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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2)

당시삼백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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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悲懷 其一〉
〈슬픈 마음을 풀어놓다 첫 번째 시〉
원진
謝公이 가장 아끼던 어린 딸
黔婁에게 시집온 후로는 만사가 어긋났네
無衣搜
옷이 없는 날 보고는 옷상자를 뒤지고
他沽酒拔金釵
술 사달라 조르니 금비녀를 뽑았었지
野蔬充膳甘
채소로 반찬 만들고 콩잎도 달게 먹으며
落葉添薪仰古槐
낙엽을 땔감 대신하면서 오래된 홰나무 쳐다보았네
今日俸錢過十萬
이제는 봉급으로 받는 돈 십만이 넘는데도
그대에겐 祭需 차리고 또 齋만 올릴 뿐이네
[通釋] 謝公이 가장 아꼈던 어린 딸처럼 훌륭한 집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내. 하지만 黔婁처럼 궁핍한 나에게 시집온 후로는 하는 일마다 순리대로 된 것이 없었다. 당신은 나에게 좋은 옷이 없는 것을 보고서 새 옷을 살 만한 옷감이 있나 자신의 옷상자를 뒤졌고, 술이 먹고 싶어 당신에게 조르면 금비녀를 뽑아주고는 그것을 저당잡혀 술을 사도록 하였지. 집이 가난한 탓에 당신은 야채와 콩잎으로 기꺼이 반찬을 만들었고, 낙엽을 가져다 땔나무 대신 태우면서 때때로 태울 것이 없으면 고개를 들어 오래된 홰나무를 보면서, 나무가 낙엽을 더 떨구어주길 바랐다.
나는 지금 봉급이 십만 냥을 넘어서 부귀하게 되었는데 당신은 이 세상에 있지 않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祭需를 차려놓고 또 齋를 올리면서 亡者인 당신의 魂을 위로하는 것뿐이다.
[解題] 韓愈의 〈監察御史元君妻京兆韋氏夫人墓誌銘〉에 “부인은 진실로 이전부터 어진 부모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훌륭한 남편을 얻었다. 또 시부모님께 가르침을 받아서는 일하는 것이며 말하는 것이 모두 예의와 법도를 따랐다. 27세의 나이로 元和 4년 7월 9일에 卒하였다.[夫人固前受敎於賢父母 得其良夫 又及敎於先姑氏 率所事所言 皆從儀法 年二十七 以元和四年七月九日卒]”라고 하였다. 元稹이 〈遣悲懷〉를 지은 것은 대략 元和 5년, 그의 나이 32세 즈음으로 추정된다.
그는 24세에 校書郞을 제수 받은 후 곧 工部尙書 韋夏卿의 딸 韋蕙叢과 결혼하였다. 위혜총은 따뜻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賢淑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원진과 결혼했을 당시 원진은 아직 명성을 얻기 전이어서 생활이 곤궁하였으나, 琴瑟은 매우 좋았다. 4년 후 원진이 河南으로 가서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宦路에서 청운의 꿈을 향해 한창 상승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위혜총은 元和 4년(809)에 세상을 떠났다. 원진은 벼슬에 매여 있는 까닭에 長安으로 돌아가 부인을 장사지내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더욱 상심하였던 것이다. 元和 5년, 원진은 江陵으로 貶職되었는데, 이렇듯 비통한 情景 속에서 그는 〈遣悲懷〉 3수를 써 내려갔다.
위의 시는 그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시의 앞부분 6句는 모두 그의 아내 위혜총의 賢淑함과 安貧하는 美德을 칭찬한 것이며, 7‧8句는 앞부분과 대조되는 내용이다. ‘今日俸錢過十萬’은 그의 생활이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生死가 나뉘어 있어 富貴함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정성을 다해 祭床을 차리고 齋를 올리는 일뿐이라고 하였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哀痛함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보겠다.
[集評]○ 元公初娶京兆韋氏 字蕙叢 官未達而苦貧
[集評]○ 元公(元稹)의 初娶인 京兆 韋氏는 字가 蕙叢이었는데 관직이 아직 현달하지 않아 가난한 삶을 견뎌야 했다.
繼室河東裴氏 字柔之 二夫人俱有才思 時彦以爲佳偶
繼室인 河東 裴氏는 字가 柔之였는데 두 부인이 모두 才思를 겸비하여, 당시 선비들이 훌륭한 배우자라고 여겼다.
初韋蕙叢卒 不勝其悲 爲詩悼之 - 唐 范攄, 《雲溪友議》
초취인 위혜총이 卒하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지어 그녀를 애도하였다.
역주
역주1 元稹 : 779~831. 字는 微之, 河南(지금의 河南省 洛陽市) 사람이다. 排行이 아홉째인 까닭에 벗들이 모두 그를 元九라고 불렀다. 校書郞‧監察御史‧祠部郎中‧知制誥 등을 역임하였고, 唐 文宗 때 武昌軍節度使가 되었는데 任所에서 죽었다. 白居易와 함께 ‘元白’이라 불리며, 貞元부터 太和까지 30년 동안 詩歌의 通俗化, 大衆化를 제창하였는데, 이를 ‘元和體’라고 한다. 저서에 《元氏長慶集》이 있고, 《新唐書》와 《舊唐書》에 모두 傳이 있다.
역주2 謝公最小偏憐女 : 謝公이 가장 편애하였던 어린 딸이란 뜻으로, 자기 妻 韋蕙叢이 고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것을 讚美하기 위해 《晉書》 〈列女傳〉에 나오는 謝道韞의 故事를 쓴 것이다. 東晉의 재상 謝安은 그의 姪女 謝道韞을 가장 아꼈다. 여기서는 장인인 韋夏卿을 謝安에 빗댄 것인데, 그는 벼슬이 太子少保에 이르렀고 死後에는 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晉代에 王氏와 謝氏 두 집안은 지체 높은 가문이었다.
역주3 自嫁黔婁百事乖 : ‘自嫁’는 《全唐詩》에 ‘嫁與’라고 되어 있다. 黔婁는 춘추시대 齊나라의 高士로, 淸貧하면서도 지조와 절개가 있어 벼슬을 구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 역시 매우 어질었다. 여기서는 시인 자신을 검루에 빗댄 것이다.
역주4 顧我 : 나를 본다는 뜻이다.
역주5 藎篋 : 풀로 엮은 의복을 담는 상자를 가리킨다. ‘藎’은 풀 이름으로 줄기가 매우 가늘어서 그것을 엮어 器物을 만들 수 있다. ‘畫篋’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역주6 : ‘진흙’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조른다’는 의미이다.
역주7 長藿 : 기다란 콩잎을 말한다.
역주8 營奠復營齋 : ‘營’은 갖추어놓았다는 뜻이다. ‘奠’은 제사에 쓰이는 물품들을 말하고, ‘齋’는 승려를 불러다가 죽은 韋氏의 亡靈을 위해 복을 빌어준 의식을 가리킨다. ‘復’는 ‘又’의 뜻이다. 이제는 삶에 여유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예의와 격식을 모두 갖추어 죽은 아내를 위로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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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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