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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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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외파〉
정전
현종은 말머리 돌려 돌아오나 양귀비는 죽었으니
운우의 정 잊기 어려운데 천지가 새롭구나
끝내 성스럽고 현명한 천자의 일이거늘
又何人
경양궁 우물 속 신세 또 누가 있겠는가
[通釋]당 현종이 촉 땅에서부터 말을 돌려 京師로 향할 때 양귀비는 馬嵬驛에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천지가 바뀌고 새로워졌지만,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가 스스로 목숨 끊게 하였으니, 이는 결국 총명한 군주의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여화, 공귀빈과 함께 경양궁의 우물에 숨어 있다가 끝내 수나라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던 진 후주와 다를 바 없을 뻔했구나.
[解題] 이 시는 일종의 詠史詩로서, 제목으로 삼은 ‘馬嵬坡’는 현종이 병란을 피해 촉으로 가던 도중에 거쳤던 곳이다. 이와 더불어 馬嵬佛寺 역시 양귀비가 자진한 곳이니, 후대 사람들 가운데 이곳에서 시를 지은 이들이 매우 많다.
첫 구에서는 제목을 짚어냄과 동시에 역사적인 일을 묘사하였고, 제2구에서는 이것을 이어 현종이 여전히 양귀비와의 애정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3‧4구에서는 공교하고 절묘하게 전환시켜, 현종의 처사를 찬탄하면서 양귀비를 처단하는 용단을 내리지 못했더라면, 제2의 진 후주가 되었으리라고 결말을 맺는다.
[集評]○ 馬嵬佛寺 楊貴妃縊所
[集評]○ 마외불사는 양귀비가 목을 매어 죽은 곳이다.
以後才士文人 經過賦詠以導幽怨者 不可勝記
때문에 이후의 재사와 문인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시를 지어 읊음으로써 그 깊은 원혼을 달랜 자들이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莫不以翠翹香鈿 委于塵土 紅凄碧怨 令人悲傷 雖調苦詞淸 而無逃此意
물총새 깃 머리장식과 향기로운 비녀가 땅에 버려져 여인의 처절함과 원한이 사람들로 하여금 슬프고 애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비록 情調가 애상하고 詩語가 맑더라도 이 뜻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獨丞相榮陽公鄭鈿爲鳳翔從事日 題詩曰 肅宗回馬楊妃死……觀者以爲有宰輔之器 - 五代 高彦休, 《唐闕史》 卷上
유독 승상 영양공 정전만이 봉상에서 종사할 때에 시를 지어 “肅宗이 말머리 돌려 돌아오나 양귀비 죽었으니……”라 하였으니, 보는 자들이 재상의 국량이 있다고 여겼다.
○ 唐人馬嵬詩極多 惟此首得溫柔敦厚之意 故錄之 - 淸 孫洙, 《唐詩三百首》
○ 당나라 사람들의 馬嵬詩가 매우 많지만, 오직 이 시만이 온유돈후한 뜻을 얻었기에 기록한다.
○ 論卽得體 調亦瑯然 - 淸 周詠棠, 《唐賢小三昧續集》 卷下
○ 의론은 體格을 얻었고, 情調 또한 곱다.
역주
역주1 馬嵬坡 : 馬嵬驛을 말한다. 지금의 陝西省 興平縣 서쪽으로, 양귀비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역주2 鄭畋 : 823?~882. 字는 台文이며, 榮陽(지금의 河南省 榮陽縣) 사람이다. 唐 武宗 會昌 연간에 進士가 되었으며, 秘書省校書郞‧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劉瞻이 재상에서 파직되자 그에 연좌되어 梧州刺史로 폄직되었다. 唐 僖宗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병부시랑으로 삼았으며, 후에 또한 재상으로 삼았다. 참소로 인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全唐詩》에 그의 시 16수가 전한다.
역주3 玄宗回馬楊妃死 : ‘玄宗回馬’는 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이 蜀으로 몽진 갔다가 장안이 수복된 후 蜀에서 다시 행차를 되돌린 일을 말한다. ‘楊妃死’는 당 현종이 촉으로 도피하던 도중에 마외역을 지나가다 장군과 사졸들이 변을 일으켜 楊國忠을 죽이고 양귀비 또한 이에 연좌되자, 당 현종이 주변의 압박으로 그녀를 自盡하게 한 일을 의미한다.
역주4 雲雨難忘日月新 : ‘雲雨’는 宋玉의 〈高唐賦〉에 실린 楚王과 巫山神女의 고사로 훗날 남녀간의 歡會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깊은 애정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난이 평정되어 새 세상이 되었지만 양귀비의 애정은 잊기 어렵다는 뜻이다.
역주5 終是聖明天子事 : ‘聖明天子’는 당 현종을 찬양하는 말로, 그가 주위의 의견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결국 양귀비를 사형에 처했던 것을 의미한다.
역주6 景陽宮井 : ‘景陽宮井’의 옛터는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玄武湖 주변에 있다. 南朝의 陳 後主가 隋나라 병사들이 이미 성으로 진격해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가 총애하던 張麗華, 孔貴嬪과 함께 景陽殿을 나가 우물에 몸을 던져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다가 결국 수나라 병사의 포로가 되었던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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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6 마외파 850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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