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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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誓掃不顧身
五千
可憐邊骨
猶是夢裏人
[集評]○ 李華弔古戰場文曰 其存其沒 家莫聞知 人或有言 蓋將信疑 悁悁心目 夢寐見之
陳陶則云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 蓋工於前也 - 宋 胡仔, 《苕溪漁隱叢話前集》 卷18
○ 此詩不減盛唐 第格力稍下耳 - 明 陸時雍, 《唐詩鏡》 卷51 晩唐第3
○ 譚云 取其苦想 - 明 譚元春, 《唐詩歸》 卷34 晩唐二
○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深閨夢裏人 用意工妙
至此可謂絶唱矣
惜爲前二句所累 筋骨畢露 令人厭憎 - 明 王世貞, 《藝苑卮言》 增補藝苑巵言 卷3
○ 漢賈捐之議罷珠崖疏云 父戰死於前 子鬭傷於後 女子乘亭鄣 孤兒號於道 老母寡婦飮泣巷哭 遙設虛祭 想魂乎萬里之外
後漢南匈奴傳唐李華弔古戰場文 全用其語意
總不若陳陶詩云 誓掃匈奴不顧身 五千貂錦喪胡塵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
一變而妙 眞奪胎換骨矣 - 明 楊慎, 《丹鉛總録》 卷11, 〈李華文陳陶詩〉
○ 隴西行曰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 此語悽婉味長 嚴滄浪謂陶最無可觀 何也 - 明 謝榛, 《四溟詩話》 卷2


〈농서행〉
진도
흉노를 소탕하리라 맹세하며 몸을 돌보지 않더니
오천의 정예병 오랑캐 땅에서 죽었구나
가련타 無定河 강가의 백골
여전히 깊은 규방의 꿈속 사람인 것을
[集評]○ 李华의 〈弔古戰場文〉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집에서는 소식조차 알 수 없어, 인편에 간혹 소식이 있어도 반신반의하여 마음과 눈에 연연하여 자나 깨나 그를 그리워한다.”라고 하였다.
陳陶의 시에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이라고 한 것이 앞의 것보다 공교롭다.
○ 이 시는 盛唐詩보다 못하지 않지만, 다만 시문의 格調와 氣勢가 조금 낮을 뿐이다.
○ 譚元春은 말한다. “고달픈 뜻을 취한 것이다.”
○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深閨夢裏人’은 뜻이 공교하면서도 묘하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절창이라 부를 만하다.
앞의 두 구에 얽매여서, 筋骨(중요한 내용)이 다 드러난 것이 안타까우니 사람으로 하여금 염증이 나게 한다.
○ 漢 賈捐之의 〈議罷珠崖疏〉에 “예전에 아버지가 전사하더니, 후에 아들은 싸우다 다쳤다. 여자들은 변새의 보루에 오르고, 고아들은 길에서 울부짖으며, 노모와 과부들은 눈물을 머금고 길에서 곡하면서 멀리 虛祭를 지내며 만 리 밖의 혼을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後漢書》의 〈南匈奴傳〉과 唐 李華의 〈弔古戰場文〉은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사용하였지만,
모두 陳陶의 詩 “誓掃匈奴不顧身 五千貂錦喪胡塵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만 못하다.
일변하여 오묘해졌으니 참으로 환골탈태라 하겠다.
○ 〈隴西行〉에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悽婉하고 여운이 긴데, 嚴滄浪(嚴羽)이 진도의 시가 가장 볼 만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역주
역주1 隴西行 : 樂府의 옛 제목으로 〈步出夏門行〉이라고도 하며, 《相和歌》의 〈瑟調曲〉에 속한다. 본래 “부인이 단장하고 문에서 손님을 맞는다.[婦有容色 能應門承賓]”는 내용이었는데, 梁 簡文帝 때부터 ‘고달픈 전쟁과 情人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삼았다. ‘隴西’는 지금의 甘肅省 寧夏回族自治區 일대를 말한다.
역주2 陳陶 : 자는 嵩伯으로, 嶺南(또는 鄱陽, 劍浦) 사람이다. 오랫동안 진사에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후에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스스로 ‘三敎布衣’라고 하였다. 宣宗 大中 연간에 난리를 피하여 洪州 西山(지금의 江西省 南昌市 新建縣)에 은거하였다. 詩 10권이 있었다고 하나 逸失되었고, 후인들이 모은 《陈嵩伯诗集》 1권이 있다. 《全唐詩》에 시 2권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3 匈奴 : 秦漢時代 때 북방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말이나, 여기서는 당나라 때 서북 지역을 침략하던 소수민족을 지칭한다.
역주4 貂錦 : ‘貂錦’은 漢代 羽林軍이 착용했던 담비가죽으로 만든 갖옷[貂裘]과 비단옷[錦衣]이다. 여기서는 선택된 정예병을 말한다.
역주5 胡塵 : 서북 소수민족의 거주지를 뜻한다.
역주6 無定河 : 內蒙古 지역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陝西省을 거쳐 黃河로 흘러 들어간다. 《一統志》에 “無定河는 변외로부터 흘러 陝西省 楡林府 懷遠縣 북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米脂縣을 거치고 또 동남으로 흘러가 淸澗縣 동북쪽을 지나 황하로 들어간다. 일명 奢延河라고 하며, 무너져 내린 모래가 급히 흐르고 깊고 얕음이 일정하지 않아 無定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역주7 深閨 : ‘春閨’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여기서는 출정한 병사들의 아내가 머무는 거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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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9 농서행 683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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