이 마침내 흉노에서 죽었다.[呼韓邪鮮于死 昭君曾上書求歸 成帝令從胡俗 不許 昭君終死於匈奴]”라고 하였다.
역주6 畫圖省識 : 그림으로는 그녀의 미모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西京雜記》 卷2에 “元帝는 후궁이 많아 평상시 볼 수가 없었으므로 화공에게 모습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살펴보고 불러들여 합방하였다. 宮人들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많은 경우는 십만이었고, 적은 경우도 오만보다 적지 않았다. 오직 王嬙만은 뇌물을 주지 않아 마침내 왕을 모실 수 없었다. 후에 흉노가 入朝하여 閼氏(흉노족 單于의 妻)로 삼을 미인을 구하였는데, 이때 왕이 그림을 보고 왕소군이 가도록 하였다. 그녀가 떠날 때에 이르러 불러 보니, 용모가 후궁 중에 제일이었고 응대도 잘하고 거동도 우아하였다. 왕이 후회하였으나 명부가 이미 정해졌고, 제왕이 외국에 대한 신의를 중시해야 했기에 다른 사람으로 바꾸지 못하였다. 이에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화공들이 모두 처형되어 저자거리에 버려졌다.[元帝後宮旣多 不得常見 乃使畵工圖形 按圖 召幸之 諸宮人 皆賂畵工 多者十萬 少者亦不減五萬 獨王嬙不肯 遂不得見 後匈奴入朝求美人爲閼氏 於是上案圖以昭君行 及去召見 貌爲後宮第一 善應對 擧止閑雅 帝悔之 而名籍已定 帝重信於外國 故不復更人 乃窮案其事 畫工皆棄市]”라고 하였다.
역주7 環珮 : 부녀자의 장신구로 여기서는 왕소군을 비유하였다.
역주8 月下 : ‘月夜’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9 琵琶作胡語 : 왕소군이 흉노에 살면서 비파를 치며 흉노의 말로 부른 노래를 지칭한다. 왕소군이 비파를 잘 탔으므로 흉노에서 삶을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古今事文類聚》(續集 卷22)에 “왕소군이 처음 흉노 땅으로 갈 때, 가는 길에 향수와 원망이 일어나 마침내 말 위에서 비파를 타며 그 恨을 기탁한 것이 지금까지 전하는데, ‘소군원’이라 부른다.[王昭君 初適匈奴 在路愁怨 遂於馬上彈琵琶 以寄其恨 至今傳之 謂之昭君怨]”라고 하였다.
역주10 腸腑를 비추는 거울 : 진나라 咸陽宮에 있었던 거울로 사람의 장부를 비춰볼 수 있다고 전한다. 北周의 庾信이 〈鏡賦〉에서 “거울이 바로 쓸개와 심장을 비추는 듯하니 접하기 어렵고 값으로 따질 수 없도다.[鏡乃照膽照心 難逢難値]”라고 하였다.
역주11 楊憑 : 당나라 德宗 年間에 활동한 인물로서, 字는 虛受, 虢州의 弘農 사람이다. 생몰년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大曆 年間에 登第하여 湖南‧江西 觀察使와 京兆尹 등의 관직을 지냈다. 두 동생과 함께 시문을 잘 지어 ‘三楊’이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역주12 陰山 : 內蒙古自治區 남부 지역에 동북으로 이어진 陰山山脈을 지칭한다. 산 사이에 통로가 뚫려 있어 예로부터 남북 교통의 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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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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