浩曰 自來解無題諸詩者 或謂其皆屬寓言 或謂其盡賦本事 各有偏見 互持莫決
余細讀全集 乃知實有寄托者多 直作艶情者少 夾雜不分 令人迷亂耳
此二篇定屬艶情 因窺見後房姬妾而作 得毋其中有吳人耶
而王茂元于武宗卽位初由涇原入朝 會昌元年出鎭陳許 則蹤迹皆不細合矣
或茂元在鎭 更有家在京 或系王氏之親戚 而義山居停于此
頗可與街西池館及可嘆等篇參悟 亦大傷輕薄矣 - 淸 馮浩, 《玉溪生詩集箋注》 卷1
아, 更鼓 소리 듣고서 入朝하기 위해 가야 하니
[集評]○ 趙臣瑗은 《山滿樓唐詩七律箋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義山(李商隱)이 王茂元의 집에 있으면서, 그 규방 여인을 몰래 엿보고 지은 것이다.
或者는 令狐相公(令狐楚)의 집에 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그 뒤에 나오는 絶句를 보면 진실로 직접 써서 주어 그녀를 부르고 있으니,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나(馮浩)는 말한다. “지금까지 〈無題〉라는 제목의 시를 해석한 사람들은, 혹은 그 모두가 寓言에 속한다 하거나 혹은 그 모두가 본래의 일을 쓴 것이라고 하여, 제각기 偏見을 갖고 있어서 서로 버티며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내가 그의 全集을 자세히 읽어보니, 실제로 寄托한 것이 많았으며 艶情을 직접 쓴 것은 적었는데, 그것이 뒤섞여 분류가 되질 않아 사람들을 혼동하게 한 것뿐이었다.
이 두 편은 분명 艶情에 속하니, 뒷방에 있는 여인들을 몰래 보고서 지었다면 그 안에 吳人(왕무원의 딸)이 없을 수 있겠는가.
조신원의 箋注의 大意가 진실로 옳고, 다른 사람들은 앞의 시를 가지고 너무 천착한 경향이 있다.
두 번째 나오는
를 분명히 파악하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鼓吹〉와 〈無題〉 여러 시들을 합하여 그것을 헤아려 엮어보면, 본래의 의미를 온전히 잃게 되니 매우 가소롭다.
또 ‘秦樓客’이라 했으니, 王氏의 사위임을 자칭한 것이다.
그런데 의산은 두 차례 秘書省에서 벼슬을 하였다.
한번은 開成 4년(839)이니 이해에는 곧 弘農으로 尉가 되어 나갔고, 한번은 會昌 2년(842)이었다.
그런데 왕무원은 武宗 즉위 초에 涇原節度使로 入朝하였고 회창 元年에는 陳許로 出鎭하였으니, 종적이 모두 세밀하게 합치되진 않는다.
혹은 왕무원이 鎭에 있을 때 그의 집이 서울에 있었거나 혹은 왕씨의 친척과 관련이 있어 의산이 그곳에서 거처했다고 볼 수도 있다.
〈街西池館〉과 〈可嘆〉 등의 시편들을 참고해 볼 만하지만, 그 또한 너무 경박한 해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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