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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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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甫
名成八陣圖
江流
[集評]○ 嘗夢子美謂僕
世人多誤會吾八陣圖詩 以爲先主武侯欲與關公報仇 恨不能滅吳 非也
吾意本謂吳蜀脣齒之國 不當相圖 晉之能取蜀者 以蜀有呑吳之志
以此爲恨耳 - 宋 蘇軾, 《東坡志林》
○ 遂使諸葛精神 炳然千古 讀之殷殷有金石聲 - 淸 愛新覺羅 弘歷, 《唐宋詩醇》
○ 按先主征吳敗績 還至魚腹 孔明嘆曰 法孝直若在 必能制主上東行 不至危傾矣 公詩意亦如此 - 淸 錢謙益, 《杜工部集箋》
○ 江流石不轉 此陣圖之垂名千載者 所恨呑吳失計 以致三分功業 中遭跌挫耳 - 淸 仇兆鰲, 《杜詩詳注》
○ 說是詩者 言人人殊
大率皆以呑吳失計之恨 與武侯失於諫止之恨 坐殺武侯心上著解
抛却石不轉三字 以致全詩走作
豈知遺恨從石不轉生出耶
蓋陣圖正當控扼東吳之口
故借石以寄其惋惜
云此石不爲江水所轉 天若欲爲千載留遺此恨跡耳
如此纔是詠陣圖之詩 彼紛紛推測者 皆不免脫母 - 淸 浦起龍, 《讀杜心解》
○ 詩意謂吳蜀脣齒之國 本不應相圖 乃孔明不能諫止征吳之擧 致秭歸挫辱 爲生平遺恨 亦以先主崩於夔州 故感及之 - 淸 楊倫, 《杜詩鏡銓》
○ 吳蜀脣齒 不應相仇 失呑吳 失策于呑吳 非謂恨未曾呑吳也 隆中初見時 已云東連孫權 北拒曹操矣 - 淸 沈德潛, 《唐詩別裁集》 卷19
○ 失呑吳 東坡謂失在呑吳之擧 此確解也
前題武侯廟 故寫出武侯全部精神 此題八陣圖 故只就陣圖一節 寫其遺恨
作詩切題之法 有如是 - 淸 李鍈, 《詩法易簡錄》
○ 此當是大曆元年初 至夔州時作 - 淸 朱鶴齡, 《杜詩箋註》
○ 失呑吳猶言未能呑吳耳 以武侯如此陣圖而不能呑吳 眞千古遺恨
故精誠所寄 石不爲轉 大意與出師未捷二句同一感慨
後人橫亘一吳蜀脣齒相依之見 遂致自尋苦惱 好事者且僞託子瞻之說 竝託於夢 兼誣杜公 亦可笑也
東坡題跋 及東坡全集 皆有記子美八陣圖詩 收者失於識別耳 - 現代 高步瀛, 《唐宋詩擧要》
○ 武侯之志 在嚴漢賊之辨 酬先主之知 征吳非所急也
乃北伐未成 而先主猇亭挫敗 强鄰未滅 賸有陣圖遺石 動悲壯之江聲
故少陵低回江浦 感遺恨於呑吳
千載下如聞嘆息聲也 - 現代 兪陛雲, 《詩境淺說》
○ 首句極贊武侯 次句入題 三句就八陣圖說
江流句 從句面看似寫聚石不爲水所衝激 實已含末句恨字之意
末句說者聚訟 大槪不出兩意
一則恨未呑吳 一則恨失於呑吳
沈德潛唐詩別裁云云 沈乃主後一說者
蓋鼎足之勢 在劉備不忍一時之忿 伐吳兵敗 致蜀失吳援而破裂 遂使晉能各個擊破
由此言之 沈說是也
石不轉有恨不消之意 知此五字亦非空設
杜甫運思之細 命意之高 於此可見 - 現代 劉永濟, 《唐人絶句精華》


〈팔진도〉
두보
功業은 세 나라의 으뜸이었고
명성은 八陣圖에서 이루어졌네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건만
吳나라 삼키려 했던 잘못, 恨으로 남아 있네
[集評]○ 일찍이 꿈에서 子美(杜甫)가 나에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八陣圖〉 시를 오해하여, 先主와 武侯가 關羽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吳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고 말하는데 그건 잘못이다.
나의 뜻은 본래 ‘吳‧蜀은 脣齒의 관계에 있는 나라이므로 마땅히 서로 범해서는 안 되니, 晉이 蜀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蜀이 吳를 삼킬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스러워할 뿐이다.’라는 의미이다.”
○ 드디어 諸葛亮의 정신이 천고에 환히 빛나게 하였으니, 이것을 읽고 있으면 殷殷하게 金石의 소리가 있음을 느낀다.
○ 살펴보면 先主가 吳를 쳤다가 실패하고 魚腹으로 돌아왔을 때 孔明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法孝直(法正)이 만일 있었다면 반드시 主上이 동쪽으로 가는 것을 능히 제압하여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公(두보)의 시가 가진 뜻도 이와 같다.
○ ‘江流石不轉’은 이 ‘八陣圖’가 천 년 동안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는 것이다. 한스러운 일은 吳를 삼키려 했던 실책 때문에 천하를 三分하는 功業이 중도에 좌절되도록 만든 것이다.
○ 이 시를 설명하는 데는 그 말이 사람마다 다르다.
대개는 모두 吳를 삼키려 했던 실책에 대한 恨과, 吳를 치는 것을 武侯가 중지하도록 諫하지 못한 잘못에 대한 恨, 이 두 가지 恨으로 무후의 마음이 좌절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石不轉’ 세 글자를 버려두어서 전체 시를 왜곡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遺恨’이 ‘石不轉’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대개 陣圖는 東吳를 막는 입구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돌을 빌려 그 애석해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이 돌이 흐르는 강물에도 구르지 않는다는 표현에는 하늘이 이 한스러운 遺跡을 천 년 동안 남겨놓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시가 다만 陣圖만을 노래한 시라고 한다면, 저 분분하게 추측하는 자들은 모두 本旨에서 벗어남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이 시의 뜻은, 吳와 蜀은 脣齒의 관계에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응당 서로 범해서는 안 되는데, 이에 孔明이 吳를 정벌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諫하지 못하여 秭歸에서 모욕을 당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평생의 遺恨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 先主가 夔州에서 崩御했기 때문에 감개가 거기까지 이른 것이다.
○ 吳‧蜀은 脣齒의 관계이므로 응당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失呑吳’는 吳를 삼키는 데 있어서 失策한 것이지, 일찍이 吳를 삼키지 못한 것을 恨한다는 말이 아니다. 제갈량이 隆中에서 처음 유비를 만났을 때 이미 “동으로는 孫權과 연합하고, 북으로는 曹操를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 ‘失呑吳’에 대해 東坡(蘇軾)가 이르기를 “잘못은 吳를 삼키려는 擧事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해석이다.
앞에서는 武侯廟에 題했기 때문에 무후의 전체적인 精神을 그려내었고, 이것은 八陣圖에 題한 것이기 때문에 다만 팔진도 한 가지에 대해 그 遺恨을 그린 것이다.
詩를 지을 때 제목과 딱 들어맞게 하는 법으로 이와 같은 것이 있다.
○ 이 시는 분명 大曆 元年(766) 초 夔州에 이르렀을 때 지은 것이다.
○ ‘失呑吳’는 ‘吳를 삼키지 못하였다.’고 한 것과 같으니, 武侯가 이런 八陣圖를 만들었음에도 吳를 삼키지 못한 것은 진실로 천고의 遺恨이다.
그러므로 그가 들인 정성으로 인해 돌이 구르지 않는 것이니, 대체적인 뜻은 ‘出師未捷’(〈蜀相〉) 두 구와 그 感慨에 있어 동일하다.
후인들은 吳‧蜀이 脣齒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였다는 견해에 걸려서 드디어 스스로 찾아서 고뇌하는 데 이르렀고, 호사가들 또한 子瞻(蘇軾)의 說에 가탁하여 꿈을 핑계대면서 杜公(杜甫)까지 속이려 들었으니 역시 가소롭다.
東坡의 題跋 및 동파의 全集에 모두 子美의 〈팔진도〉 시가 기재되어 있는데, 수록한 자가 識別함에 있어 실수한 것일 뿐이다.
○ 武侯의 뜻은 漢과 賊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先主의 知遇에 보답하는 데에 있었으니, 吳를 치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北伐은 성공하지 못한 채 先主는 猇亭에서 패배하였고, 강한 이웃(東吳)은 멸망하지 않았는데 八陣圖의 남은 돌이 그대로 있으니, 悲壯한 강물소리에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少陵(杜甫)은 강가를 배회하면서 吳를 삼키려는 것에 대한 遺恨을 느낀 것이다.
천 년 후에도 그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첫 구는 武侯를 극찬하였고, 2구는 제목을 내용에 담았으며, 3구는 八陣圖에 대해 말하였다.
‘江流石不轉’은 표면상으로는 모아놓은 돌이 강물에 충격을 받지 않음을 묘사한 듯하지만, 실은 마지막 구의 ‘恨’자의 뜻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마지막 구는 설명하는 데 있어 이론이 분분한데, 대개는 다음의 두 가지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하나는 吳를 삼키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吳를 삼키려는 데 잘못이 있었음을 한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沈德潛도 《唐詩別裁》에서 이것을 말했는데, 그는 후자의 설을 주장하였다.
대개 鼎足의 형세에서 劉備가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함으로 인해 吳를 치려다가 패배하여, 蜀은 吳에게 도움받을 기회를 잃고 파멸되는 상황을 초래하였고, 드디어 晉으로 하여금 各個擊破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심덕잠의 말이 옳다.
‘江流石不轉’에는 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 이 다섯 글자가 또한 근거 없이 가설한 말이 아님을 알겠다.
두보가 그 생각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섬세한 것과 주제를 정하는 데 있어서 수준이 높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역주
역주1 八陣圖 : 여덟 가지로 陣을 운용하는 방법이다. ‘八陣’은 天‧地‧風‧雲‧龍‧虎‧鳥‧蛇 등 여덟 가지 陣勢이고, ‘圖’는 법도 또는 규모이다. 諸葛亮이 만든 八陣은 모두 네 곳에 있는데, 여기서는 夔州의 팔진도를 가리킨다. 遺跡이 夔州 서남쪽 永安宮 앞 모래섬 위에 있다. 작은 돌을 모아 언덕을 만들었는데 각각의 높이가 5척이며 縱橫으로 배치되어 있다. 물이 불어나면 잠겨서 보이지 않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드러난다.
역주2 功蓋三分國 : ‘功蓋’는 제갈량이 세상을 덮을 만한 功業을 이루었음을 말한다. ‘三分國’은 魏‧蜀‧吳 세 나라가 鼎立한 것을 가리킨다. 이 3절을 “三國鼎立의 과정에서 제갈량의 공이 으뜸이었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역주3 石不轉 : 제갈량이 돌을 펼쳐놓아 만든 팔진도는, 강물이 아침저녁으로 와서 부딪쳐도 오히려 依然한 것이 옛날과 같음을 말한다. 劉禹錫의 《嘉話錄》에 “夔州의 西市는 강가의 모래톱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아래 제갈량의 팔진도가 있다. 돌을 모아 배치한 것이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데 골짜기에 물이 크게 불어나고 三蜀이 눈이 녹는 때가 되면, 물이 콸콸 흘러내려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와 백 길이나 되는 마른 나뭇가지가 물살을 따라 떠내려온다. 물이 빠지고 강이 잔잔해지면 만물이 모두 옛 모습을 잃은 채 드러나는데, 제갈량의 작은 돌무더기는 표시하고 모아놓은 순서가 그대로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근 600년이었고 오늘날까지 움직이지 않는다.[夔州西市 俯臨江沙 下有諸葛亮八陣圖 聚石分布 宛然猶存 峽水大時 三蜀雪消之際 澒涌滉漾 大木十圍 枯槎百丈 隨波而下 及乎水落川平 萬物皆失故態 諸葛小石之堆 標聚行列依然 如是者 近六百年 迨今不動]”라고 하였다.
역주4 遺恨失呑吳 : 이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데, 대체로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吳를 침공함으로써, 吳와 연합하여 魏에 대항하려 했던 제갈량의 계책이 무너져 恨이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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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35 팔진도 424

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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