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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3)

당시삼백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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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牧
磨洗認前朝
[集評]後二句絶妙
衆人詠赤壁 只善當時之勝 杜牧之詠赤壁 獨憂當時之敗
此是無中生有 死中求活 非淺識可到 - 宋 謝枋得, 《唐詩絶句注解》
杜牧之作赤壁詩云云 意謂赤壁不能縱火 爲曹公奪二喬置之銅雀臺上也
孫氏霸業繫此一戰 社稷存亡 生靈塗炭 都不問 只恐捉了二喬 可見措大不識好惡 - 宋 許顗, 《彦周詩話》
牧之此詩 蓋嘲赤壁之功出於僥倖 若非天與東風之便 則國亡家破
唯借銅雀春深鎖二喬說來 便覺風華蘊藉 增人百感 此正風人巧於立言處 - 淸 賀貽孫, 《詩筏》
古人詠史 但敍事而不出己意 則史也 非詩也
出己意 發議論 而斧鑿錚錚 又落宋人之病
如牧之赤壁云云 用意隱然 最爲得體
許彦周乃曰 此戰繫社稷興亡 只恐捉了二喬 措大不識好惡 宋人之不足與言詩如此 - 淸 吳喬, 《圍爐詩話》
牧之數詩 俱用翻案法 跌入一層 正意益醒 謝疊山所謂死中求活也 - 淸 吳景旭, 《歷代詩話》
春深二字 下得無賴 正是詩人調笑妙語 - 淸 薛雪, 《一瓢詩話》
認字妙 懷古深情 一字傳出 下二句翻案 亦從認字生出 - 淸 黃叔燦, 《唐詩箋注》
許顗議論多有根柢 品題亦具有別裁
惟譏杜牧赤壁詩不說社稷存亡 惟說二喬
不知大喬孫策婦 小喬周瑜婦 二人入魏 卽吳亡可知
此詩人不欲質言 變其詞耳 顗遽詆爲不識好惡 殊失牧意 - 《四庫全書總目提要》
彦周誚杜牧之赤壁詩社稷存亡都不問 只恐捉了二喬 是措大不識好惡
夫詩人之詞微以婉 不同論言直遂也
牧之之意 正謂幸而成功 幾乎家國不保
彦周未免錯會 - 淸 何文煥, 《歷代詩話考索》
許彦周詩話云云 按詩不當如此論 此直村學究讀史見識 豈足與語詩人言近旨遠之故乎 - 淸 馮集梧, 《樊川詩集注》
詩言赤壁鏖兵之地 沙中折戟 猶認殘痕
尋廢鏃于長平 出斷戈于灞上 千古英雄戰伐 可勝嘆耶
後二句言 周郞亦僥幸成功 設當日東風不竟 則二喬麗質 將歸銅雀臺中 在宮女分香之列 安得兒女江山 流傳名迹乎 - 現代 兪陛雲, 《詩境淺說》
(彦周)此論似正 却不免迂腐 非可謂知言者
大抵詩人每喜以一瑣細事來指點大事
卽如此詩 二喬不曾被捉去 固是一小事
然而孫氏霸權決於此戰 正與此小事有關
家國不保 二喬又何能安然無恙
二喬未被捉去 則家國鞏固可知
寫二喬正是寫家國大事 且以二喬立意 可以增加詩之情趣 - 現代 劉永濟, 《唐人絶句精華》


〈적벽〉
두목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혔지만 쇠는 녹지 않아
혼자 그것을 갈고 씻어 前朝의 유물인 줄 알았네
東風이 周郞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면
봄 깊은 銅雀臺에 二喬가 갇혔으리라
[集評]○ 뒤의 두 구가 절묘하다.
많은 사람들은 적벽을 노래하면서 다만 당시의 승리만을 좋게 보았는데, 두목은 적벽을 노래하면서 홀로 당시의 패배를 근심하였다.
이는 無에서 有를 살린 것이고 죽은 것 가운데서 살아 있는 것을 찾은 것이니, 淺近한 식견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두목의 작품 〈赤壁〉 시는, 적벽에서 불을 놓을 수 없었다면 曹操가 二喬를 빼앗아 동작대에 두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孫氏(孫權)의 霸業은 이 一戰과 관계가 있는데, 社稷의 存亡과 백성들의 塗炭은 모두 묻지 않은 채 그저 二喬가 잡혀가는 것만 두려워했으니 가난뱅이 書生의 무식한 好惡를 볼 수 있다.
○ 두목의 이 시는 대개 적벽에서 세운 공이 僥倖에서 비롯된 것을 조롱한 것이니, 만일 하늘이 東風의 편리함을 주지 않았더라면 나라는 망하고 집은 몰락하였을 것이다.
오직 ‘銅雀春深鎖二喬’만을 빌려 말한다면, 아름다움이 매우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온갖 느낌을 더하게 함을 깨닫게 하니,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立言에 있어 매우 뛰어난 부분이다.
○ 옛사람이 역사를 읊을 때 단지 일을 서술하기만 하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는 역사이지 시가 아니다.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 議論을 말하되 도끼로 깎고 다듬듯이 錚錚하면 또 宋나라 사람의 병통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두목의 〈적벽〉과 같은 시는 用意가 隱然하니 詩體를 얻은 것이 가장 뛰어나다.
그런데 許彦周(許顗)는 말하기를 “이 전쟁은 社稷의 흥망과 관계가 있는데 그저 二喬가 잡혀가는 것만 두려워했으니 가난뱅이 書生의 무식한 好惡이다.”라고 했으니, 宋나라 사람은 더불어 시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이와 같다.
는 모두 을 사용하는데, 한층 더 깊이 들어갈수록 뜻이 더욱 깨달아지니, 謝疊山의 이른바 ‘죽은 것들 가운데서 살아 있는 것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 ‘春深’ 두 글자는 아래에 딱히 연결되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시인의 해학이 담긴 묘한 말이다.
○ ‘認’자가 절묘하니, 懷古의 깊은 정이 이 한 글자에서 전해진다. 아래의 두 구는 翻案法을 썼는데 또한 ‘認’자로부터 생겨 나왔다.
○ 許顗의 議論은 대부분 근거가 있으며, 논평에서도 취사선택을 갖추었다.
그런데 두목의 〈적벽〉 시에서만큼은 社稷의 存亡을 말하지 않고 二喬만을 말했다고 하여 비판한다.
大喬가 孫策의 아내이고 小喬가 周瑜의 아내였으니, 두 사람이 魏나라로 들어갔다면 곧 吳나라가 망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 詩語에 변화를 준 것뿐인데, 許顗가 ‘不識好惡’라고까지 비난한 것은 두목의 뜻을 전혀 잘못 이해한 것이다.
○ 許彦周는 두목의 〈적벽〉 시를 비난하면서, “社稷의 존망은 모두 묻지 않고 그저 二喬가 잡혀가는 것만을 두려워했으니 이는 가난뱅이 서생의 무식한 好惡이다.”라고 했다.
대저 시인의 언어는 은미하면서도 완곡하여 논설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牧之(杜牧)가 의미했던 것은 요행으로 功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國家가 보존되지 못할 뻔하였다는 사실이다.
詩彦周는 잘못 이해함을 면치 못하였다.
○ 《許彦周詩話》에 이러저러한 말이 있다. 생각컨대 시를 이와 같이 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다만 역사를 읽는 村學究의 식견일 뿐이다. 어찌 족히 그와 더불어 시인의 ‘말은 淺近하지만 뜻은 深遠한 故意’를 논할 수 있겠는가.
○ 시에서 적벽의 전투가 격렬했던 장소를 말하였는데, 모래 속의 부러진 창은 아직도 그 남아 있는 흔적을 알게 해준다.
長平에서 부서진 화살촉을 찾고 灞水가에서 부러진 창을 꺼내니, 千古의 영웅들이 치렀던 전쟁에 대해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뒤의 2구는 “周郞은 또한 요행으로 功을 이루었으니 만일 그날 동풍이 불지 않았다면 二喬의 아름다운 모습은 장차 동작대 안으로 들어가 궁녀의 대열에 있었을 것이니, 어찌 이 여인들이 江山에 그 이름난 행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이다.
○ 彦周의 이 논의는 옳은 것 같지만 도리어 진부하니, 말을 아는 자라고 할 수가 없다.
대저 시인은 매양 하나의 소소한 일을 가지고 大事를 집어내는 것을 즐긴다.
곧 이 시와 같은 경우이니, 二喬가 일찍이 잡혀가지 않은 것은 진실로 하나의 작은 일이다.
그러나 孫氏의 霸權은 이 전쟁에서 결판이 났으니, 바로 이 작은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국가가 보존되지 않으면 二喬가 또 어찌 편안히 아무 탈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二喬가 잡혀가지 않았다면 국가가 굳게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
二喬를 묘사한 것은 바로 國家의 大事를 묘사한 것이고, 또 二喬를 가지고 詩意를 세우는 것이 시의 정취를 한층 더 느끼게 할 수 있다.


역주
역주1 赤壁 : 제목이 〈赤壁懷古〉라고 되어 있는 본도 있다. ‘赤壁’은 지금의 湖北省 赤壁市 서북쪽에 있는데 長江 남쪽 기슭에 우뚝 서 있다. 산의 바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 ‘적벽’이라고 부른다. 三國時代에 赤壁大戰이 일어난 곳이다.
역주2 折戟沈沙鐵未銷 : ‘折戟’은 부러진 창을 가리킨다. ‘戟’은 옛날에 쓰던 무기로, 장대 끝부분에 나뭇가지 모양의 날카로운 칼이 달려 있는 창을 말한다.
역주3 : 여기서는 ‘가지고’의 뜻이다.
역주4 東風不與周郞便 : ‘周郞’은 三國時代 吳나라의 大將이었던 周瑜이다. 이 구절은 유명한 ‘赤壁大戰’을 가리킨다. 漢나라 獻帝 建安 13년(208), 曹操는 군대를 이끌고 南下하여 吳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북방의 士兵들은 水戰에 익숙하질 않아서 이에 굵은 쇠사슬로 戰船을 모두 연결하여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주유의 部將 黃蓋는 자신의 배에 기름에 적신 마른 장작을 싣고서 장막으로 그 위를 덮고는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하여 자신의 배가 조조의 배에 가까이 닿게 되자 오나라 병사들이 불을 놓았고, 때마침 동남풍이 불어와 불이 더 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조조의 전 해군은 이 일격에 불에 타버렸고, 조조의 백만 대군은 이 싸움에서 태반이 불에 타 죽거나 오‧촉 연합군에게 쫓겨 목숨을 잃었다.
역주5 銅雀春深鎖二喬 : ‘銅雀’은 臺의 이름이다. 옛터가 지금의 河南省 臨漳縣 서남쪽 鄴城 안에 있다. 《三國志》 〈魏志 武帝紀〉에 “건안 15년에 동작대를 지었다.[建安十五年作銅雀臺]”라 되어 있다. 누대의 꼭대기에 큰 銅雀이 하나 있어서 이 같은 이름을 얻었는데, 조조가 만년에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二喬’는 東漢 때 喬玄의 두 딸을 가리키는데 모두 國色이었다. 孫策이 大喬를 아내로 삼고 周瑜가 小喬를 아내로 삼았는데, 세상에서 이 둘을 ‘二喬’라고 불렀다. 《三國志》 〈吳志 周瑜傳〉에 “喬公의 두 딸은 모두 나라에서 이름난 美人이었다. 孫策이 스스로 大喬를 맞이하였고, 周瑜는 小喬를 맞이하였다.[喬公二女 皆國色也 孫策自納大喬 瑜納小喬]”라고 하였다.
역주6 두목의 몇 편의 시 : 〈四皓廟〉, 〈烏江亭〉 및 이 시를 가리킨다.
역주7 翻案法 : 원래 있었던 평가나 결과, 처분 등을 뒤집어서 반대로 논의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8 향을 나누어 받는 : ‘分香賣履’의 준말로, 魏 武帝 曹操가 임종할 때에 사후의 처치를 유언하여 妻妾을 잊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東漢 末에 曹操가 銅雀臺를 짓고, 臨終할 때에 여러 첩에게 분부하기를 “너희들은 때때로 동작대에 올라 나의 서쪽 陵墓를 바라보라.”고 하고, 또 “쓰다 남은 香은 여러 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여러 집에서 할 일이 없거든 신 짜는 것을 배워서 그것을 팔아 먹고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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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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