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禹錫(772~842)
字는 夢得이며, 洛陽(지금의 河南省) 사람이다. 貞元 9년(793) 21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淮南節度使 杜佑의 막료가 되었다. 이후에 監察御使가 되어 王叔文의 천거를 입고 궁에 들어가 王叔文‧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왕숙문이 폄직되자 유우석도 浪州(지금의 湖南省 常德縣)司馬로 좌천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그는 낭주에서 10년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民歌를 개작하여 詞를 만들기도 하였다. 때문에 武陵 일대의 夷歌 가운데 그의 손을 거쳐 潤色된 것들이 많다. 元和 10년(815)에 다시 京都로 불려왔으나 〈游玄都觀詠看花君子〉라는 시가 정치적 사안에 저촉되어 다시 連州(지금의 廣東省 連縣)刺史로 좌천되었다. 이후에 夔州와 和州刺史를 역임하고 太和 2년(828) 다시 京都로 돌아와 太子賓客이 되었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앙과 지방을 몇 차례나 오가는 정치적 浮沈 속에서도 民間의 생활을 늘 살폈는데, 이러한 애정과 관심은 결국 民謠風의 걸출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의 小詩는 의미가 높고 빼어나면서도 民歌의 활발한 기질을 동시에 담아낸다고 평해지는데, 〈竹枝詞〉 11수, 〈楊柳枝詞〉 2수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만년에는 白居易와 친밀하게 교유하기도 하였다. 《舊唐書》와 《新唐書》에 傳이 실려 있다. 저서로 《劉夢得文集》 30권이 전한다.
《唐詩三百首》에 수록된 작품으로는 〈蜀先主廟〉, 〈西塞山懷古〉, 〈烏衣巷〉, 〈春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